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환상통 / 김혜순
하이힐을 신은 새 한 마리 아스팔트 위를 울면서 간다
마스카라는 녹아 흐르고 밤의 깃털은 무한대 무한대
늘 같은 꿈을 꿉니다 얼굴은 사람이고 팔을 펼치면 새 말 끊지 말라고 했잖아요 늘 같은 꿈을 꿉니다 뼛속엔 투명한 새의 행로 선글라스 뒤에는 은쟁반 위의 까만 콩 두 개 (그 콩 두 개로 꿈도 보나요?)
지금은 식사 중이니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나는 걸어가면서 먹습니다 걸어가면서 머리를 올립니다 걸어가면서 피를 쌉니다
그 이름, 새는 복부에 창이 박힌 저 새는 모래의 날개를 가졌나? 바람에 쫓겨가는 저 새는
저 좁은 어깨 노숙의 새가 유리에 맺혔다 사라집니다
사실은 겨드랑이가 푸드득거려 걷습니다 커다란 날개가 부끄러워 걷습니다 세 든 집이 몸보다 작아서 걷습니다 비가 오면 내 젖은 두 손이 무한대 무한대
죽으려고 몸을 숨기러 가던 저 새가 나를 돌아보던 순간 여기는 서울인데 여기는 숨을 곳이 없는데
제발 나를 떠밀어 주세요
쓸쓸한 눈빛처럼 공중울 헤매는 새에게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고 들어오면 때리겠다고 제발 떠벌리지 마세요
저 새는 땅에서 내동댕이쳐져 공중에 있답니다
사실 이 소리는 빗소리가 아닙니다 내 하이힐이 아스팔트를 두드리는 소리입니다
오늘 밤 나는 이 화장실밖에는 숨을 곳이 없어요 물이 나오는 곳 수도꼭지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나를 위로해 주는 곳 나는 여기서 애도합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검은 날개를 들어올리듯 마스카라로 눈썹을 들어 올리면
타일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나를 떠밉니다
내 시를 내려놓을 곳 없는 이 밤에
- 시집 『날개 환상통』 (문학과지성사, 2019) ----------------------------
* 김혜순 시인 1955년 경북 울진 출생, 건국대 국문학과 졸업 및 동 대학원 국문학 박사 1979년 계간 『문학과지성』 등단 시집 『피어라 돼지』 『죽음의 자서전』 『날개 환상통』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 등 시론집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산문집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 등 김수영문학상, 현대시작품상, 소월시문학상, 미당문학상, 대산문학상 등 수상 현재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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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새’는 애도의 권력을 가진 자들로부터 추방당한 채 ‘환상통’을 겪는 존재이다.
서로 구분되지 않는 ‘나-새’가 화장실에서 은밀하게 애도를 수행하는 것은 애도의 권력을 저격하는 제의적인 장면을 만들어낸다. “땅에서 내동댕이쳐져/공중에 있”는 ‘새’와 “시를 내려놓을 곳 없는” ‘나’의 모습은 하나의 존재로 보이기도 한다.
김혜순의 ‘새하기’는 어쩌면 환상통을 겪는 과정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 출판사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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