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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무 많은 이름을 알고 있다
박제천
나는 너무 많은 이름을 알고 있다
신새벽의 어둠 속에서 눈을 깜박이며 태어나는
푸른 노을이 너의 이름이다
바람 속에서 아득히 들려오는 바다의 신음소리
들끓는 소용돌이 속에서 솟아오르는 붉은 해가 너의 이름이다
나는 너의 참이름을 모르고 있구나
잠들어 있는 사이
너는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들, 죽어 움추리고 있는
것들마저 하나같이
뒤바꾸어 놓았구나
검고 붉은 바늘을 번쩍이며 바늘 점마다 흰 피를
흘리며 지나가는 강물의 이름은
어제만 해도 물푸레나무였다
온 몸에 꽃불을 놓으며 스스로 타들어가는 산의 이름은
어제만 해도 모래무지였다
저렇듯 토끼라거나 다람쥐라거나 여우라거나
딱따구리라고 불리는 저것들도
내가 알기엔
영이 숙이 순이 경이와 같은
어여쁜 여인들이었다
어린 내 그림책에 선묘화로 나타나 있던
금붕어 곰 책가방 사슴들처럼
누군가의 크레파스 칠 범벅에 새로이 태어나는
나무들, 돌멩이들, 손가락들, 구두들
세상은 이제 수많은 소리로 가득차고
이윽고 너희들도 다투어 제 이름을 소리 높이 외쳐댄
다
나는 인간, 나는 창틀, 나는 두부 한 모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그 모든 이름을 잊고 싶다
나는 너무 많은 이름을 알고 있다
이제도록 머리통에 꾸겨넣는
빨래들, 비둘기들, 휴지조각들
내가 만나는 그 모든 이름을 기억하리라던
여섯 살 적 그 아침 이래
나는 너무 많은 이름을 알고 있다
나는 이제 그 이름들을
그들에게 되돌려 주겠다
어둠인 그들에게
날치의 붉은 알이
날치의 붉은 알은 한덩어리 화염을 연상시킨다
불의 이빨들이 그 화염을 오드득오드득 씹어 삼키는 소리,
그보다는
해저의 모래알들 사이에 불의 씨알을 슬고
껍질뿐인 채 심해의 어류를 따라 떠도는 날치의
영혼을 연상해 본다
안개비에 몸이 젖은 날
푸른 불꽃을 피어올리는 정종대포를 훌훌 불어마시며
등푸른 생선의 횟살을 한 점씩 집어먹으며
생선칼로 살을 저며나가는 주방의 손놀림을 재미삼다가
고개 돌려, 문득
안개비 너머, 안개의 계곡을 건너다보며
껍질뿐인 채 지느러미를 놀리며 어디론가 날아가는
날치의 뒷모습을 본다
귀신보이는 나이 마흔을 지나 헛것까지 다 보아내는
쉰줄들어
응어리마다 덩어리진 노염의 붉은 씨알들,
어디다 토해낼 길 없어
줄창 뱃속에서 불길을 키우는 화염덩어리를
한마리 초식동물인양 되새김질 하며
오드득 오드득 소리내어 씹어먹으며
누군가 살을 저며나가는 소리를 듣기도 하며
내 오늘은 벗어놓은 껍질 속으로 되돌아 헤엄치느니
오늘은 내가 당신이 되는 날
한 마음의 열두가지 지옥을 다 비우는,
오늘은 내가 당신이 되는 날
한 물줄기의 수만 물방울이 하나같이 반짝이는,
오늘은 당신이 분수가 되는 날
푸르름의 목어, 눈부심의 풍경 다 내어건
향기로운 절 한 채 지어서
마음이 추운 이들을 모두 불러들이는,
오늘은 당신이 집이 되는 날
하찮은 돌멩이나 풀줄기, 꾸겨진 종이장 하나에까지
햇빛의 광명을 가득 채워
숨쉬게 하는,
오늘은 당신이 내가 되는 날
한 마음의 열두 가지 생각을
한 생각으로 바꾸어
오늘은 내 안을 텅 비우는 날.
눈에 관하여
눈이 내리는 날이면 들판으로 나가자
하느님이 보내는 편지를 읽기로 하자
예쁜 여자처럼 긴 머리카락을 날리는 나무들은
듣기에도 정겨운 모음이 되고
그 아래 구석구석 자리를 잡은 돌들은 자음이 된다
여기 저기 서 있는 눈사람의 마침표
눈밭속에 뛰어다니는 벌레들의 느낌표
말줄임표로 다가오는 아득한 눈보라의 입맞춤 속에
하느님의 사랑 편지가
온 들판을 가득 채운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들판으로 나가자
눈밭 아래 꽝꽝 얼어붙은 얼음장 거울에
언 볼 달구며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를 듣기로 하자.
풀밭에서
풀밭에 누워, 풀이 되어 바람 부는 대로 기우뚱거리자
다른 풀들이, 머리카락만 한 버러지들이
괴상한 풀 쪽으로 눈길을 모운다 어떤 놈은
가까이 달려와 발가락이고 귓불이고 깨물어본다
풀이 되어 좋구나
등짝 아래 흙 속에서 흙의 기운이 타고 올라와
머리뼈 등뼈 꽁지뼈를 덥혀주고
감은 눈 다문 입에는 나비도 날아와 앉는구나
이대로 흙도 되고, 바람도 될까
썩은 내 몸에서 기어나오는 수천 마리 버러지 떼들
세상에 풀어보낸 다음
저만치 서있는 나무를 단숨에 사랑병 들어 잎지게 하고
그 옆의 바윗덩이에 근심병 씌워 단번에
쩍쩍 금이 가게 하는
내 버러지들 바라보기 안쓰러워
그만 나는 다시 사람이 되기로 한다
버러지들 오장육부에 다 쓸어담고,
풀밭에 누워
한숨 눈부치다 깨어나기로 한다.
나의 화원
그 화원에 가득찬 꽃들은 언제나 나를 즐겁게 한다
기역을 살짝 누르면 가볍게 향기의 꽃술을 흔드는 감꽃이 나
타난다
니은을 두드리면 눈내리는 골짜기에 피어난 눈꽃이 떠오른다
스페이스 바를 건드리면 반음쯤 소리를 죽인
공기들이 보이지 않는 뿌리쪽으로 모여든다
뿌리들은 매우 바쁘다
모자 위에 달아놓은 이름표들이 호명될 때마다
재빨리 꽃을 피워야 한다
진달래 개나리는 물론 튤립이며 춘검을 보여줘야 한다
그 화원에 오늘도 나는
깨알같은 자모들의 씨를 뿌린다
언젠가 그 것들이 싹을 내밀면
나는 또 새 모자를 씌우고 이름표를 달 것이다
그로써
한 생애의 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다
뿌리에 모아둔 천둥의 소리, 번개의 빛을 피워보일 것이다.
눈이 눈에게
눈이 와서 눈이 선한 날에는
마음에 들어앉은 수미산 한 채가
슬그머니 나들이를 나서네
그 품 속에 자라던 나무들도, 새들도
부지런히 따라나서네
눈이 와서 마음이 환한 날에는
눈에 사는 무지개 한 줄기가
수미산 너머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바쁘게 달려가네
그 보자기 속에 숨겨둔 강물들도, 물고기들도
반짝이며 따라가네
눈밭에 서서 바라보는
수미산도 예쁘고
무지개도 예쁘지만
눈이 와서 하늘도 땅도 맑은 날에는
그리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무슨 금옥과 같이
마음에, 눈이 찰랑이네
시의 엽서
-心法宮篇
아무래도 내가 살기에 적당치 않은 이 별을 떠나기에
앞서 宇宙의 黑板 여기저기에 白墨으로 나의 별을 그려
보지만 웬일일까 영 마음에 차지 않는다 처음부터 나의
별은 따로이 정해져 있어 그 걸 찾아낼 동안만 이 별에
살기로 되어 있었던 걸까 저 宇宙로 무수히 내가 띄워보
낸 詩의 葉書들이 다리가 되기엔 아직도 그 數가 부족한
걸까 떠나기도 전에 미리 서운해 하는 이 별의 바람, 떠
날 채비를 미리미리 일러주는 이 별의 물이여 저 宇宙의
어느 별에서 나를 기다릴 그대들의 兄弟여 아무래도 나
는 얼마쯤 더 이 별에 살기로 되어 있나보다
- 박제천 시집 "心法" 에서 -
마음이여 마음이여
-心法唱篇
물소리 위에 흐르는 달을 한 벌 떠낸다
原板보다는 아무래도 조금은 희미한 달빛이
숨을 죽이고 있다 물이 불어 번쩍거리는
달을 바람에 말린다 바람이 데리고 가는
그 물방울들 속에 사는 작은 새들이 놀라서
뛰어나오고 그 서슬에 原板이 물소리
속으로 깊숙히 사라진다 마음이여 마음이여
대머리밖에 보이는 것이 없는 내 寫眞이여
사기 등잔과 함께
이미 불태운 것들은 사라져버린 지 오래라
이제 불타고 있는 것들은 사라져 또 어디로 가리
닳아버린 심지, 거뭇거뭇 남아 있는 석유 찌꺼기, 군
데군데 흠이 간 싸구려
등잔 하나를 닦으며
불꽃 한 줄기 피워 손에 들고 있느니
불타오를수록
남아 있는 뼈와 살의 무게를 또한 느끼느니
어느 별의 회답이 이리 더딘가
한밤중이면 깨어나 앉아
지난 시간의 그림자들을 개어 먹을 가느니
밤을 밝힐수록 검게 빛나는 이 어둠을 온몸에 받아들
이며
내가 만들어 띄우는 불꽃
한 줄기
언뜻언뜻 별처럼 어려 보여라.
