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28
3월13일[사순 제3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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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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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N9_w1L1Bn3w (최대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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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쓸쓸하고 허전한 마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어떤 의미에서 나자렛 사람들은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오랜 세월 기다려왔던 구세주 예수님께서 자기 마을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보통 큰 경사가 아니었습니다.
오랜 기간 함께 동고동락해왔던 고향마을 사람들! 예수님께 참으로 고마운 사람들, 정겨웠던 사람들, 꿈과 추억을 만들어준 따뜻한 이웃들이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 예수님께서 각별한 애정을 지니고 계셨던 사람들이었기에, 그 어떤 사람들에 앞서 가장 먼저 복음을 전파하고 싶으셨습니다.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있어서 첫 번째 대상자가 나자렛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철저하게도 무시합니다.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불경한 사람으로 단죄하고 돌로 쳐 죽이려고 까지 합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 모두가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즉결심판에 처하려고 합니다. 일정한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습니다.
죽입시다! 옳소! 하는 식의 인민재판식으로, 다수의 폭력으로 예수님 한 사람을 처단하려고 합니다. 산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뜨리려 합니다. 다행히 예수님은 구사일생으로 궁지에서 빠져나오셔서 자신의 갈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자신을 끝까지 거부하고 단죄하는 나자렛을 영원히 떠나십니다. 해도 해도 안 되다보니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고향마을을 등지십니다.
이제 고향마을 사람들은 예수님 복음, 구원의 기쁜 소식과는 거리가 먼 철저한 이방인이 되고 맙니다. 반대로 비록 동향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인 이방인들이 복음의 수혜자가 됩니다.
세례 받은 지 오래 되었다고 해서, 수도생활이나 사제생활의 연륜이 많다고 해서, 성당 가까이에 산다고 해서, 단체장을 맡는다고 해서 절대로 신앙의 프리미엄이 붙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언제나 겸손하고 진지하게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하느님의 자취를 찾아나가려는 매일의 노력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쓸쓸하고 허전한 마음으로 동족으로부터 발길을 돌리시는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묵상하며, 우리 각자가 몸담은 신앙공동체의 영적인 상태는 어떠한지 진지하게 반성해 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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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FugE3ftyq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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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나면 그 자체로 하느님을 거부한 상태인 이유>
채종기 씨는 자신의 토지를 제대로 보상해주지 않는다는 분노로 숭례문에 불을 질러 우리나라의 오랜 상징을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범행 당시 68세의 나이였습니다. 그는 2년 전 창경궁에 불을 지르고 집행유예로 풀려난 적도 있었습니다. 그는 현장 검증에서 이런 망언을 늘어놓습니다. “내 말 한마디만 들어줬어도 이런 일 없었어요. 그렇지만 사람 인명피해가 없고 이런 문화재는 재복원하면 되잖아요.”
토지 보상은 자신의 생존에 달린 문제입니다. 건설사는 약 1억 원의 감정평가를 내렸고 채종기 씨는 5억을 요구했습니다.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분노를 나라에 보여주기 위해 이러한 행위를 한 것입니다. 분노는 자신이 하는 행위를 정당화시킵니다. 따라서 분노가 일어났을 때 행위를 바로잡으려고 하면 늦습니다.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나이가 들어도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면 채종기 씨의 경우처럼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자렛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십니다. 마치 일부러 화가 나게 하시려는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그분은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라고 하시며 사렙타 마을의 과부와 나아만의 예를 드십니다. 회당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고향에 와서 자신들이 메시아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하는 예수님을 참아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벼랑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를 유유히 빠져나가십니다. 그들의 분노가 예수님에게는 합당하지 않은 사람들임을 증명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밀어 떨어뜨리려 하는 행동보다는 예수님의 말에 분노하는 감정을 추스를 수 있었어야 합니다.
감정을 추스르는 법을 배우려면 어떻게 감정이 생기는지 그 메커니즘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언제나 문제는 반복됩니다. 감정이 생기는 원인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연세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김주환 교수는 우리가 여러 감정을 말하지만 모든 감정의 근저에는 ‘두려움’ 하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내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두려움이 생기고 그 두려움은 신체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세 가지인데 투쟁-도피-경직의 세 반응입니다. 이러한 반응이 일어나면 이성은 그 원인을 찾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그런 위협에 다시 직면하지 않기 위해 감정을 만들어냅니다.
이런 식입니다. 산에서 멧돼지를 만났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빨리 뛰고 달아나게 됩니다. 숨을 헐떡이며 겨우 생각합니다. ‘담부턴 이 산에 오면 안 되겠다. 근데 나라는 뭐 하는 거야? 저런 멧돼지를 잡지도 않고. 아 짜증 나.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이젠 운동도 하지 말라는 건가?’ 이렇게 감정은 생각 다음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몸을 인식한 다음에 생겨납니다. 몸의 반응은 생존을 위해 저절로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 뇌 가장 깊숙한 곳에는 편도체의 아미그달라라는 생존본능을 담당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진화의 가장 원시적인 부분입니다. 이 부분과 연결된 것이 자율신경계입니다. 자율신경계는 몸의 근육이나 장의 운동, 심박수나 체온 등을 담당하는데 생존을 담당하는 편도체에 붙어있습니다. 대뇌는 생각을 포함한 다양한 기능을 담당하는데, 변연계는 생각을 거치지 않고 생존을 위해 신체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대뇌는 신체의 변화를 해석하여 다시 생존의 위협을 받지 않도록 감정을 일으킵니다. 사람은 그때의 기억보다도 감정을 기억하며 그 나쁜 감정이 일어나지 않도록 삶을 유지합니다. 이 역할을 전두엽이 합니다. 전두엽은 인간만이 가진 가장 발달한 뇌의 부분입니다.
