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는 탁월한 언론인, 학자이자 뛰어난 문장가이기도 했다.
젊은 시절 내가 그의 글에 매료된 것은 무엇보다 그의 힘차고 정밀한 문체 때문이었다.
실제로 지금도 별로 변하지 않았지만, 우리 세대가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직업적 문필가들의 문장은, 극소수를 제외하고, 절대로 본받을 만한 게 아니었다.
새 세대의 감수성을 표현한다는 글들이 매우 비논리적이거나 감상적인 문체였다. 그 상황에서 리영희라는 한 외신기자의 문장은 나와 같은 문학도가 질투를 느끼며 흉내를 내고 싶은 극히 모범적인 것이었다.
무엇보다 리영희의 문장에는 지적 태만과 후진성의 징표라고 할 수 있는 쓸데없이 현학적인 표현이 없었다.
자주적인 사고와 판단력으로 사태의 근저를 집요하게 파헤쳐 진실에 이르고자 하는 강인한 지적 체력에서 리영희를 능가할 사람이 없었다.
실제로 그의 글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문장은 단순한 지적 훈련이 아니라 험한 세월의 굽이굽이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한 양심적인 지식인의 전인격이 뒷받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박경미 교수의 말처럼
“그 일생 자체가 한국 현대사의 결정판이자 사회적 전기(傳記)”
라고 할 수 있는 리영희의 생애는 가장 수준 높은 지식인의 일생이었다.
지식인이란, 리영희 자신의 정의에 의하면,
자주적 정신과 양심에 의거하여 인류의 보편적 이상에 충성하는 ‘자유인’이다.
근 50년에 걸친 치열한 언술활동, 그리고 그로 인한 끊임없는 수난은, 본질적으로 이 자유인의 ‘자유’를 행사하려는 의지 때문이었다.
인간적 위엄을 제일 소중하게 여기는 리영희에게 그것은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이자, 억누를 수 없는 생리적인 욕구였다.
군사통치하에서 그는 무엇보다 “생리적으로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고통을 느꼈던 것이다. 그가 가장 혐오한 것은 노예의 삶이었다.
그러나 리영희가 바란 것은 결코 이상향이 아니었다.
그는 누구보다 인간의 이성을 신뢰했으나 이성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바란 것은 “최소한의 도덕성이 통용되고, 상식이 통하는” 사회였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남북한 어디서든 활개를 치고 있는 것은 몰상식과 비이성이었다.
민주정부 십년 동안에도 그는 권력에 비판적이었다.
리영희의 생애를 관통한 것은 철저한 무사(無私)의 정신이다.
20대 통역장교 시절 진주 기생 앞에서 객기를 부리다가 자신의 왜소함을 자각했다는 유명한 일화는 그의 지적·정신적 강인성을 뒷받침하는 근본 에너지가 무엇이었던가를 짐작게 한다.
그것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근원적 겸허함, 소박함이었다.
비슷한 연배였던 장일순을 자신의 정신적 스승이라고 서슴없이 말할 수 있는 인간이 리영희였다.
장일순과의 교유 탓도 있겠지만, 만년에 이를수록 리영희는 ‘문명’의 위기 증상에 예민한 관심을 드러냈다.
리영희라는 위대한 정신이 남겨놓은 사상적 유산은 크고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