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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우상숭배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보십시오! 그러면서 한국과 그 주변 중국영해 지역들이 함께 안전하게 보호되었고 한국이 주변국가들에게 은혜의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더군요.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선 의인은 단 한사람도 없다하셨습니다. 우리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엎드러 져야할 추악한 죄인 입니다.! 누구 죄가 가볍고 누구 죄는 무겁고 이렇게 죄의 무게를 따지시나요? 누가 누굴 정죄 합니까? 정죄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이십니다. 내속에 들끓고 있는 더러운 죄악들이 안보이십니까? 통곡의 눈물로 주님께 낱낱이 회개한 후 내적으로 경건하게 살려고 성결해지려고 갈급한 심정으로 눈물의 기도를 드리고 노력한 적 있습니까? 어찌하여 겉모습만 경건한 척 하는 것인가요? 주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다 똑같은 죄인 입니다. 나를 먼저 돌아 봅시다. 한 나라와 민족에게만 국한된 거라고 봐서는 안될것입니다. 같이 아파하고 애통하며 주님의 긍휼을 바라며 기도합시다. 진정으로 회개하고 두려움과 떨리는 심령으로 그분께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아랫글은 제가 다른 믿음의 블로그에서 스크랩 해온 목사님의 글입니다. 긴 글이지만 읽으시고 진정한 회개의 길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 Frozen Fantasy -
대재앙(大災殃)과 하나님의 심판, 기독교적 관점에서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부제 : 대재앙으로부터 배우는 영적 교훈)
SDG 개혁신앙연구회 - 김병혁 목사
충격과 공포의 일본 대지진과 논쟁 일본 열도에 대지진이 발생한 지 열흘이 지났다. 충격과 공포. 딱히 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수백 키로 떨어진 타국에서 TV와 인터넷을 통해 이 세계사적 재난의 현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온 몸에 소름이 끼칠 지경인데, 이 무시무시한 대재앙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의 심정은 오죽할까. 일본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지진과 10m 높이의 대형 쓰나미가 세계 2위의 경제 대국 일본을 초토화시켜 버리고 말았다. 일본 수도 도쿄에서 불과 400km 떨어진 미야기현과 이와테현, 후쿠시마현 등지의 도시들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지진과 쓰나미로 인한 사망자와 실종자 수만해도 2만 명을 넘는다. 광범위한 피해 지역과 교통, 통신 두절 그리고 여전히 구조 손길이 미치지 않는 지역이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앞으로 사망자, 실종자 수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란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세계인을 경악시켰던 원전 폭발 사태는 6개의 원자로 냉각 기능이 가까스로 정상화됨으로써 최악의 고비는 넘겼다. 하지만 이번엔 지진 공포보다 더한 방사능 공포가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이미 원전 폭발로 인해 대량의 방사성 물질이 공기 중에 유출되었기 때문이다. 방사능 피폭의 두려움을 피해 일본을 탈출하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막강한 경제력과 치밀한 국민성을 바탕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내진 시스템을 갖추었다던 일본이 단 한 번의 지진의 위력 앞에 2차 대전 이후 가장 심각한 국가적 위기를 맞고 있다. 그리고 세계인은 일본 대지진이 몰고 올 충격과 파장에 대하여 근심어린 눈빛으로 예의주시하고 있다.
