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제가 가입하고 유용한 정보를 많이 봤는데 궁금한 것이 있어 글을 씁니다.
여기 게시판에 질문하는 글 올려도 되는거죠?
일단 제가 고등학생이고 근현대사를 배우는데 지금 독립운동에 관한 부분을 배우는 중입니다.
독립운동 방법에 애국계몽운동과 항일의병운동 두가지가 있는데
제가 궁금한 것은 두 운동의 구체적인 사례 몇가지와
과연 어느쪽이 그 당시에 독립운동으로써 더 좋았을지 알려주세요
물론 양쪽 모두 나름 목표가 있고 어느쪽이 옳다 틀리다 할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 당시에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어 좋았을지 왜 그런지 궁금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항일의병운동이 독립에 더 도움됬을거라 생각하는데요.
저에게 도움을 주십시오.
참고로 저는 양쪽 모두의견을 주시면 더욱 감사드립니다 ㅋ
첫댓글 애국 계몽운동 같은 경우는 그 당시 제국주의 지배이론 중 하나인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그래서 실력이 있으면 독립을 하는거고 실력이 없으면 약육강식의 이론에 의해 일본의 제국주의 사상의 먹이가 되는거죠.애국 계몽운동가들 중 친일로 넘어간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애국 계몽운동이 중요한 이유는 신민회 때문이죠. 신민회 같은 경우 애국계몽운동도 했지만 무장독립운동도 지지했으니 경술국치 이후에 무장 독립세력으로 자연스럽게 흡수 됩니다. 전체적으로 신민회쪽 사람은 친일이 적습니다. 둘다 옳다 그르다 할 수는 없지만 친일로 많이 전환된 제 의견으로는 애국계몽쪽보단 의병투쟁쪽이 더 옳았다고 봅니다.
애국계몽운동은 이미 30년대에 실패한 운동입니다. 흔히들 신간회를 애국계몽운동의 시초로 보고 있는데 물론 신간회가 애국계몽계의 최초단체이긴 하지만 신간회의 본질은 애국계몽을 위해서 조직된 단체라기 보다는 식민지지식인회에 좀더 가깝고 애초부터 일본의 승인이라던가 일본의 식민지지식인관리목적도 겸사겸사한 그런 단체였습니다. 그러한고로 진정한 애국계몽인사들이 신간회에 포함되어 있기도 했지만 반대로 변절자들이나 아니면 심지어 일본의 연락책이라던가 2중스파이 혹은 식민통치옹호지식인들 역시 다수 포함되어 있었죠.
그게 해방후에는 신간회이면 죄다 독립운동을 한 것처럼 날조되어 버리지만요. 신간회 해소론만 봐도 신간회지도층 중 일부는 변절자라고 애눌어서 비판하고 있습니다. 대놓고 비판을 못하는 것은 당시 일제의 검열때문이죠. 그러한 점 때문에 이승만은 거의 신간회로 올뻔했지만 그 단체의 본질을 알아채고 결별했으며 이후 좌익인사들 중심으로 해소론이 퍼져서 신간회가 깨졌죠. 그리고 그 좌익인사들의 태반은 옥고를 치뤄야 했습니다. 안재홍 같은 경우엔 신간회에 친일파가 있긴하지만 그래도 신간회를 깨진 말자는 입장이었음에도 형무소를 들락날락하는 처지가 됐죠. 이후 몇몇 좌익(바로 그 신간회 해소론의 좌익)
이외에는 신간회를 통해 섭외되었기 때문에 조선지식인들중 친일이 아닌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여운형 정도가 감시를 받는 와중에서도 지하조직을 결성하려는 시도정도를 했었죠. 그러한 총체적 관점에서 보면 애초에 신간회는 윤치호, 이상재등이 식민지 지식인의 효율적 관리를 위해서 자활론 정도를 테제로 걸어서 유인한뒤 지식인들을 포섭하거나 회유, 아니면 협박 적어도 계열로 나뉘어서 관리하려는 시도로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그렇게 밖에 볼 수 없거든요. 그리고 그런 조직엔 '낚인게 죄'였죠. 이후 교계나 학계를 주도한 이들이 제멋대로 신간회의 본질을 호도, 그들의 신분을 독립운동가로 세탁하기 위해 내세운 것이 애국계몽
운동론이라던가 자강운동류입니다. 신간회의 명분(명분이야 뭘 못걸까요. 일진회도 한때 타이틀은 '독립'협회인데요. ㅋㅋㅋㅋㅋㅋ이런 개숑키들) 만 걍 고대로 가져와서 각 개별인사들의 행적에 대한 검증없이 물타기하려한 게 자강운동이죠. 걍 이거 다 쓰레기에요. 곧 청산될 역사에 불과하죠. 점차 개개인의 행적위주로 당시 인간들에 연구가 활발해질수록 이게 다 뽀록나버리잖아요. 당시 친일계 혹은 식민지 지식인들중에 검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진짜 독립운동을 한 사람은 이승만과 여운형정도가 거진 다라고 보는게 맞을 겁니다.
