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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과거사에 대해 정부차원의 진상규명을 벌인 것은 제주4·3이 최초이며, 이에 기초해 대통령이 사과한 것 역시 최초의 일이었다. 제주4·3유족회와 4·3관련단체, 50만도민이 전국의 양심세력과 함께한 4·3진상규명운동은 그 자체로서 역사적인 일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2003년 10월 31일 '대국민·대도민 사과문'을 통해 "제주도민 여러분께서는 폐허를 딛고 맨 손으로 이처럼 아름다운 평화의 섬 제주를 재건해냈습니다"면서 "제주도민들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라고 말했다. 부모와 형제, 자식 그리고 이웃 등 2만~3만여명이 죽고 모든 것이 깡그리 불타버린 참혹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맨손으로 다시 공동체를 복원해 오늘날 이 정도나마 진상규명을 하고 대통령의 사과를 통해 명예회복을 할 수 있었던 그 원천은 어디에 있었을까. '화해'와 '상생'을 이야기하는 '제주 4·3' 화해는 가해자와 피해자간의 화해를 말한다. 4·3 당시 우리의 부모와 형제, 자매들을 학살한 군과 경찰 그리고 서북청년단에 대한 유족의 용서를 말한다. 또 한편으로는 거꾸로 산사람들에 의해 죽어간 군과 경찰 그리고 민간인들의 어우러짐이 그것이다. 그러나 4·3 사건이 발생한 지 57년이 흐른 지금 과연 제주사회에 화해의 무드는 조성돼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제주 4·3을 바라보는 군과 경찰에는 아직도 '공산주의의 사주를 받은 무장폭동'이란 인식이 짙게 깔려 있다. 또 졸지에 폭도로 몰려 억울한 희생을 당한 희생자의 유족들은 그 가해자를 '원수'로 여기는 상황이 57년째 이어지고 있다. 4·3 당시의 학살과 죽음에 대해 그 어느 누구도 진실을 토해내지 않고 잘못된 역사를 참회하지 않는 상황에서 '화해(和解)'와 '상생(相生)'은 자칫 이뤄질 수 없는 미사여구(美辭麗句)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그러나 화해와 상생하지 않고서 4·3의 상처는 결코 치유될 수 없으며 제주사회는 그 멍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이 제주4·3이 처한 아픔이다. 화해와 상생이 없다면 '평화의 섬' 역시 공허한 구호에 그칠 뿐이다. 화해와 상생은 제주4·3정신을 계승하는 첫 걸음이자, 평화의 섬을 향한 출발점이다. 문형순 모슬포 서장, 자수사건으로 백여명 상모리 주민 살려내
4·3이 발발해 죽음의 광풍이 온 섬을 휘저었던 당시 억울하게 희생됐던 주민들을 추모하는 위령비와 함께 그해 11월 '학살'의 문턱까지 내몰렸던 모슬포 주민 백여 명을 살려낸 조남수 목사와 김남원 민보단장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한 공덕비이다. 그러나 이 공덕비문에는 조 목사, 김 민보단장과 함께 있어야 할 또 한 명의 주인공이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4·3 당시 모슬포 경찰서장에 이어 성산포 경찰서장을 지낸 문형순(文亨淳·작고). 경찰의 한 마디에 아무런 이유도 대지 못한 채 죽어갔던 4·3, 그리고 6·25 발발 직후 제주사회를 또 한번 죽음의 아비규환으로 몰아넣었던 '예비검속'의 끔찍한 현장을 경험했던 이들은 문 서장을 아우슈비츠의 집단학살에서 유태인을 구해낸 오스카 쉰들러와 비교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한국판 쉰들러 리스트로 불릴 수 있는 '자수사건'의 주인공인 문형순.