이러한 와중에 일본 지진과 관련하여 한국 교회가 때 아닌 홍역을 치르고 있다. 한국 교회의원로격인 목사 (여의도 순복음 교회 원로 목사)는 어느 기독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일본 지진은 일본 국민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는 논조의 발언이 기사화되면서 한국 교회에 대한 논란과 비난이 가중되고 있다. 며칠 전에는 ㅈ 목사의 처남이라는 목사가 예배 중에 그보다 더 수위 높은 발언을 해 여론의 호된 뭇매를 맞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오늘날 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이 이들의 주장에 대해서 반감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적극적으로 찬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원인이야 좀 더 따져볼 일이지만 상당수의 한국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재해나 재앙 = 하나님의 징계 혹은 심판’이라는 도식을 타협의 여지가 없는 신앙처럼 받아들인다. 이 도식은 국가적 재해 상황뿐 아니라 개인의 생활에 미치는 영역에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적용된다. 특히나 믿음이나 영적 세계를 강조하는 이들 중에는 다른 사람이 겪는 불행과 고난에 대하여 정죄와 책망을 하는 것을 마치 성도의 본분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 점에 대하여 한국 교회의 실상을 아는 한 사람의 성도요, 목회자로서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넓게 본다면 인간이 겪는 모든 형태의 고난과 고통은 일종의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의 성격을 갖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분명 타락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타락은 하나님과 영적으로 단절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때까지 모든 피조물이 고통과 탄식 가운데 처할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 만들어 놓았다.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은 이 타락으로 인한 죄의 댓가이며, 하나님의 형벌인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지진과 같은 자연 재해도 죄로 인해 인류가 겪는 일이며 결국에는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이 점에 대해서만큼은 이견(異見)이 없을 것이다.
대재앙을 대하는 기독교적 자세와 적정과 절도의 정신 하지만 일본 지진으로 기독교계에 불거진 대재앙과 관련된 논점은 이것이 아니다. 지진과 같은 자연 재해가 특정 국가나 민족 혹은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인가, 아닌가를 따져보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재앙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무자비한 심판이라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세계 도처에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는 지구적 대재앙의 원인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기독교 신앙 안에서 정당한 답변을 내어 놓아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교회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선을 갖고 있는 이들은 이러한 사건을 계기로 성경을 통하여 우리가 알게 된 지식을 속임이라고 희롱할 것이며, 나아가 재앙에 대한 기독교적 시각을 단순무식한 종교 편향주의자나 자기중심의 배타적 근본주의자의 소견으로 몰아붙이려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재앙과는 상관없다’라거나 ‘예수를 믿기만 하면 모든 재앙을 피하게 된다’는 식의 발언은 어쩌면 사회 속의 종교로서의 최소한의 도덕적 책무와 양심마저 저버린 무책임하고 저급한 신앙 행위로 비쳐질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회 현상에 대하여 무관심할 수 없다. 더구나 지구적인 고통의 문제가 되고 있는 대재앙에 대하여 침묵으로만 일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하나님은 만물의 위대한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만물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부터 가장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그 자유롭고 변함없는 주권과 섭리에 따라 모든 것에 간섭하시며 통치하시며 지도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모든 물질계와 짐승과 우연한 사건과 심지어 사람들의 죄 되는 행동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난 일은 있을 수 없다. 하물며 이 우주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유일한 도덕적 존재로서 창조함 받은 인간의 운명과 관련된 일 가운데 하나님의 간섭과 역사를 배제하는 것은 차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대재앙은 인류 전체에게 고통과 두려움을 주고 있다. 혹자는 이 고통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애써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하나님을 가정하더라도 불공평한 신 정도로 폄하하려 한다. 또 어떤 이는 재앙의 원인은 만물 자체의 불안정한 인과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일 뿐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한다. 다른 이는 하나님은 우주 내에 실재하는 유일한 행위자이므로 실제로 사람에게는 어떠한 형태의 도덕적 책임을 물어선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 신실한 믿음과 깊은 신뢰가 없다. 그런데 정말로 한심스런 사람은 말로는 하나님을 절대로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이 세계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방식과 목적에 대하여 성경과 전혀 동떨어진 생각을 자유롭게 하는 이들이다.
