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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임하시네
사도행전 2:1-4, 14-21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이다. 오순절 다락방의 성령강림은 유일회적 사건이지만, 역사적으로 성령 체험은 일상적이고 반복되는 산 증거로 나타난다.
성령강림은 영적인 성장과 내면적 성숙을 꾀하면서, 교회 안팎으로 생기가 넘치게 한다. 교회력의 순환으로 보나, 초록이 우거지는 절기로 보나, 이처럼 성령강림절기는 생명의 풍성함을 돕는 기간이다.
우리는 성령강림절기에 성령의 열매를 사모한다. 저절로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감동과 은혜로 내 삶의 변화가 있어야 가능하다. ‘사랑, 기쁨, 화평, 인내, 친절, 선함, 신실, 온유, 절제’(새번역, 갈 5:22-23)라는 열매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성령은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현재진행형으로 일하신다. 늘 구호처럼 반복하고, 주술처럼 강요하는 그런 성령이 아니다. 나를 변화시키고, 교회를 새롭게 하며, 역사를 변혁하시는 성령의 강력한 증거이다.
영이신 하나님과 날마다 동행하는 삶의 모습은 초대교회가 보여주듯 진실한 제자의 길을 통해 오롯이 드러난다. 바로 ‘변화, 새로움, 각성, 용기, 공감, 연대, 생명, 헌신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평화’이다.
오늘과 평생, 일용할 양식을 구하듯 성령의 내주(內住)하심과 충만(充滿)하심을 구하는 일이 일상적 간구이길 바란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갈 5:25).
1)
사도행전 2장에서 소개하는 성령이 임하신 날은 본래 오순절이란 유대인의 명절이었다. 오순절은 유월절이 지난 후 50일 째 되는 날이다. 49일 다음 날이라고 하여, 칠칠절이라고도 불렀다. 오순절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은 날을 기념한다.
그런 오순절에 성령강림 사건이 있었다.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다면, 이젠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율법이란 문자가 아닌, 하나님의 영이란 사랑을 주셨다. 성령강림이 있던 날, 그 오순절 명절에 예루살렘에 큰 무리가 모여 들었다. 절기는 사람들을 들뜨게 하였다.
그날 예루살렘에 머물던 120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약속을 기다렸다. 그들은 이미 십자가 아래에서 실패한 사람들이지만, 예수님의 부활로 비로소 평화와 용기를 얻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안 계신 상황이다. 여전히 두려움, 연약함, 혼란스러움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성령의 강림을 경험하였다. 본래 성령강림은 예수님께서 생전에 하신 약속이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 16:13).
부활하신 후에도, 승천하시기 직전에도 말씀하셨다. 이를 땅 위에 계실 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라고 하여, ‘지상명령’이라고 부른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제자들은 약속된 성령을 기다렸다. 그들은 성령이 어떤 모습으로, 어떤 현상으로 임할지 전혀 알지 못하였다. 다만 서로 일치한 마음으로 기도할 뿐이었다. 그리고 오순절이란 명절이었다. 그날 아침 9시에 120명의 제자들이 함께 경험한 일을 보라!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2).
오순절 성령은 제자들에게 마치 불꽃같은 모양으로 보였다. 하나님의 성령은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3)로 나타났다. 성령의 불은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임재하신 역사를 보여준다. 모세가 떨기나무가 타는 광경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한 것이 좋은 기억이다.
성령은 불꽃으로 임하셨다. 화가 엘 그레코는 ‘성령 강림’이란 작품에서 각 사람마다 머리 위에 피어난 불꽃을 강조하여 그렸다. 하나님의 영은 집단적인 경험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저마다의 체험으로 함께 하심을 인상 깊게 묘사한 것이다. 사도 바울도 성령을 불꽃으로 빗대어,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살전 5:19)고 하신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다른 언어로 말하였다. 오순절 명절을 맞아 멀리 외국 15개 나라에서 찾아온 디아스포라들이 그들을 보고 놀랐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4).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갈릴리 출신이었는데, 그들이 자유롭게 말하는 방언을 외국인과 다름없는 자신들의 귀에도 들렸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하나님의 영은 막힌 담을 열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소통시켰다.
2)
성령강림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심지어 성령을 받은 사람들의 행동을 보고, 이 사람들이 술에 취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였다.
그때 베드로는 의심하는 사람들을 향해 전후사정과 그 이치를 설명하고 나섰다. 베드로는 지금이 아침 9시인데 어찌 술에 취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성령강림에 대해 설교한다.
본래 학식이 없던 베드로는 성령의 감동으로 담대히 증언하였다. 이제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는 눈이 열렸다. 담대하게 모든 이치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사도행전 2장의 베드로의 설교는 부활 이후 복음의 핵심을 담은 최초의 설교이자, 가장 복음적인 설교의 표본이다. 베드로는 성령강림을 경험한 후, 그 모든 혼란스러운 상황을 모두 정리하였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언하면서, 선지자 요엘의 예언을 인용하였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17).
요엘의 예언은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 예언이 실현되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유대인들은 지난 수백 년 동안 우리는 하나님이 이 역사에 개입하실 그 날을 꿈꾸어 왔다. 선민, 유대인들은 특별한 명예와 특권을 지닌 민족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믿었고,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언젠가 하나님이 이 역사에 간섭하실 것이다.
