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겨울인가 보다.
채찍처럼 매서븐 탄천 똥바람에 모가지를 자라처럼 잔뜩 웅크리고 길을 걸었더니 느림보
리무진에 탑승을 하고 나서도 한참동안 굳었던 몸이 풀리지 않는다.
성애 낀 차창 밖으론 언제 보아도 낯이 익지 않은 고속도로변 풍광들이 무삼히 지나 갈 따름이고
이제 집을 떠나 입산을 하는 순간이 다가 오고 있으니 속세의 알음알이는 떨구어 버려야겠다.
법주사를 수호하듯 묘봉 문장대 천황봉 등의 우뚝 솟은 호위무사들이 마치 삼태기 처럼 보호막을 편 듯한
속리산은 보은에서 말티재를 경유하여 법주사를 참배하고 오르는 오리지널 루트가 있는데 이를 피하고 구태여
문장대 후사면에 있는 상주 화북분소를 자주 이용하는 이유는 하산길 에서야 겨우 그 속내를 알게 된다.
노 무현 정권 때 국립공원 입장료는 없애 버렸지만 사찰 출입을 위한 문화재관람료가 성인은 물경
4,000원 이라고 매표소에 적혀 있더만요. 구렁이 알 같은 참이슬 한빙이 술집에서 사천원 하져.
응달에 위치한 화북분소는 산과 길이 온통 얼음으로 꽝 꽝이다.
산행 초반부는 안즉은 괜찮으려니 하고 아이젠을 신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조심 조심 걷노라니 어느새
뒤를 따라 와 나를 오이꼬시하던 경자 언니와 외다수 등등께서 구러다가 털석 주져 앙거 지난 번에 깨고 남은
한쪽 다마 마져 깨지면 살아도 죽은 목숨 이라며 한 걱정을 하며 지나들 가신다.
데크 주위로 눈을 뚫고, 아니 잔설을 어깨에 이고서도 조금도 힘 들어 하지 않는 산죽이 적막한 겨울산의
풍광에 참으로 신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라 나도 모르게 시 한수를 읊어 본다.
다마는 내 다만데 절머서 부터 도무지 주인 말을 듣지 않더니
이제는 늙은 다마가 되더니만 자라처럼 웅크리곤 출입마져 거부한다.
철옹성에 들어 앉은 내 다마는 깨질리가 만무하건만
무삼히 희롱하는 경자 언니의 덕담에 내 가슴은 껌정 구두약이 된다.
상기 시는 제가 현대문단에 처음으로 등단할 적에 올렸던 글 입니다. 흐 흐.
문장대를 200 미터 앞 둔 너른 안부엔 기존의 휴계건물을 멸실해 버리고 밥상이 겸비 된 벤취가 여럿
놓여 있는지라 이곳에서 점심공양을 하겠노라고 여럿 느림보님들과 옹기 종기 모여 앉았다.
따숩은 햇볕에도 불구하고 약간씩은 불어 오는 겨울 바람이 거슬려, 지난 번 송년 산행 때 강 대장님이
나누어 준 비닐 쉘터를 머리 위로 차양막 처럼 두르니 여간 정겹지가 않다. 문장대 쪽으로
보이는 나무들은 흰 상고대를 섬처녀 웨딩드레스 처럼 예쁘고 두르곤 우리들을 반겨 주는 듯 하다.
속리산이냐 설악산이냐 어느 산을 가는 것이, 삼겹살이냐 비프 스테이크냐 어떤 음식을 저녁상에 올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들 한다. 누구와 함께 어느 산을 가느냐?
촛불 밝힌 소담스런 저녁상을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중요 하단 것이다.
고운 향내가 나는 느림보 벗님들과 하는 산행과 산상 점심은 행복 그 자체일 따름이다.
신선대를 경유하여 세심정으로 하산하는 일부와 신선대에서 비로봉 능선을 타고 최고점 천황봉을 찍고
다시 내려 오는 선두팀의 활기 찬 보행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 보곤 염 고문님과 난 문장대 고개마루턱에서
세심정으로 하산하는 오리지널 루트를 선택한다.
