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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여행2 - 로마에서 베네치아 광장을 지나 옛 포로 로마노를 구경하다
지중해 여행 20일째인 5월 12일 몰타의 수도 발레타의 아파트 Valletta Dream Suites
에서 배낭을 메고 나와 발레타 시내를 가로질러 성밖으로 나와서는
트리톤 파운탱 분수 (Triton Fountain ) 를 지나 C 정류장에 가서 X4 버스에 오릅니다.
공항에 도착해 우린 아랍에미리트의 에티하드 항공에서 왕복표를 끊었지만 오늘 몰타에서 로마로
가는 비행기는 코드셰어로.... 이탈리아 국적의 알이탈리아 항공 부스로 가서 보딩패스 발급
수속을 하는데 보안 검색후 몰타와 이탈리아는 셍겐조약 가입국인지라 별도의 출국 수속은 없습니다.
에티하드 EY 2960 (공동 알 이탈리아항공) 은 11시 30분에 출발해 동북쪽으로 날아서 1시간 30분
만인 13시에 로마 서쪽 해안가에 자리한 레오나르도다빈치 공항 1 터미널에 내리는데 9시간
35분 후에 아부다비행 에티하드 항공을 타야 하는지라 기달릴숙가 없으니 로마 시내를 보기로 합니다.
노랑색 Tren 표시를 따라 2층 (우리 식으로는 3층) 으로 올라가 다른 건물에서 편도 14유로
(왕복 28유로) 하는 15분 간격인 고속열차 레오나르도 익스프레스 Leonardo Express
를 타니 13시 38분에 출발한 기차는 32분만인 14시 10분에 로마 테르미니역에 도착합니다.
로마는 과거 2번을 왔는데 소매치기가 극성을 부리니 지하철은 타서는 안되고 버스도 매우 조심
해야 하며 시내 길거리에서도 늘 기장을 늦추지 말아야 하는지라... 로마 테르미니역 광장
에서 택시를 타고는 20여분을 달려서 베네치아 광장 (Piazza Venezia) 에 내려 남쪽으로 걷습니다.
우리 눈 앞에 고대 로마 유적지가 펼쳐지니 바로 “포로 로마노” 로, 여기서 "포로" 란 원래 광장을 의미
하는 말로서, 정치. 산업. 상업의 중심지를 일컫는 말이니, 이 후 역대 황제들이 차례차례 새로운
포로를 만들어 왔고.... 이것을 총칭하여 포리 임페리알리 라고 하니 포로 로마노 라는 이름이 생겼습니다.
포리 임페리알리 거리에 서서 바라보니 저 아래 2천년전의 로마 유적인 저 유명한 포로 로마노가
펼쳐진 모습이 아주 인상적인데.... 그 건너편 언덕에는 흰색의 장엄한 대리석 건물인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기념관 Monumento Nazionale a Vittorio Emanuele II 이 있습니다!
포로 로마노 (Foro Romano) 는 로마 제국 시대에는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로 로마
공화정 시기의 개선식, 공공 연설, 선거 발표, 즉위식 등 국가의 중대사가
열렸으니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포로 로마노에 대대적인 개축 작업을 실시하였습니다.
제정 시기에도 트라야누스 황제가 포룸을 짓는등 몇백년간 로마 제국의 정치적 상징으로
남았으니 전성기에는 제국 전역에서 가장 호화로운 장소이자 로마 문명의 핵심이었고,
수백만명이 이곳을 찾았으니 라틴어로는 '포룸 로마눔(Forum Romanum)' 이라고 부릅니다.
로마 제국이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나뉘어지고 서로마 제국이 붕괴하기 시작하면서 포로
로마노도 쇠락해갔으니 야만족들의 침입으로 장려했던 신전과 포룸들은 무너져 내렸고, 로마
시민들은 자신들의 주택을 보수하기 위하여 포룸의 석재를 떼어갔으며 가톨릭 교회도 성당을
짓기 위해 포룸의 대리석 기둥들과 장식물 등을 대거 떼어가면서 포로 로마노는 폐허로 전락했습니다.