이 광풍은 모슬포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군과 경찰의 탄압을 피해 산으로 올라간 '산사람'들이 부모요 형제요, 이웃인 탓에 그들에게 쌀 한 줌, 옷 한 벌 안 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고춘언(80·대정읍 하모리)씨의 증언이다. "모슬포가 온통 난리가 났습니다. 집 식구 중에 산에 올라간 사람, 산사람에게 식량이나 옷을 갖다 준 사람들은 자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자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자수하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어느 누가 앞장 서 자수하겠습니까. 그러나 군과 경찰은 '명단'이 있다며 주민들을 협박했습니다. 자수할 수도,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죽음만을 기다릴 수도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 바로 조남수 목사와 김남원 민보단장(리장)이 나섰습니다. 당시 모슬포 경찰서장이 문형순이었는데 두 분이 문 서장을 만난 것이죠. '주민들은 아무 잘못도 없다. 이들은 빨갱이가 아니다. 자수시킬 테니 살려달라'고 부탁한 것이죠. 문 서장은 두 분의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1백여 명이 경찰서로 가자 그들을 맞이한 사람은 바로 서청 대원들이었다. 총과 죽창으로 마구잡이로 주민들을 죽였던 서청의 극악무도한 행동을 잘 알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다시 고춘언씨의 증언이다. "사찰주임이 우리를 보자마자 '전부 다 빨갱이들이다. 다 쏴 죽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서청이 우리들의 조서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영락없이 죽게 되는구나 생각했죠 그 때 문 서장이 나타나 서청들에게 호통 쳤습니다. '너희들 지금 뭐하는 거냐. 다 나가라. 자수하러 온 사람들이다. 전부 나가라'며 그들을 내쫓았습니다. 그리고는 조 목사와 문 단장에게 '이들을 민보단으로 데리고 가서 자수서를 써 오도록 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문 서장은 조 목사와 김 단장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을주민들의 조서를 마을서기에게 쓰도록 했다. 경찰이나 서청대원이 조서를 받는다면 영락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뻔히 알고 있던 그는 재치를 발휘해 마을서기가 자수서를 받도록 한 것이다. 주민들끼리 말을 맞추고 의논해서 아무런 탈이 없도록 쓰도록 한 것이다. "마을 주민들끼리 공회당에서 모여 의논했습니다. 무엇 무엇은 쓰고 또 무엇 무엇은 쓰지 말자고 했죠. 또 입도 맞췄습니다. 조금이라도 흠이 될 만한 내용들은 전부다 뺐죠. 그렇지 않고는 전부 다 죽게 됐기 때문에 쉽게 입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마을주민들이 자수서를 들고 경찰서에 찾아오자 서청단원들이 다시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문 서장이 다시 말했죠. '자수한 주민들이다. 강요하지 말라. 때리지도 말라'고 엄명을 내렸습니다. 그 때문에 아무 탈 없이 주민들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며칠 후 주민들은 다시 계엄사령부로 불려갔으나 민보단 자수서와 경찰의 조서를 본 군인들은 '시시하다. 아무런 내용도 없다'며 전부 주민들을 돌려보냈고, 100여 명의 주민들은 무사히 귀가할 수 있었다. 이것이 소위 '자수사건'이었다. 문 서장은 또 이 당시 경찰이나 서청단원들이 마을주민들을 함부로 잡아들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경찰이 '누구누구는 산사람과 내통했다. 또 누구네 자식은 산으로 올라갔다'고 이야기 하면 문 서장은 '왜 말을 함부로 하느냐. 