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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東方]의 서극[西極] 묘향산[妙香山]과 살수[薩水] 하[下] 제[第] 1 편[篇]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가, 조선사[朝鮮史] 역사[歷史]의 후예[後裔]들이라고 한다면,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을 알고, 치욕[恥辱]의 식민잔재[植民殘在]로 처참하게 무너지고 거짓과 왜곡[歪曲]으로 얼룩진
우리 역사[歷史]의 사실[史實]을 찾아서 바로 세워야 하는 대의명분[大義名分]은, 분명[分明]하고도 뚜렷하다.
우리의 역사[歷史]는, 천하[天下]의 중심[中心]에서 만방[萬邦]의 문명[文明]과 문화[文化]를 발전시키고, 동[東]과 서[西]를 치고 달리며, 천하[天下] 만방[萬方]을 호령[號令]하였다.
천하[天下]를 덮는 기상[氣像]과 위엄[威嚴]을 당당[堂堂]하게 드날리며 찬연[燦然]히 이어왔고, 광명[光明]의 상서[祥瑞]로운 서기[瑞氣]를 가득히 품고 유구[悠久]하고 장구[長久]한 세월을 이어왔다.
천하[天下]의 중심[中心]에서 만국[萬國]을 다스리며 대륙[大陸]을 호령[號令]하였으며, 인륜[人倫]의 근본[根本]을 천하[天下]의 중심[中心]에 세운 장엄[莊嚴]하고도 숭고[崇高]한 역사[歷史]였다.
이러한 일 만년[一萬年]의 조선사[朝鮮史]를, 왜[倭]놈과 외세[外勢]의 침략[侵略] 세력들은, 거짓과 왜곡[歪曲]으로 사이비[似而非]의 역사[歷史]를 만들어, 반도[半島]의 조그만 땅에 심어 놓고,
치욕[恥辱]과 오욕[汚辱]의 식민지[植民地] 속국[屬國]의 역사[歷史]로 전락시켜 처참[悽慘]하게 능멸[凌蔑]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짓과 왜곡[歪曲], 사악[邪惡]하고 음흉[陰凶]한 저의[底意]가 깊이 내재[內在]되어 있는 추잡하고 더러운 식민잔재[植民殘在]의 역사[歷史] 교육[敎育]을 받고 자라난 국민[國民]들은,
우리 선조[先祖]들의 뿌리와 우리 역사[歷史]의 근본[根本]과, 우리 역사[歷史]의 본[本] 모습을 모르고 성장[成長] 할 뿐만 아니라,
역사[歷史]의 맥[脈]과 혼[魂], 정신[精神]과 기상[氣像], 자아[自我]와 주관[主觀]을 상실[喪失] 할 수 밖에 없다.
오늘날 한국[韓國]의 현실[現實]은, 국민[國民]들 모두 각자 강단[講壇]에서 가르치는 공교육[公敎育]을 떠나서,
스스로 찾아 배우고 익히며 자신을 갈고 닦는 격물[格物], 치지[致知]의 수신[修身]을 행[行]하지 않는 이상,
굳건한 자아[自我]와 주관[主觀]을 지니며, 천하[天下]를 다스리는 경륜[經綸]을 품고 천하[天下]를 울리는 서리 발 같은 기상[氣像]과 위엄[威嚴]을 지닌 국가[國家]의 동량[棟樑]으로 성장[成長]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울 것이다.
인간[人間]은 누구나 세상[世上]에 태어나면, 어릴 때부터 서서히 배우고 익히며, 깨달음을 얻고 지식[知識]과 경륜[經綸]을 쌓으며 발전해 나아간다.
식민사학[植民史學]의 거짓과 왜곡[歪曲]된 역사[歷史] 교육[敎育]은, 흐르는 역사[歷史]의 문명[文明]과 전통[傳統], 그리고 역사[歷史]의 맥[脈]과 민족[民族]의 기상[氣像]을 어릴 때부터 그 싹을 자르고 없애 버린다.
그러한 교육[敎育]을 받고 자라난 국민[國民]들이, 어찌 국가[國家]의 훌륭한 동량[棟梁]으로 경륜[經綸]을 쌓으면서 앞으로 나아 갈 수 있을 것인가 ?
이러한 망국적[亡國的]인 거짓과 왜곡[歪曲]의 더러운 식민사관[植民史觀]을 쓸어버리고 일소[一掃]하지 않는 이상,
우리의 선대[先代]와 선조[先祖]들이 이어왔던 천하[天下] 대도[大道]의 요체[要諦]인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길은 요원[遙遠]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작금[昨今], 오늘의 한국[韓國]에서 일어나고 있는 천하만사[天下萬事]의 부끄러운 모든 일들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식민사학[植民史學]의 교육[敎育]과 무관[無關]하지 않을 것이며,
거짓과 치욕[恥辱]의 식민잔재[植民殘在]를 쓸어버리지 못한 사필귀정[事必歸正]의 한 단면[斷面]을 보면서 겪는 그 일부분[一部分]일 뿐이다.
수[數] 천년[千年]의 역사[歷史]속에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천하[天下]의 대전[大戰]이었던, 고구려[高句麗]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살수대첩[薩水大捷]과 고려[高麗] 강감찬[姜邯贊]의 귀주대첩[龜州大捷]이 있었고,
청허[淸虛] 서산대사[西山大師]의 드높은 법력[法力]이 천하[天下]의 심금[心琴]을 울리는 역사[歷史]가 서려 있는 평안도[平安道] 지역[地域]의 묘향산[妙香山]은,
예나 지금이나 태고적[太古的] 본래[本來]의 그 자리에서 옛 모습 그대로 오늘도 변함이 없다.
지금의 한반도[韓半島]에 있는 묘향산[妙香山]이 역사[歷史]에 기록[記錄]된 묘향산[妙香山]이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거짓이다.
역사[歷史]에 기록[記錄]되고 역사[歷史]에서 말하고 있는 묘향산[妙香山]은 한반도[韓半島]로부터, 서북[西北]으로 일 만리[一萬里]의 저편에 자리 잡고 있다.
반도[半島]의 북[北]쪽에 있는 지금의 묘향산[妙香山]은, 그 수 많은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에서 설명하고 있는 내용과 부합[符合]되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다.
당시[當時]를 살던 우리의 선조[先祖]들이 남겨놓은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과 부합[符合]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역사[歷史]에 기록[記錄]된 묘향산[妙香山]이 아니라는 것을, 역사서[歷史書]가 분명[分明]하게 증명[證明]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오백년[五百年] 전[前]을 전후[前後]하여 우리 선조[先祖]들이 묘향산[妙香山]에 대하여 남긴 기록[記錄]들은 수 없이 많다.
중국[中國] 이라고 부르는 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가면서, 그리고 그 지역[地域]에 살면서, 또는 왕명[王命]으로 그 지역[地域]에 부임[赴任]하여 그 지역[地域]을 다스리고 묘향산[妙香山]을 유람[遊覽]하면서,
묘향산[妙香山]의 위치[位置], 묘향산[妙香山]의 산천[山川]과 지세[地勢], 묘향산[妙香山]의 자연환경[自然環境]과 묘향산[妙香山]의 역사[歷史], 그 지역[[地域] 사람들의 생활환경[生活環境]과 풍습[風習], 묘향산[妙香山]의 지질[地質]과 묘향산[妙香山]의 모습 등, 다양한 기록[記錄]들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기록[記錄]들 속에는, 돌과 물의 모습, 이상하고 기괴[奇怪]한 돌의 모양, 묘향산[妙香山]의 생김 새, 백두산[白頭山]과 묘향산[妙香山]의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와 형세[形勢], 묘향산[妙香山]에 올라 천하[天下]를 내려다보며 느끼는 감회[感懷], 등, 묘향산[妙香山]에 대한 모든 것들을 자세하게 기록[記錄]으로 남겼다.
