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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환의 명시감상 2에서
청련, 청년, 백련
이진명
靑蓮이 있대요
파랗게 핀대요
파아란 연기같이 오른대요
아름다운 靑蓮
희귀한 핏줄
불러줘 데려다 줘
내 청년으로 삼고 말거야
아름다운 내 청년
어디에 사나요
蓮도래지 남쪽바다 휘허한 옛 甲國
그림자 없는 無影池 그런 나라에
먼 청년
내 靑蓮
떠도는 소문 깊이
저 세상으로 깊이
白蓮이 피면
그 이름을 따로 불렀습니다
부를 수 없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靑蓮
희고지고희고지고희고지어서
흰빛의 목숨이 그만 끊기는 거기
파아란
내 청년은 깃들어
----이진명, 「청련, 청년, 백련」({단 한 사람}, 열림원, 2004년) 전문
이진명 시인은 1955년 서울에서 출생했고, 1990년 {작가세계}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와 {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가 있고, 그리고, 또한, {단 한 사람} 등을 출간한 바가 있다. 그의 [청련, 청년, 백련]은 아름답고 절묘한 말의 울림과 함께, 그 설화적인 기법을 통하여 아름다운 삶과 아름다운 죽음을 머나 먼 꿈나라인 듯, 노래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靑蓮이 있대요/ 파랗게 핀대요/ 파아란 연기같이 오른대요// 아름다운 靑蓮/ 희귀한 핏줄/ 불러줘 데려다 줘/ 내 청년으로 삼고 말거야// 아름다운 내 청년/ 어디에 사나요/ 蓮도래지 남쪽바다 휘허한 옛 甲國/ 그림자 없는 無影池 그런 나라에// 먼 청년/ 내 靑蓮// 떠도는 소문 깊이/ 저 세상으로 깊이/ 白蓮이 피면/ 그 이름을 따로 불렀습니다/ 부를 수 없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靑蓮// 희고지고희고지고희고지어서/ 빛의 목숨이 그만 끊기는 거기// 파아란/ 내 청년은 깃들어”라는 시구가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靑蓮이 있대요/ 파랗게 핀대요/ 파아란 연기같이 오른대요”라는 제1연의 시구는 청문형聽聞型의 종결어미를 통해서 강조법과 점층법을 사용하고 있고, “아름다운 靑蓮/ 희귀한 핏줄/ 불러줘 데려다 줘/ 내 청년으로 삼고 말거야”라는 제2연의 시구는 “불러줘/ 데려다 줘”라는 청원형 請願型의 문법을 통해서 강조법과 점층법을 사용하고 있다. 청문형이란 남에게서 들은 소문이나 전설을 차용했다는 것을 말하고(설화적 기법), 청원형이란 자기 자신의 소망과 희망을 드러냈다는 것을 말한다. 그는 “靑蓮이 있대요/ 파랗게 핀대요/ 파아란 연기같이 오른대요”라는 청문형의 종결어미를 통해서 설화 속의 ‘靑蓮’의 존재와 그 존재의 의미를 점점 더 부각시키고, 그리고 그 존재를 “아름다운 靑蓮/ 희귀한 핏줄”로 최고급의 존재로 미화(성화)시켜놓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청문형과 청원형 사이에서, 파아란 ‘ 靑蓮’은 “아름다운 내 청년”으로 변모되고, 그 펀 효과는 그 아름다운 청년을 끝끝내는 나의 연인으로 삼고 말겠다는 시적 화자의 의지를 낳게 된다. 아름답고 희귀한 핏줄의 ‘靑蓮’은 그의 이상적인 연인이며, 그 이상적인 연인을 생각해볼 때, “불러줘 데려다 줘/ 내 청년으로 삼고 말거야”의 청원형과 그 의지 표명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절묘한 말의 울림과 함께, 그의 설화적인 기법이 낳은 시구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있대요/ 핀대요/ 오른대요’라는 종결어미들이 톡톡톡, 튀어나오면서 그 울림을 점점 더 고조시켜 놓으면, “아름다운 靑蓮/ 희귀한 핏줄/ 불러줘 데려다 줘/ 내 청년으로 삼고 말거야”라는 시구들이 톡톡톡, 튀어나오면서 그 울림에 화답을 하고, 다른 한편, “아름다운 내 청년/ 어디에 사나요”라는 의문형의 시구들이 그 물음을 던지면, “蓮도래지 남쪽바다 휘허한 옛 甲國/ 그림자 없는 無影池 그런 나라에”라는 시구들이 그 물음에 화답을 한다. 