믿는 자로서 부인할 수 없는 대재앙의 현실을 남 일처럼 생각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인정하는 이로서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전제가 있다. 그리스도인에 있어서 현상을 이해하는 사유의 근거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정답은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이다. 인간의 이성과 경험은 현상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근원적인 배후와 근본적인 원인을 밝혀낼 수 없다. 오직 성경만이 현상 이면의 세계에 관한 진실에 대하여 답변하고 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의 독특한 사유의 방식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 외에는 어떠한 곳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것 외에는 하나님에 대하여 어떠한 것도 생각하지 않을 것, 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은 어떠한 것도 말하지 않는 정신이다”(기독교 강요)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적정과 절도의 정신>으로 모든 사물의 현상과 그 원리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대재앙의 혼돈 속에서 다시 성경으로 눈길을 돌려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재앙과 관련하여 답해야 할 물음들 필자는 성경적 관점에 기초하여 두 가지 관점에서 대재앙과 관련된 문제를 생각해 보려한다. 첫째, 일본 대지진과 같은 대재앙은 하나님의 직접적 심판인가? 둘째, 대재앙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은 무엇인가? 이 두 가지 물음에 대하여 성경적인 답변을 얻을 수 있다면, 충분하지는 않더라도 대재앙과 관련된 이해를 추구함에 있어서 어느 정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대재앙과 하나님의 심판 앞서 잠시 언급하였듯이 대재앙은 인류의 타락이후에 나타난 자연 현상임에는 분명하다. 우리가 일본 대지진 사건을 통하여 대재앙의 위력에 새삼 놀라게 되지만, 기실 인류 역사 가운데 대재앙은 언제나 있어왔다. 최근 10년 사이만 하더라도 지구촌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대재앙이 몰아 닥쳤다. 기억나는 것만 열거해 보자. 인도네시아 지역 쓰나미 (2004), 미국 뉴올리언스 카트리나 태풍(2005), 미얀마 사이클론 재앙(2008), 쓰촨성 지진(2008), 아이티 지진(2010), 칠레 지진(2010), 뉴 멕시코만 기름 유출 사고와 환경오염(2010), 아이슬란드 화산 폭발(2011), 뉴질랜드 지진(2011)...
이외에도 세계 곳곳에서 기상이변에 의한 폭염, 폭설, 폭우, 가뭄으로 몸살을 앓고 있으며, 인구 폭증에 의한 식량 위기의 현실화와 더불어 열대 우림 파괴와 사막화가 가속화 되고 있다. 또한 에이즈, 광우병, 조류 독감, 사스, 구제역 등의 전염병과 유행성 질환이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해가 갈수록 자연 재해의 횟수와 강도와 규모가 더욱 심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구인들은 더 이상 지구를 안전한 곳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인류가 그토록 자랑하는 최첨단 과학마저 거대한 자연 재해 앞에 속수무책이다.
자연 재해에 관한 충격적인 소식들이 방송과 신문의 지면을 차지할 때면, 많은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신의 심판을 떠올린다. 성경에 언급된 대재앙이 하나님의 심판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더욱 더 긴장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는 것은 현실 속의 대재앙이 개별적인 국가나 나라나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진노의 표현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대재앙과 하나님의 심판과의 관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다시 말하지만, 대재앙을 죄에 대한 결과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대재앙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으로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 부분을 이해하려면 성경에 기록된 대재앙의 예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경에는 대재앙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것을 예시하는 기록이 있다. 노아의 홍수 사건과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그것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기록이다. 이 두 가지 사건은 하나님이 어떻게 대재앙을 통하여 심판하시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그런데 이 두 사건에 나타난 대재앙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인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하나님께서 시행 여부를 직접 언급하셨다. 둘째,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셨다. 이 대재앙은 오직 악인을 위해 마련된 심판이었다. 셋째, 이 두 가지 재앙은 앞으로 인류가 만나게 될 최종적인 심판의 성격을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신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사도 베드로의 진술(해설)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다.