이러한 우리 선조[先祖]들의 역사[歷史] 기록[記錄]들과 틀림없이 일치[一致]하고 있다는 것은, 이곳이 우리 역사[歷史]에 기록[記錄]된 묘향산[妙香山]이라는 것을 확고[確固]하게 증명[證明]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역[地域]에서 말하고 있는 현지[現地]의 역사[歷史]가, 조선사[朝鮮史]의 사실[史實]과 부절[符節]을 합한 듯이 일치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동방[東方]과 동국[東國]으로 역사[歷史]에 기록[記錄]된 일 만년[一萬年] 조선사[朝鮮史]의 뿌리가 이 곳에 서려 있음을 이 지역[地域]에서 분명[分明]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오래전의 일이다. 현지[現地]의 지역[地域]을 조사[調査] 할 때, 그 지역[地域]에서 수[數] 백년[百年]을 대대[代代]로 살아온 후손[後孫]이 되시는 분들을 만나 뵙고, 그 분들의 말씀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분들의 말씀을 들으며, 조선사[朝鮮史] 역사[歷史] 기록[記錄]의 사실[史實]과, 역사[歷史] 변천[變遷]의 무상[無常]함과,
흐르는 역사[歷史]의 변함없는 맥[脈]과 혼[魂]을, 깊이 느끼며, 일 만년[一萬年] 조선사[朝鮮史] 역사[歷史]의 저력[底力]을 다시금 돌아보고, 역사[歷史]를 거슬러 올라가 회고[懷古]하며 깊은 감회[感懷]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날도 현지[現地]의 이 지역[地域]에서는, 이 곳은 동방[東方]의 지역[地域]이며, 고대[古代]로부터 동방[東方]의 문명[文明]이 시원[始原]한 곳이며,
동방[東方] 문명[文明]의 발상지[發祥地]라고 들어내 놓고 말하고 있으며, 이를 기념[紀念]하는 행사까지 열고 있다.
이러한 것은, 비록 천하[天下]의 흥망성쇠[興亡盛衰]로 나라의 이름은 바뀌었으나, 그 곳에 살고 있는 그들은 지나간 옛 역사[歷史]를 잊지 않고 계승[繼承]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서[歷史書]의 기록[記錄]대로 평안도[平安道]의 묘향산[妙香山]은, 압록강[鴨綠江]의 연안[沿岸], 백두산[白頭山]의 남[南]쪽, 그리고 대막[大漠]과 잇닿아 있는 삭막[朔漠]의 지역[地域]에 있는 산[山]이다.
서[西]쪽으로는 연경[燕京]과 통하고, 천리학야[千里鶴野]의 요동[遼東]과 인접[隣接]하고 있으며, 요동[遼東]에 있는 발해[渤海]의 물이 아스라이 시야[視野]에 들어오는 지역[地域]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사가집[四佳集]
송준상인유묘향산서[送峻上人遊妙香山序]
長白一支。蜿蜒逶迤。至鴨綠南岸。磅礴高峻者曰妙香山。
장백산맥[長白山脈]의 한 자락이 구불구불 길게 뻗어 내려와 압록강[鴨綠江] 남[南]쪽 기슭에 이르러 넓게 자리 잡아 높이 솟아오른 것이 묘향산[妙香山]이다.
山之勝。與金剛山相埒
이 묘향산[妙香山]의 형승[形勝]은 금강산[金剛山]과 서로 맞먹는다.
역사[歷史]에 기록[記錄]된 묘향산[妙香山] 계곡[谿谷]의 전경[全景]
동방[東方]의 천험[天險]으로 사서[史書]에 기록[記錄]되어 있는 묘향산[妙香山]은, 역사서[歷史書]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산[山]의 허리 위는 모두 암석[巖石]으로 되어 있으며, 기암괴석[奇巖怪石]이 즐비하다.
그리고 암봉[巖峯]으로 이루어진 수 많은 대[臺]가 있고, 단군굴[檀君窟]을 포함하여 여러 개의 자연적[自然的]으로 이루어진 석굴[石窟]이 있으며, 향목[香木]이 많이 자라고 있다.
뱀이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듯한 모양을 한 사암[蛇巖], 하늘을 향해 찌를 듯이 솟아 있는 검봉[劍峯], 암벽[巖壁]을 타고 흘러내리는 여러 개의 폭포[瀑布],
맑고 푸르기 그지없는 그 이름도 청천[淸川]이라 불리워진 살수[薩水]인 청천강[淸川江],
묘향산[妙香山]에서 발원[發源]하는 청천강[淸川江]의 물은, 장마철을 제외 하고 그야말로 그 이름 그대로 맑고 푸르기 그지없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토민[土民]들에게 전[傳]해오는 불념[佛念]이 가득한 수 많은 암봉[巖峯]으로 이루어진 석봉[石峯]들,
그리하여 암봉[巖峯]마다 불심[佛心]과 불념[佛念]으로 붙여진 이름들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전[傳]해지고, 지금도 그 이름들이 생생[生生]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다.
묘향산[妙香山] 계곡[谿谷]의 여름 전경[全景]
지산집[芝山集]의 유묘향산록[遊妙香山錄]에 나오는 묘향산[妙香山]의 검봉[劍峯]
현지[現地]에는 이렇게 검봉[劍峯]의 비석[碑石]을 세워 놓았다.
사가집[四佳集]
송욱상인유묘향산서[送郁上人遊妙香山序]
遂入妙香山。山在鴨綠南岸。實長白之所由分。對遼陽爲界。
묘향산[妙香山]은 압록강[鴨綠江]의 남[南]쪽 기슭에 있으니, 사실은 장백산[長白山]이 갈라져 나온 산[山]이며, 요양[遼陽]을 마주하여 경계[境界]가 되는 산[山]이다.
山多香木。冬雪蒨葱。仙臺佛刹。靈跡頗存。東國之山之大。莫之與京。
산[山]에 향[香]나무가 많아 겨울에 눈이 내려도 푸르고, 신선[神仙]의 누대[樓臺]와 불가[佛家]의 사찰[寺刹]에 신령[神靈]스러운 자취가 아주 많이 남아 있으니, 동국[東國]의 큰 산[山]이며, 이와 비길 만한 산[山]은 없다.
묘향산[妙香山]의 가을 전경[全景]
묘향산[妙香山]은 보현보살[普賢菩薩]의 불력[佛力]이 서려 있는 성[聖]스러운 명산[名山]이다.
하정집[荷亭集]의 차묘향산사태사[次竗香山四太史]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西山大師四山論云惟妙香山且秀且藏
서산대사[西山大師] 사산론[四山論]에서 이르기를, 묘향산[妙香山]은 수려하고 빼어나며, 또한 그 모습을 감추고 있는 산[山]이다.
妙香山爲八萬九峯。而元帝使使施香。普賢菩薩現靈於妙香之峯峯石石云。
묘향산[妙香山]의 팔만[八萬] 구봉[九峯]은, 원[元]나라 황제[皇帝]가 사신[使臣]을 보내 향[香]을 베풀었고, 보현보살[普賢菩薩]의 신령[神靈]함이 묘향산[妙香山] 곳곳의 암봉[巖峯]마다 나타난다고 이른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오늘날 현지[現地]의 그들도 이 묘향산[妙香山]에 대하여 똑 같은 말을 하고 있다.