맨 위의 황금빛 지붕 건물은 최고신 유피테르를 모시는 신전으로, 로마에서 가장 높은 언덕인 카피톨리누스
언덕 위에 있었으니 현재는 로마 시청사가 세워졌고 카피톨리누스 언덕 아래쪽, 색색의 석재 기둥
들이 세워져 있는 직사각형의 광장과 이를 둘러싼 건물들이 포로 로마노로 로마 권력의 심장부였습니다.
그림 오른쪽 밑에 있는 거대한 건물군들은 '황제들의 포룸 (Fori Imperiali)' 라고 불리며, 포로 로마노
와 인접해 있기는 해도 엄연히 다른 구역인데,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네르바,
트라야누스 등 로마 권력자들이 연이어 포룸들을 지었으며, 공공 회의장이나 정부 청사로 쓰였습니다.
다만 20세기 초에 베니토 무솔리니가 로마 제국의 부활을 외치며 이 황제들의 포룸
유적지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가는 도로를 만들어버렸기에 현재는 모습
조차 찾아보기 어려운데.... 이 도로를 '비아 사크라', 즉 신성한 도로 라고 부릅니다.
원래 포로 로마노가 세워진 자리는 습한 저지대로, 물이 고여있어 사람들이 살기 힘든
지역이었으니 기원전 7세기경 대규모의 간척사업이 진행되면서
물이 빠져나갔고, 이후 인구가 증가하면서 점차 로마 도심의 한복판으로 자리매김 합니다.
특히 포로 로마노는 당시 로마를 양분하던 로물루스와 티투스 타티우스의 세력이
만나는 교차점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로 인하여 두 세력이 서로 교류
하기 위하여 포로 로마노에서 만나면서 더더욱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합니다.
포로 로마노는 점차 거대한 시장판으로 변모해갔고, 인구 유동성이 로마에서 가장 높은 지역
으로 떠올랐으니...... 정치인들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포로 로마노에서 연설,
선거운동, 재판 등을 열었고, 이에 따라 점차 포로 로마노는 정치적 중심지가 되기 시작합니다.
로마 왕정 시기에 왕들은 포룸에 행정 건물들을 지었으며, 2대 왕 누마 폼필리우스는 이 곳에
베스타를 모시는 신전을 지어 베스타를 모시는 여사제들을 거주하도록 하였으며
왕정이 몰락한 이후인 로마 공화정 시기에도 포로 로마노는 여전히 정치의 중심지로 남았습니다.
사투르누스 신전과 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전, 콩코르디아 신전 등이 이때 세워졌고, 술라
장군은 포룸 한복판을 대리석 판석으로 포장하였으며 기원전 78년에 공공 기록관이
들어섰고.... 기원전 44년에는 암살당한 카이사르의 시신을 이 곳에서 장례를 치렀습니다.
카이사르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아우구스투스는 포로 로마노에 대대적인 개축
공사를 실시하면서 제국의 중심에 맞게 변모시켰으니 아우구스투스
개선문과 율리우스 신전 등을 지었으며, 베스타 신전 등을 보수하기도 했습니다.
로마 제국 시기에는 황제들의 대관식이 열렸으며, 중요한 정치 행사나 개선식에
포로 로마노가 사용되었는데, 네로 황제의 해에는 늙은 황제 갈바가
이 곳에서 암살당했으며....... 오토 황제도 친위대에게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포룸 뒤쪽에 거대한 트라야누스 포룸을 지었고, 이후 행정 업무는 대부분
트라야누스 포룸으로 이전되었으며 203년에는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개선문이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새로 들어섭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기 새 바실리카나 포룸들이 연이어 지어지면서 로마 제국에서 가장 호화롭고
번성한 곳이라는 영예를 몇백년에 세월 동안 누릴 수 있었는데 콘스탄티누스 대제때 포로 로마노에
마지막 리모델링 공사가 이루어지면서 그때까지만 해도 나름 건재했던 로마의 위상을 과시하기도 합니다.
이토록 화려했던 포로 로마노도 로마 제국의 쇠퇴와 함께 무너지기 시작하니 로마 제국이
핵심지역을 차지한 동로마 제국과 껍데기만 남아버린 서로마 제국으로 나뉘어
지고, 옛 수도인 로마가 서로마 제국에 소속되면서 포로 로마노도 같이 쇠락했던 것입니다.