鳶을 띄우며
지금 내가 하늘로 띄워올리는 저것은 鳶이 아니어라
얼레를 풀며 마음껏 줄을 놓아보내는 저것은 결코 鳶
이 아니어라
천 톤쯤의 바람을 싣고 다른 하늘로 떠나가는 저것은
절대로 鳶이 아니어라
저것은 우리의 눈길을 벗어나면서부터 누군가 키를 부
리는 한 척의 배
한마당 기다림의 삶이 돛으로 전신을 펴보이는 한 척
의 배
火星 아니면 土星쯤에서 닻을 내리고 백년 뒤의 나를
맞이할 한 채의 집이어라
그리운 이를 찾아 마음껏 물길을 돌려갈 한 척의 배여라
지금 내가 하늘로 띄워올리는 鳶은 가오리鳶도 太極鳶
도 아니어라
피도 살도 다 버리고 뼈마저 빻아서 뿌리고 난 다음의
빛만 남은 별이어라
醉雨吟
실밥을 풀어내며
한땀 한땀 뜯어내며
동여매고 살았던 마음자락을 그렇게 들추어보며
그 안에 숨어 있는 것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저자는 마흔 살 적의 스산함,
이 놈은 스무나믄 살 적의 그리움,
찬찬히 챙기며
어느새 삐죽히 드러나 추위를 타는 뼈마디는
도로 들이밀며
갑자기 가슴이 환하고, 뜨거워지고, 눈물에 젖는
그렇게 사랑스러운 녀석을 만나며
그렇게 불투명지에 그 무엇을 새기며
하염없이 비에 취한
스카치다스꽃의
떨리는 머리카락을 바라다보며.
우동국물을 마시며
용궁반점에서 배달해온 우동국물을 훌훌 들여마시며
편집실 창밖에 내리는 비의 줄기들을
젓가락으로 둘둘 말아 베어먹으며
붉은 볼펜으로 교정지의 불을 물로 고치며
바슐라르, 에코, 보들레르, 보르헤스 중에서
에코와 당근을 건져내 버리며
국물에 둥둥 떠다니던 검붉은 버섯을 집어먹
제세상인양 국물 속을 헤엄쳐다니는 물오징어들을
가장자리로 밀쳐대며
보르헤스의 쌍갈래 길 정원에서
도대체 누가 누구를 죽인 것인가 생각하며
해삼을 한 점 집어들며, 악의 꽃이 이렇게 생겼을까
궁금해 하며
검은 휘장인양 창을 가리는 비를 보며
면발의 길이와 장의 길이를 따져보며
문득 출고전표의 바슐라르 8000원, 보르헤스 6000원,
비 2500원을 확인해보며
아니다 비는 두 줄로 그어버리며
우동국물을 훌훌 들여마시며
심청이의 용궁을 중국술집으로 바꿔버린 극작가의
이름이 누구더라 궁리하며
사방의 벽에 가득가득 쌓인 책들의 운명을
책들의 무덤에서 꿈꾸고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들을 건
너다보며
내 뱃속의 용궁에 들어온 해산물들의 내생을 점찍어 보며
어느날 비에 젖어
뱃속의 물기까지 다 빠져나간 뒤를 떠올리며
그 다음 생에는 뜨거운 우동국물이나 되어
어느 뉘의 허기나 달래리 작정하며.
그리움
- 水兄에게
내 죽으면
살만 남아
어디 땅속에 흙과 섞여 고단한 잠을 자리
잠속에서
갖가지 꿈을 꾸다가
내 살던 세상 그리운 밤이면
푸른 燐이 되어
떠도리
떠돌며 사람내나 기다리다
와락
달려들기도 하리.
片紙
그리움에 눈이 있다면 너를 보고 있으리
그리움에 귀가 있다면 너를 듣고 있으리
그리움에 코가 있다면 너를 냄새 맡으리
그리움에 입이 있다면 너를 먹어치우고 말리
나는 식인종인가?
사랑아!
그 얼굴을 너에게도 달아 주겠다
열쇠론―열두번째 詩論
나는 늘 열쇠구멍에 열쇠를 제대로 맞추지 못한다
새벽 두시의 내 집 현관에서
나야, 나야, 아무리 불러대도
열쇠구멍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대답하지 않는다
내가 가진 열쇠는 이 세상의 어떤 구멍에도 맞지 않는가
절망 속에 담배를 두어대쯤 피워물고, 이마의 땀을 훔칠 즈음
보다못한 자물쇠가 열쇠를 덥썩 손으로 받아들 때가 많다
그러나 스스로 몸을 연 자물쇠 속에서
나는 또 나를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열쇠구멍을 만난다
비무장지대 순찰길에 지뢰를 밟았을 때처럼
열쇠구멍에 열쇠를 맞추기까지
긴장과 흥분 속에 온 신경을 집중하지만
열려지지 않을 때가 더 많다
내가 가진 열쇠로는 열려지지 않는
책상서랍의, 비밀상자의, 뮤직박스의 열쇠구멍
나를 뚫어지게 바라다보고 있는 꽃들의, 나무들의 열쇠구멍
나를 독촉하는 하늘의, 구름의, 바람의 열쇠구멍
어느날 나는 마침내 스스로 열쇠가 되기로 했다
열쇠가 되어, 제일 먼저 만난 열쇠구멍에 몸을 밀어넣자
열쇠구멍에 열쇠가 딱 들어맞었다
자물쇠의 가슴에서 뚝딱거리던 시계소리가 뚝 멎고
이 세상의 모든 문이 열렸다
그로부터 어떤 열쇠구멍도
열쇠가 된 나를 거부하지 못했다.
도깨비가 그리운 날
도깨비가 되고 싶은 날은 도깨비가 되자
스무 살 짝사랑 찾아 이 구석 저 구석 휴대폰 거는 몽달비
도깨비도 만나보고
그리운 이에게 밤새도록 삐삐를 쳐대는 반딧불 도깨비도 만
나 보자
도깨비가 그리운 날은 도깨비가 되자
도깨비감투를 눌러쓰고 투명 도깨비가 되어
비디오 테이프를 따라 어슬렁거리다가
당나라 때 귀신이 된 이하도 만나보고
만주벌 사신총에 들어앉아
불타는 눈, 불타는 입, 떨리는 황금빛 목젖을 번쩍이며
고구려를 불러대는 도깨비 맏형도 만나보자
도깨비가 된 날은 도깨비만 만나자
사람사는 어려운 일 제껴두고
도깨비 방망이만 두드리며
사람보다 어여쁜 도깨비들과
컴퓨터 노래방에 들어앉아
목이 쉬도록 그리운 이들이나 불러모우자.
입춘부
고로쇠나무에 등을 기댔더니, 어느 순간 서늘한 손길
아, 요녀석이 내게 지금 氣를 보내오는구나
고로쇠나무 잎으로 손부채를 만들어
고로쇠나무의 물을 한 모금 먹었더니, 뱃속이 서늘해진다
요녀석이 지금 내 뱃속을 제 세상으로 만드는구나
머잖아 내 눈, 내 입, 내 귀에서도
푸른 눈이 트고, 고로쇠나무의 어린 잎이 하나 둘 돋아나겠구나
이 봄엔 아예 나도 고로쇠나무가 되어
뿌리 아래 갇혀 있던 봄 기운을
물관이 터질 듯 타고 오르는, 이 솟구치는 노래를
전해주어야겠다
그리운 이가 등을 기대면.