이승만은 본디 서재필, 윤치호, 박영효등이 걸은 미국유학파 친일계 혹은 친일외교계 의 길을 걷다가 미국에서 이들과 결별, 미국내 한인들의 도움으로 유학을 마친뒤 서재필과 같은 스파이활동용이 아닌 진성의 미국인으로써 미국국적으로 국내귀국까지 했지만 암것도 못하고 귀국한 케이스이고 여운형은 본디 신간회에 가입되어 일제의 관리를 받는 지식인으로써 협조아니면 감옥행을 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겉으로는 협조했지만 그나마 뒤통수칠 시도라도 한 것이고, 그 외에는 윤동주같이 옥고를 치른 인간이 아니면 죄다 친일파로 봐야죠.
결론은 애국계몽운동은 본디 친일계의 고도의 프로파간다전략에 의한 수작질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차라리 없었더라면 제2 제3의 윤봉길 됐을 사람들을 선차단한 그런 것에 불과합니다. 은영전의 오벨슈타인식 풀베기의 당근정책에 해당하는 것이죠. 1920년는 중국에서도 상해나 하얼빈에서 국민당과 일본계가 치열하게 프로파간다전쟁, 스파이워 등을 벌이던 시기인데 그러한 점에 대한 고찰이 전무하니 쌍팔년도 인간들이 그 견해가 아직도 남아있죠. 일진회 전신 독립협회처럼요. 독립문은 친일계가 조선 점령기념으로 세운 개선문인데 그게 아직도 광화문이라 믿는 바보들이니 뭐..... 이 뭐 병이랄 따름.
와우 ㅋㅋ 좋은 내용이네요. 감사합니다. 역시 제 생각대로 항일의병운동쪽이 더 나은 것같군요. 그래도 제가 중립적으로 보려고하는 것도 있고 애국계몽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는데
제가 어디서 들은건지 혼자만의 생각인지 확실지는 않은데 애국계몽운동은 먼 미래의 독립을 보는거고 항일의병 운동은 독립을 가까운 미래를 본다고 생각하는데
항일의병운동이 성공해서 독립후 혼란을 대비하는 부분에선 항일의병운동이 독립후 혼란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생각이였는지 알려 주실수있나요?
그런 전략따윈 없어요. 상해임시정부는 중일전쟁이 한창이던때에는 거의 명맥만 남아서 중국인정부서기(그러니까 요즘으로치면 경리)월급 줄 돈도 없어서 갤갤댈 지경이었고 김구조차 타이틀만 임정대통령이지 집도 없어서 남의 집에 얹혀살 지경이었습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김구등이 귀국했을 때 니네들의 독립운동은 귀족들의 장난에 불과함으로 정치세력으로써의 귀국은 불허 개인자격으로써만 입국해야 한다고 한 미군정의 엄포가 현실은 현실이었던게죠. 중일전쟁이전에으로 이미 모든 항일활동은 전멸한 것이죠.
