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풍
때론 허풍쟁이처럼 자신을 과장하여 포장하고 싶은 욕망에 시달릴 때가 있다. 이는 애정결핍이거나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에서 오는 고립감 또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양에 차지 않을 때 비정상적으로 드러나는 사회성의 결여로 생각되지만, 이는 그저 심리적 추측일 뿐이다. 어쩌면 타고난 성격이 종종 균형감을 잃는 다혈질적인 성향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도 종종 이런 감정에 휘말려 스스로 과대 포장하거나, 그야말로 하잖은 소영웅심에 신경을 곤두세우곤 한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결국 내면에서 독소로 작용하여 수시로 필자를 곤란에 빠뜨리곤 한다. 필자의 이와 같은 고백은 필자가 가끔 무의식적으로 떠는 허풍과 허위에 대한 면죄부를 얻고 싶다는 소박한 반성이지만, 늘 내면을 둘러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요즘 들어 남은 생의 대부분을 참회록을 써야 하지 않을까 하는 강박증세를 앓고 있다. 나의 참회록이 타자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는 부분은 물론 끝내 침묵해야겠지만. 허풍이란 결국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 다른 사람들보다 강렬한 경우에 드러나는 증세로 보이고, 이는 필자 스스로 종종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진인眞人이란 무엇일까? 사전을 찾아보니 참된 道를 깨달은 사람, 진리를 체득한 사람이다. 참되다는 것은 무언가? 거짓이 없고 진실하다는 뜻이다. 즉 정직한 사람을 말한다. 가슴이 뜨끔하다. 난 과연 내 삶에 거짓이 없었는가? 가끔 떠는 허풍도 분명 참된 모습이 아니니, 애초부터 난 진인은 아니다. 그렇다면 진인이 되고 싶은가? 道까지 깨닫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거짓 없이 살고 싶지만, 그건 너무 재미없고 지루할 뿐 아니라 그런 그릇도 못 되기 때문에 진인이 되는 것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아니 어쩌면 진인이 되고 싶은 욕망도 허풍의 일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진인은 포기하자. 아니 될 능력도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럼 무엇이 되고 싶은가? 그저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은, 이해받고 이해하고 싶은 그야말로 코드가 맞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고 싶다. 내가 힘들고 외로울 때 언제고 어느 시간이고 전화할 수 있는 친구가 단 한 사람이라도 곁에 둘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하지만 불행히도 난 그런 벗을 두지 못했다. 아니 그런 벗이 되어 주지 못했으니 잘못 살아온 것이 분명하다.
이제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을 그리워하는 필자가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드는 지금은 새벽 3시 30분이 지나고 있다. 이제 무조건 자야 한다. 아침에 일하러 가야 하므로 적어도 스스로의 생계유지는 해야 하므로.
순수와 비순수
어젯밤에는 한국 전위예술의 1세대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무세중 선생님이 나의 조그만 음악회에 오셨다. 선생님은 내가 연주하는 카페에 가까운 거리에 대형 비닐하우스를 짓고 그곳에서 아름답고 젊은 무용가 부인과 단둘이 사신다. 자녀는 없고 얼마 전 간암 말기에서 극적으로 건강을 회복하신 분이다.
공연이 끝난 후 동행한 피아니스트와 그의 친구들과 함께 선생님이 집으로 가서 새벽까지 힘찬 목소리로 막힘없는 달변을 토해내시던 선생님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돌아왔다. 선생님의 연세는 이제 칠순이시다. 그러나 아주 건강해 보이시는 모습이셨고 예술에 대한 그분의 생각들이 잔잔한 충격으로 필자를 집중시킨 행복한 밤이었다. 오늘은 그분이 해주신 이야기 중에서 순수와 비순수에 대해 다시 기억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어제 그분이 하신 많은 말씀 중에서 잠깐 스쳐 간 부분에 불과하지만, 필자에게는 가장 깊은 인상을 준 말이었기 때문이다. 같이 동행한 핀란드에 사는 교포에게 한 이야기이다.
