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21, 4)
오늘 복음과 유사한 내용이 불교의 「현우경」에도 있습니다. 부자가 부처 앞에 바친 만 개의 등燈은 밤중에 기름이 다 되어 꺼졌는데, 가난한 노파가 전 재산을 털어 바친 한 개의 등은 꺼지지 않고 계속 불이 켜져 있었다는 고사에서 『빈자일등貧者一燈, 부자만등富者萬燈』이란 표현이 나왔으며, 이는 곧 봉헌의 액수보다 봉헌하는 이의 마음과 정성의 소중함이 중요하다는 우화입니다.
예전 본당신부를 할 때, 교구 사제들과 만남의 자리에서 어떻게 하면 주일 헌금액을 올릴 수 있느냐는 대화 중에 어느 신부님께서 이렇게 자신의 체험담(?)을 말하더군요. ‘여러 방법을 다 활용해봤는데 가장 효과적인 것은 헌금함 앞에 사제가 서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새로운 방법이 아니라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것을 “눈을 들어 보고 계셨다.”(21,1.2참조)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하는 모습을 바라보신 까닭이야 근본적으로 그 사제가 말한 의도와 전혀 달랐으리라 여겨집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의도된 행위이든, 의도하지 않은 행위이든 사람들이 헌금함에 예물을 봉헌하신 모습을 보시면서 유독 그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으신 것을 보고 무척 감동하셨던 이유가 무엇일까, 라고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21,3) 예수님께서 그저 가난한 과부가 더 많이 넣었다고 하신 까닭은 바로 “다른 사람들은 모두 풍족한 가운데에서 얼마씩을 넣었지만, 그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21,4)일 겁니다. 분명 더 많이 넣었다, 는 표현은 헌금액의 액수가 아니라, 그것은 헌금하는 사람이 가진 것에 비례해서 다 넣었다, 는 표현에 담겨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과부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넣었다는 표현을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그 과부가 많이 넣었다, 는 의미는 그녀가 가진 전부를 다 내어놓았다는 상대적인 액수라고 봅니다.
왜 그 과부는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봉헌했을까? 그 과부의 의향을 알지 못하니, 다만 그녀의 의향을 사렙타 마을의 과부의 상황과 견주어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1열17, 8~16) 아무튼 그 과부의 심정은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고 있는 처지에서 자신이 가진 것, 혹 받은 것 전부를 내어놓음에서 그 과부의 처절한 삶의 비장함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내일이 없는, 다만 지금 이 순간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전부를 온전히 다 봉헌하는 그녀의 마음이 아름답습니다. 그녀는 아마도 봉헌 이후는 오직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매달리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빈 손, 빈 깡통뿐일지라도 말입니다. 온전히 아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그녀의 올인All-in 정신이 부럽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이 과부의 헌금, 봉헌에서 예수님께서 미구에 당신의 모습을 보고 계신 게 아닐까, 상상해 봅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자신의 전부를 아빠 하느님과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해 봉헌하실 당신 모습을.
오늘 복음을 보면 분명 주님은 과부를 칭찬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부자를 비난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상대적으로 정성이 부족하다는 뜻은 담고 있지만 결코 비난하신 것은 아닙니다. 사실 현실적인 측면에서 볼 때, 본당에서도 그렇고 연말 이웃돕기 성금도 주로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내지, 정말 부자는 잘 내지 않는다고 봅니다. 물론 대기업이야 성금을 내면 세금 감면이 되기에 내긴 하지만 이는 다 생색이고. 그런데 만일 지갑에 천원밖에 없는 사람이 천원을 다 헌금하는 것과 백억을 가진 사람이 백억 전부를 헌금하는 것 중에서 어느 편이 훨씬 더 쉽겠습니까? 천원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은 액수이기에 내려면 전부 다 넣을 수밖에 없을 것이고, 백억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 중에서 일부인 10억 혹 1억만 내도 많이 내는 것입니다. 이는 곧 백억을 가진 사람이 백억 전부를 내는 것보다 천원을 가진 사람이 자신이 가진 천원 전부를 내놓은 것이 상대적으로 자유롭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면에서 가난한 사람이 참으로 행복하고 자유롭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 편안한 마음이 있기에 쉽게 자신의 전부를 다 내어놓은 것이 아닐까, 싶어서 한편은 제가 가진 게 짐스럽게 느껴지며, 늘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내어놓지 못하고, 전부가 아닌 일부, 전체가 아닌 부분으로 살아간다는 게 조금은 불편해집니다.
오늘의 본당 신부님들은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헌금하는 과부에게 마음을 두시기나 하실까 의문이 듭니다. 헌금 액수가 중요하지, 헌금에 있어서 무슨 질을 따지지는 않을 것이며 그런데 한번 헌금하는 게 아니라 매 주일 헌금을 내야 하는데 이를 어쩌나! 하지만 주일금 혹 교무금이 부담되어 성당에 오시는 것이 불편한 사람이 없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교무금 많이 내고 신축금 많이 내는 신자가 대우받는 교회가 아니었으면 솔직히 좋겠습니다. 신축금 납부 현황표(=납입자 이름과 금액)를 성당 게시판이나 주보에 게시하지 않았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오히려 마음으로부터 예수님을 온전히 살고자 하는 신자들을 더 많이 사랑하시는 사제들이 더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예전 광주 일곡동 수도원에 살 때, 3년 동안 매주 소화자매원(=여성신심장애인 공동체)의 주일 미사를 집전하러 갈 때마다 그들의 봉헌하는 모습을 보면서 느꼈지만, 봉헌금 액수와 상관없이 그들의 봉헌하는 모습이 참 좋았습니다. 대부분이 천원 지폐 한장 봉헌하지만 말입니다. 참으로 몸도 마음도 가난하며 소박한 사람들입니다. “주님, 오늘도 가난한 이들의 봉헌에서 오늘 복음의 가난한 과부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하여 주시고, 그 모습에서 참 교회의 모습을 봅니다. 그들에게 당신께서 축복을 내려 주시길 바랍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