神山潛藏 秘境
신[神]이 몰래 감추어 놓은 비경[秘境],
国家机密的神秘地区
국가[國家]의 기밀적[机密的]인 신비[神秘]한 지역[地域],
被遗忘的人间天堂名山
잊었던 인간[人間] 천당[天堂]의 명산[名山],
隱之秘境 人間仙境
숨어 있는 비경[秘境], 인간[人間] 선경[仙境]의 명산[名山],
세월이 흐르고 나라가 바뀌었으나, 오늘날의 그들도 서산대사[西山大師]와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유독 이 산[山]에 대해서만 고금[古今]을 초월[超越]하여 이러한 평론[評論]이 나오는 것은, 그러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대개 그러하듯이 예로부터 삭막[朔漠]과 이어진 산[山]들은 웅장[雄壯]하기는 하나, 그야말로 황량[荒凉]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묘향산[妙香山]은 이러한 지역[地域]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한 발 다가서면, 그 삭막[朔漠]하고 황량[荒凉]한 모습을 지닌 거친 태산준령[泰山峻嶺]의 대령[大嶺]속에, 천하[天下]의 비경[秘境]으로 자리 잡고 있다.
삭막[朔漠]의 지역[地域]에 있는 산[山]들은 대개 웅장[雄壯]하기는 하나 황량[荒凉]하기 이를 데 없다.
우리의 역사[歷史]에 기록[記錄]된 묘향산[妙香山]은, 양력[陽曆]으로 6월[六月]에도 정상[頂上]에는 백설[白雪]이 하얗게 쌓이고, 양력[陽曆]으로 9월[九月]이면 눈이 내리는 산[山]이다.
이에 대한 다른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은 거마[車馬]로 실을 만큼 많다. 먼저 염헌집[恬軒集]과 동문선[東文選]], 해석유고[海石遺稿]에 실려 있는 묘향산[妙香山]에 대한 시[詩] 세 편[三篇]을 보기로 한다.
동문선[東文選]
송 문욱사미 입 향산[送文郁沙彌入香山]
김수온[金守溫]
들으니 묘향산[妙香山]이 삭북[朔北]에 있어 聞說香山臨朔北
6월[六月]에도 그늘진 벼랑에는 백설[白雪]이 쌓여 있다고 하네 六月陰崖猶積雪
구름 속에 치솟은 상봉[上峰]은 아득 하기만 하고 絶頂入雲常漠漠
향산香山]을 오르는 사람은 칡백[蔓栢]을 잡고 오른다. 登者攀緣側栢
목의[木衣] 입고 초식[草食하는 수 많은 은자[隱者]들 木衣草食多隱逸
경전[經典] 읽는 소리만이 밤마다 골짜기를 울린다 하노라. 念經夜夜聲響谷 [중략]
저 멀리 보이는 흰 눈이 쌓인 산[山]이 묘향산[妙香山]의 산봉[山峰] 줄기이다. 묘향산[妙香山]은 이렇게 5월과 6월에도, 산[山] 정상 [頂上]에는 백설[白雪]이 하얗게 쌓인다.
염헌집[恬軒集]
희천객관[煕川客館] 망묘향산[望妙香山]
오월의 묘향산[妙香山]은 백설[白雪]을 녹이려하고 五月香山雪欲融
평명[平明]의 제색[霽色]은 성중[城中]에 가득 하다. 平明霽色滿城中
해석유고[海石遺稿]
약산동대영변[藥山東㙜寧邊]
절벽[絶壁]위의 외로운 성[城] 최고위에 있는 상관[上關] 絶孤城最上關
대황[大荒]의 땅에 해가 저무니 날던 새도 돌아온다. 大荒日落鳥飛還
팔월의 묘향산[妙香山]은 항상 눈이 흩날리며 내리고 妙香八月恒飛雪
푸른 산의 백운[白雲]은 이슬을 다하고 절반의 모습을 바꾼다. 蒼白雲端露半顔
묘향산[妙香山]은 가을이 빠르고 음력[陰曆]으로 8월[八月]이 되면, 눈이 내리면서 쌓인다.
대황[大荒]의 땅에 해가 저무니 날던 새도 돌아온다. 大荒日落鳥飛還,....... 묘향산[妙香山]은, 대황[大荒]이 자리 잡고 있는 이러한 지역[地域]에 있는 산[山]이다.
대황[大荒]의 지역[地域]에 있는 불함산[不咸山]은, 사시사철 빙설[氷雪]이 두텁게 쌓여 있는 산[山]이며,
대황[大荒]의 주변 지역[地域]에 있는 산[山]들은, 양력[陽曆]으로 6월[六月]과 9월[九月]에도, 초목[草木]이 푸른 산[山]위에, 백설[白雪]의 흰 눈이 하얗게 쌓이는 지역[地域]이다.
수[數] 천년[千年]을 이어 내려오는 고금[古今]의 역사서[歷史書]들이 모두 한결같이 같은 기록[記錄]을 남기고 있다.
반도[半島]의 땅은, 수[數] 천년[千年] 전이나 지금이나 대황[大荒]의 지역[地域]이 될 수 없는 땅이다.
묘향산[妙香山]이 있는 대황[大荒]의 주변 지역[地域]에 있는 산[山]들은, 6월과 8월에도 산[山]위에 백설[白雪]이 하얗게 쌓인다.
역사[歷史]에 기록[記錄]된 이러한 산[山]이 지금의 반도[半島] 북[北]쪽에 있는 묘향산[妙香山]이라고 한다면,
그런 말을 하는 자[者]가 제 정신[精神]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망국[亡國]의 식민사관[植民史觀]인 반도사관[半島史觀]은, 반도[半島]의 북[北]쪽에 묘향산[妙香山]이 있다고 주장[主張]하며, 오늘날까지 국민[國民]들에게 그렇게 가르쳐오고 있으며, 현재[現在]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위로는 우러러 청천[靑天]의 하늘을 속이고, 아래로는 천하 만물[天下萬物]을 싣고 있는 땅을 속이며, 우리 선조[先祖]들의 업적[業績]을 무시하고 부정[否定]하고 있으며, 선대[先代]의 영령[英靈]을 능멸[陵蔑]하고 처절[悽絕]하게 짓밟고 있다.
국민[國民]의 혈세[血稅]와 학부모[學父母]들의 피땀 어린 돈으로 봉록[俸祿]을 받으며 학생[學生]들을 가르치고, 국가[國家] 백년대계[百年大計]의 교육[敎育]을 책임지고 있는 명색[名色]이 석학[碩學]이요. 학자[學者]라는 자들이,
대명천지[大明天地]에 이 얼마나 황당무계[荒唐無稽]하고 패악[悖惡]의 어이없는 일이란 말인가 ?
탄식[歎息]하고 탄식[歎息]하지 않을 수 없도다. 어찌 하늘과 땅을 우러르며 통탄[痛嘆]하지 않을 수 있으랴.
수 천년[數千年]을 이어 내려오면서 우리의 선대[先代]들이, 현지[現地]에 살면서 당시[當時]를 기록[]記錄]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을 따르지 않는 오늘날 한국[韓國]의 역사[歷史],
식민사관[植民史觀]의 반도사관논자[半島史觀論者]들이 말하는 그들의 역사[歷史]는, 누구의 역사[歷史]인가 ?
