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 수행자, 수도자 (독신 생활자)의 부모님 마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
"저 아픈 거 부모님껜 비밀입니다
종교인들을 취재할 때 가끔 “저 아픈 거 부모님껜 비밀입니다.
그래서 인터뷰, 특히 사진은 못 찍습니다.”
종교인들을 취재할 때 가끔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걱정하고, 자식은 어버이가
자신을 걱정할까봐 걱정하는 것이지요.
故정진석 추기경은 어머니가 당시 노기남 대주교와 담판을
벌인 덕분에 사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정 추기경은 사회주의운동을 하다 월북한 부친의 존재도 모르고 자랐습니다.
외아들이었지요.
서울대 화학공학과에 입학했던 정 추기경은 6·25전쟁을 겪으며
‘사제’로 인생방향을 전환합니다.
당시만 해도 외아들은 ‘代가 끊긴다’는 이유로 신학생으로 받아주지를 않았는데,
독실한 신자였던 정 추기경의 어머니 이복순 여사는 노기남 대주교와
담판을 벌여 신학교 입학 허가를 받아냈습니다.
그렇게 외아들을 사제로 바친 후에도 ‘보고 싶다’는 말 한 마디 없던 어머니는
아들이 39살의 나이로 주교가 된 후 “사진 한 장만 찍자”고 해서
촬영한 사진을 평생 머리맡에 두고 지냈다고 합니다.
故이춘선(1921~2015) 할머니는 슬하 11남매 중 신부 네 명,
수녀 한 명, 손자 한 명까지 신부로 키웠습니다.
이 할머니는 성당 주일학교에서 한글을 배워 수시로 편지를 썼고
그 편지들과 구술 내용 등을 모아 아들 신부가 책으로 펴냈지요.
40대 후반에 얻은 막내가 사제가 돼 임지로 떠나게 되자 어머니는 보따리 하나를 건네며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풀어보라”고 했는데, 궁금증을 참지 못한 아들이 보따리를 풀었더니
그안에는 자신이 애기 때 입은 배넷 저고리와 편지 한 장이었습니다.
편지엔 “사랑하는 막내 신부님, 신부님은 원래 이렇게 작은 사람이었음을 기억하십시오”라고
적혀 있었다지요. 난관을 헤쳐가는 열쇠는 역설적으로 ‘겸손’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춘선 할머니의 유언은 “내 장례미사 때 강론 시간에 신자들을 한바탕 웃겨달라”는 것이었답니다.
막내 신부는 어머니 장례미사 날 선글라스를 쓰고 강론해 어머니의 유언을 지켰다고 합니다.
강석진 신부의 부친은 아들이 사제품을 받게 되자
“앞으로 생일날엔 밥 같이 먹자”고 하셨답니다.
천주교 신자나 사제는 세례 때 성인이나 성녀의 이름을 따서
세례명을 받는데, 각각의 祝日이 있습니다.
강 신부의 아버님이 말씀하신 ‘생일’은 생물학적인 생일입니다.
“이제 축일이 되면 본당(성당)에서 신자들과 지낼 테니 앞으로 아들 생일이 되면
집에 와서 이 애비, 애미랑 함께 식사하는 겁니다. 알겠죠?”라고 말씀하셨답니다.
생일엔 밥 한 끼라도 따로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지요.
故성철 스님과 어머니의 금강산 유람 이야기도 유명합니다.
성철 스님이 출가 후 금강산 마하연 禪房에서 참선수행할 때였습니다.
하루는 성철 스님 어머니가 거기까지 찾아왔습니다.
성철 스님은 소식을 듣고도 내다보지도 않았다지요.
그러자 함께 수행하던 다른 스님들이 술렁였답니다.
“아무리 그래도 진주에서 금강산까지 찾아오셨는데 외면하는 건 도리가 아니다.
어머니를 맞든지, 아니면 선방을 떠나야 한다.”
그렇게 해서 어머니와 만난 성철 스님은
“뭐하러 여기까지 찾아오셨냐”며 퉁명스레 쏘아붙였다지요.
어머니 답은 더 걸작입니다. “나는 너 보러 온 거 아니다. 금강산 구경 왔지.”
결국 성철 스님 모자는 덕분에 금강산 유람에 나섰습니다.
금강산 유람을 마치고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보고 싶던 아들 손 잡고 금강산 구경 잘 했제. 어째 험한 길에 가면
아들한테 업히기도 하고, 매달리기도 하고, 그래 그래 금강산을 돌아다니는데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은 마음에 분간이 안 되는 기라.
금강산 구경 잘 하고 헤어졌제.”
마가(63) 스님은 지난해 九旬의 어머니를 모시고 전국의 50여곳
사찰을 여행하는 영화 ‘불(佛)효자’(감독 최진규)를 만들었습니다.
스님이 스무살에 출가하던 당시만 해도 俗家와 가까이 지내는 것을 터부시하던 때여서
속가 가족, 어머니와 다시 소식을 주고 받게 된 것은 수십년이 지나서였답니다.
그리고 어머니 구순을 맞아 나들이 선물, ‘지구별 마지막 여행’을
계획한 것이 영화로까지 발전됐답니다.
영화에서 스님은 때론 휠체어를 밀고, 때론 등에 업고
계단을 오르며 어머니와 사찰 순례를 다닙니다.
거의 3년 가까이 틈틈이 촬영했고 지난해 5월 공개됐는데요,
어머니는 개봉을 한 달 앞둔 작년 4월 3일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영화에서 스님은 어머니에게 “왜 어릴 때 ‘사랑한다’고 말로 안 해줬느냐”고 묻습니다.
어머니의 답은 이렇습니다. “너 잘 때 뽀뽀하고 ‘사랑한다’고 했지.”
아들 스님과 생애 마지막 여행을 한 어머니는 행복하셨던 듯합니다.
“더 이상 바랄 것 더 뭐있어? 스님 덕에 이렇게 나와서 구경도 하고. 그렁께 좋지.
고맙다는 말은 내가 해야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영화는 작년 코로나 와중에 지역별 시사회를 마친 후 정식 개봉되지 못해
아쉬움이 있었는데 올해 서울국제노인영화제에 초대됐다고 하네요.
또 이를 계기로 전국 순회 상영도 예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마가 스님은 “코로나 시국에 결국 가족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하며 만든 영화”라고 말했습니다.
<옮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