한글 개역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자.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날까지 지키시며 (벧후 2:4-9)
베드로는 구약 시대의 노아 홍수과 소돔과 고모라 성의 파멸을 종말에 대한 예표적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온 천지에 물과 불을 보내셨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경건치 않은 자들은 이 무서운 대재앙에 의해 모두 심판받고 말았다. 이 두 가지 사건 속에 등장하는 대재앙은 장차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심판의 성격을 나타낸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죄에 대하여 분노하시며 정죄하시지만, 그렇다고하여 모든 죄인을 동일한 방법으로 다루시지는 않는다. 누군가 타락한 현대 사회를 가리켜 노아 시대의 사회나 소돔과 고모라 성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노아와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셨던 동일한 대재앙으로 심판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아직 타작마당에 알곡과 쭉정이가 한데 모여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알곡과 쭉정이를 구별하여 알곡에 들이거나 불에 내던지실 때까지 심판을 참고 계신다.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 때가 이르기까지 경건한 자는 고통을 당할 수 있다. 반대로 불의한 자는 세상에서 더 승승장구하고 기고만장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다.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거의 실족할 뻔하였다’ (시 73:2-3)는 시편 기자의 고백은 성도들의 현실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누가 보아도 심판받아 마땅한 사람이 부귀영화를 누리며, 악을 도모하는 일에 열심인 사람이 더 많은 재물과 명성을 얻으며 사는 경우가 얼마나 허다한가. 그러나 반면에 믿음을 가졌다는 이유로 인해 온갖 핍박과 조롱을 당하고 또한 고통과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사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베드로의 교훈에 따르면, 경건한 사람에게 이 같은 일은 시험이나 불의한 자의 번성함은 오히려 자신에게 형벌을 쌓는 일이 된다.
다시 일본 대지진을 생각해 보자. 이 사건을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한 혹은 우상 숭배하는 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 결단코 그렇게 볼 수 없다. 이 사건은 앞서 언급한 하나님의 직접적 심판으로서 받을 만한 세 가지 조건 중 그 어느 것 하나도 충족시키지 못한다. 우리가 만나는 거의 모든 형태의 자연 재해도 이와 다르지 않다. 따라서 그 누구도 대재앙을 하나님의 직접적 심판이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며, 대재앙으로 희생된 모든 사람을 구원받지 못할 불의한 자라고 규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재앙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대재앙을 만날 때에 하나님께서 대재앙을 허용하신 이유와 또한 이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는지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정죄와 심판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여야 할 것이다.
대재앙을 통해 깨닫는 영적 교훈 예수님께서는 대재앙을 목도하는 성도로서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지를 복음서에 기록된 교훈을 통하여 친히 말씀해 주셨다.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 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1-5)
사람들은 모두가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예기치 못한 죽음, 그것도 원인모를 불행이 가져온 죽음에 대해서는 혼동스러워한다. 굳이 대재앙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에는 재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러한 소식을 들을 때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황스러운 모습으로 ‘왜 그들에게 그러한 불행이 닥쳤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당황스러움이 죽음에 대한 애도라기보다는 죽은 자에 대한 섣부른 판단일 경우가 훨씬 많다는 점이다.
본문에 두 가지 불행한 사건을 대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이 이와 같았다. 예수님은 두 가지 재앙을 대하여 언급하신다. 첫째, 유대인 성전에서 발생한 대학살 사건이다. 이 사건이 언제 일어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하지만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과 두려움을 준 사건이었다는 사실만큼은 자명하다. 이 사건의 전모는 이렇다. 이스라엘의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순례 왔던 일단의 갈릴리 출신 사람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을 때, 빌라도의 명령에 의해 보내진 로마 병사들에 의해서 잔혹하게 살해되었다. 빌라도가 그들을 죽인 구체적인 이유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여러 가지 연구 자료를 근거로 볼 때, 갈릴리에서 온 사람들이 빌라도의 통치, 나아가서는 로마의 압제에 대하여 반역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손치더라도 이들이 예배를 드리는 성전을 급습하여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무참한 학살을 시행했다는 것은 빌라도의 잔인무도함이 만천하에 드러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은 본문이 말하려는 주요 관심사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희생당한 사람들의 불행이나 빌라도의 잔인함보다도 이 사건을 바라보는 유대인들의 시각을 더욱 주목하고 계신다. 이 사건을 대하는 유대인들의 논지는 이렇다. : 빌라도에게 무참하게 죽은 사람들은 실제로 매우 악한 사람들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이들을 이런 식으로 불행하게 죽도록 내어두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두 번째 언급한 실로암 망대 붕괴 사건으로 죽은 사람들에 대한 태도도 역시 이와 같았다. 실로암 못 근처에 망대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망대가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 원인은 알 수 없다. 천재지변인지 아니면 인재였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망대가 붕괴되는 과정에서 열 여덟 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이것은 그 일을 당한 당사자들뿐 아니라 남겨진 가족들에게 엄청난 재앙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전해들은 유대인들은 한결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죽은 것은 안타까울지라도 죽을만하니까 죽었을 것이라고. 다시 말해서, 이들의 죽음은 그들이 지은 죄의 결과이며, 결국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 때문이라는 식으로 결론지었던 것이다.