그 말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느냐. 조사해서 사실이 아니면 너를 처벌하겠다'며 오히려 경찰에게 호통을 쳤습니다. 그 때문에 모슬포 주민들은 밀고에 의해 죽은 사람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병언씨의 증언이다. 한국전쟁 당시 계엄사령부의 예비 검속자 총살명령 '거부' 선량한 마을 주민들의 생명을 살려내기 위한 문 서장의 행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문 서장을 '한국판 쉰들러'라고 불릴 수 있도록 한 것은 그가 성산포 경찰서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였다. 지난 1999년 1월 제주도 대정리 출신의 4·3 연구가 이도영 박사(현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 방문 연구교수)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전쟁 발발 직후 군·경에 의해 자행된 소위 '예비검속 학살'을 입증해 주는 경찰자료를 공개했다. 4·3이라는 엄청난 희생을 치른 후라 마을마다 다시 잡아들일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군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적에게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자'를 검거할 것을 지시했고, 예비검속에 붙잡힌 사람들은 대부분 집단 총살을 당했다. 예비검속으로 마을마다 수백 명씩 전 도 차원에서 수천 명이 다시 희생됐다. 모슬포 '백조일손' 사건은 대표적인 예비검속 집단 학살사건이었다. 그런데 이도영 박사가 공개한 경찰자료에서 계엄사령관의 예비검속자 총살집행 명령을 '거부'한 문 서장의 자료가 발굴됐다. 1950년 8월 30일 제주주둔 해병대 정보참모 해군중령 김두찬은 성산포경찰서장에게 '예비검속자 총살집행 의뢰의 건' 공문을 보낸다. 김두찬은 이 문서에서 "귀서에 예비구속 중인 D급 및 C급에서 총살 미집행자에 대해서는 귀서에서 총살집행 후 그 결과를 9월 6일까지 육군본부 정보국 제주지구CIC 대장에게 보고하도록 이에 의뢰함"이라며 총살집행을 명령했다.
1950년 8~9월 경 제주도 전역에서 수천 명이 죽어간 예비검속에서 성산면 지역의 예비검속자들만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부당한 명령을 거부할 수 있었던 문 서장의 '용기' 때문이었다. 이 당시 성산포경찰서 관할지역에서 예비검속으로 희생당한 사람은 모두 6명이었다. 그러나 이는 문 서장이 불가피하게 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었으며, 읍면별로 수백 명씩 죽음을 당했던 다른 지역의 상황과 비교해 볼 때 성산면 지역은 거의 온전할 수 있었다. 일부 주민 반발로 공덕비 대상에서 제외…"문 서장 재평가 운동 벌여야" 대정읍 하모리 주민들은 1996년 4·3 당시 마을 주민들을 살리는데 많은 공헌을 한 조남수 목사와 김남원 민보단장(나중에 대정면장으로 됨)과 함께 문형순 서장의 공덕비를 세우자는 운동을 벌였으나 이 과정에서 문 서장의 공덕비는 끝내 세우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당시 공덕비 건립 추진위원장을 맡았던 고춘언씨는 이렇게 말한다. "자수사건으로 백여 명의 주민들이 살아나기 직전 하모리에서 경찰에 붙들려간 48명의 주민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 때문에 이 유족들이 문 서장의 공덕비를 세우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백여명의 주민들 살린 것을 보면 48명의 주민이 죽기는 했으나 그것은 문 서장이 죽였다고 보질 않습니다. 물론 당시 경찰서장을 맡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책임은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지 않았겠냐고 저희들은 보고 있습니다." <제주의 소리>는 하모리 주민 고춘언, 송응주(87), 김대종(82)씨와 함께 짐개동산을 찾았다.