그들은 오늘날 한국[韓國][의 사학계[史學界]를 장악[掌握]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학자[學者]도 아니요. 사학자[史學者]도 아니다.
모름지기 학자[學者]라고 한다면 거짓과 왜곡[歪曲]의 바르지 못한 그러한 길을 갈수 없기 때문이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은 병자호란[丙子胡亂]때에 척화[斥和]를 주장하다 심양[瀋陽]에 끌려가 옥[獄]살이를 했던 분이다.
지금으로부터 그 시기[時期]의 상거[相距]가 그리 멀지 않다.
훗날 이 분이, 敬次伯氏韻。寄姪光炫三水謫居 큰형님의 운[韻]을 공경[恭敬]스레 차운[次韻]하여 조카 광현[光炫]이 귀양 가 있는 삼수[三水]의 적소[謫所]에 부치는 시[詩]에서,
만 길 높은 호산[胡山] 곁의 한 조각의 성이거니 萬仞胡山一片城
삭풍[朔風] 속에 새벽 피리 애절하게 울리리라 朔風哀動曉笳聲
타향 땅은 모든 일이 고향과는 다르거니 殊鄕事事故鄕違
팔월[八月]의 변방[邊方] 풍설[風雪]은 위세를 떨치고 八月邊風雪作威
추위 피해 사는 움집[지교地窖] 무덤과 비슷하다. 地窖避寒疑塚是
오월[五月]에도 엄한 서리 초목[草木]에게 재앙 주고 五月嚴霜草木灾
자갈밭의 병든 보리 이삭 맺지 못하리라 石田瘦麥不成胎
북[北]쪽으로 백두산[白頭山]은 오랑캐[胡天]의 하늘 아래 있고 胡天直北白頭山
강계[江界]에서 동[東]쪽으로 설한령[雪寒嶺]과 이어진다. 江界之東連雪寒
설령[雪嶺] 백산[白山]은 한 없이 가이없거니 雪嶺白山無限際
어디에서 장안[長安] 쪽을 바라보려 할 것인가? 欲從何處望長安
지금도 묘향산[妙香山] 자락에는, 청음[淸陰]의 시[詩]에서 말하고 있는 움집인 지교[地窖]가 고스란히 보전[保全]되어 내려오고 있다.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대로 묘향산[妙香山]에서 압록강[鴨綠江]이 멀지 않은 까닭일 것이다.
이렇게 한편의 시[時]를 지어, 묘향산[妙香山]과 인접[隣接]하고 있는 압록강[鴨綠江]과 백두산[白頭山]의 형세[形勢]를 노래 하였다.
지금도 이 묘향산[妙香山] 자락에는, 청음[淸陰]의 시[詩]에서 말하고 있는 움집인 지교[地窖]가 고스란히 보전[保全]되어 내려오고 있으며, 여러 채의 지교[地窖]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형태[形態]의 움집은, 북[北]쪽으로는 백두산[白頭山]으로부터 남[南]쪽으로 압록[鴨綠江]을 지나 이 곳 묘향산[妙香山]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形態]가 온전히 보전[保全]되어 현재[現在]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묘향산[妙香山]과 압록강[鴨綠江]의 중간 지역[地域]에 있는 움집인 [지교地窖], 이러한 지교[地窖]는 한두 채가 아니다.
그리고 이 묘향산[妙香山]에는, 지산집[芝山集]의 유묘향산록[遊妙香山錄]에서 말하고 있는 석옹[石罋]인 돌 항아리가 지금도 산[山] 중턱에 당시[當時]의 모습 그대로 보존[保存] 되어 있다.
지산집[芝山集]
유묘향산록[遊妙香山錄]
旣而同行。有冠童數人。攀崖而躋。捷若猿猱。於是仁叔先。汝寅次。余最後。旣至則長劍倚天。光芒耀日。吹雨半空。霹靂飛動。所見凡五而䧺偉過之。
얼마 있다가 동행[同行]하던 관동[冠童] 몇 사람이 절벽[絶壁]을 기어 올라가는데 민첩하기가 원숭이와 같았다.
이에 인숙[仁叔]이 앞장서고, 여인[汝寅]이 그다음에 가고, 내가 맨 뒤에 갔다. 얼마 뒤에 이르러 보니, 긴 칼이 하늘에 솟아 있어 햇빛을 받아 섬광[閃光]이 번쩍거렸으며, 비구름이 허공[虛空]에 걸려 있어 번갯불이 번쩍거렸다.
본 바가 무릇 다섯 번인데 앞서 본 것보다 더욱 웅위[雄偉]하였다.
下有石罋。傍平可坐。寬曰。此古龍潭也。庵成而龍徙。蓋嫌居立錫之上也。留一水穴。時至而禮師。卽庵下龍井是也。
그 아래에는 돌항아리[석옹石罋]가 있었으며, 그 곁은 평평하여 앉을 만하였다. 관[寬]이 말하기를, 이것은 옛날의 용담[龍潭]입니다.
암자[庵子]가 다 완성되자 용[龍]이 옮겨 갔는데, 이는 주석[住錫]한 곳의 위에 사는 것을 혐의롭게 여겨서 옮겨 간 것입니다.
용[龍]이 어떤 수혈[水穴]에 머물러 있으면서 때때로 나와서 사[師]에게 예배하였는데, 바로 암자[庵子] 아래에 있는 용정[龍井]이 그 용[龍]이 머물러 있던 곳입니다. 하였다.
묘향산[妙香山]에 대하여 수 천년[數千年]동안 이어온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은, 한결같이 묘향산[妙香山]은, 대막[大漠]과 인접[隣接]하고 있는 삭막[朔漠]의 지역[地域]에 위치[位置]하고 있으며,
동방[東方]의 서[西]쪽 끝인 서방[西方], 서극[西極], 또는 북[北]쪽으로는 사시사철 눈이 쌓여 있는 백두산[白頭山]에 가깝기 때문에 북극[北極]으로도 부르고 있다.
응와집[凝窩集]
약산동대[藥山東臺]
북[北]쪽으로 산과 언덕은 삭막[朔漠]에 연[連]이어져 있고 北去岡巒連朔漠
서[西]쪽으로 오는 강수[江水]는 안주[安州]를 지나간다. 西來江水過 安州
하늘에서 내려다본 오늘날의 안주성[安州城] 모습, 응와집[凝窩集]의 시[詩]에서 말하고 있듯이, 살수[薩水]는 서[西]쪽으로 안주[安州]를 지나가고, 안주성[安州城] 의 들판과 산[山]과 언덕은 북[北]으로 삭막[朔漠]의 지역[地域]인 요동[遼東]으로 이어 진다.
명[明]나라가 찬술[撰述]한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서도 같은 기록[紀錄]으로 말하고 있으며, 당시[當時]에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을 오고가던 명[明]나라 사신[使臣]들은, 이러한 역사[歷史]의 사실[史實]들을 시[詩]를 읊으며 노래하고 기록[記錄]으로 남겼다.
오늘날 현지[現地]의 지명[地名]들은 모두 바뀌어져 있다. 그러나 묘향산[妙香山]에 대하여 내려오는 유서[由緖]깊은 역사[歷史]의 사실[史實]들은,
옛 고조선[古朝鮮]과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의 묘향산[妙香山]에 대한 역사[歷史]를 말하고 있다,
평안도[平安道]의 묘향산[妙香山]은, 고려[高麗]와 조선[朝鮮] 의 서북[西北]에 있는 최 변경[最邊境] 지역[地域] 이었다.