이후의 항일운동은 기실 김구라던가 이회영, 안창호 이런 사람들과는 전혀 무관한 신세대들이 주도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수는 생각보다 많아요. 다만 이들은 거진 윤동주같은 꼴을 당했기 때문에 역사에 등장하지 못할 뿐이죠. 30년대후반~40년대당시 젊은 세대들은 반전이라든가 강압적인학원시스템 등에 반발 생각보다 제법 일제에 반항적인 태도를 취했었고, 그 활동방법역시 총기제작의 암살시도라던가 폭탄테러기획등 애초에 반항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진정한 테러리스트들의 탄생이었죠. 그리고 그 수역시 애초에 반전에 기인한만큼 되려 탄압이 더 심해진 전쟁말기가 되면 될 수록 활동 양상역시 더 과격해지는 꼴이였구요.
문제는 이들의 활동은 죄다 점조직 형태로 전혀 통일전선을 이루고 있지 못하였다는 점, 태반의 활동은 언론에라든가 사법계에 의해서는 그저 범죄행위로 기록되어져 그 인사들 그러니까 학생운동분자들은 걍 '조용히(무슨뜻인지 아실겁니다. ㅎㅎㅎㅎ)' 처리된게 문제였죠. 비유하자면 1940년대의 대한민국내 항일운동은 이미 PLO에서 하마스로 나아가는 그 중간정도의 여정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고로 어떤 의미에서는 김구의 임정을 내세운 한국정부에 대한 정통성주장역시 미군정의 반박대로 좀 말도 안되는 것이다 그렇게 볼 수도 있었죠. 만약 일제의 통치가 좀더 길어졌더라면 그러니까 이들 징용세대들이 중장년이 될때까지
일본의 통치가 이어졌더라면, 이건 대한민국엔 악재이지만 이러한 지하활동이 결집하여 하마스같은 형태를 지녔을수도 있겠죠. 그러나 그건 가정에 불과하고 하여간 김구등은 어찌어찌해서 목숨을 연명한 것이지만 중일전쟁이전에 이미 대한민국의 모든 독립시도는 죄다 뿌리가 뽑힌게 현실이므로, 일본으로부터 국권을 이어받은 뒤의 각론 이따위 배부른 걱정을 할 수도 없고 그게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40년대이후 반일운동을 전개한 신세대들중 대표적인 인물이 좌익중엔 김일성 우익중에는 광복군의 멤버들인데(혹자는 광복군이 임정의 조직인 것처럼 하지만 실제로는 단지 인적관계에 있어서
한때 임정산하기관의 인물이 광복군이 된 것은 사실이나 임정과 광복군의 조직으로써의 연관성은 그닷없다고 봅니다. 다만 이름 몇자 있으나마나한 직책만들어서 넣어준정도.) 김일성계나 광복군계나 너무 티나게 적군2중대, 국민당2중대일 뿐이어서 반일을 하고 있긴 하지만 실상은 그 주인의 의향에 의한 것이거나 아니면 일본에의 적대라는 한시적 목표에 의해서 공동투쟁한다고 밖에 볼 수 없는 형편이라 당최 이것이 궁극적으로 한민족을 위한 테제를 지닌 집단이다 이렇게 볼수가 없는 판국이고, 다만 항일을 한다는 의미뿐이니 당연지사 한반도정체에 대한 고민은 전무하고 현실적으로도 김일성이나 김원봉, 장준하 이들은
고런 고민을 하기엔 한마디로 짭밥이 안되었다는 문제까지 하여간 그랬었습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에서 송건호 교수에 의하면 결국 일본의 철수뒤에 한반도의 갈길을 실질적으로 모색하는 집단은 대략 송진우, 김성수의 친일지주한민당계(얘네들의 계획은 일본철수가 아니라 일본이 자치를 부여한다는 것 다시 말하면 한국이 일본의 위성국 혹은 괴뢰국으로 독립할 상황을 염두에 둔 그런 것이었습니다), 여운형계, 그리고 박헌영의 공산당계 요렇게 3개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나머지 조직은 죄다 지리멸렬(안창호의 조직이나 이승만의 조직)이었죠. 그나마도 공산당은 조직은 있지만 비전이나 플랜은 전무했다고 하구요.
아.... 뭔가 슬프네요 ㅋㅋ 그러면 다른 문제는 생각치 않고 일단 독립이 목표 였던거군요?