청문형의 종결어미들이 청원형을 낳고, 청원형의 시구들이 의문형의 시구들을 낳고, 의문형의 시구들이 화답형의 시구들을 낳는다. 강조법이 점층법을 낳고, 점층법이 그 파아란 靑蓮을 ‘아름다운 청년’으로 변모시키는 이적을 낳게 된다. 이진명 시인의 자유자재로운 상상력과 그 설화적 기법이 낳은 마술의 효과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 “아름다운 내 청년”은 어디에 살고 있으며, “蓮도래지 남쪽바다 휘허한 옛 甲國”은 어디에 있으며, 그리고, 또한 “그림자 없는 無影池”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지만, 아름다운 내 청년은 “蓮도래지 남쪽바다 휘허한 옛 甲國”에 살고 있고, 그 “蓮도래지 남쪽바다 휘허한 옛 甲國”은 “그림자 없는 無影池”의 나라에 지나지 않는다. 연은 수련과의 여러해살이 수초이며, 아시아 남부와 호주의 북부가 원산지로 되어 있다. 연은 진흙 속에서 자라나고, 아름답고 고귀한 식물로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다. 연은 붉은 꽃을 피우는 홍련紅蓮과 흰꽃을 피우는 백련白蓮이 있으며, 7월 달과 8월 달에 꽃이 피고, 그 꽃은 곧바로 부처의 화신이며, 극락의 세계를 지시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연꽃은 아름다움의 상징이며, 그 아름다움의 세계는 극락의 세계이다. 극락의 세계는 모든 고통이 사라진 세계이며, 최고급의 인간인 부처가 살고 있는 세계이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세계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의 세계에 지나지 않으며, 이 세상의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다.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示空空卽示色’의 말장난과도 같은 세계가 “蓮도래지 남쪽바다 휘허한 옛 甲國”의 세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나는 “휘허한 옛 甲國”의 이 ‘휘허한’이라는 형용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할 수가 없어서, 조금쯤은 머리를 싸매고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휘허한 옛 甲國”의 ‘휘허한’이라는 형용사는 ‘휘영찬란한 옛 甲國’인지, 또는 ‘무서울정도로 고즈넉하고 쓸쓸한 옛 甲國‘인지 그 의미가 너무나도 불분명해보였던 것이다. 아름다운 “蓮도래지 남쪽바다 휘허한 옛 甲國”은 과거의, 혹은 설화 속의 부귀영화를 생각해볼 때는 ‘휘영찬란한 옛 甲國’이 더 어울리고, 다른 한편, 그 반대방향에서, 꿈과 현실 사이, 혹은 수천 년의 시간의 풍화작용에 따라, 그 흔적만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서울 정도로 고즈넉하고 쓸쓸한 옛 甲國’이라는 해석이 더 어울린다. 그러나 이 첫 번째의 해석과 두 번째의 해석을 제각각 따로 따로 살려 놓으면서, 그 두 해석의 의미들이 아주 중층적이면서도 복합적으로 살아 있는 세 번째의 해석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이 시의 깊은 울림과 그 다의적인 공간을 살리게 되는 일일 것이다. 시는 깊디 깊은 울림이 있어야 하며,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해석들이 수천 년의 시간들을 찍어누르면서 살아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는 이를 여럿의 이름으로 언표한다. 아니, 단 하나의 진리는 없으며, 다양한 해석들만이 아름답고 풍요로운 샘물처럼 솟아나오고 있을 뿐인 것이다. “蓮도래지 남쪽바다 휘허한 옛 甲國”은 극락의 세계이며, “그림자 없는 無影池”의 세계는 그림자, 즉, 모든 고통(그늘)이 극복된 이상적인 세계이다.
