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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은총
시편 29:1-11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삼위일체주일이다.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신 모습, 즉 세 가지 위격으로 나타나심을 기념하는 주일이다.
삼위일체 교리를 머리로 이해하는 일은 참 어렵다. 생활 속에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경험하며 사는 일은 놀라운 신비이다. 주후 4세기, 세상의 땅끝 아일랜드에 처음 복음을 전한 성 패트릭은 가장 흔한 존재 속에서 하나님을 배우고 경험하도록 하였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그 나라에서 가장 흔한 토끼풀에서 삼위일체의 신비를 느꼈다. 토끼풀은 아일랜드의 국화, 샴록이다.
유대교는 ‘하나’(에핫드)를 강조한다. 그리스도교의 숫자는 ‘셋’이다. 1과 3은 유일신교와 삼위일체 신앙의 차이이다. 유대교는 예수 그리스도도, 성령도 부인한다. 오직 하나의 모습이신 하나님만을 믿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한 분이며 동시에 세 모습으로 존재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
‘삼위일체’는 세 가지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존재 양태이다. 성부는 나를 위하시는 하나님(God for us), 성자는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God with us), 성령은 내 안에 계신 하나님(God in us)이다.
삼위일체 신앙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핵심체계이다. 내 인생에서 성부, 성자,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일상에서 가슴으로 경험하기를 바란다.
1)
삼위일체주일 본문인 시편 29편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찬양시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에 주님을 찬양한다.
시편 29편은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 먼저 엎드려 예배하라(1-2).
- 불안한 삶 속에서도 하나님께 집중하라(3-9).
-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얻고 평화를 누리라(10-11).
먼저 모든 것에 앞서서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그의 이름을 찬양하고, 엎드려 예배하라고 권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니 스스로 권능을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2).
우리가 입어야 할 거룩한 옷은 무엇일까? 구별된 옷으로, 구별된 마음이라고 볼 수 있다. 성경은 평화의 옷을 입고 있다고 한다. 하나님과 일치하려는 경건한 삶의 태도일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예수님을 가장 닮았다고 평가를 듣는 사람은 성 프란체스코이다. 그는 부유한 비단 장수의 아들이었는데, 그가 신앙의 길로 들어선 후 자신의 화려한 옷을 아버지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평생 낡은 누더기를 걸치고 살았다. 그가 걸친 누더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거룩한 옷이었다. 거룩한 옷은 값비싼 옷도 아니고, 화려한 옷도 아니다.
거룩한 옷은 깨끗한 예복이나, 높은 사람이 입는 신분을 나타내는 옷이 아니다. 거룩한 옷은 하나님께 나아오는 진실한 마음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신실한 생활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께 참되게 예배할 수 있다. 프란체스코가 하나님 앞에서 다시 입은 것은 바로 샬롬의 옷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옷을 입는다. 사람들은 입은 옷으로 신분을 과시하고, 자신이 하는 일을 드러내며, 유행에 따라 자기 표현을 한다. 성경은 입은 옷 모양으로 차별하거나 구분하지 않는다. 다만 거룩한 옷, 즉 자신이 고백하려는 아름다움 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권면한다.
2)
시편은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하라고 하면서, 이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이 ‘여호와의 소리’로 함께 하신다고 하면서, 무려 일곱 번에 걸쳐 여호와의 소리를 반복한다. 그 소리는 경외감 그 자체이다.
다윗이 고백하는 하나님의 소리들은 인간의 과학적 지식이나 만인의 상식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특별한 성자나, 특별한 시대에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라. 하나님은 나 같은 보통 사람들과도 함께 하신다. 온 세상과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지금 내 앞에 계신다. 시편은 여러 가지 자연 현상의 파노라마를 들려준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증거하려는 것이다. 그 가운데 여호와의 소리가 있다.