자 이제 나쁜 감정이 생기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생존을 포기하면 됩니다. 생존을 생각하는 마음이 ‘불안’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존을 포기할까요? ‘평안’하면 됩니다. 아이들은 이 해답을 압니다. 자신의 생존을 자신의 생존을 책임져줄 대상에게 마치 보험 들 듯이 맡겨버리는 것입니다. 유튜브에 네 살 아이가 호흡 곤란으로 목숨을 담보로 한 큰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결국 아이는 부모보고 자신을 안아달라고 합니다. 부모가 자신을 안으면 자신은 부모를 더는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부모의 존재 안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가장 필요한 일임을 압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품에서 죽은 존재들입니다.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어린아이가 자신을 부모의 포옹에 맡기는 것처럼 하느님 품에 안긴 사람은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맡겼기 때문에 더는 잃을 것이 도무지 없습니다. 잃을 생명이 있기에 불안한 것입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부모의 품 안에서 평화를 얻는 것입니다. 이때 분노나 화, 두려움 등이 올라올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은 자시 생존권을 내어 맡길 대상을 만나지 못한 이들의 것입니다.
어차피 누군가에게 나의 생존권을 보장받아야 한다면 우리와 함께 계셔주시겠다고 오신 사람이 되신 하느님 품에 맡깁시다. 그러면 모든 나쁜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모험이고 보험입니다. 왜 돈에 대한 보험은 들면서 감정에 대한 보험은 들지 않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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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영어로 ‘이해’는 ‘understand’입니다. 아래에 서 있으면 이해하기 쉽다는 뜻입니다. 아래에 서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기 마련입니다. 새로운 방법을 받아들이기 마련입니다. 근대의 문을 열었던 유럽의 르네상스는 문학, 예술, 과학, 의학에서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였습니다. 1000년 동안 이어오던 중세의 ‘규범과 틀’을 과감하게 벗어버렸습니다. 이슬람 문명이 번역한 고대의 학문과 철학을 받아들였습니다. 인간중심의 새로운 사상이 시작되었고, 산업혁명과 자본주의는 새로운 시대의 여명을 밝혔습니다. 반면에 ‘오해’는 ‘misunderstand’입니다. 아래에 서 있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내가 왕년에 다 해 봐서 안다.’라는 말을 자주 하던 분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방법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조선은 서양의 학문과 과학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랑캐의 학문이라고 천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서양에서 들어온 천주교인 서학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유교의 가르침이 유일한 통치기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천주교를 박해하였고,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외면하였습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초지종(自初至終)’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고도 합니다. 영어는 주어 다음에 동사가 나오기 때문에 처음 들어도 대충 이해할 수 있지만 한국어는 동사가 맨 나중에 나오기 때문에 끝까지 들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도 끝까지 말을 듣지 않고 판단한 적이 많았습니다. 예전에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노인대학 미사가 화요일에 있었습니다. 제대회에서는 소성당에 미사 준비를 해 놓았습니다. 저는 착각하고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려고 하였습니다.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제대회 자매님께 먼저 묻지도 않고 미사 준비를 하지 않았다고 짜증을 냈습니다. 자매님은 소성당에 모든 준비를 해 놓았는데 제가 짜증을 냈으니 무척 난감하였습니다. 그래도 저의 이야기를 다 들어 주었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제가 착각하였다는 것을 알았고, 자매님께 사과하였습니다. 자매님도 저의 사과를 받아 주었고, 제대회 봉사를 계속하였습니다. 삼국지의 적벽대전에서도 조조는 자초지종을 듣지 않고 충실한 부하를 전쟁터에서 죽였습니다. 적벽대전의 패배는 자초지종을 듣지 않았던 조조의 성급함에 있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에는 자초지종을 듣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왕은 아람 왕이 보낸 나아만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았습니다. 아람 왕이 전쟁을 벌이기 위해서 나아만을 보냈다고 생각했습니다. 엘리사는 자초지종을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만을 보내 달라고 하였습니다. 나병환자였던 나아만은 엘리사를 만났습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요르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담그라고 하였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았습니다. 시리아에도 요르단강보다 좋은 강이 많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사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강의 수질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자초지종을 듣고 자신의 교만함을 내려놓았습니다. 엘리사의 말을 들었던 나아만은 요르단강에 몸을 일곱 번 담갔고, 그의 나병은 깨끗해 졌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도 자초지종을 듣기보다는 자신들의 판단을 먼저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을 보기보다는 예수님의 가족과 친지를 먼저 보았습니다. 색안경을 쓰면 세상은 그 색안경의 색깔대도 보이기 마련입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나병’이 치유될 수 있는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나아만은 그 길이 너무 쉽다는 이유로 가려하지 않았습니다. 나아만은 결국 그 길로 갔기 때문에 나병이 치유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희생, 순명, 사랑, 헌신, 봉사’의 길입니다. 사람들은 편한 길을 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가려하지 않았습니다. 길은 목적이 아닙니다. 길은 목적지를 가기 위한 도구입니다. 날아다닐 수 있는 사람에게는 ‘길’은 굳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아직 날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길이 필요합니다.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는 ‘이정표, 지도, 내비게이션’이 필요합니다. 깨달은 사람들에게는 계명과 율법이 필요 없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계명과 율법을 초월해서 살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나는 새에게 굳이 땅 위의 길이 필요 없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하느님께로 가는 계명, 율법, 규정이 필요 없으신가요? 아니면 사랑의 계명, 봉사의 율법이 아직은 필요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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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4,24-30: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예수님은 당신이 자라나신 고향과도 같은 나자렛을 당신의 공생활 초기에 방문하신다. 나자렛을 위하여 방문하셨지만 나자렛 사람들의 태도는 달랐다. 그들을 회당에서 가르치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24절) 하시면서 하느님 앞에 회개하라고 하신다. 나자렛 사람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믿음으로 대하지도 않았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엘리야가 찾아간 사렙타 마을의 과부 이야기와 엘리사 시대에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을 고쳐주신 이야기(24-27절) 하시면서, 기적을 팔레스티나 밖에서 행하신 것은 바로 당신의 백성들이 믿음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사실 사렙타 마을의 그 과부(1열왕 17-18장)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2열왕 5장)이 얼마나 큰 신앙을 입증해 보여주었나를 알 수 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의 영역을 넓혀주고 확장한다. 예수님을 자신의 편의와 이익을 위해서만 잡아두려고 하는 것은, 즉 하느님을 나의 편의와 이익만을 위해서 이용하려고만 한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계획과는 거리가 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더는 새로운 길로 나아가지 못하고 하느님께서 제시하시는 새로운 일들도 받아들일 마음의 문을 열 능력도 없게 된다. 그런 마음에는 하느님께서 들어가실 자리가 없다.