하지만 그 휘허한 옛 甲國은 어디에 있으며, 그림자 없는 無影池의 나라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甲國’의 ‘甲‘은 첫 번째의 의미와 대개 물 속에 살며 딱딱한 등껍질로 되어 있는 갑각류甲殼類의 의미가 담겨 있지만, 이때의 ’甲國‘은 첫 번째의 나라로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甲國’은 첫 번째, 즉, 으뜸의 나라이지만, 그러나 그 으뜸의 나라는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전지전능한 부처도 없고, 그림자 없는 이상적인 세계도 없다. 아름다운 연꽃은 다만 피고지고 피고지는, 여러해살이의 수초에 지나지 않으며, 그 아름다운 연꽃 역시도 ‘색色의 허상(空)’에 지나지 않을 뿐인 것이다. 따라서 파아란 ‘靑蓮’이 아름다운 ‘靑年’이 되고, 그 아름다운 청년은 내 이상적인 청년이 되고 있지만, 그러나 그 청년은 ‘휘허한 옛 甲國’에 사는 ‘먼 청년’에 지나지 않게 된다. 아름다운 靑蓮이 죽음의 꽃이듯이, 그 ‘먼 청년’역시도 죽음의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요컨대, 그 ‘먼 청년’은 “ 내 靑蓮”이며, “떠도는 소문 깊이/ 저 세상으로 깊이/ 白蓮이 피면/ 그 이름을 따로 불렀습니다/ 부를 수 없는 이름으로” 불러야 하는 청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의 ‘白蓮’은 실제로 흰꽃이 피는 백련이 아닌 데, 왜냐하면 그 ‘흰 백白 자字’가 ‘늙음’과 ‘죽음’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꽃은 홍련과 백련만이 존재하고, 따라서 파아란 꽃이 피는 청련이 허상의 존재이듯이, 그 청년 역시도 허상의 존재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청년은 먼 청년이고, ‘저 세상’에서 ‘白蓮’으로 핀 존재에 지나지 않으며, 그 죽음의 꽃인 ‘白蓮’이 피면, “부를 수 없는 이름으로” “그 이름을 따로” 불러야만 하는 ‘靑蓮’에 불과했던 것이다. “희고지고 희고지고 희고지어서/ 빛의 목숨이 그만 끊기는 거기// 파아란/ 내 청년은 깃들어”라는 시구가 바로 그것을 증명해준다. 비록, 옛날의 설화 속의 이야기 같은 시이기는 하지만, ‘靑蓮’이 ‘靑年’이 되고, 그 ‘靑年’이 ‘白蓮’이 되는 그 이적 속에는 우리 인간들의 아름답고 행복한 삶과 아름답고 행복한 죽음이 들어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나의 [사색인의 십계명] 제2장에서 이진명의 [청련, 청년, 백련]을 다음과 같이 분석해 놓은 바가 있다.