자박 자박한 눈길을 밝으며 법주사 경내로 들어 가니 멀리서 부터 황금빛 청동대불이 눈에 들어 오는지라
경건히 고개 숙여 반배 부터 올려 본다.
당초의 법주사 청동대불은 물자가 부족한 일본놈들이 왜정 시절 파손해 버려 이후 콘크리트로 새로이 조성
했다가 시일이 지나면서 여기 저기 문제가 생겨 지끔의 청동대불로 새로이 모셨는데 점안식을 하던 날
부처님 뒷편 하늘에 오색이 영롱한 무지개가 떠 오르는 이적을 방송국 카메라가 잡아 전국에 방영해 주었던
기억이 나는데 현재는 청동 위에 개금불사를 한 상태인지라 옆에 계시던 염 고문님께서 구태여 돈을 들여
황금빛으로 개금불사를 하는 연유에 대해서 의아해 하신다.
원래 종교가 성립하기 위해선 첫째 교주와 교리 그리고 신도가 있어야 되고 교주의 말씀 즉 교리는 시대에
따라서 그 의미가 변하지 않아야 된다고 한다. 교리나 복음 그리고 진리는 변하지 않아야 되므로 금이나
금강(다이아)에 많은 의미를 두기도 하고 어느 분의 말씀에 따르면 수행을 많이 하여 득도의 경지 즉 부처가
되는 성불의 순간에 짙은 진금색을 띄기 때문에 불상을 황금빛으로 조성한다고들 하는데 저 역시 정확한
의미는 잘 모르겠습니다. 교주의 말씀이
시대가 바뀌면서 전혀 생소한 얘기로 흘러 버려 종교로서의 위상이 흔들려 버린 종교가 이미 종주국인
중국에선 누구 하나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유교가 대표적이다.
중국에선 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이 많은 유교 유적지를 이미 훼손 했는데 흐미나 한국과 국교를 정상화 하고
나니 한국땅에서 곡부에 있는 공자묘로 개떼처럼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지 멉니껴? 돈이 벌리는 일인지라
중국 정부에서 부랴 부랴 유교 유적지를 재정비 했었다고 하는데 한국땅엔 유건을 쓰는 유도회라는 종교
모임이, 중국땅에선 사문화된 유교를 여태도 신봉하는 단체가 있다.
사대주의 사상이 여태도 조선 민중의 혈관을 타고 흐르고 있다.
정확히 1980년 여름 이였다.
참으로 무시 무시한 장대비가 청주를 비롯한 충북 일대를 물바다로 만들었던 적이 있었는데 속리산이 있는
이곳 보은은 밤새 내린 비로 우선 전화 같은 통신이 두절되어 버렸고 도청소재지인 청주로 가는 도로가
유실되어 어느 용기 있는 공무원이 밤새 빗길을 엎어 지고 자빠 지며 걸어 다음 날 새벽에야 피해 상황을
겨우 도청에 알려 급거 현장으로 달려 간 도지사 부인을 비롯한 여러 분들이 보은읍 전체가 몽쨩 물에 잠긴
처참한 현장 앞에서 대성통곡을 할 따름 이였다고 한다. 보은읍을 지나 가는
보청천의 콘크리트 교량들이 마치 어느 거인이 장난으로 공기놀이 한 것 처럼 강바닥에 어지러이 널려 있었던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보았는데 차후 이바구는 당시 충북도청에 근무 하던 어느 공무원으로 부터 직접 들었던
얘기다.