저는 미국이 임시정부사람들을 미군정이 막아서 미군정이 나쁜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나름 이유가 있었네요. 김일성은 북쪽에서 활동하고 좌익 세력이라서 소련한테
따로 압력받거나 활동못하게 한것은 없었나요?
미군정이 임시정부를 캐무시한게 이유는 있다는 거지 그게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애초에 2차대전이 1차대전때 진작에 민족자결주의 원칙과 반열강주의로 갔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전쟁인데 베르사유체제로 되려 반동적인 국제질서를 수립했기 때문에 나온 거잖아요. 그리고 임정은 그런 국제사회의 삽질만 아니었더라면 다시 말해서 만약 1차대전직후에 우리민족이 독립할수 있었더라면 당연히 우리나라를 대표할 정부였으며 그게 아니더라도 2차대전 전후체제에서 우리민족의 의사가 임정을 지지하는 한 당연히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울나라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한은요.
김일성은 소련의 퍼펫, 이승만은 미국의 퍼펫인데 소련이 김일성에게 압력을 가하고 할 필요가 없죠. 협력이라면 모를까요. 여운형의 건준위가 미군정에 의해 처참하게 박살난건 확실히 미국의 탓이지만요, 미소역시 이후에는 한반도현실을 인식하고 나름의 제안을 하긴 했었습니다. 바로 신탁통치죠. 문제는 당시의 국제적 정황에서 반탁은 한반도에 냉전의 기운을 받아서 불러일으키는 것이면 찬탁은 민족결집의 일말의 희망이었는데 애초에 냉전론자인 이승만이 반탁, 그리고 당시 정세상 국민당중국의 남쪽에 나름 좌익정부수립의 가능성이나마 열어두려한 소련의 의향을 받은 김일성이 찬탁을 한 것은 양대 냉전세력의 이해관계를 직접적으
반영하는 것일 뿐이지만 본디 민족주의자인 김구가 그만 한반도에 양대냉전세력간 구도를 대치시키는 반탁에 동조한 거였습니다. 근대사 역사가들에 의하면 김구는 당시 국제정세에 대한 지식이 너무 떨어지고 눈앞의 것만 보는 경향이 있었다고 하는데 김구의 반탁이 바로 그런 것이었죠. 그러한 고로 김구는 앞잡이인 (반탁인)이승만의 2중대역할만 하게 되어 이후 한반도가 둘로 쪼개지고 냉전구도로 돌아서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후에 북한과의 외교회담등으로 이걸 어찌 덮어보려 하지만 그 땐 이미 너무 늦어있었죠.
결론은 당시 정세에서 김일성은 소련의 앞잡이, 이승만은 미국의 앞잡이이며, 여운형세력은 미국손에 의해 (직접)박살, 박헌영세력은 김일성계에 의해 (간접적으로)흡수, 숙청, 해체, 한민당계는 이승만의 비호하에 이승만 2중대화, 김구계열은 국민의 지지를 없고 캐스팅보드를 잡을 기회가 있었으나 통찰력부족으로 다 놓치고 결국 이승만-한민당계에 의해 박살나는 처지가 당시의 역사입니다. 상당히 안습이죠.
http://durl.me/9krrj 일제 초중기 무력투쟁의 중심에 있었던 이회영 일가의 내용입니다. 첨언을 하면, 애국계몽은 의병투쟁의 반성에서 나온 것으로 한일 합방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국권을 점차 강탈하고 왕실을 허수아비로 만드는 일제에 항거해서 의열차게 일어난 의병은 일제에 의해 처참하게 제압됩니다. 아무리 의병투쟁을 해도 일본군에게 기스도 못내고 괴멸을 하니 나온 것이 실력양성론(이건 이후 애국계몽)과 준비론(무장투쟁론), 외교 노선입니다. 세다 기본적으로 현 조선인의 실력으로 일본에 대응이 않된다고 인정하고 그 반성을 기반으로 합니다.