이진명의 「청련, 청년, 백련」은 아름답고 절묘한 말의 울림과 함께, 언어의 마술사로서 그녀의 자유로운 상상력이 돋보이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이진명의 ‘靑蓮’은 상상 속의 꽃이며, 그녀는 그 파아란 청련을 통해서 아름다운 ‘靑年’을 연상해낸다. 그 청년은 그녀의 마음 속의 이상형이며, 그와의 사랑을 통하여 “蓮도래지 남쪽바다 휘허한 옛 甲國/ 그림자 없는 無影池”의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소망을 간직하게 된다. “아름다운 내 靑年/ 어디에 사나요”라는 시구가 바로 그것이며, 따라서 「청련, 청년, 백련」은 ‘아름다운 인간--행복한 삶’을 노래한 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아름다운 靑蓮”도 아름다운 인간의 행복을 자라나게 하고 있고, “아름다운 내 靑年”도 아름다운 인간의 행복을 자라나게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인간--행복한 삶’은 이 시의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아름다운 인간--행복한 죽음’으로 자연스럽게 시적인 승화를 이룩하게 된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靑蓮’과 ‘아름다운 내 靑年’이 살고 있는 ‘蓮도래지 남쪽바다 휘허한 옛 甲國’은 ‘白蓮’이 피는 죽음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백련’이 피는 죽음의 나라는 ‘아름다운 인간--행복한 죽음’의 나라로 지칭되는 데, 왜냐하면 그 행복한 죽음의 나라는 “파아란 내 靑年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백련’은 아름답고 행복한 죽음의 상징이며, 머나 먼 하늘 나라의 꽃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인간--행복한 삶’이 ‘아름다운 인간--행복한 죽음’이며, 그것은 곧바로 우리 인간들의 행복으로 승화된다. 「청련, 청년, 백련」은 삶과 죽음이, 마치 자웅동체처럼 육화되어 있는 시이며, 한국현대문학사 속에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낙천주의의 목표는 ‘아름다운 인간--행복한 삶’과 ‘아름다운 인간--행복한 죽음’이다.
연꽃과 불교에 대해서는 더 언급하고 싶은 생각도 없지는 않지만, 아래의 인용문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연꽃은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다.
부처님은 설법을 하실 때에도 연꽃의 비유를 많이 들었다. 또한 선가禪家에서 ‘염화시중拈花示衆의 미소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묘법妙法'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어느 날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부처님이 설법은 하시지 않고 곁의 연꽃 한 송이를 들어 대중에게 보였는데 제자 중에 가섭존자만 홀로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이것은 마음으로 마음을 속속들이 전하는 도리로서 선종禪宗에서는 세 곳에서 마음 전한(三處傳心)이치라 하여 중히 여기고 있다.
연꽃이 불교의 상징적인 꽃으로 된 것은 다음 몇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 처렴상정處染常淨이다.
즉 연꽃은 깨끗한 물에서는 살지 않는다. 더럽고 추하게 보이는 물에 살지만, 그 더러움을 조금도 자신의 꽃이나 잎에는 묻히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불자佛子가 세속에 처해 있어도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아름다운 신행信行의 꽃을 피우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보살菩薩이 홀로 자신의 안락을 위하여 열반涅槃의 경지에 머물러 있지 않고 중생의 구제를 위하여 온갖 죄업과 더러움이 있는 생사의 세계로 뛰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화과동시花果同時이기 때문이다.
연꽃은 꽃이 핌과 동시에 열매가 그 속에 자리를 잡는다. 이것을 ‘연밥(蓮實)'이라 하는데, 즉 꽃은 열매를 맺기 위한 수단이며 열매의 원인인 것이다. 이 꽃과 열매의 관계를 인因과 과果의 관계라 할 수 있으며 인과因果의 도리는 곧 부처님의 가르침인 것이다. 중생들은 이 인과의 도리를 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온갖 죄악罪惡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이 짓는 온갖 행위에 대한 과보果報를, 마치 연꽃 속에 들어 있는 연밥처럼, 환히 알 수 있다면 아무도 악의 씨를 뿌리려 하지 않을 것이며 죄의 꽃은 피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인과의 도리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꽃이 연꽃인 것이다.
셋째, 연꽃의 봉오리는 마치 우리 불교 신도가 합장하고 서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부처님 앞에 합장하고 경건히 서 있는 불자의 모습은 마치 한 송이 연꽃이 막 피어오르는 것과 흡사한 것이다. 이러한 몇 가지 이유에서 연꽃은 불교의 상징적인 꽃으로 사랑을 받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