바로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께서 선포하신 새로운 것들에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적개심을 갖게 되었고 그분을 배척하고 마침내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이 불편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선 영원한 예언자이신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는 어떤가? 그분은 어떤 면에서 ‘불편한’ 분이시다. 이 불편한 분의 말씀에 부응하여 우리 자신을 변모시켜 나가고자 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자렛 사람들과 같이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더라도 그분에게 어떤 제약을 가하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결국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산벼랑으로 예수를 끌고 가 그곳에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한다. 사람이 악하다는 것이 여기서도 드러나고 있다. 거부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곧 박해로, 죽음에로까지 가게 하는 인간의 잔인성이 보이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 안에도 어떤 면에서 이러한 나자렛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날 수도 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면서도,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선지식으로, 혹은 선입견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못하고 만다면, 그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주님을 산벼랑으로 밀어내어 죽이려고 하지나 않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항상 주님의 자녀로서 어떠한 판단을 갖지 않고, 이웃에게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실천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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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들은 왜 화를 냈을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24ㄴ-30)>
예수님께서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이야기를 하시자, 나자렛 사람들은 크게 화를 내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화를 냈을까? 만일에 예수님께서 ‘이방인들도’ 구원을 받는다는 뜻으로 말씀하셨다면, 그들은 화를 덜 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만’ 구원을 받는다는 뜻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들도’가 아니라, ‘이방인들만’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차이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너희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그 뜻을 알아들었고, 그래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고, 크게 화를 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만’ 구원을 받고 이방인들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만의 생각이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의 생각입니다.>
또 그들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유대인들만 선택하셨기 때문에, 유대인들만 구원을 받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방인들만 구원받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부정하고 모독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은, 하느님을 모독한 죄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굳이 그렇게 표현해서 나자렛 사람들을 자극하셨을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사렙타의 과부만’ 엘리야 예언자를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또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믿고 청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에는 엘리야 예언자를 받아들인 사람이 없었고, 또 나아만처럼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청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먼저 하느님을 떠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이야기를 하신 이유는 하나입니다. 이제라도 회개하라는 것. 하느님께서 완전히 버리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회개하고, 하느님을 향해서 돌아서기만 하면 됩니다.
유대인들의 특권의식과 선민사상은 초대교회 내부에서도 문제가 되었고, 그것 때문에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간에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는데(로마 10,12-13), 바리사이파 출신인 일부 신자들은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라고 주장했습니다.(사도 15,1-5)
그래서 결국 그 문제로 예루살렘에서 사도회의가 열렸고(사도 15,6), 사도회의는, 필수적인 몇 가지 율법 외에는 유대교 율법들을 모두 폐지했습니다(사도 15,28-29). 말하자면, 유대인으로 귀화하지 않아도, 이방인들도 예수님에 대한 신앙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음을 공식 확인한 셈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다면, 여러분이야말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약속에 따른 상속자입니다.”(갈라 3,26-29)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시고, 메시아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주님이십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 예수님의 가족입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유대인들만의 특권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특별히 선택하셔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특권’이 아니라 ‘특별한 은총’입니다. 아무렇게나 막살아도 되는 특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특별한 은총’이라는 말도, 이스라엘에게만 차별적으로 더 큰 은총을 주셨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민족들보다 ‘먼저’ 하느님을 알고, 믿는 은총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먼저’ 당신을 계시하신 것은, 이스라엘에게 다른 민족들을 인도하는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이 되어서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은 분명 큰 은총이고, 특별한 은총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특권이나 특혜가 아니라, ‘남들보다 먼저’ 예수님을 믿게 된 은총입니다. 특히 ‘회개’를 면제받는 특권이나 특혜 같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답게 더욱더 진실하게 회개해서 이 은총 상태를 잘 유지해야 하고, 끝까지 충실하게 살면서,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을 수행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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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루카 복음은 이방인들에 대하여 다른 복음서보다 더 많은 관심을 둡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이러한 특성을 잘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나자렛 회당에 가시어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이 내용은 마태오 복음이나 마르코 복음에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시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구약 성경의 두 이야기를 예로 드십니다. 하나는 엘리야를 통한 기적 이야기입니다.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엘리야 예언자를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 파견하셨습니다. 과부는 엘리야 예언자에게, 그녀가 굶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들과 함께 먹으려고 남겨 둔 밀가루와 기름으로 작은 빵 과자를 만들어 대접합니다. 그 뒤 그 집에서는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시리아 사람 나아만에게 예언자를 파견한 내용으로 오늘 제1독서에서 들었습니다.
