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부부싸움(2024.8.16)
부부싸움과 어머니?
대기업의 아울렛이 들어선 장유 신문지구에서 마찰교를 지나면 외가인 칠산 동네이다. 마찰은 낙동강 지류인 조만강을 건너기 위해, 양 강언덕의 말뚝에 묶은 로프를 나룻배 위에서 길손이 당기며 건너던 나루터였다. 또한 녹산수문(綠山水門)이 있는 명지시장에 서김해, 주촌과 장유 사람들이 생필품을 사고팔려고 통통배를 타던 출발점이었다. 이제 포장도로에 다리까지 놓여 옛 정취는 사라지고, 줄어든 강물 위로 무성한 갈대와 수초들이 지난날을 아는 나에게 할 말이 있는지 나를 부르는 것 같다.
중학교 1학년 때 아버님은 40대 초반이고, 열일곱에 시집을 온 어머님은 30대 후반의 아줌마였다. 친정 나들이가 쉽지 않던 시대에 어머님은 일찍 돌아가신 외할머님의 기제사를 모시려 외가에 나를 데리고 갔다. 제사 다음 날 이모들과 속닥이다 시간차를 놓쳐, 외갓집서 장유 버스 정거장까지 걸어갈 일이 생겼다. 나의 걸음으로는 아무리 빨라도 한 시간이 넘는 거리였다. 추운 겨울에 나룻배의 젖은 로프를 당겼으니, 손이 시려 호주머니에 넣은 채 나는 걷고 있었다. 뒤에서 걷던 어머님이 계속 한숨을 쉬며 중얼중얼하며 왔다. 걷는 속도를 어머님과 맞추려고 나는 잠시 기다렸다. 며칠 전 할머님과 의사소통이 않되었던 일로 답답해하시는 줄 알았다. 나를 의식하지 않고 어머님은 표정이 굳은체 계속 걸었다. 조금 후 옆에서 걷는 나를 보며, “얘야! 네 아버지가 ...” 하고는 그만 말을 끊었다. 내가 무슨 뜻인지 하는 표정을 짓자, 어머님은 ‘괜한 말을 했구나’ 하는 얼굴로 다시 걷기만 하였다.
말없이 모자가 버스 정거장 쪽으로 걸어가던 중, 주빗주빗하던 어머님이 갑자기 “사실 네 아버지가 요즘 바람을 피우는 것 같아” 하지 않는가. 어린 아들에게 이 말을 하기 전에 얼마나 망설였을까. 하소연할 사람조차 없었던 어머님은 또 얼마나 답답하였을까. 다시 불편한 표정으로 “네 아버지가 왜 속을 썩이는지 모르겠다”면서, “너희들 학교도 보내야 하고, 동네 부끄럽게 말이다”하며 아버님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었다. 나는 속으로 ‘남자가 그럴 수 있지’하고 생각하면서, 겉으로는 어머님을 위로한답시고 불쑥 “아버지가 왜 그러셨지...”하고 반응을 했다.
그러자 갑자기 어머님이 정색을 했다. 그리고는 “이일에 너는 신경쓰지마라” 하는 게 아닌가? 순간 나는 갑자기 혼란스러웠다. 지금까지 아버님이 무슨 외도나 하신 것처럼 그렇게 성토하더니, 내가 관심을 보이자마자 금세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아마 순간적으로 답답한 나머지 어린 아들에게 하소연했던 것이다. 그러나 부부간의 문제를 어린 자식에게 내보이기라도 한 듯 어머님은 자존심이 상했던 같았다. 이후 버스 정거장까지 가면서 어머님도 나도 한마디 말없이 걸었다.
외갓집에서 돌아온 후, 어머님은 형제들에게 아버님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가장’이라는 사실을 더 인식시키려는 듯했다. 부정적인 이야기보다 ‘아버님이 동네에서 제일 부지런하다’는 소문이나, 자식을 키우려고 고생하는 아버님 이야기를 틈만 나면 하였다. 부부싸움에 대한 발설로 자식인 내가, 아버님의 권위를 무시하는 ‘지휘존중(指揮尊重)의 철회(撤回)’가 일어날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이는 성인의 시각이 성장기 자식들에게 선입감으로 보이게 하지 않으려는 배려였으리라. 어머님은 “집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샌다”거나, “사람이 염치(廉恥)가 있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하였다.