그리하여 서관[西關], 또는 서북관[西北關]으로 역사[歷史]에 기록[記錄] 되었다.
목은집[牧隱集]
香山安心寺舍利石鍾記
향산[香山] 안심사[安心寺]의 사리석종[舍利石鍾]에 대한 기문
指空。西天人也。高麗普濟王師。其弟子也。其入寂而茶毗也。皆有舍利。人之信者疑者。於是合而爲一矣。[중략]
지공[指空]은 서천[西天] 사람이다. 그리고 고려[高麗]의 보제 왕사[普濟王師] 나옹[懶翁]은 바로 그의 제자이다.
이들이 입적[入寂]하여 다비[茶毘]를 행했을 때 모두 사리[舍利]가 나왔으므로, 믿는 사람이나 의심[疑心]하는 사람이나 이에 모두 의견이 합치되어 하나로 귀결되었다.
香山岸鴨江。地最僻。與女眞交界
향산[香山]은 압록강[鴨綠江] 연안[沿岸]에 위치[位置]하여 그 땅이 가장 외진 데다, 여진족[女眞族]과 접경[接境]하고 있는 지역[地域]이다. [중략]
이 사진[寫眞]은 오늘날 압록강[鴨綠江]인 객납사호[喀纳斯湖] 지역[地域]에 살고 있는 토민[土民]의 집에 걸어 놓고 있는 징기스칸의 그림이다. 그들은 지금 벨루하산으로 부르는 불함산[不咸山]인 백두산[白頭山]의 지역[地域]이 옛 원[元]나라의 고토[古土]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징기스칸은 휘하의 장군[將軍]들을 거느리고, 백두산[白頭山]인 벨루하산의 주봉[主峯]에 와서 기도[祈禱]를 올리고 돌아 갔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 지역[地域]은 숙신[肅愼]의 고토[古土]이며, 고구려[高句麗]가 일어난 중심[中心] 이었으며, 훗날 여진[女眞]의 본거지가 되었다.
조선[朝鮮] 왕조[王朝]는, 백두산[白頭山] 지역[地域]에서 이 여진[女眞]을 몰아내고 사군육진[四郡六鎭]을 두었다.
오늘날 현지[現地]의 그들은 이 지역[地域]을 어떻게 부르고 있을까 ?
중국서북변계적선경[中国西北边界的仙境],........... 이렇게 부르고 있다.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의 서북[西北] 변경[邊境] 지역[地域]과 한 치의 차이도 없이 같은 말이며 같은 뜻이다.
묘향산[妙香山]의 지명[地名]을 그들은 몽고어[蒙古語]로 바꾸어 놓았는데, 액이제사대협곡[额尔齐斯大峡谷],............또는 액이제사하대협곡[额尔齐斯河大峡谷] 이라고 부른다.
액이제사하[额尔齐斯河]는,.............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의 살수[薩水]인 청천강[淸川江]이다.
오늘날 몽고어[蒙古語]로 액이제사대협곡[额尔齐斯大峡谷]이라고 부르는 묘향산[妙香山] 계곡[谿谷]의 청천강[淸川江]인 살수[薩水]의 상류[上流], 묘향산[妙香山] 계곡[谿谷]을 흐르는 물들은, 비가 자주 오는 한 여름이 되면, 물의 수량[水量]이 많아 계곡[谿谷]을 휩쓸며 흘러 나간다.
이 보다 더 의미심장[意味深長]한 것은, 액이제사하대협곡[额尔齐斯河大峡谷]에는 청천강[淸川江]의 상류[上流]이며 발원지[發源地]인 이곳의 계곡[溪谷]을 오고가며 건너는 여러 개의 다라기 놓여 져 있는데, 다리 이름이 아미이살랍교[阿米尔萨拉桥]이다.
이 다리의 이름이 걸작[傑作]이다.
아미이살랍교[阿米尔萨拉桥],.............. 보살[菩薩]은, 위로는 깨달음을 구[求]하여 부처의 경지에 이르
며, 아래로는 중생[衆生]을 교화[敎化]하여,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의 버금이 되는 성인[聖人]을 이르는데, 묘향산[妙香山]의 계곡[溪谷]을 건너는 다리에, 보살[菩薩]의 살[薩] 자[字]를 쓰고 있다.
불가[佛家]에서 묘향산[妙香山]은,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주재[駐在]하고 있는 산[山]이다.
묘향산[妙香山] 계곡[谿谷]은 크고 거대하여, 묘향산록[妙香山錄]에서 말하고 있듯이 괴암기석[怪巖奇石]이 즐비한 계곡[谿谷]을 이리 저리 수도 없이 건너야 한다.
묘향산[妙香山]의 계곡[谿谷]을 건너는 다리인 아미이살랍교[阿米尔萨拉桥], 건너는 다리에도 보현보살[普賢菩薩]의 염원[念願]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묘향산[妙香山]의 산봉[山峯]에는,.......... 아미이살나봉[阿米尔萨那峰]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이 일대[一帶]의 산[山]들을, 불념[佛念]이 서려 있는 성[聖]스럽고 신비[神秘]로운 산[山]으로 부르고 있다.
오늘날에도 묘향산[妙香山]의 암봉[巖峯]에는 불념[佛念]이 깊이 서려 있으니, 청허[淸虛] 서산대사[西山大師]의 드높은 법력[法力]은, 시공[時空]을 뛰어넘어 묘향산[妙香山]을 뒤덮고 있다.
그들은 현재[現在], 옛 조선[朝鮮]의 영변[寧邊)] 지역[地域] 이었던 이 일대[一帶]를, 가가탁해[可可托海]라고 부른다.
그리고 백두산[白頭山] 세 개의 주봉[主峰] 가운데의 하나인 장백산[長白山]의 주봉[主峰]으로부터, 동남[東南]으로 묘향산[妙香山]에 이르기까지를,............ 아륵태산지구[阿勒泰山地区]라고 부르는데, 이 역시 몽고어[蒙古語]로 금산[金山]이라는 뜻이다.
이름하여 금산아륵태지구[金山阿勒泰地区]이다.
백두산[白頭山]의 주봉[主峯] 전경[全景], 백두산[白頭山]을 소개 할 때 게재한 사진[寫眞]이나, 묘향산[妙香山]에 대한 이해[理解]를 돕기 위하여 다시 올린다.
청[淸]나라의 열하[熱河]는 이 백두산[白頭山] 주봉[主峯]의 서[西]쪽 기슭에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알타이산맥이라고 부르는 이 일대[一帶]의 산맥[山脈]들은, 역사[歷史]에서 말하고 있는 불함산[不咸山], 장백산[長白山], 백산[白山], 금산[金山], 백두산[白頭山]이다.
알타이는 몽고어[蒙古語]로 금[金]을 말하는 것이니, 그들은 지금도 알타이산, 즉 금산[金山]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알타이산맥은 아이태산[阿尔泰山]으로도 부르는데, 모두 같은 뜻이다. 그들이 말하는 아이태산[阿尔泰山] 지역[地域]의 범위는,
역사서[歷史書]와 백두산기[白頭山記]에 기록[記錄]된 내용과 단 한 치의 차이도 나지 않는다.