두 기적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유다인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모두 이방인을 대상으로 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시돈 지방이나 시리아는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나라에 속하는 곳으로 이방인들의 지역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미 엘리야와 엘리사 예언자가 활동하던 때부터 하느님께서 유다인들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구원하시고자 하셨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뒤에야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린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미 구약 성경 시대부터 이방인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복음에서 강조하는 것은 구원에 민족의 구분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속한 민족이나 출신에 상관없이 믿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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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정욱 바오로 신부님]
우리 모두는 삶을 살아가면서 가장 소중한 것, 가장 귀중한 것을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살아갑니다.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공기, 빛, 물 등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주위에 흔하고 인간과 아주 가까이 있는 빛과 공기에 대하여 그 소중함을 느끼기보다 아주 당연한 것처럼 여기며 살아가고 있고, 그 소중함을 잊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잘못된 생각은 오늘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천년 전 나자렛이라는 마을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 바로 인간들에게 가장 필요하고 소중한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이 오셨건만 세상 사람들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기는커녕 예수님을 불신했습니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을 보면 고향 마을에 있는 회당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가르침을 베풉니다. 이때 고향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로 놀랍다고 하는 반응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라고 말하며 세상 오래 살아보니까 별 희한한 일도 다 있는 듯한 반응을 나타내고 서로 수군거립니다.
그리고 그 의심의 대표적인 말이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 자매들은 다 우리와 같이 여기 살고 있지 않은가?” 하면서 좀처럼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는 불신에 가득 찬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사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라는 말씀과 함께 사렙다 과부 이야기와 예언자 엘리사 시대 사람인 시리아사람 나아만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귀한 시간을 귀한 만남을 소중히 여기지 못하는 고향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아무런 기적도 행하실수 없었던 것입니다. 무지와 불신에 가득 찬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기적은 커녕 그들의 불신을 탓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한 아니 불신한 나자렛 고향 사람들처럼 현대인도 소중한 것, 소중한 사람들을 아끼지 못하고 있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먼저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내 아내, 남편에 대하여 그리고 내 자녀들에 대하여 무의식적으로 너무나 잘 알기에, 함께 하기에 이해 해 주겠지 하는 마음 안에서 서로에게 상처주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보도록 하며 “내 남편, 아내, 내 자녀들은 사랑 받는다”라는 말로 나누며 오늘 가정에서 다시 한번 더 여러분의 소중함을 가족들에게 고백해 보도록 합시다.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써 내 형제들에게 얼마나 믿음의 삶을 주고 살아가는지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만나는 많은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는 사랑과 화해의 삶이 되고 있는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품속에 품고 살아가면서 그 말씀이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통하여 내형제들에게 기쁨의 소식 희망의 삶 모습이 되도록 형제자매의 마음을 여시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예수님은 여러분의 소중한 삶의 모습이 드러나기를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어렵고 힘든 삶 안에서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것입니다. 수많은 유혹이 항상 우리 주위에서 나의 영혼을 파괴하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좀더 쉬운 것, 편한 것, 내 만족스러운 것, 그리고 고난과 욕심 안에서 신앙인으로서 자주 갈등을 일으키지만 신앙인이기에 지켜야 하는 삶이 있습니다. 신앙인이기에 또한 우리가 가꾸어나가야 할 삶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과 용서를 가르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어떠한 삶 안에서도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노력해 나갈 때 우리는 이 세상 안에 말씀의 씨앗으로 자라며 열매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오늘 독서 말씀의 나아만처럼 말씀에 다시 한번 더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각박한 세상이라도 새로운 눈으로 보면 살만한 곳이요, 아름다운 천국이요,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낙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말씀을 소중히 여기면서 그 말씀에 순종하면서 증거 하도록 합시다.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우리는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 모든 것들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가지며 살아가도록 합시다. 그 분의 말씀이 지금 여러분 안에서 꽃 피울 수 있는 순간임을 잊지 말고 지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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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세상의 단 한 사람>
하느님께서는 모르는 게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까지 기억하시고 세상 구석구석의 일들을 일일이 알고 계시니 놀랍지 않나요?
엘리사에게 나병을 치유 받았던 아람의 군대 장수 나아만, 배고픈 엘리야 예언자에게 자신의 마지막 양식을 내어 준 사렙타의 과부, 오늘 우리들은 하느님께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요? 나아만의 경우도 사렙타 과부의 일도 어느 날 갑자기 우연히 그런 축복을 얻은 것은 아니었을 테니 말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남편의 위치가 하늘 같았던 시절 더욱이 한 나라에서 으뜸가는 군대 장수였던 나아만이 집안에서는 아내의 의견을 존중했던 자상한 남편이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그는 집안에서 부리는 어린 종이 조잘대는 ‘소리’까지도 들을 줄 알았던 열린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어린 아들과 외롭고 힘겹게 살아가야 했던 사렙타 과부는 궁색한 살림을 꾸려야 했지만 마음은 넉넉했던 것이겠지요. 마지막 먹거리를 탐(?)하는 엘리야 예언자의 청을 몰라라 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틀림없이 마음이 따뜻하고 정이 많은 여인이었으리라 싶으니까요.