天地自然經
靑山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건 풀뿌리나 짐승의 살덩어리뿐
비록 흘러가는 시냇물이며 기괴하게 서 있는 바위산을 취한다 해도
고작 幾捨年쯤 빌리는 것뿐
그와 더불어 終生할 수는 없는 일
봄이 되어서
묵은 그루터기마다 새 가지가 뻗어나고
바위벽에는 꽃과 풀이 어우러져 새옷을 뽐내는가
보이노니 새소리 듣노니 나무의 설레임이나
靑山은 시치미를 떼며
天地自然經을 소리내어 읽어나갈 뿐
아서라
내가 이제는 스스로 산이 되어
내 풀과 나무, 내 바위와 물을 키워야겠다
처음부터 취한 것이 없었기에
靑山이 사라져 버린다 해도 내 알 바는 아니다.
새와 함께
나무에 돋아나는 새 잎을 보면
작은 새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회중시계의 문자판인양
나무의 가지들이 서로 얽혀 보여주는
초침의 숫자를 지켜보며
언제라도 나무를 떠나 하늘로 날아오를 자세이다
나 역시 그 나무의 문자판을 지켜본다
아마도 그 숫자들은 나무가 커갈수록 결 속으로 숨어들어가
마침내는 잘린 널의 무늬로 남아
그 때도 누군가 새처럼 날아갈 시간을 알려줄 것이다
흙의 뿌리에서
눈처럼
잎처럼 돋아나는 것들은
언제나 처음부터
저와 같은 비행을 꿈꾸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선묘 - 심우도
눈 오는 날
부석사 선묘각에서 선묘 얼굴을 처음 보았다
무량수전 뒤켠 맞배집 한칸 방에 들어
선정에 든 듯 적막한 눈빛으로
문 밖 세속의 사내는 안중에도 없이
소백 준령 굽이치는 먼 등성이 너머
난바다에서 끊임없이 반짝이며 달려오는 눈송이들만 보고 있었다
그림 속 곱게 단장한 선묘는 저 혼자 놓아둔 채
무량수전 한귀퉁이에서
가볍게 제 몸을 들어올리고 있는 부석을 찾아갔다
사람의 땅에서 한 발 뛰어올라
허공에 새겨놓은 사랑
선묘의 부석 위로 눈보라처럼 들끓는 사랑의 이야기가
눈꽃으로 고요히 내려앉았다
흔적 없이 사라지는 걸 보았다
눈송이들이 온몸에 달라붙어 눈꽃을 피울 때까지
나는 오래도록 난바다의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그네 새
붉은 물감을 한 바가지 뒤집어쓴 채
내 눈은 백록담 발치의 차돌멩이를 꿈꾼다
푸른 물감을 한 초롱 덮어쓴 채
내 마음은 천지 언저리의 고사목에 매달린다
바람아, 이 누더기 꿈을 휘날리게 하여라
바람아, 딴딴하게 굳어버린 이 마음에
너의 아픔을 새겨두거라
이 세상 사는 그리움은 배가 되어
가까운 하늘을 떠다니고
이 세상 죽는 즐거움은 새가 되어
먼 하늘을 날아다니니
술에 섞여드는 별들의 피
술로 씻어내는 무지개의 살
이제는
모두 버리고
땅 속 어드메
하늘 길 어느 갈래
참나무 숯이 되어 이글거리는 노여움
빈 오동나무 울리는 서러움
둥치도 가지도 잘린 채 장승이 된
오리나무의 서러움
모두 버리고
먹어치우는 천둥소리 번개빛
벼락불까지 아귀아귀 먹어치운 채
홀로 뼈를 꺾고 높이 솟아오른 먹물 섬
가자,
일개 미물로 살아서 움직이는 세상 밖
물방울 하나로 살아서 꿈틀거리는 그림 밖
그 어느 섬으로 훌쩍 떠나가기로 하자.
春雷
이름 모를 비슷비슷한 씨앗을 뿌린 뒤 이윽고 얼굴을
내민 새싹의 떡잎을 들여다보는 이 봄날의 아침을 누구
에게 주랴
아직은 그의 이름조차 알 수 없는 한 송이 꽃의 삶을
갖기엔 초라하기 그지없는 이 여윈 가슴을 누구에게 주랴
이 크고 작은 새싹들의 五線紙에서 문득 하늘로 날아
오르는 저 새, 빛이라거나 별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저 밝음을 누구에게 주랴
청명한 저 새의 날아감 뒤에 그리움처럼 내 가슴의 밑
바닥에 괴어 잔잔히 떨리는 햇빛의 무늬, 이 무늬를 그
누구에게 주랴
먼 산 너머에서 들려오는 무엇인가 무너지는 소리, 소
리의 울림만 구름으로 남아 떠도는 하늘 아래 아직 이름
지어지지 않았으되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날 이 새싹의 아
픔을 그 누구에게 주랴.
빛의 씨앗!
그날 나는 푸른 칠판 앞에 서서
백묵으로 봄을 그려보고자 했다
봄의 얼굴은, 나이는
문득 칠판의 푸른 빛더미 속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솟아나오는
그 무엇이 있었다
도르르 말려 있는, 무슨 벌레와도 같은
연한 움직임이
멈추는 순간
그 빛의 씨앗이 펴 보이는 떡잎 두 장
아지랑이에 싸여
어디론가 사라지는 봄이여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푸른 칠판에 춤추는 듯 절로 움직이는 백묵 글씨
그와 함께 즐기는 꿈처럼
내가 만나본 봄을 찾아
칠판의 푸른 빛더미 속으로 들어가볼꺼나.
허무나무
그가 만난 수많은 것들
칡덩굴, 끈끈이주걱, 개미귀신과 같은 것들에다가
그 와중에도 향내짙은 금강초롱, 약수와 같은 것들
비빔밥 만들듯 한데 버무려, 탕약으로 달이고 있는
삶, 그 깜깜하고 비린내 나고 쓰디쓴 역겨움을
수만 마디 잎사귀로 펴놓고 있는 나무야
밤이면 나들이를 다니는 나무야
진흙탕에 뿌리를 내려보고, 낭떠러지 끝에도 뿌리를 뻗어보
고,
제집삼아 구멍을 내고 들어앉은 귀신들도 모르게
지구를 반바퀴쯤 돌아보다가
새벽이면 땀에 젖은 몸뚱아리 드러내놓은 채
잠에 떨어진 나무야
이 마음은 천지의 여관이고, 천지는 만물의 여관이라 한즉
너는 바로 나의 여관,
이빨이 나가도록 도끼질해 얻은 널쪼각으로 관 하나 만들어
놓고
밤낮없이 잠이나 자는 나는 누구인가.
석죽꽃 마음꽃
햇빛으로 눈을 뜨는 돌, 이슬로 눈물을 흘리는 돌, 푸
른 숨을 쉬는 돌, 하늘의 소리를 듣는 돌, 땅의 꿈을 꾸
는 돌, 구름으로 사랑을 하는 돌, 비로 눈으로 어둠을
씻어내고 가려주는 신기한 돌들을 가슴에 가득 모아갖
고 있습니다
고함을 질러대는 돌, 노여움으로 굴러다니는 돌, 피를
흘리는 돌, 멍이 든 돌, 창이 되고 칼이 되는 돌, 저마
다 사람을 찾아 달려나가는 돌들을 모조리 오장육부에
쑤셔넣은 채 혹시라도 빠져나갈까 눈을 감고 입을 다물
고 귀를 막으며 살고 있습니다
차라리 석죽꽃 되어
가슴의 돌들은 마음꽃으로 피워올리고
오장육부의 돌들은 뿌리 아래 묻어두고 있습니다.
불밭에서
어느 날 나는
가슴밭의 진흙떼기 속
범벅이 된 지푸라기며 못이며 모래알 사이로
연줄기의 뿌리라도 내려
봉오리 봉오리 피어오르는 꽃을 키우리
어느 날 나는
금강앵무새의 몸이라도 빌어
사막의 시간 속 불타는 살, 허물 벗어지는 마음을
훌쩍 벗어나
멀고 먼 서쪽 하늘에 붉은 노을의 날개를 펴리
바위에 뿌리를 내리는 푸른 이끼옷을 만지며
바위며 이끼옷의 따뜻한 허파에 귀를 갖다대며
저들의 환한 숨소리와 향기를 깊이 깊이 들여 마시며
어느 날 나는
사람으로 사노라 겪는
노여움을
노랗게 썩히고 삭히어
한 알 청심환으로 만드리.