"자네는 순수하지 못해, 그러나 비순수는 순수를 감싸 안는 그릇이라네. 예를 들면 물이 순수라면 그 물을 담고 있는 그릇이나 주전자 같은 것이지"
순수가 꿈이라면 비순수는 꿈을 지탱해 주는 현실, 순수를 순수하게 버티게 해주는 그릇. 그러므로 순수와 비순수는 한 몸이었을 때만이 완성된다는 말일까. 필자는 순수 쪽일까, 비순수 쪽일까? 만약 한 가지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어느 쪽으로 발을 들여놓아야 하는 걸까? 라는 한심한 생각을 하면서 돌아오는 길에 참 오랜만에 커다란 달을 보았다. 도심에 내리는 달빛과 구파발 너머 송추 가는 길목 북한산 자락 선생님의 대형 비닐하우스에서 내리는 달빛은 달랐다. 그 동네에 내리는 달빛은 순수하고 내 사는 동네에 내리는 달빛은 비 순수하기 때문일까. 달빛을 담아내는 그릇이 다르기 때문일까.
며칠 후 독도에서 열리는 무세중 선생님의 공연이 멋지게 펼쳐지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같이 가고 싶어도 뱃멀미가 무서워서 포기했다. 그리고 필자와 종종 함께 공연하는 피아니스트가 재즈로 편곡한 피아노곡 아리랑을 녹음해서 쓰시기로 했다.
이글은 십수 년 전에 써둔 글이다. 시방 무세중 선생님은 팔십대 후반이시고 건강이 안 좋으시다. 세월만 무장무장 간다. 선생님의 쾌유를 빈다.
언어는 본질이 아니다
도道를 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떳떳한 도가 아니요 / 이름을 이름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떳떳한 이름이 아니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命. - 노자, <도덕경道德經> 중에서
사랑을 '사랑'이라고 하면 벌써 사랑이 아닙니다. / 사랑을 이름 지을 만한 말이나 글이 어디 있습니까. / 미소微笑에 눌려서 괴로운 듯한 장미醬薇빛 입술인들, 그것을 스칠 수가 있습니까. / 눈물 뒤에 숨어서 슬픔의 흑암면黑闇面을 반사反射하는 가을 물결의 눈인들, 그것을 비칠 수가 있습니까. / 그림자 없는 구름을 거쳐서, 메아리 없는 절벽을 거쳐서, 마음이 갈 수 없는 / 바다를 거쳐서, 存在입니다. / 그 나라는 국경이 없습니다, 수명壽命은 시간時間이 아닙니다. / 사랑의 존재는 님의 눈과 님의 마음도 알지 못합니다. / 사랑의 비밀은 다만 님의 수건手巾에 수繡넣는 바늘과, 님이 심으신 꽃나무와, 님의 잠과, 시인의 상상想像과 그들만이 압니다.
- 한용운 <사랑의 존재>
道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도라는 언어로 드러내면 떳떳한 도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사랑을 노래하면서도 사랑을 '사랑'이라는 말로 드러내면 이미 사랑이 아니라는 것, 이러한 인식은 도와 사랑이라는 어떤 관념을 나타내는데 각각 '도'와 '사랑'이라는 언어가 그것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는 인식, 곧 언어에는 한계와 결함이 있다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언어가 어떠한 대상이나 개념을 정확히 담아내지 못하는 이유, 혹은 언어에 결함이 있는 이유는 언어가 대상을 가리키는 일종의 기호라는 특성에 기인한다. 한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을 지칭하고 떠올릴 수 있는 기호이며 '도'와 '사랑'이라는 언어도 '어떠한 진리', '남을 좋아하는 감정'을 가리키는 기호이다. 즉 언어는 대상과 개념을 가리키는 기호일 뿐, 대상과 일치하지는 않는 것이다. 결국, 언어는 대상과 개념과 본질을 그대로 담아낼 수 없다는 본질적인 결함을 지니게 된다.
이 글은 대학입시 논술 문제와 그 모범답안을 작성해 본 것이다. 언어로 상처받고 속이고 언어를 절대 신봉하고 과잉된 감정이 과잉된 언어로 포장되는 작금의 문장들을 읽으며, 다시 한번 정리해 보자면, 언어는 본질적으로 믿을만한 게 아니다. 그저 근사치에 아니 본질의 근사치에도 못 미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언어는 믿을 수 없다는 진리'도 결국 언어로 설명 혹은 묘사할 수밖에 없다는 이 기막힌 아이러니! 그래서 나는 오늘도 시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