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6일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조재형 신부
복음; 루카11,29-32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그때에 29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30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32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천고마비의 계절, 책을 읽는 계절입니다. 오늘은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동물원에 잡힌 범의 불안 초조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언제 보아도 철책가를 왔다 갔다 하는 범의 그 빛나는 눈, 그 무서운 분노, 그 괴로운 부르짖음, 그 앞발의 한없는 절망, 그 미친 듯한 순환, 이 모든 것이 우리를 더없이 슬프게 한다. 철창 안에 보이는 죄인의 창백한 얼굴. 무성한 나뭇가지 위로 내려앉는 하얀 눈송이, 이 모든 것이 또한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당신은 벌써 근 열흘이나 침울한 병실에 누워 있는 몸이 되었을 때, 달리는 기차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어렸을 적에 살던 조그만 마을에 많은 세월이 지나 다시 들렀을 때,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당신을 알아보는 이 없고 일찍이 뛰놀던 자리에는 붉고 거만한 주택들이 들어서 있고, 당신이 살던 집에서는 낯선 이의 얼굴이 내다보고, 왕자처럼 경이롭던 아카시아 숲도 이미 베어져 없어지고 말았을 때,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3년이 지난 후에 어머니의 묘소를 찾았습니다. 하느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으리라 희망하지만 이제 다시는 ‘아들 신부님!’이라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음이 저를 슬프게 합니다.
제가 사는 뉴욕 플러싱의 노던블루버드 147st에는 일자리를 찾는 분들이 어깨를 움츠리고 앉아 있습니다. 빵을 먹기도 하고,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핸드폰을 보면서 희망을 찾고 있습니다. 승합차 한 대가 멈추자 많은 사람들이 승합차 주위로 몰려왔습니다. 승합차에 탈 수 있는 사람은 1명이었습니다. 다행히 승합차에 탄 사람은 기쁨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아쉽게도 승합차에 타지 못한 사람들의 허망한 눈빛이 저를 슬프게 하였습니다.
문득 예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한 사람들이 생각났습니다. 은전 서른 닢에 스승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리웃 유다의 입맞춤이 예수님을 슬프게 합니다. 닭이 울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통회의 눈물을 흘리는 베드로의 눈빛이 예수님을 슬프게 합니다. 영광의 자리로 올라가면 예수님의 오른 편과 왼 편에 앉게 해 달라는 야고보와 요한의 욕심이 예수님을 슬프게 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교만이 예수님을 슬프게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들의 변심이 예수님을 슬프게 합니다. 솔로몬보다 더 큰 이를, 요나보다 더 큰 이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지함이 예수님을 슬프게 합니다. 솔로몬의 지혜가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요나의 외침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보다 더 지혜로운 분이 오셨어도, 요나 보다 더 큰 표징을 보여주신 분이 오셨어도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였고,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고정관념이라는 ‘틀’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닫힌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알은 스스로 안에서 껍질을 열어야 새가 될 수 있습니다. 겉에서 껍질을 열 수는 있지만 그런 새는 하늘을 날지 못 할 것입니다.
2023년의 교회는 어떤 문제들을 가지고 있을까요? 이 시대는 교회에 어떤 기대를 하고 있을까요? 많은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교회의 제도가 영적인 충만함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유럽의 교회는 건물만 남아 있는 곳이 많습니다. 교회가 가난한 이, 소외된 이, 아픈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지금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없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교회가 대형화 되고 있으며, 교회도 성장과 발전의 패러다임에 갇혀있습니다. 교회라는 하드웨어는 있지만 공동체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줄 소프트웨어는 부족한 현실입니다. 이혼 했지만 재혼한 사람들, 성 정체성의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 피임을 하는 사람들, 낙태를 해야 했던 사람들, 배아 줄기 세포를 이용한 치료를 원하는 사람들, 여성 사제와 사제 독신의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 제도 교회의 틀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교회의 주변부에 있습니다.
질병, 전쟁, 전염병, 기아, 기후변화, 이념의 갈등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과제가 힘들고,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언제나 성령의 이끄심으로 지혜롭게 새로운 길을 찾아 왔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을 청하며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을 걷는다면 우리는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 아드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분께서는 또한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미주가톨릭평화신문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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