사코 디 로마가 여러 차례 이루어지면서 야만족들이 포로 로마노와 인근의 팔라티노 황궁에 있는
보물들을 약탈하고 건물들을 파괴하였으며, 재정이 모자랐던 서로마 제국은 보수할
여력도 없었으니 결국 제국은 포로 로마노가 황폐화되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으며,
476년에는 서로마 제국이 완전히 멸망하면서...... 포로 로마노도 그 중요성이 크게 떨어집니다.
기원후 500년에는 한때 100만 명에 달하던 로마 인구가 25만 명까지 급감했고, 6세기 경에는 점차
포룸의 건물들이 가톨릭 성당으로 변했으며 동로마 제국의 황제는 신전의 납 지붕과
대리석을 모두 뜯어가면서 포로 로마노의 황폐화에 거들었고 608년에 황제 포카스를
기리는 기둥이 세워지는데, 이것이 포로 로마노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지어진 건축물이 되었습니다.
8세기경 로마에 방문한 여행자의 말에 의하면, 당시 포로 로마노는 예배당과 교회에 둘러
싸인 돌더미 수준이었으며 주위를 지나는 사람들마다 이를 보며 제국의 멸망을
한탄했다고 할 정도이니... 당시 얼마나 포로 로마노가 초라한 모습이었는지 알수 있습니다.
한편 교황 우르바노 5세는 아비뇽 유수에서 돌아오면서 로마에 대대적인 성당 건설을 명했고,
이 시기에 가장 가까운 석재 공급지였던 포로 로마노와 팔라티노 황궁에서 또 대거
석재가 유출되면서....... 기껏 남아있던 건물들도 많은 수가 헐려나가거나 무너져 내렸습니다.
채석 작업도 어느정도 문화재 보존에 대한 관심이 생겨난 17세기 부터는 자제되었으며, 포로 로마노는
주로 예술가나 철학가들이 방문하여 옛 영화를 그리워하는 장소가 되었으니 1803년에는 고고학계
에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을 발굴하고 주위를 정리하는 등 본격적인 보존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1898년 이탈리아 왕국에서 보존 및 복원 프로젝트가 가동되었으며 현재까지도 복구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정부에서는 추가적인 훼손을 우려했고, 서두른 복원은 안하느니만 못하다는 신념하에 신전이나 바실리카를
완전히 개건하는 것은 극히 꺼리며, 기존에 남아있는 건물들을 정리하고, 유구를 발굴하는 것에 그치고 있습니다.
포로 로마노에서 문득 며칠 전에 코린토스에서 옛 고린도 유적지에 갔을 때 그리스 유물 외에 갑옷을 입은
로마인 동상이 서 있는걸 보았는데, 아마도 로마인들이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를 점령해 다스렸기
때문이니.... 문득 국제신문에 김진식 박사가 인문학 칼럼란에 쓴 “충직한 로마인” 이란 글이 떠오릅니다.
로마인은 조상을 모시는 데 진정으로 최선을 다하는 충직한 민족이었다. 로마를 대표하는 덕목을 하나만
뽑자면 ‘피에타스 (pietas)’ 인데 이는 가족, 특히 조상에 대한 충직함이다. 로마의 건국 영웅
아이네아스가 트로이아를 떠나 이탈리아에 온 것은 조상의 신주를 모실 새로운 땅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의 별명이 ‘충직한 사람’이다. 로마에서 발굴되는 고대 비석은 대부분 망자를 기리는 것들이다. 로마인은
생전 본 적 없는 남의 무덤을 세워주고 돌보기까지 했다.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는 기원전 75년 속주
시칠리아를 다스리는 관리로 파견됐고, 곧 시칠리아에서 가장 아름답고 풍요로운 도시 쉬라쿠사이를 방문했다.
키케로는 무덤을 찾았다. 무덤 임자는 뉴턴, 가우스와 함께 세계 3대 수학자로 꼽히는 아르키메데스
였는데 쉬라쿠사이가 낳은 최고의 수학자이자 공학자, 과학자였다. 이때 무덤은 벌써 140년
가까이 방치된 상태였다. 쉬라쿠사이 사람들조차 위치를 모르고 있었고 심지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키케로가 가진 단서는 비석에 원기둥과 원기둥에 내접한 구가 새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내접한
구와 원기둥의 부피가 2:3 의 비율임을 증명한 수학적 업적을 기리는 비석이었다.