윗자리에 있되 아래를 살펴 챙기는 나아만을 고쳐 주고 싶은 하느님 마음, 가난하고 구차한 살림이지만 결코 옹졸하지 않은 과부의 삶을 책임지고 싶으신 하느님 마음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네 모습도 하느님 마음을 저릿하게 감동시킬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세상 주인이신 하느님께서는 세상 모두를 아십니다.
알되 일일이 한 사람 한 사람의 형편과 처지를 깡그리 아시고 살피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마음속까지 생각까지 모두 아시는 그분을 알려 주고 싶었던 것이라 싶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되 하느님의 뜻을 향하고 자신의 몸가짐을 살펴 살아야 한다는 당부를 하고 싶었으리라 짚어 봅니다.
이웃에게 마음을 열어 서로 내어주는 삶을 살아가는 일이야말로 기적을 부르고 이적을 드러내는 바탕임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라 믿습니다. 그럼에도 그날, 그 말씀을 들었던 회당의 사람들은 화가 잔뜩 났습니다. 스스로 선을 행하지 못한 것에 대한 울화는 아니었을까요?
자기보다 못한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뜻을 살고 있는 것에 대한 시샘은 아니었을까요? 우리는 모두 선이 좋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환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코가 석 자라는 사실에 걸려 버립니다. 눈앞의 이익에 발목을 잡히고 맙니다. 눈 밝으신 하느님께 어느 것 하나도 숨길 수 없습니다. 주무시지도 않는 하느님이시기에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삶의 선택은 오직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께 얻은 자유를 하느님의 뜻에 사용할 때 세상에서 단 한 사람으로 그분께 기억되는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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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허찬란 임마누엘 신부님]
<부족함 많아 보이는 사제>
제 고향은 대한민국 최남단에 있는 서귀포의 산간 마을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생각나는 일은 감귤 선과, 똥돼지 우리 청소, 제사입니다. 제사 때면 모든 식구가 캄캄한 방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 기도서에 몇 사람이 머리를 모아 연도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중풍으로 앓으셔서 한 달에 한 번 병자영성체를 모셨는데 신부님이 오시면 대청마루 밑에서 절을 한 기억이 납니다. 저에게는 증조부요, 조카들에게는 고조부부터 신앙생활을 한 셈이니 집안에 천주교가 뿌리내린 지 참 오래되었다는 것입니다.
고향 어른들은 많이 돌아가셨고, 땅도 수도원의 일부로 편입되었지만 가끔씩 고향에 가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리고 명절이나 제사로 친지들과 고향에 모일 때면 교회식으로 기도를 하고 차례를 지내는데 그 주송은 늘 집안 어른들의 몫입니다. 물론 집 밖을 나와서는 집안에서 귀하게 난 사제로 존중해줍니다.
그러나 아직도 어른들의 눈에는 비록 제가 사제일지라도 부족함이 많은 듯 보이시나봅니다. 신앙의 집안에서 나고 자랐고, 식구들이 신앙으로 하나임에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사제이자 구교 집안의 뿌리 깊은 그리스도인으로 잘살아가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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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첫발이 중요하다>
현대를 지식 정보화시대라고 합니다.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많은 부작용을 낳기도 합니다. 저도 많은 정보를 접하면서 긍정적인 것도 있지만, 마음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특히 어떤 사람에 대해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데 난데없이 몰라도 되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그 사람에 대한 인식을 다르게 할 때가 있습니다.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는 말을 하면서도 좋지 않은 기억을 지우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마음을 넓혀서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가득 차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전해 주시는 복음을 귀담아 들을 수 없었고, 그들은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어떤 말씀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듣고 싶은 만큼 듣고, 보고 싶은 만큼만 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자기의 틀이 너무 강해 갈 길이 멀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은 나자렛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그러한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나를 비추어보기보다는 나의 잣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내 입맛에 맞게 선택하고 맞지 않으면 흘려버립니다.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진리이고 능력이 넘치지만, 그 능력을 간과하고 사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실 하느님에 대한 알량한 지식과 편견이 그분과 만남을 가로막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안다는 것이 장애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겸손을 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부드러운 마음을 달라고 청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돌같이 강한 마음을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시길 희망합니다.
우리의 이웃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정보를 먼저 접하느냐에 따라 달리보입니다. 신뢰하지 않는 사람을 통해 얻게 된 정보는 흘려버릴 수 있지만 내가 신뢰하는 사람을 통해 정보를 얻으면 그만큼 선입견에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진실과는 먼 정보에 상관없이 흔들리는 연약함을 지녔으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품을 키워야 합니다.