꽃의 불길
진달래 꽃 쑥갓 꽃 씀바귀 꽃의 정령이 되어
들판의 잡초더미 속에서, 바위 틈 속에서 솟아오르고
싶다
꽃이 되어, 꽃 속의 씨가 되어
땅으로 돌아가
땅 속에서 뻗어나가는 뿌리들과 살을 섞고
피를 갈라
새로이 태어나고 싶다
푸른 수액이 되어 꽃물과 섞여 있고 싶다
햇빛을 보면 따뜻하게 껴안고
어둠이 오면 어둠이 되어 푸근한 잠을 자다가
사막의 금빛 모래알, 여울물의 붉은 버들치
반짝이는 눈뜸으로
깨어나고 싶다
무형의 기운, 무형의 하늘로 깨어나
바다가 된 나, 사막이 된 나
지구가 된 나, 우주가 된 나를 되찾고 싶다
진달래 꽃 쑥갓 꽃 씀바귀 꽃 꽃잎마다
빛으로 피어오르는
불길 속에 나를 던져버리고 싶다
허묘―세번째 詩論
눈 밖에는 보이지 않아서, 순결한 기운만 가득 차서
하늘님께 미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냅다 사들인 내 땅
등기봉투가 나달나달 해지도록
마음 한구석에 넣고 다니는 내 땅
파종할 종목을 채 정하기도 전에
봄이 오면서 잡초들이 우르르 돋아났고
그 봄이 다 지나가기도 전에 잡초의 낙원으로 바뀌었다
제초제를 뿌리고, 트랙터로 땅을 뒤집기엔 힘이 부쳐
허약해진 마음이나 돋울 겸
경계선 귀퉁이마다 나도밤나무 몇 그루 심는 시늉만 한 채
농사를 작파하자
이번엔 잡초 속에 잡초벌레들이 들끓어댔다
바닥에 갈무리한 희망은 줄기며 뿌리가 거두어가고
그나마 날개를 파닥이던 꿈까지
내 가진 것들을 다 빼앗아갔다
그야말로 녹초가 된 나는
참다못해 어느날 그 땅으로 달려가
잡초며 벌레들을 박살내었지만
잠이 깨면 도로아미타불이었다
방법은 하나, 땅을 되물리는 일이지만
누가 사랴, 그 잡초의 땅을
이 마음이 빚은 허물을 어느 뉘에게 넘기랴
형벌처럼
평생 내가 받아들여야 할 잡초의 땅, 벌레의 땅이 아니던가
그리하여 나는
내 땅에 허묘를 한 구덩이 파고는 틈만 나면 거기 들어가
잡초며 벌레에게 살을 내주며 살기로 결론지었다
시퍼렇게 두 눈을 뜬 채
지금도 나는 내 살로
끝도 없는 보시를 하고 있다.
빙어가 되고 싶다
눈이 툭 불거진 잠자리 한마리에게
내 대신 날아다니게, 호박꽃 덩굴 위에도 앉고,
동네를 한바퀴 돌아와, 불로 달아오른 머리 위에도 앉게,
온 기운 다 내어준 채,
돌덩어리인양 풀밭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육괴
문득 하늘의 구름에게
토끼도 되었다가 오리도 되었다가 닭이 되어버리는,
내 대신 둥둥 떠서 흘러다니게,
흘러서 남해 땅끝도 보고, 북쪽 요동벌쯤에서는
소나기도 한줄 내리게,
온마음 몽땅 띄워보낸 채
오늘따라
눈이며 귀, 입술이며 코, 손이며 발,
내 가진 것 모조리,
저희들끼리 살게 한 채,
담배나 한대 물고
혼자서 어슬렁거리며, 돌이 되었다가, 물로 흐르다가
속이 다 보이는 빙어가 되고 싶다
SF―투명인간
친구는 죽어서 철원평야에 묻히고
눈이 내려 한자나 쌓인 철원평야의 언덕에서
우리는 친구의 무덤을 찾지 못해
여기저기 불룩불룩 솟아난 눈무덤을
삭정이로 쿡쿡 질러보면서
친구는 이제 투명인간이 되었구나
보여줄 것이 하나도 없어서
이 세상 떠도는 투명한 혼이 되었구나
중얼중얼 눈은 내리고
내려서 우리 또한 눈사람을 만들고
순백의 심장, 순백의 눈동자로
머잖아 우리 또한 투명인간이 되겠구나
투명한 혼이 되어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지내겠구나
친구가 묻힌 철원평야 언덕에 서서
우리가 돌아갈 길을 지워버리는 눈을 보면서
눈속에 새로 생긴 투명한 길을 보면서
땀내나는 살덩어리, 부끄러움에 달아오르는
두 뺨을 눈으로 씻어내다가
문득 투명인간이 되어
저기, 눈시린 길에서
바삐바삐 오고 있는 친구를 보았다.
SF―교감
금강초롱 꽃잎 속 황금 꽃술로 발돋음하는 너를 본다
氣치료를 받고 와서, 태어나 처음으로 들여다보는 배꼽
금강초롱 꽃잎 속 배꼽에서 배꼽으로 퍼져나가는
우주의 파동을 느낀다
꽃잎 가득, 배꼽 가득,
눈부신 햇살도 눈시린 눈발도 모두 받아들여
황금꽃술로 발돋움하는 너를 본다
단전에 가득 불을 피워 덥히는 내 삶도
어머니의, 그 어머니의 해소기침도
예서 물려받았단다
꽃잎 속에 손을 넣으면
문득 외계의 하늘이 서른 세 하늘로 층층이 쌓이고
그 어느 하늘에 금강초롱으로 피어나는
어머니의 배꼽 있으니
나 있는 여기서도 개벽의 꽃속으로 들어가는 길 보이느니,
그곳에서 내 배꼽을 꼭꼭 누르는 손길을 느끼느니
사랑노래-심우도
오늘밤, 나는 내 지옥의 하나를 너에게 보낸다
봉두난발로 헤매던 지난 여름 남쪽마을에서 보았던 감나무,
그때 눈으로 가져온 땡감을
마음으로 익혀낸 홍시 한 알을 너에게 보낸다
겁먹지 마라,
보이지 않는 무지개의 피처럼
붉은 홍시 속에 내 마음의 열두 가지 지옥이
과육의 뼈로, 살로, 물로 어우러졌느니
오늘밤, 삭히고 삭힌 내 사랑지옥의 하나
너에게 보내노니
네 지옥나무의 우듬지에 등처럼 환히 밝혀놓아라
빙하 바이러스-심우도
빙하 바이러스가 바다에 지어놓은 내 집을 덮쳐왔다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은 내 집, 내 사랑이 얼음가루를 뒤집어썼다
굴뚝으로 달아놓은 산호초 구멍마다 얼음가루가 쌓이고
바다 속에서 기르던 애완 물고기들도 얼음물고기가 되어 흘러다녔다
시스템의 패스 워드로 사용하던 그대 눈의 홍채도 얼음으로 굳어버렸고
보고 싶을 때마다 내가 불러내던 이름의 자모들은 저마다 얼음꽃이 되어
해초의 긴 머리칼 사이에 머리핀인양 파고들었다
바다는 일시에 아이스크림 곽이 되고, 내 집은 그 얼음곽 속
한 조각의 얼음과자가 되어 누군가 먹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빙하기의 내 삶도 저러했을까
벌거숭이 얼음 속에
갇혀버린 내 집, 내 사랑,
얼어붙은 삶의 화면, 정지된 사랑에 마우스를 던져버리자
순간, 수천만의 색채가 으깨진 얼굴 하나,
마음이라고 이름붙일 수밖에 없는 내 얼굴이 나타났다
모니터의 얼음바다 저 밑에 턱하니 버티고 있는
누구도 알 수 없는 마음 하나와 맞닥뜨렸다.