재앙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유대인의 통속적인 신앙에서 유래하였다. 그들은 항상 영적인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유일하게 택함 받는 민족이기에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지키실 것이며, 언약을 통하여 약속된 모든 복을 허락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민족을 세계의 중심으로 세워주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대주의적 시오니즘은 이방 세계와 심지어 동일한 신앙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자신들과 비교하여 열등하다고 생각되는 (예를 들어, 갈릴리 사람들) 사람들을 향한 종교적 편견과 신앙적 차별을 오히려 자신들의 의를 내세우는 근거로 삼게 하였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은 알 수 없는 재앙을 당하는 사람들 앞에서 늘 당당했다. 그리고 이들은 원인 모를 불행과 고통은 죄를 짓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 해석하였다.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두 가지 불행한 사건과 관련하여 그 피해자들을 향해 정죄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재앙에 대한 유대인들의 이러한 통속적인 신념은 당시에만 있었던 현상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고대사에 해당하는 욥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는 바와 같이 동방의 의인이라 칭함을 받던 욥은 사단의 시험으로 인해 큰 재앙을 당하게 된다. 욥의 자녀들은 한 순간에 모두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그의 소유물은 다 빼앗기고 그의 종들마저 학살되었다. 뿐만 아니다. 그 역시 건강을 잃었으며 그의 아내마저 그를 배신하였다. 대재앙의 고통속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세 친구가 그를 방문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애초에 욥을 위로할 목적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욥이 어쩌다가 이런 대재앙을 당하게 되었는지를 자신들 편에서 규명하는 것이었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는 고통하는 욥을 향해 이같이 심문하였다.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건함 때문이냐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욥 22:4-5, 개역개정). 말하자면, 욥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라면 어찌 이런 대재앙을 당했겠느냐는 것이다. 대재앙은 저지른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강변하였다. 엘리바스의 주장은 재앙을 만난 사람에 대한 유대인들의 통속적인 편견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신약의 다른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들마저 이와 같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말해 준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까 자기오니까 그 부모오니이까”(요 9:2)라고 물었다. 소경이 당한 재앙(불행)의 원인을 본인의 죄나 심지어 부모의 죄의 문제와 얽어매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불행에 대해서 달리 이해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제자들이 하고 싶었던 말은 소경에 대한 불행의 문제가 아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것은 본인이나 부모가 지은 죄의 댓가라고 생각하고 싶었던 것이다. 고로, 소경되지 않은 자신들은 이 사람보다는 죄가 덜한 사람인 줄로 자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재앙에 대한 유대인들의 관념은 성경 그 어디에서도 지지를 받지 못한다. 오히려 이러한 바리새적인 태도는 주님으로부터 강력한 책망과 저주를 받는 원인이 될 뿐이다.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혹은 국가적인 재앙이나 불행을 항상 악한 사람을 솎아내기 위한 심판으로 보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이것은 오늘날 자연 재해나 예상치 못한 사고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경우를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대재앙의 수많은 피해자들 중에 믿음을 가진 사람이 없다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지진과 쓰나미와 홍수로 쓸려 내려간 수많은 가옥 중에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가정과 교회가 없단 말인가. 원인 모를 이유로 추락한 비행기의 잔해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없단 말인가. 911 사태때 무너진 빌딩 아래 깔려 죽은 수많은 사람 중에 단 한명의 거듭난 사람은 없단 말인가. 만약 누군가 그렇다고 말한다면 분명 그 사람은 스스로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임을 폭로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성경은 경건한 사람이 만나는 여러 가지 형태의 재앙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성경은 성도에게 시험과 시련을 피하는 것이 요령을 말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시련을 겪는 것을 기정사실화할 뿐 아니라 ‘시험을 만날 때에 온전하게 기쁘게 여기라’(약 1:2)라 하며, ‘시험과 시련을 피해가는 것이 복이 아니라 참고 견디어 참고 이기는 자가 복이 있다’(약 1:12)라고 권면한다. 성도로 사는 이유로 인하여 극심한 핍박과 고난을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재앙 속에서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이와 반대로 불의한 자라 할지라도 재앙과 고통과 슬픔과 상관없이 살아가며 행복한 모습으로 여생을 마치기도 한다.