회당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무지를 일깨워 주실 때 오히려 화를 내고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자기들의 기득권과 자존심을 지키려 취한 방법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기득권을 포기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면 더 큰 존경과 권위가 살아날 것인데 눈앞의 이익을 위해 악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니 첫발이 중요합니다. 선을 택할 수 있는 첫발이 그의 미래를 열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든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루카4,30) 결코, 어둠이 빛을 이길 수는 없는 법입니다.(요한1,5-9)
우리는 살아가면서 현실과 타협하고 싶은 충동을 받습니다. 그리하면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나만 바보처럼 손해를 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적당히 눈 감으면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심과 배척,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넘어지시고 또 일어서시는 십자가 길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 대한 사랑을 일깨웁니다. 진정 “사랑은 크면 클수록 행동치 않을 수 없고, 진실 될수록 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박병해 신부)
생각해 봅니다. 주님의 가르침뿐 아니라 이웃의 충고를 수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요? 좋은 충고를 받아들여 현명하게 판단하고 수행하면 충고는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뜻이 됩니다. 그러나 ‘꿀도 약이라면 쓰다.’라고 합니다. 충고는 현명한 사람일수록 마음속 깊이 스며들지만, 우둔한 사람의 귀에는 스치고 지나갈 뿐입니다. 충고를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충고를 하려거든 먼저 자신에게 충고해서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부터 해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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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A와 B 두 사람이 있습니다. 차례로 동전을 던져서 두 사람 모두 앞면 또는 뒷면처럼 같은 면이 나오면 둘은 100만 원씩을 받습니다. 하지만 서로 다른 면이 나오면 두 사람은 단 한 푼도 받지 못합니다. 이제 A가 먼저 동전을 던졌습니다. 앞면이 나왔습니다. 이제 B가 동전을 던질 차례입니다. 지금의 경우 앞면이면 100만 원을 받고, 뒷면이면 한 푼도 받지 못합니다. 드디어 B가 동전을 던졌습니다. A, B 모두 “제발 앞면”을 외쳤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뒷면이 나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리고 누가 죄책감을 더 느끼게 될까요? 거의 모두가 B가 잘못했다고 지적하고, 죄책감도 더 느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수치가 자그마치 92%입니다. 심지어 A로부터도 “앞면을 던졌어야지.”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A가 비난하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자신이 처음에 뒷면을 던졌더라면 100만 원을 획득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도 50%의 잘못이 있음을 잊은 것입니다.
우리는 남 탓을 먼저 하곤 합니다. 그러나 남 탓하기 전에 자기 탓은 어떤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남을 판단하지 마라.’라고 강력하게 이야기하신 것이 아닐까요? 남 탓하면서 옳고 그르다고 판단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수님 시대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향해서도 그들은 탓을 외칩니다. 분명히 많은 기적을 행하셨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셨지만, 예수님 탓을 하고 있습니다. 고향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깜짝 놀랄만한 기적을 보여주셔도 의심하면서 또 다른 표징만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엘리야와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있었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고향 사람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보지 못하는 자신만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에게 문제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 탓을 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화가 잔뜩 나 있습니다.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면서 산 벼랑에서 떨어뜨리려고까지 합니다.
남 탓을 더는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의 잘못된 습관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고 하지요. 남 탓하는 것도 분명히 잘못된 습관입니다. 습관적으로 남을 먼저 탓하는 모습을 취하게 됩니다. 이런 잘못된 습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먼저 바라볼 수 있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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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라>
루카 4,24ㄴ-30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다)
예수님께서 나자렛에 도착하시어 회당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라>
빛은
어둠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니
그대
빛이여
어둠을 뚫고
힘차게 비추어라
선은
악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니
그대
선이여
악에 맞서
힘차게 이루어라
살림은
죽임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니
그대
살림이여
죽임을 넘어
힘차게 펼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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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믿음의 회개>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오늘 주님께서는 엘리야와 엘리사 예언자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 사람들만 고쳐 주셨다고 고향 사람 곧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지만, 이 말을 들은 이스라엘 사람은 고향 사람일지라도 듣고 가만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래서 사람들은 주님을 죽이려고까지 하는데 아무리 사실이라도 이런 얘기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왜 굳이 말씀하셨을까요? 왜 이런 도발적인 말씀을 하셨을까요?
고향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으셔서일까요? 고향 사람 입맛에 맞는 말은 하지 않으려 하신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고향 사람들을 사랑치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아첨꾼이 아니라 사랑꾼이시기 때문입니다. 아첨꾼은 결코, 사랑하는 자가 아닙니다.
아첨하여 그에게서 자기가 목적하는 바를 얻어내거나 이루려는 자지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반대로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그에게 진정 유익한 말, 곧 바른말을 하여 그를 진리와 진실에로 돌아서게, 다시 말해서 거짓과 잘못에서 그를 회개케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이 진실한 믿음으로 돌아서도록 도발하십니다. 왜냐면 고향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고 싶은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적당히 얘기하면 또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믿고 싶은 대로 믿기에 폐부를 찌르는 도발적인 말을 해야만 똑바로 알아듣습니다.
그렇다고 그 말을 수긍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오늘 주님의 고향 사람들이 바로 그런 경우인데 주님의 말뜻을 제대로 알아듣기는 했지만,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어 분노하고 주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 말의 뜻은 알아들었지만,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만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주님도 배척합니다. 이제 이들에겐 주님이 고향 사람도 예언자도 구세주도 아니고 원수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죽이는 것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이는 믿음으로 무장하기에 보통 확신범과 같습니다.
나쁜 짓을 하면서도 자기 생각이나 믿음이 옳다는 확신에서 하기에 거리낌이 없는데 그 생각과 믿음이 잘못된 것을 모르고 그러하지요.
요즘도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잘못된 믿음으로 확신에 차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이비 종교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 그런 사람이 많고 천주교 신자들은 다행히도 그리 많지 않은데 그것이 꼭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확신범이 될 만큼 자기 믿음이 강하지 않기 때문인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고향 사람들에게 회개를 바라신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회개를 바라시는데, 그것은 믿음의 회개입니다.