바다 민박-심우도
등허리도 춥고 가슴속에 불길도 일지 않는 날
바다를 찾아가 민박을 했다
미역냄새 나는 갯벌을 걸어도
퐁퐁퐁 구멍을 내고 바깥을 내다보는
새끼 게 한 마리 없었다
밤늦도록 술 취해 바라보는 물이랑에도
문어단지 하나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물결마다 눈 내리듯 별들이 무수히 떨어져내렸지만
떨어져내린 곳마다 은빛 미늘로 번쩍였지만
바다는 누군가 그리울 때처럼
어둠의 물무늬를 하염없이 낚고 있었다
돌아와 혼자 먹는 밥상엔 싸시랭이젓도 없고
바다냄새 나는 비웃젓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한사람
바다가 되어 달려드는 나를
바다 민박집에서 기다렸다
눈-심우도
순간, 장미줄기의 마악 솟아오르는 눈(嫩葉)과 내 눈이 마주쳤네 푸른 눈썹잎사귀 아래 붉은 혀
를 내미는 눈과 눈이 마주치자 눈이 부셨네 장미의 입술이 열리며 수없이 많은 붉은 혀들이 눈으
로 돋아나 내 눈 속에 담겨왔네 순간, 내 눈 속에 박힌 눈의 붉은 혀들이 일제히 덩굴을 감아 온몸
에 피어올랐네 온몸을 둥글게 말아쥔 장미덩굴 앞에서 눈으로 솟아나는 장미의 입술이 열리는
순간 내 몸도 그만 하나의 눈이 되고 말았네 그렇게 장미꽃불빛이 되어 한세상 환히 밝히고 있었
네
명인-심우도
칼의 명인을 만났다.
그가 눈이 뚫어져라 바라보는
바위에
이윽고 부조처럼 흐릿한 상이 떠올랐다
그 얼굴 모습에 손을 갖다대면 온기가 전해져왔다
누군가의 가슴이 뛰는 소리도 들려왔다
바라볼수록 아려지는 바위의 가슴을 음각으로 파내었기에
바위 속으로 사라지는 어둠을 따라가면 그 속에 들어앉은
누군가의 얼굴이 점묘화처럼 떠올랐다
그는, 아무도 없는 심산에서
바위 속 그리운 얼굴을 찾아내고 있었다
봄날-심우도
봄날이다 이런 날엔 고비사막에 엎드려 있던 황사들도 황룡이 된다 북해에 떠다니던 곤이 하늘
로 떠올라 붕새가 되듯 황룡은 수천 킬로를 날아다닌다 이런 날 내 눈에 박힌 모래알들은 황룡
의 몸에서 떨어져나온 비늘들이다
봄날이다 이런 날 옛 중국 황제들은 왕관을 꾹꾹 눌러썼다 한다 뒷머리에 나 있는, 고기비늘처
럼 뒤집힌 머리칼이 한번 치솟으면 누군가 죽음을 면치 못했다 한다
봄날이다 내게도 노여움의 역린(逆鱗)이 남아 있는가 이런 날 모자를 꾹 눌러써도 마음 속 깊은
곳에 웅크리던 있던 소 한 마리가 난데없이 뿔을 쳐들고 씩씩거릴 때가 있다 이놈의 소가 만리장
성이라도 쳐들어갈 듯 낯빛이 붉으락푸르락 눈알을 부라리면, 속수무책, 아무리 소 엉덩짝을 후
려갈겨도 소용이 없다
봄날이다 이런 때는 무협지가 제격이다 장풍도 심검도 필요없다 오직 경혈을 다스려 쌓은 내공
으로 단전의 힘을 북돋고, 씩씩거리는 소 코뚜레를 휘어잡아 긴 동안거 속으로 되돌려보낼 뿐
봄날이다 이런 날 눈에 박힌 모래알뿐이 아니라 이무기처럼 마음속 밑바닥에 숨어 있는, 오래
된 모래먼지들까지 훌훌 털어 날려보낼 일이다
악마의 발톱―심우도
칼라하리사막의 모래땅에 자라는 악마의 발톱을 아시는가
손가락은 손가락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깍지를 낀 채
모래땅의 부드러운 젖가슴을 움켜쥔 채
모래땅 속 깊이 숨어 있는 젖줄을 줄기로 끌어당겨
트럼펫을 부는 양, 있는 힘껏 벌린 입속으로
선홍의 목젖이 드러나도록 젖줄을 빨아당기는 양
꽃잎 가득 피의 노을을 머금고 있는 그 꽃을 아시는가
광막한 모래땅의 적막을 피의 흐름에 새기며
몸을 태울 듯 달구는 햇볕과 몸이 부서져라 얼리는 달빛 아래
한 생애의 고통을 거두어 탱탱하게 부풀린
그 알뿌리를 아시는가
내 사막의 어깨에 뿌리를 내린 악마의 발톱을 아시는가
두 어깨 속 깊이 파고든
내 살아온 동안 응어리지고 옹이진
적막한 피의 흐름,
갈퀴손으로 깍지 낀 채
살의 고통을 빨아들이는 선홍의 입술,
내 몸을 알뿌리삼아 피어나는 악마의 발톱을 아시는가.
점멸-심우도
오늘밤 별 하나 이 땅으로 달려오는 걸 보았다 몇 광년의 길을 혼자서 달려온 별, 그
리고는 다 불붙어 타버린 운석 하나로 이 땅에 살기로 한 별, 별들도 더 이상 참을
수 없기에 온몸에 불이 붙더라도 그리운 사람을 찾아오는 것이다 개똥밭에 참외로
뒹굴더라도 이승으로 건너오는 것이다 불이 붙어 다 타버린 영혼은 얼마나 끔찍한가
그러나 장자 식으로 말하자면 돌이 된 별은 1억년이 걸리더라도 제 짝만 찾으면 다시
별이 되어 하늘로 오르는 것이다 붕새가 물고기였다가 새가 되어 북명에서 남명으로
옮기듯 자리를 바꾸는 것이다 오늘밤 저 별이 하염없이 달려오며 보여주는 점멸의 불
빛을 나는 이렇게 읽었다
불면 앨러지―심우도
복사꽃 점점, 푸른 잎의 하늘에 손톱만한 달인양 색색의 알전구를 켜드는 밤, 문득
복숭아 앨러지가 생각난다 복숭아 캔만 만져도 온몸에 두드러기가 일고, 복사나무
곁만 지나가도 복숭아귀신이 털북숭이 손으로 덥썩 손을 잡는 것 같아 얼굴이 파랗
게 질리고 만다는 복숭아 앨러지
바람 부는 대로 무지개빛 알전구들이 점멸하는 밤이면 채 열매를 맺지도 못한 백도
황도 천도 복숭아들마저 온몸이 간지러워 색색의 불빛 사이로 씨눈을 내놓은 채 잠
못드는 복숭아 앨러지를 아시는가
복사꽃 등불밑에 우련히 드러난 내 마음에도
구석구석 돋아나는 복사꽃 물이 든 붉은 반점의 앨러지가 있어
더는 참을 수 없이 근질근질거리며
솟아나는 열꽃을 어쩔 수 없어
달 속으로 달 속으로 한밤내 타박타박,
달 속 모래사막을 땀 흘리며 걷는 불면의 앨러지가 있느니
이래도 내 말을 믿을 수 없다면
복사꽃 피는 밤이 오거든
그 달이 보여주는 슬로우 비디오나 보시게나.
달의 어둠 속으로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고 있는 내 뒷모습을 보시게나.
융프라우-심우도
소방울소리에 문득 잠이 깨었다
방울소리에 섞여 드문드문 소울음소리도 들려왔다
몸이 둥둥 떠 있는 느낌이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소 한 마리가 콧김소리도 요란하게
하늘 한가운데로 떠가고 있었다
등에다 걸머진 집 한 채도 보였다
도대체 저 집, 저놈의 소가 어디서 튀어나왔는가
채찍을 찾는 내 손에 소방울이 쥐어졌다
융프라우 산비탈 기념품점에서 사온
스위스産 소방울이 청명하게 울리며
문득 정신이 되돌아왔다
융프라우 만년설을 누비다 온 소방울이
밤이면 마음대로 집을 이끌고 구름 사이를 떠돌다
소방울소리에 코가 꿰여 돌아오는 것이었다.
내 살기에 바빠 제멋대로 지어놓은 마음의 집 한 채,
저 역시 밤이면 헤매다 오는 것을 나만 몰랐다
매화오름-심우도
매화오름에서 괴석 하나를 보았다
온몸에 입이며 눈이며 귀와 같은 것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누군가,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상하고 죽었다 한다
그래선가 괴석에는 무슨 핏물처럼 붉은 무늬들도 새겨져 있었다
군데군데 파여들어간 부분을 들여다보면
바위를 종이 삼아 무엇인가 새겨놓은 것 같았다
보고 들은 대로 말하고 싶어
온 몸뚱이가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것 같았다
귀 기울이면
저 혼자 안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끝이 없어
그 소리 껴안으며 온 몸이 상처딱지로 덮여가는 것 같았다
완당에게-심우도
철쭉오름에서 내가 만나본 괴석은 돌시계 모양이었다
햇빛 환한 날이면 아직도 순결한 피의 분수가 뿜어나오는 듯한
철쭉 무덤을 지키며
이 생에서는 단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어서
바다만 보이는
철쭉오름 외딴 낭떠러지에서 발을 돋우며
소나기가 초침처럼 후두둑 스쳐가며 써주는 비의 문자
시침으로 박히는 햇빛의 문자나 골똘하게 생각하는가
나 역시
사람의 귀로서는 들을 수 없는 소리, 초음파의 물결이 보여주는
내 안에 패여진 시간처럼,
응어리지고 상하고 떠돌아다니는 상처나 추스르며
상처 속에 숨겨둔 죽음이나 후벼내느니
그래선가 괴석의 온몸에 새겨진 시계무늬 또한
옛사람이 알려주는 내 상처의 문자처럼 보이느니
탁본이라도 하면
내 안의 돌시계, 괴석의 돌시계에
엉켜 있는 피의 이내, 철쭉꽃 무더기가
금방이라도 예서체로 튀어나올 것같느니.