우선 실력양성은 조선민족은 덜 개몽되어 있으니 좀더 배우고 지식을 쌓고 산업을 양성하며 애국심을 지켜나가는 등 조선 민족 사회의 내부의 실력을 쌓아 기회를 보아 독립을 이루자는 것입니다. 주로 서구(주로 미국)에 유학을 하고 돌아와 조선사회와 선진국의 차이를 실감을 한 지식인 계층이 많았습니다. 안창호, 서재필등 서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뿐만 아니라 조선교육회, 한글학회,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등도 다 이쪽 계열 독립운동입니다. 그런데 이쪽의 문제는 변절자가 많이 생겼다는데 있습니다. 왜냐하는 십수년씩 수십년씩 교육하고 산업을 발전시키고 해도 점점 일본과의 격차가 줄어들기는 커녕 늘어나는게
보였거든요. 특히 일본이 중국, 동남아, 미국을 상대로 승승장구를 하던 30년대부터.. 이때부터 일본과의 격차를 좁혀 일본에 맞먹는 실력을 기르는게 힘들다고 생각되자 나온 차선책이 조선참정론과 조선자치론입니다. 조선참정론은 이왕이렇게 된거 일제에 협력해서 일본인과 똑같은 지위를 획득하자는 것이고, 조선자치론은 독립은 힘드니 일제로부터 조선자치를 얻어서 조선인에 의한 통치를 하자는 것이죠. 뭐.. 둘다 말도 많고, 반발도 많고, 욕도 많이 먹었지만(당시나 지금이나) 둘다 적극친일로 빠질수 밖에 없는 루트이고, 어쨌든 일제에 협력함으로써 조선독립을 방해했다는 점에서 처벌받아야할 친일행위입니다..(만.. 쩝..)
친일의 폭압적 강압적 회유에 흔들린 지식인과 지도층에게 친일의 명분을 주어 쉽게 넘어가게한 점도 큽니다. 다음 준비론은 *실력양성*(교육개몽과 산업발전)을 하되 무력투쟁준비도 같이 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일본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걸 알고 다른 국가(중국, 러시아 등)가 일본과 전쟁이 있을때까지 *무력준비*를 하고 있다가 전쟁이 생기면 재빨리 참전해서 같이 싸워서 조선의 독립을 이루자는 것입니다. 군사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조선에서는 않되고, 그렇다고 너무 먼 곳(미국이나 먼 중국지역)은 않되기 때문에 주로 만주에서 자리잡게됩니다.
뭐.. 이걸 일제가 몰랐던 것도 아니어서, 3.1운동으로 조선독립운동에 경각심을 갖게된 일제는 그 다음해 만주에서 학살을 벌여 완전 토벌해버립니다. 물론 도망치던 독립군이 토벌하기 위해 추격하던 일본군을 습격하여 승리한 청산리전투도 있지만, 승리한 전투가 꼽힐정도이니 대부분.. 어쨌든 일제군을 피한 만주 무장단체는 자유시에 집결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지만, 자유시 참변으로 많은수가 사살, 포로가 되고 나머지는 붉은군대에 편입됩니다. 여기서 조선말~21년까지 이어진 무장투쟁 조선인세력은 사라지고, 이후 팔로군, 중국군, 소련군에 편입된 조선인부대로 이어나갑니다.
그들중에 가장 일본과 치열하게 싸운 곳은 팔로군(동북항일연군)쪽이지만, 이들은 해방뒤 북한으로 들어가 북한군 주력으로 625를 일으켰다는게 주된 시점이고, 소련군 쪽은 소련과 일본이 불가침을 맺었기 때문에 그닥.. 중국군쪽은 장개석이 전투보다는 선전, 심문, 통역등으로 많이 이용해서(전투가 없었다는건 아니지만..).. 각 분야는 알아서 찾아보시고.. 마지막으로 외교노선은 준비를 해봐야 큰 소용없다 강대국에게 호소해서 이를 통해 독립을 이루자는 것입니다. 헤이그 밀사라든가 이승만, 서재필의 미국 활동이 이쪽이죠.