지금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가? 눈에 보이는 재앙은 재앙일 뿐이다. 재앙은 죄의 결과인 것은 분명하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확증하는 계시는 결코 아니다. 재앙을 만나지 않았다 고해서 재앙을 만난 자보다 덜 한 죄인일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교만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죽어 마땅한 죄인이다. 우리 모두는 죄의 결과로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죽음은 우리에게서 멀리 동떨어져 있지 않다. 우리의 삶의 어디에서든지 만날 수 있다. 아무도 자신이 언제 죽을지 장담할 수 없다. 또한 어떤 모습으로 죽게 될는지도 알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지금 죽음을 피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모습으로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진정한 대재앙과 진실한 회개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재앙을 통하여 진정한 대재앙이 무엇인지를 교훈하신다. 갈릴리 사람들과 같이 성전에서 죽거나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내려 죽는 것은 비참하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 영원한 심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러한 형태의 참혹한 죽음 속에서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은혜를 입는다. 그들에게는 그 죽음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과 상급이 보장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진정한 대재앙은 죽음의 형식이나 형태가 아니다.
회개없이 죽는 죽음이야말로 가장 크고 두려운 대재앙이다. 이 점을 강조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3장 1절에서 5절 사이에서 동일한 말씀을 두 차례나 언급하신다. 3절, 5절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이와 같이 망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재앙과 불행을 목도하는 자리에 선 우리를 향해 철저하고도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신다. 바로 진정한 회개이다. 성경적인 회개란 진실한 죄의식의 결과이다. 즉 우리는 회개에 의하여 우리 자신의 죄가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얼마나 위험하고 더럽고 추악한 것인지를 인식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과 의로운 법에 위배되는 것인 줄 알고 자신의 죄에 대하여 슬퍼하며 증오하여 모든 죄악으로부터 하나님께로 전향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죄에 대한 진지한 증오심과 슬픔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타인의 고통 속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손이라는 이유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다거나 재앙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만난 이들보다 덜 한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진정한 회개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며 도와주심의 은혜를 신뢰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께로 나아가도록 한다. 그리고 성령의 요구와 가르침에 따라 생명에 이르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일에 힘쓰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거룩한 사역이 완성되기까지 우리를 위하여 최종적인 심판의 때를 지체하신다. 완전한 진노의 실행을 연기하고 계시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의 증언에 귀 기울여 보자.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5-9)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의 때까지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소행을 형벌 아래 두어 지켜보시나 이 기간 동안 성도에게는 회개의 기회를 주시며 오래 참으신다 (벧후 2:9).
이 땅에서 성도에게 미치는 육체적 대재앙은 영원한 재앙이나 영원한 심판을 의미하지 않는다. 재앙을 맞는 자들의 고통과 슬픔을 목격하고도 진실한 회개에 이르지 못한 채 맞이하는 죽음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대재앙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된 우리에게 진정한 대재앙을 극복할 수 있도록 복음을 주셨다.
우리는 이 유일하고도 참된 은혜의 방편을 통하여 회개에 이르기까지 심판을 지체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을 깨닫게 된다.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는 말씀은 성도된 자들에게 여전히 유효하고 확실한 하나님의 약속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대재앙의 공포와 혼돈이 지속되는 중에도 회개의 기회를 잃지 않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오는 사람은 반드시 그를 위하여 예비해 두신 구원의 날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
첫댓글 자야할때는 잠을 자야 합니다...비판,판단,하지말고...하나님의 뜻을 바라시길..