다음 날 보은에서 가장 피해가 심한 마을로 구조 헬기가 착륙하기 바쁘게 한 중년의 남자가 헬기 발통을 부여
안고는 거의 실신할 정도로 울어 제키길래 사유를 물어 보았더니
하천이 범람하여 마을이 점차 물에 잠기게 되자 통신이 두절된 상태에서 누군가는 이 난국을 탈출하여 구호를
요청해야 되는데 누가 이 깜깜한 밤중에 저 물바다를 헤쳐 나가느냐가 문제인데 마을주민들이 잠깐의 회의
끝에 내린 결론이 지서장(파출소장) 네 놈이 바지 벗고 강을 건너란 것이다. 평소에
짜바리(경찰) 모자 쓰고 개폼 잡으며 으시댔다는 것이 빌미인데 강에 뛰어 들면 오분이 되지 않아 물귀신이
될 터이고 못 가겠다고 버팅기니 담박에 몽둥이 뜸질이 들어 오더란 것이다. 허휴 밤새
몽둥이로 복날 개 잡듯이 지서장을 팼으니 그 인간이 헬기 발통을 부여 안고 대성통곡할 수 밖에...
조선 민중이 관에 대한 정부에 대한 나라에 대한 불신이 최고점에 이르게 된 사건이 바로 임진왜란 때 절대
도망가지 않겠다고 백성들에게 허언을 한 선조가 그 오밤중에 장대비를 맞으며 줄행랑을 쳤고 화가 난
민초들이 지체없이 조선궁궐에 난입하여 불을 싸 질러 버린 바로 그 사건 이라고 한다.
세상 뒤집어 지면 평소에 착해 보이던 그분들도 팔뚝에 완장 하나 두르곤 죽창으로 이놈 저놈 쑤셔 댄다고
하는데 대한민국 구중궁궐은 어이타 붉은 빛으로 물이 들어 가는지 말린 무화과 처럼 쬬구라 들은 내 다마가
마냥 무서버서 고개만 숙일 따름이다.
탄천변에서 다마치기 명수 돌삐 드립니다.
첫댓글 문장대 오르며 심상찮은 바람소리에
신선대까지 가려던 계획을 바꾸어
바로 하산하리라 마음 먹었습니다
예상대로 휘파람 소리를 내며
하얀 눈을 날리던 속리산 바람..
비닐쉘터 안에서 점심을 해결하니
포근하니 좋았고
더 정다워진 느림보님들 ㅎ
첫번째 사용치고 아주 유용했습니다
전국 사찰중 가장 유명한 속리산 법주사를 지나며
이번에는 돌삐님께서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실까 기대하고 있었는데
역시 제게 유익한 얘기였습니다
역사적 사실과 사담속에
건질건 건지고?버릴건버리고..ㅎ
돌삐님 새해에도 느림보 개근하셔서
재미있고 유익한 이야기 많이 들려주세요
팬들을 실망시키시면 아니되옵니다 ㅎ
난 넘어려워요 몬말쌈인지 ㅠㅠ
고수가 되셔야 이해가 갑니다
기억력과 글쓰기 박학다식 모든걸 다갖춘 돌삐님을
느림보 주간지 주필로 임명해 산행이야기를" 돌삐의
산행이야기"로 함이 어떨런지요
좋은 생각이십니다.
돌삐님이 승락하신다면요..ㅎ
순진한 척 내숭 떠는 저 분이 지난 번 내장산 단풍 구경 갔을 적에
조수석 맨 앞자리에 앉았던 그 여성분 이신데 안동말로 어리넉달이고
서울말로 어팔당 이라고 하여 어리숙해 보여도 당수가 팔단인 강호 지존의 고수
로서 저 정도 남정네 열두어넘 정도는 왼손 빗 나간 반방으로 깨끗하게
마무리 한답니다. 어휴 가랑이 사이로 들어 오는 니킥은 살인병기 그 자체입니다.
작가 박 범신님이 고댜꾜 다닐 적에 은사님 이셔서 외모와는 달리 청초롬한
산행기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쓴답니다. 그렇다고 외모가 꼬옥 멋하다는 건
물론 아니지만 요즘 느림보에 잘 나타 나지 않으니 카페가 조용한 건 사실입니다.
어느 분 말씀이 안 보면 궁금하고 눈에 띄는 그 순간 잇빨이 갈리는게
에쉴리 여사님이져. 흐 흐.
다마치기에도 달인은 따로 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