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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 고구려비는 고려(고구려) 장수태왕의 한반도 장악과 함께 신라가 고려(고구려)의 종속국이였음을 증명하는 소중한 고고학적 사료입니다.
[자료]중원고구려비는 충청북도 중원군 가금면 용전리 입석(立石)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1979년 4월 5일, 충주의 몇몇 문화재애호인들의 모임인 예성동호회 회원들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학술 조사를 거쳐 국보 제205호로 지정되었다. 조사 당시 비는 입석마을 어구에 세워져 있었는데, 주민들은 마을을 지켜주는 선돌(立石)로서 모셔왔었다.
중원고구려비는 사각 돌기둥 모양으로, 흡사 집안의 광개토대왕릉비를 축소해 놓은 듯하다. 비의 재질은 견고한 화강암이고 글씨도 예서풍으로 광개토왕릉비의 글씨체와 같은 분위가를 풍긴다. 비 자체는 큰 손상없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나, 비문은 심하게 마멸되어 판독이 쉽지 않다. 아마도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에 시달리면서 자연 마멸이 이루어진 듯하며, 비의 뒷면과 우측면의 경우에는 사람들의 손을 타게 되어 더 심하게 마멸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뒷면과 우측면에서도 글자를 새긴 흔적은 확인되나, 글자를 거의 판독해낼 수 없는 지경이다.
이 비는 4면에 모두 글자를 새긴 4면비(四面碑)로서 글자는 앞면이 10행으로 각 행 23자씩이고, 한쪽 옆면은 7행 23자씩이며, 또 한쪽의 옆면은 6행이 분명한데 뒷면은 대략 9행 정도로 추측된다. 글자는 대략 400여자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 200여자만 확인되고 있다. 이렇게 확인되는 글자가 반이 채 안되는 사정인지라, 이 중원고구려비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비의 발견 직후부터 바로 논란에 휩싸였던 문제는 비문이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나느냐 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었다. 또한 중원고구려비가 언제 세워졌는가도 중요한 의문으로 남고 있다. 그러면 일단 그나마 판독이 가장 많이 이루어지는 앞면을 중심으로 그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자.
먼저 오른쪽면에는 5월의 회맹에 대한 준비에 대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 앞면과 왼쪽면의 해석 가능한 내용은 이러하다.
"고구려 태왕(太王)이 신라 매금(寐錦)과의 회맹을 위해 동쪽으로 왔다. 신라매금과 고구려 태자 공(共) 등이 태왕을 맞아 들였고, 태왕은 교(敎)를 내려 신라 매금과 그의 신하들과에게 의복을 하사하였다. 6개월 뒤인 12월 23일에는 5월의 회맹에 참여하였던 고구려측 관료와 신라측 관료가 모여서 그 회맹에서 이루어진 협약에 의해 3백인을 모으는 활동을 진행하는 주체가 되고, 이를 진행시키는 실질적 책임자로 고구려의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 3인과 신라측의 衆人(지방세력)이 활동하였다. 그리고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에 고추가(古鄒加) 공 군대와 고모루성(古牟婁城) 수사(守事)에 의한 사건이다."으로 비문은 종결된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중원고구려비의 건립 시점은 회맹이 있었던 449년의 이듬해 무렵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는 그 동안 고구려에 종속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던 신라가 그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적극적으로 움직이던 시기였다. 그래서 450년 이후 양국관계는 악화되어 적대적 관계로 변화하게 된다. 비문에 보이는 5월의 고구려왕과 신라왕의 회맹은 신라의 이탈을 막아 보려는 고구려의 적극적인 외교전략에서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구려의 이러한 의도는 실패하였다.
이듬해인 450년에 고구려의 변경의 장수가 살해되는 충돌이 일어났으며, 이에 고구려는 비문에 보이는 바와 같이 고추가 공에 의한 무력 시위를 벌였다. 양국의 관계가 본격적인 군사 충돌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나, 신라가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것은 돌이킬 수 없었다.
중원고구려비는 이 시점에서 과거 고구려와 신라가 맺고 있던 주종관계를 과시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그리하여 이를 잘 보여주는 고려 태왕과 신라 매금의 회맹을 시작으로하는 중원지역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기술한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비문은, 오히려 비문이 과시하고자 하는 시대의 종언을 보여주는 상징물이 된 것이다.