한국 광복이 강대국(미국과 연합군)에 의한 것을 보면, 이쪽(외교노선)이 견해가 맞기는 한듯보이지만, 단정적으로 성과가 전혀 없었습니다. 강대국에 의한 한국 독립은 결국 연합군에 의한 것이고, 연합군 내의 중국(장개석)이 주장에 의해 보장되었으며,(루즈벨트, 스탈린은 out of 안중, 처칠은 조선독립 반대) 장개석은 김구의 독립운동(윤봉길의사의 도시락 폭탄)에 감명을 받아서였죠. 결국 실력양성운동(어설픈 독립 무장투쟁은 조선민족의 역량을 훼손시키는 것)과 외교노선((테러와 같은)폭압적 방법은 국제적 인식을 나쁘게해 조선독립을 방해함)쪽이 욕한 무장투쟁, 그중에서도 극단인 테러 독립운동에 의해 해방되었다할 수 있죠.
우리모두님 양쪽 의견 모두 적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ㅋ 애국계몽운동가들의 변절하는 경우가 얼마나 됬을까요? 시인들 중에서는 그래도 저항하는 분들도 있었는데 민족말살기에 많이 절필하거나 친일로 돌아 섰다는데 얼마나 많은지 궁금해서요~
거의 다 입니다. 저항했다고 알려진 몇몇을 제외하면 한반도에 있었던 거의 다죠. 모진 고문도 끔찍할 정도죠. 지도자급 명성이 있는 경우는 좀 나은데, 네임벨류가 낮은 층을 보면 고문으로 인한 사망이 부지기수.. 명성이 있어도 사망한 경우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죽게하지 않는다 뿐이지 홍난파는 몇달 갖히지 않았는데 전향서 쓰고 나와 병원을 전전하며 몇년간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고, 박헌영은 모진 고문으로 일본 경찰이 볼때도 몸이 걸래짝이 되고, 재정신이 아니다라고 생각될 정도였죠.(그 몸으로 한겨울에 모스크바로 탈출한 박헌영이 진정한 독종..) 아무튼 걸리면 죽거나 죽을 정도의 고문이 있던 시절이죠.
생활고도 큰 문제죠. 창씨 개명을 않하면 배급을 주지 않으니 당시 대부분의 조선인은 창씨개명을 할수밖에 없었죠.(않하면 굶어죽을 수 밖에) 찟어지게 가난해서 배고프고 힘들고, 걸리면 죽거나 배신할 때까지 끝없는 고문이 기다리는데, 조선 독립운동도 지리멸렬하고 일제는 승승장구를 하니 수십년 반일 독립운동을 해도 독립의 희망은 언제가 될지 가능은 할지 먼지크기만큼도 보이지 않고.. 독립운동가에게 그런 상황이 끝없이 계속 된거죠.. 개명 않하고 끝까지 저항한 사람의 대표적 인물이 한용운인데, 이 분은 친일파의 대표적 인물인 방응모랑 절친으로, 이분의 집과 생활비는 모두 방응모가 지원해줬죠.(같이 자주 놀러다니고..)
그러고 보면 당시 광산업자인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한 이유가 당시 일제에 체포된 안창호의 국내 직책(조선일보 사장)을 마련하기 위해서라고 하죠.(부 사장은 이광수.. 이때까지는 이광수는 이름높은 독립운동가.. 그런데, 의외로 오래 갖혀있고, 풀려난 뒤에도 고문 휴유증으로 고생하며 휴양을 가서 사장직을 방응모가.. 이때부터 조선일보의 흑역사 시작..안창호는 얼마뒤 수양회건으로 또 들어갔다 나와 얼마뒤 고문 휴유증으로 사망..) 안창호가 감옥에 있을 때, 감옥 수발, 석방 로비를 한 사람은 윤치호.. 윤치호는 미국으로갈 연줄이 있을 때마다 이승만에게 생활비및 활동자금을 보냈죠. 친일파와 독립운동가의 절친관계ㅋㅋ
광복까지 계속된 친일로 빠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는 외국에 있거나, 일제에 구체적 적대행위를 하지 않지만 회유에 강단있게 버티면서 지원해주는 거부 친일 절친(또는 친일 거부 집안)이 있거나, 아니면 정말 아무도(동료도, 총독부도) 모르게 숨어있던가..