잘못된 확신은 강할수록 더 큰 죄이고, 더 회개가 필요한데 자기가 믿는 종교만 옳다는 믿음, 하느님을 자기가 믿는 종교 안에 가두는 믿음, 곧 자기 종교가 가르치는 하느님만 하느님이라는 믿음, 하느님께서는 자기 교회의 신자만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믿음, 그래서 오늘 주님의 고향 사람들처럼 자기들이 믿는 하느님이 다른 사람도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질투하는 믿음은 하느님을 왜곡하고 타인을 배제하는 정말로 잘못된 믿음이기에 우리에게 이런 믿음의 경향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빨리 회개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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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되고 멋진 믿음>
- 선입견, 편견이 없는, 겸손하고 순수한 믿음 -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그리나이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 하나이다.”(시편42,2-3ㄱ)
끊임없는 기도가, 끊임없는 회개가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참된 믿음에 대한 궁극의 답입니다. 이와 더불어 참되고 멋진 믿음, 선입견과 편견이 없는, 겸손하고 순수한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은 절대 혼자의 믿음이 아닙니다. 더불어의 믿음, 더불어의 여정입니다.
섬같은 고립된 믿음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에 자리잡은 활짝 열린 믿음이요 하느님 향한 순례 도상(途上)중의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의 도반들을 만나면 힘이 나고 기분이 좋습니다. 일기를 쓰듯 하루를 여는 강론입니다. 여러 일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1.“아무 걱정 마시고 지극한 인내의 믿음과 희망을 지니고 치료에 전념하시기 바랍니다. 최고의 명의(名醫)이신 주님께서 늘 함께 하십니다. 저의 평생 절친(切親)이신 주님께 특별히 제가 당부해놨습니다.”
“신부님께서 특별히 주님께 당부해놨다는 말씀에 빵 터지는 웃음꽃이었습니다. 신나게 웃었습니다. 당부해주셨다는 말씀에 힘이 납니다.”
이또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주님이 흡사 수십년동안 제 절친이란 생각에 아픈 자매님께 힘이 되고자 드린 덕담입니다.
2.강론집이 지체되었다는 소식에 어느 순수한 믿음의 자매님이 답을 주었습니다.
“신부님, 혹시 제가 그 자매님 나으실때까지 제본해 드릴까요?”
“너무 감사합니다. 자매님답습니다. 당분간 보류하고 쉴까합니다. 하게 되면 그 자매님이 하게 될 때까지 자매님께 부탁하겠습니다. 청하는 마음이 너무 곱고 아름다워 감사합니다. 봄꽃 감사 선물로 드립니다.”
“와 꽃이 폈군요!!! 신비롭습니다.”
“매화꽃 수수하고 맑기가 자매님 영혼같아요, 순수하고 겸손한 믿음의 영혼!”
3.“매화꽃이 아름답고 우아하네요. 우아한 자태가 울 신부님의 거룩함을 닮았습니다!”
“자매님도 파스카의 봄꽃을 닮았지요! 겸손한 사랑!”
4.“예고치 못했던 병마와 싸우려니 지칩니다. 체력이 고갈상태라 고통스럽습니다. 너무 힘들고 괴로워 다 내려놓고 싶은 심정이들었다 바로 참회와 회개했습니다. 신부님 아프지 마세요. 신부님 편찮으시면 저희 모두 무너집니다. 제사랑드립니다.”
정말 감동적인 믿음입니다. ‘신부님 아프면 저희 모두 무너진다’라는 말이 마음깊이 새겨졌습니다. 참으로 혼자의 고립된 섬같은 믿음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에 활짝 열려있는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더불어의 믿음, 더불어의 여정, 더불어의 도반들입니다.
5.어제 베네딕도 규칙을 공부하면서 “다함께(All together)”란 대목의 해설에 적극 공감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에로 각자 개별적으로 인도하지 않는다. 우리는 각자 1등으로 목적지에 도착하려 노력하는 경주자가 아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말처럼 어느 사람이 다른 이의 월계관이 될 수 있도록 함께 달린다. 수도자는 다른 이들에 대한 배려없이 더 이상 혼자 목표에 도달하려고 노력해선 안된다.”
6.조선시대 중기 대학자 화담 서경덕에 대한 소개도 잊지 못합니다. 정말 믿음의 삶에 “신독(愼獨)”이 얼마나 중요한지 공감했습니다.
‘서경덕은 제자들을 가르칠 때 가장 강조한 것이 여색(女色)을 멀리하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모든 의리의 출발은 혼자 있을 때 행동에 어긋남이 없어야 하는데, 이를 신독(愼獨)이라했다. 여색을 탐하는 것은 바로 신독을 못한다는 것이고, 신독을 못하는 사람은 다른 일도 옳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과 제1독서 열왕기 하권에서 참 멋진 믿음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다음 복음의 서두 예수님 말씀은 고향 사람들에 대한 주님의 실망을 반영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고향 사람들은 질투와 편견, 선입견에 눈이 멀어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믿지도 못했습니다.
참으로 순수한 믿음의 사람들은 선입견과 편견에서 많이 자유로운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는 이런 편견과 선입견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삼년 육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을 때 엘리야를 시돈 지방 믿음 좋은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합니다.