비문의 내용에서도 다른 자료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가 신라를 ‘동이(東夷)’라고 칭하면서 종주국으로서 의복을 하사했다는 것은 중원고구려비에서만 나타난 사실이다. 또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란 직명에서 신라 영토 내에 고구려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음은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 관등조직의 정비과정을 이해하는 데 많은 시사를 얻을 수 있으며, 고구려에서도 이두식(吏讀式)표기가 사용되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결국 중원 고구려비에서 나타난 사실은 오랫동안 신라군의 영내에 고구려군이 주둔하고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일본서기'에서도 ‘웅략(雄略) 8년, 즉 장수왕 52년(464년)이 정병 100인을 보내어 신라를 지키도록 하였다.’ (중략) ‘고구려왕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내의 유성(流城)에 주둔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고구려가 광개토태왕에서 장수태왕까지 근 100여년간 신라를 점령하고,왕까지 교체할 정도로 신라의 모든 부분에서 직 ․ 간접적으로 통제를 하고 있었다는 증거로 보여 진다.뿐만 아니라 비문의 내용은 광개토호태왕비의 나와 있는 하 평양에 대한 기록, ‘백잔위서 여왜화통 왕순하평양(白殘緯誓 與倭和通 王巡下平壤)’을 뒷받침 한다. 황해도 대방땅을 놓고 백제와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던 중에 고구려 고국원왕이 전사한 장소가 바로 이 하평양성이다.
광개토태왕과 장수태왕 시기에 북한의 평양은 고구려의 수도가 아닌 한반도 통치를 위한 중심지라고 봐야 한다. 광개토태왕 시기에 고구려 수도는 집안이고, [요사/지리지]기록에 의거하여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은 요양이다. 북한 평양천도는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 안전한 한반도 평양으로 천도하여 고구려의 멸망과 함께 했다.
단군조선의 고토와 홍익인간 정신으로 민족을 통합하겠다던 고추모의 다물(담로)정신은 마침내 KOREA중심의 세계강국를 건설하였던 광개토태왕 시기에 실현되었다. 그리고 고구려인들은 영토를 크게 넓히고 백성들을 배 부르게 만들고 문화를 발전시킨 광개토태왕을 '호태왕(좋고 큰 왕)'으로 높이 칭송했다.
동방을 환하게 비추던 태양이였던 단군한국의 영토(동아시아)와
정신을 모두 회복하겠다(다물)는 고려(고구려)는 스케일이 달랐다
김춘추는 연개소문이 3국 연합군으로 당나라를 정벌하여 지나대륙을 3등분하여 연정하자고 간곡히 제안했으나 거부하고 당나라의 개가 되어 고구려.백제를 공멸시키는 방법까지 당나라에게 알려 주며 앞잡이 노릇을 했던 것이다.
신라입장에서야 기뻐할 일일지는 몰라도 이후 우리 민족사와 영토는 지나대륙과 아시아 바다를 상실하고 축소되었으며 당당했던 기상과 기운은 서서히 움추려 들면서 신라세력이 고려.조선의 권력을 장악하면서 소중화 사대주의와 함께 눈치보기와 뇌물비리정치로 몰락하고 말았으며, 결국에는 일제에 국권을 강탈당하고 민족분단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신라의 김춘추는 자신의 개인적 원한(딸의 죽음에 대한 복수)을 갚기 위하여 오직 백제를 멸망시키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들은 큰 대의를 그르친 것이다. 임진강이남의 통일이 어디 통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중국대륙을 호령하던 신시배달국 치우천왕의 기백을 이어 받은 사내 대장부 연개소문을 생각해 본다. 연개소문은 당 태종 이세민의 침략을 격퇴하고 추격하여 장안성에 입성하여 당태종으로부터 항복을 받아 내고 산서성과 하북성 등 지나영토를 받아낸 만세의 쾌걸이다.
연개소문은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고구려로 온 김춘추에게 백제도 동의했다면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환단고기/고구려국본기]"당나라 사람들은 패역하기가 짐승에 가깝습니다. 청컨대 우리나 그대들은 반드시 사사로운 원수를 잊고 지금부터 3국은 백성들의 뜻을 모으고 힘을 합쳐 곧바로 당나라 서울 장안을 쳐들어가 도륙한다면 당나라 괴수를 사로 잡을 수 있을 것이오! 전승 뒤에는 영토을 분할하여 연정을 실시하고 인의로써 함께 다스릴 것을 약속하고 서로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영구준수의 계획으로 함이 어떻겠소? 라고 하며 연개소문이 재삼 권하였으나, 김춘추는 종래 듣지 않았으니 애처롭고 가석할 일이었다. "
다물은 우리 한민족의 본래 어진 성품과 영토를 회복하는 민족비젼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 주고,침략과 불의를 용서치 않았으며,양보하고 협력했다"
조선말 다산 정약용을 비롯하여 실학자들은 조선의 소중화사대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지나국으로부터 탈피하여 자주주권적인 국가가 되야 한다고 생각했던 정치인들이다. 실학자들의 고대사에 대한 인식 또한 마땅히 소중화 사대주의 사관에서 탈피하여 민족주체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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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민족사에 있어 신라가 문제지요 ㅠㅠ 이것 또한 민족의 운명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