이승만은 본디 서재필, 윤치호, 박영효등과 함께 유학파 친일파로써 친일계의 최고급 이너써클에 본디 속하여야 할 자인데, 그런 그가 그냥 전향도 아니고 일본이 건드릴래야 건드릴수 없는 미국으로 전향했으니 재전향시킬려고 별의 별 짓을 다하는 것이야 너무 당연한겁니다. 1차대전 대전의 미일관계가 가쓰라-태프트조약으로 대표되는 협력적 관계였다면 1차대전 이후엔 파나이사건이나 중국철수요구등 미국이 일본에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관계가 되어버렸는데 다름 아니라 이승만이 미국으로의 전향이라는 태크를 탔으니 당연히 윤치호로써야 후딱 돌아오라고 할 수 밖에요.
이승만을 지원하는 윤치호의 입장은 비유하자면 일본나가있는 김정남을 귀국하라고 꼬시는 김정일 똘마니의 입장이랄까요. 뭐 애초에 이승만이 미국쪽에 포섭된 정황역시도 그렇고 그런 이유였다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1차대전 이전엔 일본의 식민계 지식인들이 미국쪽을 거쳐가는 것을 그저 보고만 있었는데 이후에는 미일관계가 좀더 미묘해지므로 미국쪽에서 조선식민계지도자급에서 최고급인맥에 속하는 그를 회유했을 수도 있죠. 1차대전이후 베르사유조약이라는 최악의 반동적인 외교협정으로 죽쒀서 개줬다는 인식을 하게 된 미국의 입장에서 일본은 전형적인 베르사유조약의 기득국으로 열강으로 분류해야 할 그런 국가에 불과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1차대전이후 미일관계가 미국의 고압적 자세로 귀결되죠. 이전엔 일본계의 귀여운 짓을 나름 잘 봐줬다면 이제는 고따구 사탕발림에 안속는다가 1차대전 이후의 미국의 기본적인 일본에 대한 태도랄까요. 하여간 그런 상황에서 최고급 조선식민통치그룹중(당시 일본의 최대 식민지가 대만과 한국 이 두 곳입니다.) 한명에 컨택트해서 미국계로 만들어 버린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라는 거죠. 그 것을 다시 돌리려는 시도도 당연한 거구요. 이승만이 미국인인 이상 죽여버릴 수도 없고 단지 후원등을 통해 회유하는 것만이 유일한 수이니 그런 겁니다.
그리고 안창호랑 윤치호가 친한 것은 안창호가 본디 그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안창호의 출생성분을 논하자면 간단히 서재필, 윤치호, 박영효, 이승만이 MBA출신이라면 안창호는 어학연수생출신인 그정도의 차이입니다. 안창호의 성향은 어떻냐면요 그 유학파애새끼들이 대충 뭐할꺼다 이런게 각이 나오니까 그것에 적당히 끼는 척하면서 재미도 보고 그러면서 그걸로 비밀결사만들고 하여간 앞으로는 빨면서 뒤로는 저항하는 전형적인 이중스파이같은 사람입니다. 이사람은 독립운동계의 이중스파이죠. 사교계에도 끼고 각종 사업이권에도 끼고 그렇게 하는요. 하여간 그런 그가 평양학교에 윤치호불러서 교장시켜주고 이건
너무나 당연한 거란 겁니다. 그래야 의심안받고 독립자금마련하는 사업가행세를 할 수 있으니까요. 그게 윤봉길 거사로 뽀록난게 이미 1932년인데 윤치호가 걍 가만 있었을까요? 안창호야 말로 완죤히 친일계의 뒷통수를 후려갈기는 그런 사람이었는데요. 윤치호의 30년대 옥고라던가는 전형적인 프락치짓이다 그렇게 밖에 볼수 없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윤치호가 안창호의 말년에 그건 실상은 안창호를 죽어라 고문하면서 안죽게 하는 그런류의 지원이었다 전 그렇게 봅니다. 실제 고문기법에서 사람 무조건 쥐패는게 고문아닙니다. 사람은 극한 상황에서는 고통을 뇌가 차단하도록 그렇게 설계되어있습니다.