백두산[白頭山] 세 개[三個]의 주봉[主峯] 가운데, 두 번째로 높으며, 압록강[鴨綠江]이 발원[發源]하는 장백산[長白山]의 전경[全景
중국[中國] 사람들은 백두산[白頭山]을 장백산[長白山]이라고 불렀으나, 우리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에서는, 백두산[白頭山] 세 개[三個]의 주봉[主峯] 가운데, 두 번째로 높고, 압록강[鴨綠江]이 발원[發源]하는 이 산[山]을 장백산[長白山]이라고 하였다.
장백산[長白山]의 한줄기는 동[東]으로 뻗어 함경도[咸鏡道]가 되었고, 한줄기는 서[西]쪽으로 뻗어나가 발해[渤海]가 되었으며, 장백산[長白山]의 한줄기가 압록강[鴨綠江]을 따라 동남[東南]쪽으로 뻗어내려, 그 태산준령[泰山峻嶺]의 대령[大嶺]속에 자리 잡은 것이 바로 묘향산[妙香山]이다. 묘향산[妙香山]에 대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찮은 하나의 붓끝으로 거짓을 말하고,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여 세상[世上]을 속이는 짓은, 잠시 한때, 세상[世上]을 횡행[橫行]하며 혹세무민[惑世誣民]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천하만물[天下萬物]의 성장[成長]과 발육[發育]을 돕고, 천지[天地]의 하늘과 땅을 가르며, 천하[天下] 만물[萬物]을 싣고 있는 대자연[大自然]의 경의[敬意] 스러움과 위대[偉大]함을
어찌 한갓 창해[滄海]의 진애[塵埃]만도 못한 티끌만한 부초[浮草]같은 인간[人間]들이, 그 모습을 바꾸고 끝까지 천하[天下]를 속일 수 있을 것인가 ?
일찍이 청[淸]나라의 황제[皇帝]인 강희[康煕]가, 열하[熱河]에 피서산장[避暑山莊]을 지어놓고 친히 기[記]를 지었다. 曰避暑山莊 康煕自爲記曰
금산[金山]은 일어나 줄기차게 뻗어 내리고 따뜻한 샘은 솟구쳐 흐른다. 金山發脉。暖溜分泉
구름 잠긴 동학[洞壑]의 깊은 곳 물은 깊디깊고 돌 쌓인 못엔 푸른 안개가 둘렸다. 雲壑渟泓。石潭靑靄。
청[淸]나라 황제[皇帝]의 피서산장[避暑山莊]인 열하[熱河]는, 오늘날 벨루하산의 서[西]쪽인, 압록강[鴨綠江]이 서[西]쪽]으로 흘러 발해[渤海]에 들었다가 다시 동북[東北]으로 흘러 굽이쳐 흘러 나가는 그 어귀의 깊은 계곡[溪谷]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강희[康煕]는, 이 금산[金山]의 서[西]쪽 기슭에 피서산장[避暑山莊]을 지어놓고, 그 기[記]를 지은 것이다.
오늘날 현재[現在]도 알타이산맥의 장백산[長白山]이 묘향산[妙香山]으로 뻗어 내리는 산[山]자락에, 버젓이 금산[金山]이라고 새겨 놓았다.
조선사[朝鮮史]에서는 백두산[白頭山], 산해경[山海經]에서는 불함산[不咸山], 명[明]나라에서는 장백산[長白山], 청[淸]나라에서는 금산[金山]이라고 불렀으니, 어찌 그 산[山] 이름을 바꿀 수 있었겠는가 ?
지도[地圖]에 그려진 알타이산맥과 중국[中國]에서 말하는 아이태산산맥[阿尔泰山山脉], 그리고 조선사[朝鮮史]에서 말하는 백두산[白頭山]은 같은 곳을 말하고 있으며, 그 지역[地域]의 범위[範圍]도 똑 같다.
청[淸]나라의 연경[燕京] 동북[東北] 700리[七百里]에 있던 열하[熱河]가, 오늘날의 북경[北京] 지역[地域]에 있는 승덕[承德]이라고 하는 것은, 지나가는 우공[牛公]이 배꼽을 잡고 웃으며 넘어질 일이다.
지금의 승덕[承德] 주변 그 곳 어디에, 사시사철 백설[白雪]이 하얗게 쌓여 있는 대황[大荒]의 지역[地域]에 있는 불함산[不咸山]인 금산[金山]이 있었는가 ?
백두산[白頭山] 세 개[三個]의 주봉[主峯] 가운데 하나인 장백산[長白山]의 북[北]쪽, 백두산[白頭山] 주봉[主峯]의 동북[東北]에 있는 주봉[主峯]의 전경[全景], 백두산[白頭山]은 이 세 개[三個]의 주봉[主峯]이 서로 삼각의 형세[形勢]를 이루고 있다.
백두산[白頭山]은 오르는데 높이가 삼백리[三百里]리가 되고, 백두산[白頭山]의 주위가 이천리[二千里]라고 하는 것은, 백두산[白頭山]의 산세[山勢]가 이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과장[誇張]된 표현[表現]이 아니다. 오늘날도 똑같이 백두산[白頭山]의 산세[山勢]를 그리고 있다.
여진[女眞]의 청[淸]나라 사람들은, 이 산맥[山脈]의 전체를 금산[金山] 이라고 하였다.
오늘날의 알타이산맥이다.
중국서북변계적선경[中国西北边界的仙境],............... 신강액이제사대협곡[新疆额尔齐斯大峡谷], 오늘날 그들이 중국[中國]이라고 하면서 말하고 있는 이러한 것들은,
역사[歷史]에서 말하고 있는,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의 서관[西關]이며, 서북계[西北界]이고, 평안도[平安道] 묘향산[妙香山]과 청천강[淸川江]인 살수[薩水]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지금도 이 묘향산[妙香山]은, 6월[六月]에도 그늘진 절벽[絶壁]에는 눈이 녹지 않고, 묘향산[妙香山]의 상봉[上峰]에는 백설[白雪]이 하얗게 쌓인다.
산[山]아래에는 초목[草木]이 무성하고 푸르며 꽃들이 만발[滿發]하고, 산[山]위에는 눈이 하얗게 쌓이는 산[山],
9월[九月]이면 백설[白雪]이 휘날리며, 눈이 하얗게 쌓이는 산[山],
묘향산[妙香山]은 역사[歷史]에 기록[記錄]된 당시[當時]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본[本] 모습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
묘향산[妙香山]의 음력[陰曆] 팔월[八月]의 전경[全景]
묘향산[妙香山]이 있는 영변[寧邊]은, 조선[朝鮮]의 대도호부[大都護府]가 있던 지역[地域]이다.
살수[薩水]가 흐르는 안주[安州]는 평안도[平安道]의 중앙[中央]이라고 일컬어져 왔으며, 살수[薩水]는 평안도[平安道]의 중심[中心]을 흐르기 때문에, 안주[安州]는 평안도[平安道]의 요충[要衝]이며 인후[咽喉]가 되는 지역[地域]이라고 사서[史書]는 기록[記錄]을 남기고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세종[世宗] 10년[十年] 12월[十二月] 2일[二日] 기묘[己卯]
吏曹啓 請合平安道 延山府及撫山縣, 稱爲寧邊大都護府, 置府使判官, 以都節制使, 兼任府使。 從之
이조[吏曹]에서 계[啓]하기를, 평안도[平安道] 연산부[延山府]와 무산현[撫山縣]을 합병하여 영변[寧邊] 대도호부[大都護府]라 호칭[呼稱]하고, 부사[府使]와 판관[判官]을 두고는 도절제사[都節制使]로 그 부사[府使]를 겸임[兼任]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간이집[簡易集]
寧爲西邊大都護。故節帥兼其長
영변(寧邊)은 서쪽 변방[邊方]의 대도호부(大都護府)이기 때문에 절도사(節度使)가 그곳의 최고 책임자를 겸하고 있는 곳이다. [중략]
우리가 공교육[公敎育]을 통하여 배워온 한국[韓國]의 역사[歷史]는, 식민[植民] 잔재[殘在]의 거짓과 왜곡[歪曲], 그리고 역사[歷史]의 비하[卑下]로 점철[點綴]된 사이비[似而非]의 역사[歷史]였다.