또 하느님은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환자가 많이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습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경계와 벽이 철폐됩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것은, 감동하시는 것은 인종도, 국적도, 성별도 아닌 순수하고 겸손한 믿음뿐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엘리사와 나아만의 만남이 멋집니다. 아람 임금의 군대 장수인 나아만은 그의 주군이 아끼는 큰 인물이었습니다. 나아만은 힘센 용사였으나 나병환자였습니다. 전화위복입니다. 나병 덕분에 겸손하고 순수한 믿음을 지닐 수 있었고 마침내 엘리사를 통해 하느님을 만나 치유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 혜성처럼 등장한 이스라엘의 포로 소녀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어떻게 일하실지 모릅니다. 깨어있는 믿음의 사람에게 계시되는 하느님의 작은 손길입니다. 소녀의 말에 귀를 기울여 응답한 여주인은 나아만에게 엘리사를 찾도록 합니다. 나아만의 등장에 믿음이 없는 이스라엘 임금은 두려워 옷을 찢엊지만 믿음의 예언자, 엘리사의 대응이 참으로 신속하고 기민합니다.
엘리사에게는 편견도 선입견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참 순수하고 참된 믿음의 예언자 엘리사입니다. 엘리사의 처신이 얼마나 의연하고 당당한지요. 심부름꾼을 시켜 나아만에게 요르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면 깨끗해질 거라 말씀하십니다. 나아만의 믿음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요르단강물의 효험이 아니라 믿음의 효험, 하느님 힘의 효험이기 때문입니다.
열화같이 성을 내던 나아만은 부하들의 충고에 즉시 회개하여 교만을 내려놓고 겸손히 엘리사의 명령에 순종하여 요르단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다 나오니 그는 어린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습니다. 나아만의 겸손한 믿음에 하느님은 치유로 응답하신 것입니다. 엘리사도 믿음도 멋지고 회개한 나아만의 믿음도 멋집니다. 참으로 하느님 안에서 멋진 사람들의 만남입니다. 나아만의 하느님 믿음의 고백을 통해 그는 나병뿐만 아니라 영혼의 치유까지, 전인적 치유의 축복을 받았음을 봅니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정말 탓할 것은 하느님도 아닌 내 믿음 부족뿐이요 유일하게 청할 것은 믿음 하나뿐임을 깨닫습니다. 순수하고 겸손한 믿음, 편견과 선입견이 없는 참된 믿음입니다. 나아만과 복음의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의 믿음이 너무나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엘리사를 만나 회개와 더불어 치유받은 겸손한 믿음의 나아만과는 달리 예수님에 대한 고향사람들의 반응이 완고하기가 무지의 절정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회개는커녕 화가 잔뜩 난 이들은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은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밀어뜨려 죽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유히, 홀연히, 미련없이, 홀가분하게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시니 믿음의 승리, 믿음의 자유입니다. 새삼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게 합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를 통한 순수하고 겸손한 믿음이, 편견과 선입견, 두려움이 사라진 눈밝은 믿음이 얼마나 귀한지 깨닫습니다.
주님은 복된 사순시기,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회개와 더불어 겸손하고 순수한 믿음을 선사하십니다.
“주님,
당신의 빛과 진리를 보내시어, 저를 인도하게 하소서,
당신의 거룩한 산,
당신의 거처로 데려가게 하소서.” (시편43,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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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4,24)
<나의 본질은 살아있는가?>
오늘 복음(루카4,24-30)은 '예수님을 진실되게 믿고 받아들이는 바로 그곳에서 하느님의 구원행위(기적)가 시작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우리에게 기쁨과 자유와 해방이라는 부활을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선포하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 고향 사람들은 이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예수님께서 희년 선포를 통해 당신이 요셉의 아들(인성)이시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아들(신성)이심을 드러내시는데도,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바로 오늘 복음입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라는 말씀과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았던 엘리야 때와 나병 환자가 많았던 엘리사 예언자 시대를 언급하시면서, 그런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의 구원행위가 내리지 않고,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내렸다는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구원행위가 이스라엘 백성 유다인들에게 내려지는 전유물이 아님을 선언하십니다.
이는 곧,
내가 세례 받았다고,
내가 기도했다고,
내가 미사했다고,
내가 성경을 필사했다고,
...
그것이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절대적 행위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그리고 우리 앞에 놓여 진 구체적인 이슈와 문제 앞에서,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세례의 본질이 드러나고, 기도와 미사와 말씀의 본질이 드러나야, 우리가 이제와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구원행위가 이루어져야 할 이 세상이 참으로 혼란스럽습니다. 분열의 장과 싸움과 전쟁의 장으로 변해있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세례와 기도와 미사와 말씀의 본질이 살아있는가?
그 본질은 '예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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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m.youtube.com/watch?v=cGCN2fMPWn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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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 30)
열망이 있기에
예수님의 여정은
멈추지 않습니다.
뺄 수도 더 할 수도
없는 우리의
불편하고
모순된 현실에도
예수님께서는
결코 묶이지
않으시며
그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십니다.
꺾이지 않는
사랑이 있기에
시들지 않는
사람의
길이 됩니다.
사람이 있습니다.
복음의 길을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의 길은
버려야 할
시간도
있습니다.
선입견으로
서로를 온전히
담지 못하는
아픈 만남도
있습니다.
상처가 파견이 되고
상처의 중심에는
기도가 있습니다.
기도로 새롭게
시작하고 용서로
한 발 물러나며
새롭게
떠나갑니다.
사순(四旬)은
부활(復活)이라는
목적지를 분명히 알고
떠나는 시간입니다.
십자가의 높이만큼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높이 만큼
선입견과 편견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인정해야 할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지혜와 용기가
있는 사람입니다.
모든 여정에
감사하게 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가장 아픈 시간도
거부할 수 없기에
기도로 받아들입니다.
굳센 정신의
십자가에서
뜨거운 길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참된 만남은
서로를 붙듵지
않으며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십자가가 되기 위해
십자가가 되는
십자가의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따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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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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