60-80년대 독재하던 애들의 고문에도 그러났지만 고문할려면 회복도 시켜줘야합니다. 그래야 다시 고문할때 막말로 '아프거든요.' 회복안시켜주면 통각이 마비되니까요. 윤치호의 안창호 말기의 그짓은 바로 그거입니다. 그렇게 생각해야 앞뒤가 맞죠. 일본항복하니 일본도로 지뱃돼지 가르는 애가 갑자기 안창호앞에서는 한없이 자애로워졌을리도 없고 이미 윤치호는 안참 이전에 친일파로 낙인찍힌지가 오래인 인간말종인데요.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요인귀국, 12월 6일 윤치호 자살 이건 인과관계가 있다고 보는게 맞는 설명이죠.
다시 말하면 안창호=국내항일독립운동의 마스터브래인으로 애초에 그렇고 그런 목적으로 친일계에 접근, 안창호의 국내행적 1호격인 평양학교의 교장에 윤치호를 임명, 친일계입장에서는 아 저새끼는 외국물좀 먹구와서 울한테 빌붙으려는 애새끼다 돈만 주면 별짓을 다할 놈이군 좋아써 그래 너 띄워준다 능력치도 은근히 쓸만한 사냥개구먼 그런 이미지를 팍팍 풍기면서 친일계에 접근한 진정한 열혈투사이고(안창호 초기 사진만 봐도 안창호는 그렇죠. 제복입고 찍은 사진이나 이런거 보면, 이사람이 독립군맞어라는 생각이 들정도의 그런 사람) 거기에 첨부터 윤치호등은 낚인바가 된바
후에 이 안창호를 얼마나 윤치호가 찟어죽여버리고 싶었는지야 말로 설명을 못하는 정황이죠. 그게 바로 그 안창호 형무소의 돈이라 봅니다. 개패듯이패고 이제 잘먹이는거죠. 그래야 다시 개패듯이 패니까요. 뭐 이게 정석적인 고문기법입니다. 근데 그게 해방이 되니까 윤치호가 안창호가 만든 학교의 교장이었다거나 안창호사식보조해주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날조가 된거죠. 아마 그 12월 6일의 할복(차라리 목이라도 매달지 ㅋㅋㅋ 그래야 후세인들이 속아줄거 아냐. ㅋㅋ 아오 원숭이족속들은 이래서 멍청해 ㅋㅋㅋㅋ 진짜 이거 아니었으면 후대들은 죽었다깨도 얘가 어떤 인간인줄 몰랐을꺼)이 아니었으면,
윤치호가 어떤 인간인지는 죽었다 깨도 몰랐을 겁니다. 근데 뒤지기 전에 빙신짓해서 이넘아가 한 악행이라든가가 다 뽀록난거죠. 뭐 임정요인귀국후 자살 이건 안창호랑 최악으로 엮인게 윤치호였다는 점만 고려해도 왜 얘가 그때 뒤졌는지야 뻔히 각이 나오는거죠. 안 그랬으면 얘가 한 2중스파이짓이나 (구한말당시)로비활동, 뒷구멍으로의 독립단체에 대한 공작등이 다 탄로났을테니까, 그럼 한국일제공간사가 완전히 새로써야 할 지경이 되니까, 그래서 칼로 배가른 겁니다. 허벌나게 독한 새퀴이고 진짜 악질오브 악질이죠. 그걸 왜 당대인들은 몰랐냐고 하면
당대사람들에게는 구한말당시 독립협회, 일진회등이 치열한 조선왕조에 대한 공작이 있었긴 하지만 이후 36년간 강압통치를 받은 덕에 그러한 류의 정체에 대해서는 좀 너무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울나라 일반인들이 정치의 그렇고 그런 속성에 대해 실질적으로 눈을 뜬 것은 예의 그 군사독재시절 그걸 겪고 나서죠. 전두환의 민주정의당이 민주적이지도 않고 정의롭지도 않은 당이다 이런 당연한 테제가 구한말공간사나 해방공간사에서는 결여되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독립협회=독립을 위한 당이다라거나 윤치호같은 인간이 거진 창업멤버격인 신간회가 하부구조는 그 명분에 의해 고취된 젊은이들로 구성되어도 지도급의 테제나 실창립이
념은 다른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었죠. 그런 결과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윤치호, 서재필등을 독립투사로 넣어주는 대만행을 떳떳이 저지른거구요. 뭐 무식하면 용감하달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