역사[歷史]는 수[數] 천년[千年]을 이어 전[傳]해 내려오는 역사서[歷史書]를 따라 배우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평안도[平安道]
영변대도호부[寧邊大都護府]
군명[郡名], 밀운[密雲, 안삭[安朔], 연산[延山], 연주[延州], 무주[撫州], 무산[撫山], 고청성[古靑城], 약산[藥山]
형승[形勝], 모양이 쇠독[鐵甕]과 같다. 옛 기록[記錄]에 이르기를, 약산[藥山]의 험준[險峻]함은 동방[東方]에서 으뜸간다.
겹겹이 싸인 멧부리가 서로 사면[四面]을 에워싸 그 모양이 쇠독[鐵甕]과 같다. 하였다.
하늘이 만든 성[城]이다. 부[府]의 기록[記錄]에, 약산[[藥山]은 하늘이 만든 성[城]이다. 하였다.
산천[山川], 약산[藥山] 부[府]의 서[西]쪽 8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묘향산[妙香山] 부[府]의 동[東]쪽 1백 30리에 있다.
태백산[太伯山]이라고도 하며, 옛 기록[記錄]에, 그 산[山]에 3백 60채의 암자[庵子]가 있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성지[城地], 철옹산성[鐵瓮山城], 일명[一名] 약산산성[藥山山城]이라고도 하는데, 둘레가 20여 리이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약산[藥山]의 험[險]한 것은 동방[東方]의 으뜸이다. 하였다.
읍지[邑志]에는 이르기를, 동남[東南]의 형세[形勢]가 극히 준엄[峻嚴]하고, 남[南]쪽은 곧 대야[大野]에 임하여, 형세[形勢]가 심히 넓고 땅이 비옥하여, 뽕나무와 삼[麻]을 심기에 적합하다. 하였다.
묘향산[妙香山]의 날카롭고 험준[險峻]한 전경[全景]
묘향산[妙香山]을 동방[東方]의 천험[天險]이라고 한 것은, 묘향산[妙香山]의 산세[山勢]가 장엄[莊嚴]하면서도 극히 날카롭고 험준[險峻]하기 때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평안도[平安道]
영변대도호부[寧邊大都護府]
누정[樓亭], 운주루[運籌樓]. 부[府]의 성내[城內]에 있다.
최치운[崔致雲]의 기문[記文]에,
통판[通判] 이정[李禎]군이 나에게 이르기를, 저 약산[藥山]은 사방[四方]이 높고 험조[險阻]하다.
암석[巖石]이 깎은 듯이 서 있어 하늘이 만든 성[城]이라고 일컬으며, 땅이 또한 기름지어 뽕나무와 삼[麻]을 심기에 알맞아 실로 고을을 삼을 만한 곳입니다.
또한 의주[義州]와 삭주[朔州], 강계[江界] 등 여러 고을 중에서 군사[軍士]를 모으기에 적당한 곳이므로, 태종[太宗] 16년 봄 정월[正月]에 공조[工曹]가 왕명[王命]을 받들어 본도[本道]에 공문[公文]을 보내어 성[城]을 쌓게 하였습니다. [중략]
묘향산[妙香山]의 산세[山勢]는 실로 하늘의 조화[造化]로 만든 천험[天險]의 산[山]이라는 말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전하[殿下]의 11년 겨울에 본도[本道]의 도체찰사[都體察使] 황희[黃喜] 등이 글을 올려, 약산성[藥山城]은 실[實]로 하늘이 만든 성[城][天作城]으로서 무주[撫州]와 연주[延州]의 두 고을을 합치어 한 고을로 만들어 대도호부[大都護府]로 부르고,
부사 판관[府使判官]을 두고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로 겸임하게 하며, 토관[土官]을 설치하여 거진[巨鎭]을 이루도록 하소서. 하였더니 상[上]이 그 건의에 따랐습니다. [중략]
지난해 정월[正月]에 최윤덕[崔潤德] 상공[相公]이 도절제사[都節制使]로서 여기에서 작전[作戰]을 계획하여 군마[軍馬]를 모아 북[北]쪽 오랑캐를 평정[平定]하였습니다.
가을 7월에는 다시 우의정[右議政]으로서 도안무찰리사[都按撫察理使]가 되어 이곳에 왔었는데, 내가 막료[佐幕]가 되었습니다.
작전[作戰] 계획에 빈틈이 없었으므로 모련위도독[毛憐衛都督] 이살만[李撒滿], 답실리[答失里]와 건주위도지휘[建州衛都指揮] 이만주[李滿住] 등이
각각 그 아우와 조카로 하여금 항복[降伏]하는 글월을 보내와 궐하[闕下]에 머리를 조아렸고, 그 밖의 우두머리들도 몸소 내조[來朝]하여 성심[誠心]으로 귀순[歸順]하였으므로 변방[邊方]의 경계[警戒]가 거의 걱정 없게 되었습니다. [중략]
오직 우리 우상공[右相公] 공[公]이 선공[先公]의 업적[業績]을 이어받아 세 번이나 왕명[王命]을 받고 와서 본도[本道]를 지켜,
나라의 울타리가 되어 단번에 흉노[匈奴]를 쳐부수고, 한 장의 격문[檄文]으로 흉노[匈奴를 귀순시켜 태산[太山] 같은 공[功]을 이루었으니,
내 비록 옹졸[壅拙]한 붓이나마 감히 사양[辭讓]하지 않고 써서 기문[記文]을 삼노라. 하였다. [중략]
기원전[紀元前]에 세워진 이 비석[碑石]은, 알타이산맥 깊숙이 벨루하산의 북[北]쪽, 즉 백두산[白頭山]의 북[北]쪽에 세워진 고 비석[古碑石]이다.
이 지역[地域]은 숙신[肅愼]의 지역[地域]이며,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의 지역[地域]이다.
발해[渤海]가 사라지고 금[金]나라가 일어났으며, 명[明]나라가 망하고 청[淸]나라가 일어났다. 중국[中國]의 사서[史書]에서는 고구려[高句麗]의 일파를 흉노[匈奴]라고도 적고 있다.
여진[女眞]은 옛 흉노[匈奴]의 세력들과 교류[交流]가 빈번 하였으며, 서로 뭉치고 헤어지기를 반복[反復] 하였다.
최치운[崔致雲]의 기문[記文]에서 흉노[匈奴]를 단번에 쳐부수었다는 것은, 여진[女眞]과 흉노[匈奴]가 뒤섞인 무리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도 현지[現地]에서 이러한 역사[歷史]의 사실[史實]들을 확인[確認] 할 수 있다.
최치운[崔致雲]의 기문[記文]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영변[寧邊]의 묘향산[妙香山]은, 흉노[匈奴]들이 횡행[橫行]하던 지역[地域]과 인접[隣接]하고 있었으며, 요동[遼東]과 경계[境界]를 이루는 지역[地域] 이었다.
