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 요19:30-34(+이사야 53장)
- 제목 : 그가 찔리고 상한 것은..
◆ 시작기도
아버지를 의지하고 기대하는 마음을 먼저 내겠습니다. 말씀을 읽는 이유는 주님을 만나고 싶어서이며, 절대자의 곁에서 얻는 빛으로 인해 제 삶에 부스러기 같은 삶의 제사라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바른 마음을 내도록 제 마음과 행동에 지혜를 주십시오. 교만하거나 좌절하지 않으며, 더 앞으로 조금 나아갈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십시오.
◆ 본문살핌
* 예수께선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셨다. 이로써 가룟 유다가 다락방에서 나갔을때 시작된 예수님의 마지막 사역이자 궁극적 사역이었던 '그 잔'이 깨끗이 비워졌다(19:30). 유월절 절기를 깨끗하고 순결히 지키려고 빌라도의 관정(이방인의 뜰)에도 발을 들이지 않았던 자들은, 죽은 시신을 들판에 방치하고 명절을 성수하고 싶지 않아서 시체를 치워달라 한다. 예수와 함께 있던 두 범죄자는 아직 죽지 않았던지 다리를 꺾어 죽음이 빨리 오도록 한다(19:31-32).
그러나 예수께선 이미 죽으셨으므로 다리를 꺾지 않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죽음을 확인만 한다(19:33). 이에 그분의 몸에서 피와 물이 쏟아졌다(19:34). 무엇이 예수님을 보통의 사람들보다 빨리 죽음에 이르게 했는가. 그의 몸이 허약했었을 것이란 추측은 근거가 없다. 이사야가 기록한 예언은 그분이 병약한 육신을 가졌다기 보다 외형적인 풍모가 그럴듯한 (마치 사울왕처럼) 분이 아니란 것을 말해준다. 확대해석하여 예수의 죽음이 빨랐던 이유로까지 가려하기에는 미진한 구석이 있다.
*그분의 풍모를 찾아보다가 이사야 53장으로 갔다.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 대신 제물되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 거기 묘사되어 있다. 그분의 아픔과 슬픔, 고통과 결심, 기대가 거기 선견자의 손에 의해 기록되어있다.
그분의 오심은 알려져 있었으나 누구도 그분을 알아 보지 못했다(사53:1, 요1). 그의 외모는 사람들의 기대와 다르게 볼품없고 강한 구석도 없었다(사53:2). 그분께선 멸시를 받고 버림을 당하셨으며 사람으로 인한 고통이 무엇인지 겪으신 분이며, 질병으로 인한 고통이 무엇인지도 겪으신 분이다. 또한 그분은 하찮은 자, 투명인간 같이 없는 자처럼 취급당하셨다(사53:3).
예수께서 당하신 형벌과 수치는 우리의 죄악과 허물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 대신 징계를 받아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평화를 선물하셨고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에게는 온전함을 선물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그분을 오해하여 그가 하나님께 무슨 죄를 지어서 저리 되었다 생각하였다(사53:4-5). 예수께서 이렇게 고통을 자처하신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죄악을 자신에게 담당시키시기 원하신 까닭이다. 무명과 무지에 쌓인 줄도 모르고 자기 소원과 고집을 꺾지않는 어리석은 양 같은 우리를 대신해 순전한 제물 어린양의 모습으로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죄를 대신 담당하시게 된 것이다(사53:6).
이 어린양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도 입을 열지 않았으니 마치 제단 위에 바쳐지기 전 털을 깎이면서도 잠잠한 양과도 같았다(사53:7,마27:12-14). 이사야 선지자는 그분께서 제물되어 대신 죽으신 이유, 곤욕과 심문을 당하신 이유를 '마땅히 형벌받을 자기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말씀한다(사 53:8). 예수는 죄 없으신 자로서 악인들과 함께 형을 받으시고 장사되었다. 그리고 부유한 이(아리마대 요셉)에 의해 무덤에 뉘어지셨다(사53:9).