개인적으로 읽기에 가치있고 공정한 글이라 생각합니다. "재앙은 죄의 결과인 것은 분명하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확증하는 계시는 결코 아니다." 재앙은 죄의 결과라는 측면에서 죄인인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크리스천조차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비기독교인들이 재앙을 만났다면 어떤 면에서는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지금은 기독교인들인 우리가 당할 재앙[또는 징계]이 어떤 의미인지를 깊게 생각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재앙 당한 자들을 돌아보며 우리가 재앙 당할 자는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근데 지진 해일 화산폭발 등이 자주 일어나는 곳은 우연히도 불교국가 모슬렘국가 카톨릭국가인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물론 개신교국가들도 재앙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교도 국가들이 당하는 재앙과는 차원이 다르죠..소돔성의 경우를 보더라도 실질적으로 그곳에 열명의 의인이 없음으로 불심판을 당한 것을 알수 있듯이 그 성읍, 그 나라에 의인, 오늘날 말로 진짜 그리스도인이 몇명이나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맞습니다
뉴질랜드 지진 같은 경울 볼때 개신교국가 아니냐 할지 모르지만 거긴 영국 성공회이고 성공회는 알다시피 문제가 많은 종파입니다 동성애 사제도 임명되고 믿음도 거의 버렸다는 것...그래서 크라이스트쳐치라는 이름도 기독교식인 도시를 주님이 쳐버리신 것이 해석이 되죠
그런데, 오늘날은 기독교국가, 기독교도시는 안전하다라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할 시기가 되었습니다. 바야흐로 지금이 배교의 계절이기 때문이죠 미국도 기독교 잘 믿어서 그동안 보호를 받았는데 카트리나부터 시작해서 해마다 엄청난 재앙들로 깨지고 있는것을 보면 그 때가 가까운 것은 사실입니다 점차 지구상에 안전한 곳은 기독교국가였던 곳을 포함해서 사라져갈 것이며 최종적으로 이땅에 그리스도인이 싹 증발해 버릴때 휴거 이후엔 이땅에 어떤 보호나 보장이 없게 될 것입니다
무슨 뜻으로 글을 올리셨는지는 알겠습니다만 별로 동감이 안가는데요
나도.......
어제까지만도 일본 불쌍히 생각하고 기도했는데 오늘 완전 정내미 떨어졌습니다. 우리나라가 도와줬더니 도와준거 안고맙다 한국물품은 도와줘봤자 질떨어져서 못쓴다 부품 지네꺼 다 쓰니까 니네는 안도와주면 안된다...이런 말들은 일본인들 다는 아니겠지만 정치인들도 아니고 시민들이 올린글들인데 고맙다 보다 이런말에 공감을 하더라구요...이게 일본입니다. 원자력 문제 생길때도 처음부터 서방국가에 도움을 받을 생각은 안하고 국익 나라의 명예지껄이면서 국민을 담보로 하더니 국민들 다 죽일 판이고 방사는 오염시키고 한심하고 그지없고 그러더니 이제는 독도는 지네땅이라고 이와중에 지껄이고....
일본은 우상숭배와 교만 그리고 자신들이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지금보다 더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게 될것입니다. 사람이라면 회개 아니 반성이라도 해야 하는것 아닙니까? 일본의 야욕 역겹기 그지없습니다.
우리가 일본을 위해 기도하거나 선행을 베푸는 것보다 더 중요한것은.. 우선순위로 하여야 할 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회개"입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13:1,5)
물론의인은없나니하나도없지만 하나님께서택한백성에대한보호하심이있는거죠 정말마지막때하나님의심판은 인간들이맘대로판단하면안됩니다 하지만 일본지진은 많은뜻이있으시겠죠 특별히사랑하는자녀들이심판의주를 두렵고떨림으로바라보며 회개의역사가일어나야한다는것이지요
시대가악하고악하다 하십니다 누구를막론하고 업드릴때입니다 오직 하나님앞에...
제 개인적인 생각인데 이웃나라의 지진은 죄의 결과라고 생각이 들며 일본에 회개를 촉구 하시는 뜻이 있으며 우리 한국도 성도들과 우리 국민 모두가 회개해야 할 때라고 생각 합니다; 이웃나라 일본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경고의 메시지 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