베드로는 성령강림의 증거를 본 후, 드디어 예수 안에서 그날이 온 것이라고 외쳤다. 하나님이 역사에 개입하시는 날, 곧 주의 날이 왔다고 선포하였다. 보라, 예수는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신 하나님이시다.
예전에 하나님의 영은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와 같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머물렀다. 그러나 선지자 요엘은 하나님의 영이 만민에게 임하실 그날이 바로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날임을 예언하였다.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17)
이제 가장 평범한 사람도 하나님의 영을 경험 할 수 있다. ‘너희의 자녀들, 너희의 젊은이들, 너희의 늙은이들’ 모두 예외는 없다.
이제 사람들은 누구나 거룩한 하나님의 영을 자신의 몸에 지닐 수 있게 되었다. 자녀, 젊은이, 늙은이는 성전에서 가장 소외된 사람들이다. 신앙의 중심에서 제외된 사람들이다. 그런데 가장 보잘 것 없는 그들까지도 예언을 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꿀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눌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이신 하나님을 따라 사랑하며 산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은 그의 삶 안에 하나님의 영을 지닌다.
처음부터 사람은 그 입김으로 창조되었고, 생명을 얻었다. 그러나 인간은 범죄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영이 사람들에게 임하셨다. 사람들은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하나님의 입김인 성령에 사로 잡혔다.
성령의 내주하심! 이제 하나님의 영을 받아들인 사람은 새로운 생명의 차원을 살게 되었다.
3)
베드로는 담대한 확신을 갖고 외친다. 성령은 우리에게 큰 능력이 되신다. 성령은 놀라운 “선물”(행 2:38)이며, 누구나 원하기만 하면 성령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 이미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그와 함께 하신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21).
영은 영으로 통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예배할 때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바벨탑 사건과 대비하여 비교할 수 있다. 바벨탑은 불통을 상징한다. 사람들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혼란을 겪고, 흩어졌다. 그러나 오순절에 사람들은 성령을 받고, 서로 말이 통하였고, 일치하는 경험을 하였다.
하나님과 통하는 길이 열렸다. 제자들 간에 서로 통하여 하나가 되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벽이 허물어졌다. 자유인과 종, 남자와 여자, 헬라인과 야만인,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소통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소통을 가능하게 한 것이 성령이다.
이처럼 그리스도교는 소통의 자리에서 탄생하였다. 그런데 흔히 교회 다니는 사람을 가리켜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정말 그런가? 성령을 강조하는 교회일수록, 세상과 역사와 벽을 쌓는다. 오히려 세상과 불통을 조장한다. 독선적이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이 아니다. 불통은 예수님이 원하는 교회의 모습이 아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답답함이 아니라, 성령은 남을 이해하고, 감동을 주는 소통의 역사를 이루신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권면한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갈 5:16).
이러한 성령을 구하는 사람마다 내 안에 성령이 내주하심을 믿으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들이라. 우리가 연약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영적인 성품인 ‘영성’을 지니고 있다. 교회에서 자주 사용하는 ‘신령한’, ‘영적 깊이’, ‘영적 능력’이란 낱말들은 모두 그리스도교의 신비함을 드러내는 영적인 속살이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성령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다. “성령을 믿사오며.” 자주 성령의 충만, 성령의 열매를 말한다.
마틴 루터가 쓴 가정교육용 <소요리문답>에 보면 사도신경에서 고백한 “성령을 믿사오며”에 대해 이렇게 풀어서 가르친다.
“나는 자신의 이성이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믿을 수 있거나 그에게 갈 수 없습니다. 다만 성령이 복음을 통하여 나를 부르시고 그의 은혜로 눈을 뜨게 해 주셔서 올바른 믿음 가운데 거룩하게 하시고 보존시켜 주시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다.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또 마틴 루터의 고백처럼, 내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나의 그리스도임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은 내 지식이나, 상식 때문이 아니다. 내 이성이나 능력 때문이 아니다. 내 안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영, 성령 때문이다.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에 속한 사람’으로 산다. 하나님은 내게도 성령을 주시기로 약속하셨다.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17).
성령은 나를 변화시킨다. 성령은 나를 성장시킨다. 성령은 내게 비전을 품게 한다. 환상을 보는 자로, 꿈을 꾸는 자로 변모시킨다.
성령이 나를 도와주신다. 약함 가운데 위로하시고, 답답함 속에 감동을 주시고, 내 안에서부터 새로운 능력을 주신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강하고, 사랑이 넘치고, 신실한 사람으로 만드신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살게 하신다. 불가능의 가능성을 신뢰하라!
성령은 초대 교회 위에,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먼저 놀라운 능력을 주었다. 약속된 성령의 강림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것이 사도행전과 초대교회가 보여주는 생생한 산 증거이다.
이제 성령께서는 우리에게도 임하셔서 내 삶의 연약함, 두려움, 혼란스러움을 밑바닥에서부터 흔들어 깨우신다. 성령을 향해 마음을 열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충만하셔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생기있고, 거룩한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