이는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께서 상함을 받고 질고를 당하시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은 아들의 수난과 죽음으로 온 백성을 대속한 속건제의 제사 삼으셨기 때문이다. 아들의 생명과 백성의 죄악을 맞바꾸어 치르셨고 그 은혜는 오늘 나에게까지 미친다. 예수님의 희생은 당 시대의 사람들 혹은 이스라엘 혈통의 사람들, 혹은 소수의 제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먼저 믿게 된 이들을 통해 따라 믿게 된 모든 이들까지 포함한 것이기 때문이다(사53 :10, 요17:20-21).
예수의 죽음과 고초의 순종 결과, 그로 인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이 생겨나게(태어난, 거듭난) 되며, 예수께서도 이를 만족히 여기신 다. 예수는 영광과 존귀를 아버지께로부터 입으실 것이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내어주며, 죄인 중 하나로 취급받기를 자처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많은 이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것이며, 오히려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셨다(사53:11-12).
◆ 묵상
선지자 이사야가 증언하는 예수님의 고통은 전인적인 것이다. 그분은 소위 공생애 뿐 아니라 생의 전반에 걸쳐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을 고루 맛보았다. 멸시와 하찮게 여김, 몸의 아픈 것과 사람으로 인한 마음의 고통과 슬픔을 모두 아시는 분이었다. 마침내 그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의 신분은 대속의 제물이었고, 아브라함이 둘도 없이 귀한 아들 이삭에게 칼을 들었듯 그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그 희생제사의 기획자, 주도자, 집행자셨다. 이삭에게는 다른 제물이 예비되었으나 예수님은 바로 그 다른 제물이자 영원한 제물이 되셔서 기꺼이 죽음을 받으셨다.
이사야 53장을 읽으며 눈이 붓도록 울었다. 오늘 나의 눈물은 사람들에게 아무 것도 증명하지 못하지만 내 안에서 이처럼 예수를 증언, 증명, 증거하시는 분이 계시니 그가 성령이시다. 그가 내 안에 계신 것은 예수께서 고초와 죽음을 받으시고 부활하신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곧 그분이 진리요 그분의 하신 희생이 진실임을 드러낼 증거물이다. 내가 증거물된 삶을 살아야 한다. 주님 죄송합니다! 소리가 마음에서 터져나온다. 또 눈물이 난다. 이번엔 송구하고 죄스러운, 참담한 눈물이다. 그러나 이는 보김의 눈물(삿2장)이다. 자기를 바꾸려 마음을 내지 않고 버티고자 우는 눈물이다. 받는 것만 좋아하는 눈물이다.
그러나 그런 나를 오늘 발견, 발각하게 되었다. 부어진 은혜에 합하는 삶으로 가고자 다시 맘을 잡는다. 최후엔 우상향의 그래프가 되리라는 어느 자매님의 말씀처럼 내 삶의 지향점을 다시 바라본다. 우선 말씀으로 씻는다. 더럽혀지고 어두워지고 말라버린 내 존재의 우물에 다시 생명의 말씀을 매일매일 흘려 보낸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여기가 끝이 아니고, 증거물이 되는 삶을 만나기 위해 나간다. 여기서 끝이라해도, 이게 한계라 해도 이 삶을 중단하지 않는다. 이보다 좋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린양의 희생은 그보다 더 큰 가치가 있다. 생명을 주시고 풍성히 주신다는 말의 기쁜 비밀을 알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 묵상기도
아버지... 주여... 저를 떠나셔야 마땅할텐데 주님은 후히 주고 꾸짖지 않으시는 좋은 선생님이십니다. 스승닮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스승께 갖다 바치는 삶은 관두었고, 앞으로도 관두겠습니다. 스승을 따라 배우는 삶으로 제자의 길 가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저도 아버지의 기쁨이 되는 삶이고 싶습니다. 하루하루 말씀으로 씻어 주소서. 깨끗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