키케로는 쉬라쿠사이 성문 근처에 덤불과 잡초가 사방을 덮은 곳을 뒤졌다. 사람들을
시켜 주변을 청소하고 덤불을 치우며...... 무덤으로 가는 길을 열었을 때 정면에 묘비가 보였다.
기껏해야 140년인데 반쯤 지워졌다는 키케로의 증언을 그대로 믿을 수 있을까? 아무튼 비문은
반쯤 지워져 명확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구와 원기둥은 또렷이 보였다고 한다. 그렇게
쉬라쿠사이를 방문한 로마인 키케로는 지중해 지역 전체를 통틀어 가장 유명했던
그리스인의 무덤을, 한때 드높은 학문을 자랑하던 도시가 배출한 최고 학자의 비석을 찾아냈다.
수학자 아르키메데스는 금관이 순금인지 은이 섞였는지를 알아내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목욕탕 에서 알아냈을때 벌거벗은 채로 ‘헤우레카 (heureca·eureka)’ 라는 말을 외친 것으로
유명하다. ‘나는 드디어 방법을 찾아냈다’ 는 뜻이다. 그를 묘사한 18세기 판화는 배움과
깨달음의 기쁨에 들떠 창피한 것도 모르고 벌거벗은 몸으로 시가지를 뛰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 그는 원주율을 요즈음 수치에 아주 근사하게 계산해 냈으며, 태양과 달과 다섯 개 행성들의 운동을 조망할수
있는 천구의를 발명하기도 했다. 키케로의 ‘국가론’ 제1권에 따르면 그가 발명한 천구의는 기존의 천구의와
달리 단 한 번의 회전으로 태양 등의 불균등하고 복잡하고 다양한 궤도를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기계 장치 였다.
하늘에서 달이 태양을 가릴 때처럼 회전하는 청동 천구의에서 달이 태양을 가리는 일식 현상이 똑같이
재현됐다. 쉬라쿠사이를 함락시킨 정복자가 대단하고 찬란한 다른 전리품은 하나도
손대지 않고 오직 아르키메데스가 발명한 천구의만을 로마로 가져갔을 만큼 경이로운 발명품이었다.
도시 함락후 로마 병사가 아르키메데스를 데려오라는 로마 장군의 명령을 받고 그를 찾아갔다고 한다. 도시가
로마군에 함락되던 날에도 수학자는 흙바닥에 원을 그려놓고 그가 좋아하는 기하학의 문제를 풀고 있었다.
그를 데려가려는 병사에게 자신을 방해하지 말고 내버려두라고 소리를 질렀고 이에 격분한 로마 병사는
그에게 칼을 휘둘렀다. ‘내 원을 건들지 마라’. 자긍심의 발로였을 이 한마디 외침은 그의 유언이 되고 말았다.
전쟁에 패해 조국은 패망하고 있는데 흙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한가롭게 무언가 심각한 고민에 빠진
노인의 모습은 무지한 로마 병사에게 한심해 보였을지 모른다. 아무짝에 쓸모없어 보이는 낙서(?) 에
열중하며 이제 도시의 통치자가 된 로마의 권위와 명령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노인의 태도가 승리로
우쭐한 로마 병사에게 괘씸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힘 있는 자는 무력한 자에게 늘 가혹한 법이기 때문이다.
아르키메데스가 불귀의 객이 되던 날 쉬라쿠사이를 정복한 로마 장군 마르켈루스는 노학자를 위해 무덤
을 만들고 구와 원기둥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 그저 운이 없었다고 위로할 뿐 누구를 원망
하겠냐마는 다만 허망하게 떠난 학자의 업적을 기려 묘비를 세워준 갸륵한 마음은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또 먼 훗날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로마의 고위 관리가 학자를 잊지 않고 기억하여 고향 사람들도 기억하지
못하는 버려진 무덤을 찾아내고 돌본 정성은 우리를 감복시킨다. 떠난 이의 빈자리를 서글퍼하고 떠난
이의 업적을 기억할 줄 아는 충직함이 있었기에 로마는 지중해를 지배하는 위대한 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