날개-심우도
시력이 약해지더니 눈에 보이는 것들이
갑자기 하나같이 예뻐 보인다
무심히 길거리를 걸어가다가
발끝에 채이는 돌멩이가 옥돌로 보이고
영화에서 본 듯한 여자들이
입체 안경을 쓴 양 눈앞에 어른거린다
또, 이제 갓 태어난 것들
토끼며 오리며 닭의 병아리들과 눈맞출 때마다
나는 문득 그것들의 아버지가 된 양 가슴이 설렌다
그 중에서도 살맛나게 경이로운 건
하루일을 마치고 돌아와 문을 열 때
두 살배기 손주인 정주가 바람처럼 내게 안겨오는 일,
눈 깜박할 사이 단숨에 날아오는
그 등 뒤에 나폴거리는 어리디 어린 날개를 보는 일,
눈 나쁜 것도 잊은 채 번쩍 들어 천정까지 올리면
까르륵 터뜨리는 웃음소리로
눈부시게 흩날리는 깃털들을 바라보는 일
두충잎 연초-심우도
나는 오늘 신선들이 즐겼다는 두충잎 연초를 피었다
두충잎을 들여다보면, 엽맥들이 방사선으로 길을 만들고 있었다
그 길의 어디쯤에서 길눈을 잃었다
나는 다시 두충잎 연초를 피어물었다
봄에 피는 자잘한 흰 꽃잎의 연기를 튀밥인양 잘근잘근 씹으면
두충잎에서 흘러나오는 은백색 고무 실이 나를 꽁꽁 묶어
공중으로 던졌다 다시 땅에 떨어져도 고무공처럼 튀어올랐다
허공의 길 어디쯤에서 길눈을 잃고 헤매는 나를 만나러
나는 계속해서 두충잎 연초를 피어물었다
담배잎 연초처럼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 둥둥 떠다니는
나를 지켜보고자
내 안에 길을 만드는 또다른 나를 지켜보고자
두충잎 연초를 피고 있었다
눈부처
돋보기를 쓰고부터, 모든 것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가령, 눈이 오는 날에
어린 손주의 눈 속 깊이 떠 있는 초록별을 들여다보면
아이들이 눈 속의 어린 새들과 함께 만들어내는
눈사람들이 말갛게 비쳐보였다
눈의 나라 숲속 여기저기에서
나무가 되어 웅크린 초록의 새들이
사이사이 기지개를 켜거나 깃을 쳐서
조금씩 눈을 털어내며
저마다 눈사람 하나씩을 만들어내고 있는 게 보였다
세발까마귀며 금계며 봉황과 같은 새들도
반짝이며
함박눈을 타고 넘어와
눈사람마다 은빛 눈썹날개를 달아주는 게 보였다
눈사람들이 눈의 날개를 휘저을 때마다
함박눈이 쏟아져
이 세상 부끄러움을 덮어주고 있는 게
어린 손주의 눈 속 깊이 떠 있는 초록별에
환하게 비쳐보였다.
하늘돋보기
―첫번째 詩論
어느날 돋보기를 쓰고 본즉
이미 많은 것들이 돋보기를 쓰고 있는 걸 알게 되었다
하늘의 달빛도 돋보기를 쓴 채
우리 사는 구석구석을 환하게 들여다보는 중이었고
풀밭의 왕사마귀, 왕개미들도 돋보기를 쓴 채
풀 속이며 땅 속을 샅샅이 보아내는 중이었다
봄날 양수리에 나갔더니
무심히 흐르는 강물도 돋보기를 썼고
그 속의 물고기들, 물고기 비늘에 쉬고 있는 햇빛들
바닥에 숨죽이고 있는 모래알들까지도
하나같이 돋보기를 쓴 채
저들에게 해꼬지하려는 잡것들조차
미소로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로부터 사람들을 만날 때는
그 악취, 그 탐심은 모른 척
산과 친구하고, 강과 사귀고 싶듯이
돋보기를 쓰고 바라보기로 했다.
子音
바람이나 쐬면서 되도록이면 뼛속까지 에는
겨울바람에 全身을 내맡기면서 이 몸뚱이 속의
것들을 다 내어주면서 그도 못하면 벌레가 슬지
않게 말려두기나 하면서 어느날 그렇게 바람이나
쐬면서 되도록이면 바람에 내가 날려가 버리기나
바라면서 그것으로서 이승이며 저승이며 모두
마무리되어질 수 있기나 셈하면서 홀연히
허공에 피어나는 바람의 꽃을 지워버리면서
子音 2
自畵像을 한장 그리려다가 지쳐 버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 눈을 지우기 위해
고무지우개를 집어들었다가는 코까지 지워버리기 일쑤다
애당초 自畵像을 그리려 마음먹었던 것도 아니었다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그려나가다 보니
그것들이 눈에 익었고 그러다 보니 3分의 2쯤 내 얼굴이 거기 그려져 있었다
破綻은 그때부터였다. 눈이 좀 커보이거나 귀가 조금은 작아보이고
코도 너무 삐뚜러져 보였다 하는 수없이 지우개로 모두 지워버린 도화지 한 장
수없이 지운 자국이 너무도 뚜렷한 종잇장 하나가 내 自畵像일 수밖에
子音 3
못을 박다보면 언젠가도 이렇게 힘껏 장도리로 못대가리를 때려 박았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것은 아마 내가 누워있던 棺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내가 갇혀 있던 어느 房門은 아니었을까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이 들면 못대가리를 때려박는 손놀림이 더욱 빨라지고 힘도 더욱 강해진다
다시는 나오지 말아라 거기 그렇게 꽁꽁 묶인 채 누워 있거라 거기 그렇게 오도가도 할 것 없이
房이나 지키거라 산다는 것이 대수냐 잡념을 갖고 못을 박다보면 도망가지 못하게 못을 쥐어잡고
있는 엄지손가락을 때려서 피멍이 들게 마련이다 詩란 것도 쓰다보면 이렇게 마음과는 딴 판이
지 않느냐
-제 3 시집 "律" 에서
흰 눈을 보며
눈이 와서 흰 것뿐인 날, 흰 눈사람을 만들어 보았지
푸른 종이로 귀를 달아 주었어
붉은 종이의 입, 노란 종이의 코,
눈은 흰 종이로 새겨 넣었어
눈이 와서 흰 것뿐인 날, 얼음의 심장에
얼음의 슬픔, 얼음의 기쁨을
가득가득 채우고
눈이 와서 흰 것뿐인 세상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 있었어
사람들이 감추어 둔 관념이
눈이 와서 흰 것뿐인 사이로
군데군데 묻어날 것만 같아서
그 쪽으로 기우뚱거리며 다가가 보고도 싶었어
그때 누군가 내게 말해 오더군
초록물감 노랑물감 자주물감의 색동옷을 입고
흰 눈사람과 더불어
흰 것뿐인 우주, 흰 것뿐인 죽음 속으로 떠나가자고
참으로 가고 싶었는데.......
눈이 와서 흰 것뿐인 날, 눈이 되어 가고 싶었는데......
그만 얼음의 심장이 녹아 버리고 말았어
망설이는 동안 햇볕을 이기다 못해 스르르 무너지고 말았어.
끝없는 울음
밤이면 아내도 듣지 못하는 울음을 운다 어느날 나의
울음소리에 아내가 깨어 함께 울 때까지 밤이면 나는
운다 무릎을 꾸부리고 그 무릎 속에 얼굴을 묻고 운다
나의 울음소리는 바다에 모인다 나의 울음소리는 웅덩이
에 모인다 나의 울음소리는 수도관 속에 모인다 나의 울
음소리는 땅으로 스며든다 나의 울음소리는 아무 것도
흔들지 못한다 잠자는 아내도 깨우지 못한다 나의 울음
소리는 끝없는 울음으로 나를 이끌고 간다 나는 막연하
게 운다 때로 아내가 깨어나면 나의 울음소리도 그쳐진
다 울고 싶어도 울어지질 않는다 나는 혼자서 운다 혼자
가 되면 운다.