그 하나님의 음성은 많은 물, 우렛소리, 백향목, 레바논의 산, 불꽃, 광야, 숲 등 어디에서나 임재하신다. 이 자연의 음향은 창조와 심판 사이, 그 한가운데 존재하는 다양한 소리들이다.
예전에 자연의 소리는 두려움과 공포였다. 그래서 범신론이 생겨났다. 다신론(多神論)은 고대 사회의 중요한 신앙 내용이다.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나, 두려운 존재는 모두 신적인 대접을 받았다. 현재도 그런 신앙 형태가 존재한다.
그러나 성경은 단호히 말한다. 아니다. 모든 천지자연과 우주 만물은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이다.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경배와 찬양의 대상이 아니다. 성경의 계명에서 우상의 형상과 숭배를 엄히 금지한 이유이다.
때로 자연의 소리는 얼마나 위협적이며, 두려운가. 그러나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은 그 모든 소리는 하나님의 음성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시인은 소리들 가운데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임재하시며, 하나님의 위엄이 삼라만상의 합창 속에 함께 하신다고 고백한다. 내가 하나님을 믿으니 어떠한 어려움과 고통 중에도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더라는 것이다.
두려움으로 가득한 자연 현상조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로 느낄 수 있다.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9).
시편 29편의 결론은 이렇다. 온 세상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바로 우리를 지으신 분이시며,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고, 힘과 평강의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거룩한 옷을 입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므로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해야 한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은 기쁨의 의무이다.
시편 29편에는 짧은 분량이지만 ‘여호와의 소리’란 표현이 7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그 소리는 크고 위엄이 있다. 세상과 만물 중에서 여호와의 소리를 듣는 것은 쉽지 않다. 만약 커다란 소리 가운데 들으려고 한다면 더욱 실패하고 말 것이다.
라틴 속담에 “소리는 많으나 음성은 적다”란 말이 있다. 소음이 가득한 세상이지만 여호와의 음성은 종종 ‘세미한 소리’(왕상 19:12)로 다가온다. 내 목소리를 더 낮추고, 내 귀를 더 기울여야 하는 이유이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신다. 들을 귀가 복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체험한 사람들의 증언을 담고 있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이 느낀 일차적인 반응은 두려움이었다.
옛 사람들은 무서운 자연 현상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느꼈다. 욥기(37:2-5)에 따르면 옛 사람들은 천둥을 하나님의 음성과 연결시키기도 하였다. 우상 숭배는 파괴와 공포 때문에 시작되었다.
현대인은 자연을 극복하는 과학 세계에 살지만, 여전히 두려움이 많다. 사회 안전망이 사람들의 염려와 근심을 없애지 못한다. 다만 사람들은 점점 불감증을 앓게 되었다. 전쟁 위협이든, 대형 재난이든, 치안 부재의 사건이든 둔감해졌다.
최근 끔찍한 사건을 보더라도 당장은 크게 호들갑을 떨다가 조금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둔감하고, 무감각해진다. 사람들이 강심장이 된 것일까? 아니다. 오히려 이웃과 공동체는 점점 사라지고, 자기 내면의 빗장을 닫아걸었다.
사람들은 평화의 하나님에 대한 절실한 마음을 표현하지 않는다. 평화에 대한 목마름이 없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무거운 중병이다.
신앙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사람들은 자기 구원의 문제까지도 계속 ‘설마'라는 불확실성에 의지하고 있다. 위험도 예방하는 일보다 닥치고 나서 후회하는 사람이 많다. 사람들은 썩어질 것을 위해 한 푼 두 푼 재산을 모으는 일에는 마음을 쓰지만, 영원히 사는 생명에 투자하는 데는 매우 둔감하다. 그동안 설마와 우연의 법칙을 진리로 알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시편 29편에서 다윗은 증거 한다. 일상과 자연 속에서 듣는 하나님의 소리는 자기 백성에게 분명한 가르침을 베푸신다. 인간이 경험한 그 소리는 더 이상 두려움과 공포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뜻을 알려주는 음성이었다.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어거스틴의 경험은 재미있다. 어거스틴은 평생 삼위일체 교리와 씨름한 초대교회의 신학자이다. 그의 방황은 유명하다. 어느 날 그는 자기 영혼의 비참함을 경험한 후 무화과나무 밑에 쓰러져 하염없이 울었다.