묘향산[妙香山]은 동방[東方]의 천험[天險]을 지니고 있는 산[山]이다. 암석[巖石]이 하늘을 찌르듯 솟아오르고 깍아지른 암벽[巖壁]이 줄지어 이어지는 날카롭고 험준[險峻]한 산[山]이다.
또한 남[南]쪽으로는 광활[廣闊]한 대야[大野]가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동방[東方]의 서극[西極] 묘향산[妙香山]과 살수[薩水] 하[下], 제[第] 2편[篇]에서 이어집니다.
첫댓글 인녕히세요. <환국고려>님!
드디어 조선왕조(총칭)의 서북변경과 서쪽변경에 대한 진실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군요.
원전만을 대하다가 이렇게 지형지세와 기후 및 기록과 일치하는 곳 및 사진까지 대하고 나니, 가슴이 다 후련해집니다.
현지인들이 지금도 수천년, 수백년 전의 역사적 사실들을 잊지 않고 기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우리들은 지금컷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자책이 됩니다.
이런 소중한 글을 쓰기 위해 님께서 얼마만한 고생을 하셨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미뤄 짐작됩니다.
고생많이 하셨습니다. 우리 카페의 회원님들께서도 님께서 올려주시는 조선사 진실에 대해서 많은 공감을 표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묘향산이 서쪽지방에 있을 것이라는 정황적 증거는 수없이 많으나, 어떤 산이라고 확정하기에는 너무 많은 제약이 있었습니다.
오늘 님께서 올려주신 글을 보고나니 많은 의문이 풀립니다.
원전에 기록된 사실들이 비록 왜곡된 곳들이 많이 있지만 지형지세와 종족과 부족, 나라들과의 관계를 종합해 보면, 조선사의 전개영역은 오늘날의 구도와 별만 차이가 없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깊어가는 겨울 밤!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문무 선생님 안녕 하십니까 ?
우리의 역사에 헌신 하시는 문무 선생님의 노고에 비하면 조그만 하나의 일일 뿐입니다.
감사 합니다.
지난 세기에는 조선의 강역 이었으나 지금은 중화 인민공화국의 영역, 그러나 그 지역에서 수 백년 대를 이어 살고 있는 사람들은, 지나간 조선의 백성 이었습니다.
역사의 왜곡으로 중국도 옛 중국이 아니나, 옛 전통과 풍속을 지키는 사람들은 역사에 관하여, 알것은 다알고 있습니다. 이곳이 묘향산임을 더욱 굳게 하는 것은 현지 토인의 역사에 관한 증언과 증명 입니다.
그 쪽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오늘날 옛 조선의 강역을 중국이라고 왜곡하고 있으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것들이 역사의 왜곡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 입니다.
들어내 놓고 말을 하지 못하지만 지금 중국 인구의 대다수는 옛 조선의 백성 들이었습니다.
귀중한 조언을 해준 한 분의 말씀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말씀과 그 맥락을 같이 합니다. 우임금의 수토는 서양의 침략으로 사라졌다. 중화를 옮겨와 지킨것은 고려와 조선 이었다.
지금의 중국은 조선과 옛 중화를 모두 합친 것으로 이해해야 되지 않겠는가라고 말 입니다. 그리하여 지금 중국의 국명은 중화 인민 공화국이다.
우리 역사인 조선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러한 주장은, 매우 불쾌하고 괘씸하며 애석하고 가슴아픈 일이나, 이러한 것이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 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전통과 선조의 역사를 소중히 생각하고, 이어가고 있는 현지의 많은 후손들이 옛 역사를 잊지않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드릴 말씀은 많으나 차차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어느 사이 계절은 바뀌어 겨울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추워지는 날씨에 문무 선생님 늘 강건 하시고, 댁내에 항상 평안과 건강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귀한자료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의 자료를 보면 한편으로는 옳은것같기도하고 다른한편으로는 장안과의 거리가 넘 멀어서 과연 그곳을 지키며 방어하기까지 가능했었던 일인가? 라는 믈음표가 붙습니다. 대체로 원문과 증거를보면 사실일가능성이 크다고 사료됩니다. 건강하고 따뜻한 겨울나기 바랍니다.
대부여님 안녕 하십니까 ?
대부여님께서 말씀 하시는 논제와는 조금 다르나, 이해를 돕는 측면에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조선 왕조만 하더라도 각 지방의 행정 구역과 그 지역을 다스리는 수령 방백들의 신분은, 우리가 지금까지 역사라고 배워온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로 다릅니다.
왕조실록과 문집들을 통하여 밝혀지는 역사의 사실들은, 반도 땅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 입니다.
고려와 조선에서 주[州]와 목[牧], 이라는 것은 제후의 영토와 같으며, 그 지역을 다스리는 관리는 제후와 같은 신분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조선의 팔도는, 반도사관이 거짓으로 가르쳐온 반도 조선의 팔도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 입니다. 고려와 조선의 한 주[州]는, 지금 한국의 남북을 합친 것 보다도 더 큰 지역이었다는 것이 모두 밝혀지고 있습니다.
주[州] 보다 더 큰 것이 목[牧]이고 목[牧]보다 더 큰 것이 도[道] 입니다. 조선 팔도의 면적은 지금의 중국 대륙보다 더 크다는 것입니다.
왕의 명을 받고 한 도[道]를 다스리고자 지방으로 나가는 방백의 행차는, 그 규묘가 제후를 능가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가 원전의 역사서를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 입니다.
참고가 되시리라 사료 됩니다.
대부여님의 댁내에, 늘 평안과 건강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대부여님, 환국고려>님!
안녕하세요.
저는 환국고려님의 글을 볼 때마다 감탄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기록에 있는 지형지세를 현지에서 찾을 수 있을까 말입니다.
이게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거든요.
과거 수천년 또는 수백년 전의 선인들이, 관리로 임지로 갈 때, 또는 왕명으로 방문할 때 등등으로 그곳 모습을 기록한 것들과 현지 실제의 모습과 같다는 것만큼 증거가 되고, 논거가 되는 것은 없다고 보아집니다.
이건 확고부동한 증거가 되는 일이죠.
아주 쉽게 비교해 봐도, 신증동국여지승람만을 보아도 조선왕조는 반도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여지승람에 기록된 지형지세나 방위, 특산물등을 비교해 보면, 금새 반도조선의 허구를 찾을 수 있음에도, 반도인들은 전혀 동요없이 반도조선을 외칩니다.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말입니다.
특히 액이제사하가 청천강이란 말은 놀라움뿐입니다.
액이제사하에 대해서는 해국도지에서 상세한 설명이 나옵니다.
결국 우랄산맥과 발하슈호와 아랄해등등이 조선의 서쪽 변경지방이다라는 것이 되겠지요.
특히 카자흐 북방지대인 서시베리아분지가 만주(滿洲) 땅이 됩니다. 물론 東西(동서)로 조금 이동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보아집니다. 백두산과 압록강, 두만강등의 국경지대라고 보며, 이런 설명이 가능토록 하는 논거가 됩니다.
마지막 사진의 벨루하산 북쪽에 세워져 있다는 '돌비석'을 보면서, 감개무량합니다.
기원전에 세워졌다면, 수천년 풍상을 겪으면서, 저렇게 당당하게 서있다는 생각에 말입니다.
과연 무엇을 위한 돌비석일까? 정말 궁금합니다.
<지금까지 누구도 해본 적이 없는, 접하지 못했던 어려운 현지답사와 함께 사진을 첨부하여 올려주신 "환국고려"님께, 재삼 감사를 드립니다.>
두 분 모두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