붉은 울음꽃
검붉게 색이 바뀌고 때묻어 내용을 알 길 없는 동판화 하나
내게 있습니다
선을 따라 손톱으로 때를 후벼내다보면 어렴풋이 떠오르는
그림 하나 내게 있습니다
어린 짐승 한 마리가 홀로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채 온 몸으로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려오고 낱낱의 그 소리를 들춰보는 밝은
햇빛이 너무나 눈부셨습니다
둘러보면 모래밖에 보이지 않는 모래구덩이에 들어앉아,
차라리 이렇듯 스스로를 놓아둔다면 모래알이 이윽고 몸을
덮어버리고 지상에는 어디 누가 있었던 자취조차 보이지 않을
모래밭이었습니다
죽어서 땅에 묻어도 심장이 썩지 않아 죽은 지 120년이면
되살아난다는 무계국 사람인양 동판화 속의 모래밭에 파묻은
열아홉 살의 내가 웬일로 오늘 되살아나는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외로움의 어떤 풀은 잎이 둥글고 줄기가 없으며 붉은 울음꽃을
피울 뿐 열매를 맺지 않으며 너무 먼 곳에 있어 다만 바라만 볼 뿐
가질 수 없다 합니다.
地上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별을 가지고 있다 잃어버렸다
가도 다시 찾게 된다 개중엔 이승의 몸을 버리고서야 자
기의 별을 찾기도 한다 어느 날 무심히 밤하늘을 바라볼
때 갑자기 한 줄기 불꽃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면 그대
곁의 어느 누가 또 보이지 않으리라 사람들은 누구나 별
과 운명을 같이한다 사람들은 그러나 별에 이르지 못한
다 별은 언제나 사람들의 머리 위에 떠 있다 사닥다리를
뛰어올라도 움켜쥘 수 없다 피와 살의 무게가 사람들을
地上에 있게 한다 그것들을 버린다 해도 별빛이 너무 눈
이 부시다 오늘 밤은 별도 보이지 않고 사람도 보이지 않
는다 먼 곳에서 한 줄기 등불만 몸을 떨고 있다 그 누구
에게도 알리지 못한다.
夢生
발에 채이지 않고 눈에 가로거치지 않고 살은 鐵甲같고 속은 텅텅 비고 구멍이 숭숭 뚫리고 몸
은 마구 휘어 8百年을 살 수 있었던 나무가 되고 싶었읍니다 구름을 불러타고 물 위를 걷고 이슬
을 먹고 마징가 제트처럼 마음대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道士가 되고 싶었읍니다 이제 남은 꿈은
어떻게 하느님의 빽으로 天數를 다하고 저승돈 一萬貫으로 往生을 하는 것뿐입니다.
近況
밤마다 배를 몇 척씩 꾸려서 떠나 보낸다
오늘 내가 만난 물빛 한 지게, 달빛 두 지게만으로도
滿船이 되는 나의 작은 배들이여
그대들 물길의 安全을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물빛 一千隻, 달빛 二千隻의 배를
하염없이 떠나 보낼 뿐이다
어둠마저 가서 돌아오지 못하는 그곳에
舍利 몇 알로 길을 밝히며 찾아나설 그날까지
다만 밤마다 배를 몇 척씩 꾸릴 뿐이다
어제 부친 一片의 苦惱
一片의 鳶
아직 이름도 지어주지 못한 나의 작은 배들이
싣고 가는 밤마다의 밤
그것이 오직 나의 財力일 뿐이다
눈송이 하모니카
오늘처럼 눈이 오는 날에는 은빛 하모니카를 불자
하모니카에서 톡톡 튀어나오는
점2분음표, 점4분음표가
눈사람을 만들고,
수수깡안경, 털실모자를 쓴
눈사람이 함박눈을 뛰어다니는 고향을 보자
내가 부는 하모니카,
은빛이 벗겨져
누런 구리빛이 드문드문 드러난,
고장난 하모니카 소리에
더운 눈물, 더운 입김이
내리는 눈, 눈발을 비로 바꾸더라도
눈이 오는 날에는
입술이 부르트도록 은빛 하모니카를 불자
내리는 눈송이 하나하나에서 고향을 보자
내리는 눈이 불꽃 되어 가슴을 덥히는 축복을 보자
관음 찬
여우콧등만큼 잔설이 희끗거리는 골짜기
청솔 둥치에 앉아
무심히 흔들리는 솔의 손가락 세어보다가
문득 뿌리께에 돋아난 실생,
아기손만한 손바닥을 보이는 솔의 새 손을 보았다
연신 키를 세우느라 눈방석 아래 뿌리발을 뻗느라
땀으로 범벅이 된 떡잎마다 떡잎의 손금마다
나비 날개, 햇빛 더듬이를 한 눈송이들이 쉬고 있었다
잠시, 아주 잠시
가슴 속에 회오리치던 눈보라가 개이고
청솔의 무수한 손가락들이 천개의 손가락으로 보이고
그 끝마다 빛나는 햇빛의 눈이
서늘한 가슴의 바닥까지 비쳐왔다
잠시, 아주 잠시
청솔나무로 서 있는,
이 세상 살아있는 것들의 아픔을 기쁨으로 바꾸어주는,
고통의 어미, 천수관음을 보았다.
내 친구 적막
―오수환에게
1
내 친구 적막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에서 달옹배기의 북덕불을 샅에 낀 채
바깥 어디에 있을 정하디 정한 갈매나무를 생각하던 시인과 같이 있을까
저물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으면서 시인이 못되므로
시가 무언지 잘 모른다던 시인과 함께
이 세상 알파이고 고귀한 이름이고 영원한 광명인 시인을 생각하고 있을까
북창을 열어 산을 향해 앉은 채
이승의 낮과 저승의 밤에 아아라히 뻗쳐 다리를 놓는 산을 보는
시인의 어깨 너머 하늘에서
또 하나의 산을 바라보고 있을까
내 친구 적막은 어디에도 없는 것일까
2
눈이 오는 날 내 친구 적막을 찾아서 숲으로 가보았어
문득 폭설 속에 불길을 내뿜는 단풍나무를 보았어. 흰눈을 맞을수록 더 붉은 화염이
솟아오르더니, 마침내 다 타버린 단풍나무 숯검덩이만 남았고, 그 숯검덩이 위로 피
시시 피시시 소리내며 하늘로 올라가는 백설의 눈물을 보았어. 그 하늘 언저리에서
아직도 우련히 붉은 단풍나무 그림자를 보았던 것도 같았어. 그 하늘 연못에 물이
된 적막이 있는 것도 같았어
내 친구 적막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봄의 神에게
봄밤이다, 복사나무 마디를 뚝뚝 꺾는 소리, 인동덩굴 서로 껴안는 소리, 뿌리아래 작은 벌레들
이 더드미를 세우는 소리, 날개를 손질하는 소리, 굳은 어깨 관절이 풀리는 소리, 얼음이 종이짝
처럼 바스라지는 소리, 남천나무 열매가 얼음물에 녹아 나가는 소리,
화엄세계다, 쌓인 눈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쑥내음, 눈매가 푸른 냉이내음, 지난 가을 떨어진
비자열매 매자열매 들뜨는 내 음, 웅크린 바위마저 코를 벌룸이며 들여 마시는 자연의 술내음,
산도 나도 천지도 취해 기지개를 켜다가 팔자걸음을 걷다가
누군가,
봄밤에 깊이 숨어
당사주를 보는 자에게
낭랑하게 소리의 금강경을 읽어나간다
진달래꽃 복사꽃 입안 가득 틀어넣고
반야심경을 외어나간다
누구인가.
瀑布
달에서 크는 내 나무의 높이에서 떨어지누나
폭포수소리
눈을 뜨면 잠의 머리맡
그늘을 비치는 마른 번개의 갈기를 쥐면
별은 별대로 넋은 넋대로 미친 흰 말의 머리를 쳐들고
보라 물에서 타는 내 오뇌
꽃으로 피는 오뇌의 물방울 속 투명히 드러나봬는
一瞬의 生涯여
붉은 열네새 바디가 쿵쿵 울리는 音律에
날카로운 銀槍을 던지며
별은 별대로
넋은 넋대로 萬里의 꿈을
달에서 자라나는 내 나무에 열고
보라 흰 피의 능금꽃
흐드러진 꽃살 속의 꽃비 속의
수천수만의 나비가 어지러운
안단테 알레그로
漏電하는 내 살의 미묘히 五官이 서로
비비며 떨리어 비비는 노래여.