그때 담장 밖에서 자기를 향한 소리를 들었다. “톨레레게, 톨레레게” 이는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라는 뜻이다. 어거스틴은 그 소리를 하늘의 계시로 알고 집 안으로 들어와 성경을 펼쳐 첫눈에 들어온 구절을 읽었다.
어거스틴을 회심으로 이끈 말씀으로, 바로 로마서 13장 13-14절이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어거스틴은 이 말씀을 읽은 후 확실한 빛이 그의 마음에 들어왔고, 모든 의심의 그림자를 몰아냈다. 성령의 은혜가 그의 마음에 함께 하셔서 그는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 그는 평생 거룩한 옷,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살았던 신앙의 모범이 되었다.
중세와 근대를 잇는 위대한 영성가 이그나티우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한 음성이 우리를 위로할 때, 평화와 고요함과 확신과 예배를 우리에게 가져올 때,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한 음성이 우리를 쓸쓸하고 혼란스럽고 무질서하고 걱정스러운 상태로 내버려 둘 때,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밀어내기 때문이다.”
누군들 하나님 앞에서 오만할 수 있을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수 있도록 꾸준히 연습해야 한다. 마치 피아노를 배우는 어린이가 기초 피아노 교본인 바이엘을 ‘띵 똥’ 거리듯이, 마라톤을 결심한 사람이 조금씩 ‘뛰고 걷기’를 반복하면서 서서히 거리를 늘려가듯이 우리는 점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그러니 때로는 침묵하심으로, 때로는 말씀하심으로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라는 것이다.
3)
오늘은 웨슬리회심기념주일이다. 존 웨슬리는 ‘은총의 수단’이란 설교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은 성경을 찾으면서 기다려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어떤 개인이 성경을 읽고, 듣고, 묵상할 때. 하나님은 자기와 대화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시고, 또 은총이 전달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신다. 따라서 웨슬리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적어도 하루에 두 번씩은 하나님 말씀을 듣는 훈련을 하도록 요청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죄를 용서하고 회복할 뿐만 아니라, 성령 안에서 우리의 삶 속에 능력을 부여하tl는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이다.
존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였다. 그는 인생을 ‘돛’과 ‘노’(櫓)로 움직이는 배로 비유한다. 돛이 바람을 타면, ‘순풍에 돛 단 듯’ 행복하다. 그러나 바람을 등진다면 그 배는 아무리 쉴 새 없이 노를 진다고 한들 그 수고가 고달프다.
하나님의 은혜가 배의 ‘돛’이라면, 인간의 수고는 ‘노’이다. 존 웨슬리는 말한다. “은혜의 바람을 타되, 노젖기 역시 게을리 하지말라.”
우리는 늘 삼위일체 은총을 반복하며 고백한다. 대표적인 것이 삼위일체 축복문이다. 성경에서 삼위일체 축복문은 우리에게 필요한 세 가지를 말씀하신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친교)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다윗은 시편 29편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복 내리시기를 바라는 말로 맺고 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11).
평화는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의 샬롬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선지자들은 우리의 삶 속에서 샬롬을 이루는 법을 가르쳐 준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차고 넘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갈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샬롬을 주신다. 내 안에 불안이 깃들 때 평안을 구하라. 내 연약함을 든든히 세워 주시는 평강을 구하라. 모든 관계 속에서 평화를 구하라. 이것을 내 개인적인 차원 뿐 아니라, 사회적인 영역에서도 평화를 위해 힘써야 한다. 샬롬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슬로건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평화이다. 그 결론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의 복’(샬롬)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 샬롬을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기쁨을 회복하기를 원하신다. 여러분이 그 주인공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