고춘언씨는 "상모리 주민들은 문 서장에게 큰 은혜를 받은 것만은 분명하다"며 "4·3 당시 대부분의 경찰이 선량한 주민들을 죽이려고만 했지 문 서장처럼 수백 명의 인명을 살린 경찰이 또 어디에 있었느냐"고 말했다. 고씨는 또 "문 서장이 성산포경찰서장으로 가서 예비검속자의 총살명령을 거부한 것만 보더라도 그의 됨됨이를 알 수 있는 것 아니냐"면서 "그가 성산포경찰서장으로 가지 않고 모슬포경찰서장으로 계속 남아 있었더라면 백조일손의 학살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이제 문 서장의 행동을 제대로 평가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돈 있는 사람들은 수백만원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우리 같은 노인들에게는 힘에 부치는 돈입니다. 내가 돈이 있고 조금만 젊었더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문 서장의 공덕비를 세우고 싶은 생각입니다. 우리가 죽고 문 서장의 선행이 잊혀지기 이전에 하루 빨리 문 서장의 공덕비를 세워야 합니다. 아니 문 서장의 공덕비는 4·3평화공원에 세워져야 합니다. 문 서장의 용기 있는 행동은 제주도민들로부터 존경받을 가치가 충분히 있습니다." 일제에 맞서 싸운 독립군 출신…극장 매표원으로 일하다 쓸쓸히 임종 모슬포 주민과 성산포경찰서 관내 주민들의 생명의 은인인 문형순 서장은 일제 치하 만주지역에서 일본과 맞서 싸운 독립운동가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문 서장을 알고 있던 한 경찰출신 인사는 그의 별명을 '문 도깨비'로 기억했다. 지난 99년 문 서장의 이야기를 보도한 바 있는 <제민일보>(1월 20일자)는 그가 모슬포경찰서장을 맡았을 당시 서귀포경찰서장이었던 김호겸(90·서울시 은평구)씨의 이야기를 빌어 이렇게 전하고 있다. "문형순은 배운 게 없어 경찰 법규조차 몰랐다. 그 때 그의 별명이 '문 도깨비'였다. 그 까닭은 그가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은 일자무식 때문이라기보다는 당시 경찰 중에서는 군대에 맞설 수 있는 드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문형순씨는 나보다 20살은 위로 당시 이미 50대의 중년이었다. 그는 기운이 장사였고 배짱 있고 남자다운 멋진 사람이었다." 김씨는 또 "박정희 전 대통령은 물론 제주지구 토벌대사령관이던 송요찬·함병선 연대장 그리고 나 역시 일제 때 모두 일본군이나 그 앞잡이인 만주군에 있었지만 그 때 문형순씨는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이었다. 그런 경력 때문에 군대에서도 문 서장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문 서장이 제주도민들을 억울한 죽음에서 살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독립군의 정신이 깃들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1948년 4월 3일. 4·3사건 발발 직후부터 종료직전까지 제주에 상주하면서 4·3사건 진압의 책임을 맡았던 지휘관 중 김익렬 9연대장을 제외하고는 최경록 11연대장, 송요찬 11연대장, 함병선 2연대장 모두 독립군을 탄압했던 일본군 지원병 출신이었다. 일본군 출신인 이들이 제주에서 선량한 양민들을 상대로 '초토화 작전'을 펼치며 수많은 양민을 학살할 당시 독립군 출신인 문형순 서장은 제주도민들의 억울한 희생을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 모슬포 주민들을 보호했고, 성산포경찰서장 당시에는 계엄사령부의 예비검속자 총살명령까지 거부한 것이다. 그러나 독립군 출신의 말로가 대부분 그렇듯이 문 서장 역시 비참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제주지방경찰청 역시 1948년도 당시 경찰이 체계를 갖추지 못했던 탓에 문 서장에 대한 이후 자료를 찾을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다만 모슬포 주민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성산포경찰서장을 끝으로 경찰을 퇴임하면서 경제적으로 매우 힘들게 살아왔다고 전해진다. 퇴직 후 제주시에서 자그마한 가게를 운영하던 그는 장사가 안 돼 가게를 넘기고 제주의 첫 영화극장이었던 대한극장(현대극장의 전신)에서 매표원으로 일하다가 누구의 보살핌도 없는 상태에서 쓸쓸히 삶을 마감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수백 명의 제주도민을 살려낸 생명의 은인이자, 한국판 쉰들러의 주인공인 문형순 서장의 기억이 점차 도민들의 뇌리에서 안타깝게 사라져 가고 있는 셈이다. 이런 그를 우리는 그대로 보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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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어제 우즈벡전 축구를 보다가 카메라에 잡히는 청소년들을 보니 마음이 든든했습니다. 무슨일이됏든 열심히 하는, 얼굴가득 총명함이 가득한 젊은이들을보니 우리나라 미래의 영웅들이다 싶어 든든했습니다. 더이상 나쁜바이러스들로인해 우리나라가 상처받을일은 없을꺼라는게 제 생각이죠.
알려지지 않은 애국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