作品 二三ㆁ
꽃이라기엔물과같고물이라기엔꽃과같아
어둠이라기엔물과같고물이라기엔어둠과같아
눈에 대한 내 믿음이 약해져 간다
오히려 이런 상태가
즐겁다
완벽하다는 것은 혐오할 만한 일이다
아직 안경을 쓰기엔 이르지 않았다
가던 길이 문득 사라지고 절벽 아래로 아름다운
무지개다리가 걸려서 나를 손짓해 부르곤 한다
視力과 精神, 視力과 想像力의 비례를 생각하면서
그러다가 깜박 정신이 들고 깜박 정신이 나간다
즐겁다기보다 즐거움을 즐기는 편이다.
壁時計에게
겨울을 불러 일으키는 너의 목소리
갈매 하늘을 가로지르는 기러기 울음에 스밀 때
창유리에 얼굴을 비비며
물오르는 소리를 듣는다
잠자던 나무의, 가지들은
戰慄을 기다리며
끈끈한 어둠의 잎을 떨어낸다
잎진 자리마다 술렁이며 달빛이 돋아난다
몽롱한 날개로 無意識의 하늘을 다스리며
飛翔하는 기러기 울음이
창유리를 깨뜨릴듯 錚錚할 때
書籍들 사이, 누워 있는 古典의 달이 흔들리는데
杜子美詩屛風에 둘러싸여
屛風속 山水를 딛으며
어디론가 逃亡하는 내 꿈의
발소리를 몰며
한 칸 반의 房에 넘치는 너의 목소리
너의 목소리가 지어내는 造化의
槍 끝에 밀려 監禁된 나의 꿈을
알겠다 너의 목소리 앞에 한 마리
풀버레로나 變身하는 나의 몸뚱아리를
너의 목소리는 살아 있다
零下의 깊이에서 달빛을 길어올리는
두레박소리 갓물난
물고기의 비늘터는 소리 소리에
너의 입내는 서려 있다
너의 振子가 불러들이는 새벽노을이
뜨락에 섬으로 쌓이는 지금
잠자던 나무의 가지들은
눈부신 날빛의
잎을 피워 올리기 위해
胎줄처럼 흔들리고 있다
봄 住所로 새 울음을 불어 보내고 있다.
모래의 집, 불의 집
여섯살짜리 손녀 정주가 모래집을 짓는다
---여기는 할머니 집이야
까슬한 마음의 모래알들이 모여 하나의 집을 이루었다
---모래집 속에 할머니 계셔
모래의 집을 들여다보며
문득 불의 집을 떠올렸다
엇그제, 화장장의 분화구에서 아내는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불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로부터 내 가슴에도 불의 집이 생겨났다
그, 불의 집은 휴화산처럼 불을 숨기고 있다
혼자 캄캄하게 마음의 집을 지키고 있노라면
불의 집이 나타나고, 불길이 솟아오른다
땀을 흘리며 만든 모래집을
정주는 다시 뭉개고, 새 모래집을 짓는다
나도 불의 집을 보기만 하곤, 다지 지워버린다
정주와 나는
이렇게 매일 새집을 짓는다
---할머니에게 늘 새집을 지어줄거야.
* 박제천 시인의 약력
1945년 3월 23일생(본적;서울 중구 주교동 15번지)
현주소:138-050 송파구 방이동 한양3차아파트 1동 1405호
문학아카데미 상근
110-809 종로구 동숭동 2-19 낙산빌라 101호 문학아카데미
전화;764-5057(문학아카데미) 413-6237(집) 011-723-6237
학 력
1956년: 방산국민학교 졸업.
1959년: 한양중학교 졸업.
1962년: 성동고등학교 졸업.
1963년: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입학. 동국문학회장(2-3학년).
1966년: 4학년 1학기 수료후 육군에 입대(69년 만기 전역), 이후 복학하지 않음.
경 력
1969-72년; 주부생활사 등 잡지사 기자 역임
1972-76년; 신태양사·동서문화사 등 출판사 편집장 역임
1976-94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근무(자료관장, 홍보출판부장, 문학미술부장, 문화총괄부장, 조
사연구부장 등)
1983-94년; 「시정신」(구명 손과 손가락) 동인 참여
1984년; I.W.P.(국제 창작프로그램; 미국 아이오와대 소재) 초청시인
1988년; 문학아카데미 창립.
1994년;문학아카데미 대표
1995년;월간 『문학과 창작』 창간, 발행 겸 편집인(95년 계간 『문학아카데미』 창간, 통권 3호로 폐간).
현재;한국시인협회 이사
동국대 겸임교수(문창과)
문학아카데미 대표
월간 『문학과 창작』발행 겸 편집인
한국시인작가협의회 회장
동국문학인회 회장
강 의
문학아카데미(현재. 1988년 이후)
경기대 문창과 대우교수(2001~2003년)
1998년(강사), 1999년(국문과 겸임교수), 2000년(문창과 겸임교수)
성균관대국문과 강사(현재, 2001년 이후)
동국대 문창과 겸임교수(현재, 1999년~ 2000년, 2002~2003 국문과 강사)
동국대문화예술대학원 문창과 강사(1995년~2000년)
추계예술대 문창과 강사(1995년~2001년)
기타:한국문인협회 문예대학, 삼성그룹, 성북구청 등에서 시창작 강의
시 집;
1975년; 제1시집 『장자시』출간(예문관)
1979년; 제1시집『장자시』 재간행(연희)
1988년; 제1시집『장자시』 1,2권으로 분책 재간행(문학사상사)
1979년; 제2시집 『心法』출간(연희).
1981년; 제3시집 『律』출간(문학예술사).
1984년; 제4시집 『달은 즈믄 가람에』출간(문학세계사).
1987년; 제5시집 『어둠보다 멀리』출간(오상).
1988년; 제6시집 『노자시편』출간(문학사상사).
1989년; 제7시집 『너의 이름 나의 시』출간(문학아카데미).
1992년; 제8시집 『푸른 별의 열두 가지 지옥에서』출간(청하)
1995년; 제9시집 『나무 사리』출간(문학아카데미)
2001년; 제10시집 『SF-교감』출간(문학아카데미)
시선집 및 번역시집;
1983년; 시선집 『세번째 별』출간(고려원).
1984년; 『The Mind & Other Poems』간행(영, 불, 스페인, 중, 일 등 번역 합본, 문장사).
1987년; 시선집 『꿈꾸는 판화』출간(문학사상사).
1988년; 시선집 『스물세살의 가을』출간(예전사).
1991년; 시선집 『하늘꽃』 간행(미래사)
1997년; 『Sending the Ship out to the Stars』간행(고창수 영역본. 미국 코넬대 Cornell East
Asia Series 88).
2002년; 베트남어 번역「한국현대시인 5인 선집」(베트남 시인 우옌 쾅티우가 번역한 시선집으
로 박제천, 고은, 김광규, 김지하, 신경림의 작품 가운데 322편을 선정해 번역했다. 베트남작가동
맹출판사刊. 333쪽.)
저서 및 편저;
1983년; 『영혼의 날개』출간(민족문화사) *절판
1985년; 『명심보감선』출간(샘터).
1985년; 『채근담』출간(샘터).
1988년; 『시창작강의』출간(작가정신, 강우식 공저). *절판
1989년; 『시창작방법론』출간(작가정신, 강우식 공저). *절판
1989년; 『꿈꾸는 삶의 불꽃』출간(문학아카데미). *절판
1993년; 『마음의 샘』출간(문학아카데미)
1994년;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출간(문학아카데미, 강우식 공저)
1995년; 『어린이 글짓기소프트 200』출간(문학아카데미, 이탄 공편)
1997년; 『시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출간(문학아카데미) 2004년 개정판 발간
1998년; 『한국의 명시를 찾아서』출간(문학아카데미)
1999년; 『시를 어떻게 완성할 것인가』출간(문학아카데미)
문학상 수상
1965-66년; 『현대문학』신인추천제 시부문 완료(申石艸선생, 완료작 「벽시계에게」).
1979년; 제24회 현대문학상 수상(시부문).
1981년; 제14회 한국시협상 수상.
1983년; 제4회 녹원문학상 수상(시부문).
1987년; 제22회 월탄문학상 수상.
1989년; 제4회 윤동주문학상 본상 수상.
1991년; 제5회 동국문학상 본상 수상.
1997년; 제5회 공초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