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 4】
왜구의 한반도 침입 횟수에 관하여는 약간씩의 차이가 있지만 1223년부터 1392년까지 169년간 총 529회의 침입이 있었고, 1392년부터 1443년 세종 25년까지 총 155회나 되며 조선 건국 직후 10년간은 연 10회가 넘은 해도 여러 번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왜구 침구 기사를 312번이나 언급하고 있다.
왜구들은 조선의 국력이 강해지고 일본 국내 사정이 안정되면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조선도 이들을 달래고 조공과 무역관계로 점차 순화시켜갔다.
한편, 왜구의 노략질에는 중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중국에서 피해가 컸던 곳은 주로 산동반도와 연안 일대였으며, 미곡을 약탈하고 사람을 납치했는데 14세기 중엽 원말명초의 혼란기나 명조 중기 해안방어가 늦추어진 틈을 타 왜구들의 강탈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15세기에는 일단 주춤했지만 16세기에 다시 활발해졌다.
이 당시엔 명나라가 무역을 제한, 단속이 엄했으므로 왜구는 중국인과 결탁하여 무장을 하고 밀무역을 하기도 했다.
1553년 8월 왜구가 중국 절강성에 대거 상륙하여 벌인 참극은 처참했다.
이들은 무자비한 살육을 감행했고, 항주에서 절강 서쪽을 지나 안휘성 남쪽을 짓밟은 다음 남경에 육박했다.
그 후 또다시 표양·무석·소주 등지에 상륙해 절강·안휘·강소의 3성을 짓밟으면서 80여 일에 걸쳐 4천 명 이상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그런데 만행을 저지른 왜구의 병력은 겨우 100명 미만이었다.
1559년 명 정부에서는 젊은 장수 척계광을 절강 동부에 파견하여 왜구 토벌에 나섰다. 척계광은 왜구와 싸울 군대를 엄격한 훈련을 거쳐 편성한다.
1561년 척가군(척계광의 군대)은 태주에서 왜구와 싸워 연전연승함으로써 절강의 왜구를 몰아내는 데 큰 공을 세운다. 뒤이어 척계광은 복건, 광동에 가서 또 다른 장수 유대유와 연합으로 왜구를 물리쳤다. 그리하여 1565년에는 중국의 동남연해에 왜구는 거의 소멸되다시피 했다.
왜구가 미치지 않는 동아시아의 바다는 거의 없었다.
왜구들은 베트남과 태국까지 진출하여 약탈하기도 하고 정착하기도 했다.
일설에는 샴(태국)에선 이 왜구들을 샴왕의 근위병으로까지 고용했다고 한다.
조선과 중국을 노략질하던 해적인 왜구들의 주된 무기는 칼과 창과 활이었다. 최대한 가볍게 무장을 하고 재빨리 노략질을 한 다음에 관군이 오기 전에 빠져 나가기 위함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연안을 노략질하던 왜구선은 선체가 작고 날렵했다.
왜구들의 배는 임진왜란의 일본군선 ‘아다케’와 ‘세키부네’를 보면 짐작케 된다. 세키부네는 선체가 홀쪽한 쾌속선이었으며 아다케는 규모에 있어 대형함이었으므로 먼 항해를 해야 하는 왜구선은 이와 비슷한 크기와 형태를 가졌을 것이다. 세키부네를 비롯한 일본 전통 선박은 가공하기 쉬운 삼나무나 전나무로 된 매우 얇은 판재를 사용해 정밀한 구조로 만들어져 있지만 구조적으로 허약했다.
지난 1991년 진도에서 발견된 13세기경 통나무배가 왜구의 해적선일 가능성이 조심스레 점쳐졌다. 속을 파낸 반원형 통나무를 결구해서 배의 하부구조를 만든 후 상부에 돛대와 선실 등 구조물을 얹힌 형태가 일본의 12~14세기 선박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구조였고 배를 만든 재료도 일본산 녹나무였기 때문이다.
당시 한반도에 드나들던 일본의 배는 무역선이라기보다는 왜구의 해적선일 가능성이 크다. 이런 배라면 약 3.7~5노트까지 속도가 나고 선원은 약 12명 정도, 전체 승선 가능인원은 24~30명, 혹은 많이 잡으면 40명도 가능할 것으로 추산된다. 고려 말 왜구 기록 중에 왜선의 숫자가 많은 경우 500척까지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언뜻 비정상적으로 많아 보이지만 이같은 통나무를 활용한 소형 선박이었다면 선박숫자나 3천명이 몰려왔다는 고려사의 리포트는 충분히 사실적인 숫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