아버님을 두둔하는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식사 때도 아버님의 수저나 그릇을 먼저 챙길 뿐만 아니라, 아버님의 음식을 제일 먼저 담고 아버님보다 수저를 먼저 들지 못하게 했다. 아버님이 안 계셔도 항상 자리는 비워두도록 하였으며, 아버님의 옷이나 침구류는 어머님이 직접 챙기면서 정리하고, 신고 다니는 신발도 신발장의 제일 높은 곳에 깨끗이 닦아 올려놓았다. 아버님이 찾을 때 대답이 늦거나 아버님 말씀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당신이 시킨 일을 하지 않았을 때보다 더 화를 내었다. 이처럼 ‘위엄있는 가장이 있어야 훌륭한 가정이 될 수 있다’는 어머님의 철학을 마음에 새기며 우리는 컸다. 그러나 아버님을 오히려 우리가 ‘쉽게 가까이할 수 없는 분’으로 만들어, 아버님께 응석 한 번 부리지 못하고 우리를 자라게 했다.
한겨울 새벽 아버님은 부엌 솥에 물을 끓여 어머님이 밥할 때 온수를 사용하게 했고, 찬밥을 싫어하는 아버님을 위해 삼복 더위에도 더운밥을 해드렸다. 이렇게 금슬 좋기로 소문난 분들이지만 사소한 일로 다투기는 끝이 없었다. 우리들 모르게, 혹 알더라도 관여할 틈을 주지 않게 묘하고도 기술적인 부부싸움을 하였다. 시부모를 모시는 일부터 가문의 전통을 지키는 일, 대가족제도 내에서 길흉사 뿐만 아니라 자식 교육 문제까지 갈등이 왜 없었겠는가. 나는 한 참 뒤에야 아버님에 대한 어머님의 깊은 사랑을 깨달을 수 있었다.
부부싸움은 남들 입장에서는 입살에 오르내리기에 좋은 화제꺼리이다. 어머님은 남편을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었겠지만, 자식을 위해 연약한 여자의 마음을 노출시키기 보다 참는 전통적인 여인상을 택하였다. 부부의 문제는 부부의 문제일 뿐 자식에게까지 아픔이 건너지 않도록 방둑을 친 분이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의 권위가 조금이라도 손상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하였다. 어머님은 가끔 “부부는 마치 시이소오(seesaw)를 타는 것과 같다”는 말씀도 했다. 당신을 낮추면 가장의 권위가 올라가지만, 당신이 높은 곳에 머무르면 남편은 땅에 서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당신은 언제나 아버님을 가장 높은 곳에 서도록 하는 아내, 자식에게는 어머니의 도리만 평생 솔선한 현모양처였다. 그래서 나는 아버님에게 하는 당신의 모습에서 그것이 당연히 아내의 도리인 줄 알았으며, 당신이 자식을 사랑하는 모습에서 그것이 진정 어머니의 도리인 줄만 알고 평생을 살았습니다.(2020.1.19)
첫댓글 미당 모친은 훌륭한 현모양처입니다.
미당글을 읽다보니 고인이 된 내 아
내의 모습을 보는 느낌입니다.
내가 내 아내에게 고마운 두 가지
는 시부모의 감정적인 발언에
단 한번도 불편한 표정을 보이
지 않았다는것과, 자식들 앞에
서 단 한번도 남편의 흉을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부친 모친 돌아가시고 한참 후에 여동생으로터 들은 비밀을 알고. 속으로 남자가 그럴 수 있지 하였으나,
여동생은 그렇지 않고 분노하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세상은 바뀌었고ㅡㅡ
미송의 글이 진솔하고 사실적이어서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