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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곰례야
때는 1979년, 새마을 운동의 바람이 휘몰고 지나간 농촌마을 -.
초가지붕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고 곳곳에 신작로가 들어선 농촌은 ‘근대화’되었다. 하지만 그 근대화된 농촌엔 오히려 젊은이들이 줄어들었다. 이촌향도(離村向都)의 바람 속에서, 도시에는 남부여대(男負女戴), 살 길을 찾아 상경한 촌사람들이 넘쳐났다. 이른바 신흥 빈곤계층인 도시빈민들 -. 그들은 도심 속의 빈민촌, 달동네에서 막연하게 불투명한 미래를 꿈꾸었다.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 곰례도 그렇게 서울살이를 시작한다.
시골도 보통 시골이 아닌 깡촌에서 올라온 곰례. 그 ‘컨트리스러운’ 캐릭터에 정윤희란 배우는 너무 예쁘고 도회적인지도 모른다. 주인집 아들역의 노주현 역시 장애를 가진 도시빈민치고 지나치게 세련되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간판급 인기배우에 연규진, 김인문, 서승현, 사미자, 김형자 등 탄탄한 조연들이 뒤를 받쳐준 드라마 ‘야 곰례야’는 감칠맛나게 재미있었고 인기도 좋았다. 오죽하면 출연한 배우가 극중 인물의 이름으로 개명까지 했겠는가.(극중 마영달 역으로 나온 탤런트 이성웅은 드라마 출연을 계기로 아예 마영달로 개명을 했다고.)전병식 연출, 나연숙 극본의 일일연속극,
‘야 곰례야’는 매일 밤 8시 30분부터 9시까지 방송되던, 거점 프로그램이었다. 드라마 시청률이 뉴스 시청률과 직결된다는 시간대, 첫 방송은 TBC에서, 마지막 방송은 KBS에서 나갔다. 드라마가 방영되던 중에 언론통폐합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3공화국 말기, 경제개발의 환상이 반민주적 정치행태에 퇴색될 무렵에 시작돼, 12․12사태가 발생할 무렵에 끝난 드라마. 그 시기에 경제성장의 그늘이라 할만한 도시빈민 소재의 드라마가 방영된 것이 의아스러울 법도 하지만 ‘야 곰례야’는 성장의 그늘을 비추되 우울하지 않았다. 코믹터치로, 정겹게 살아가는 달동네 사람들을 보여준다.
마당을 가운데 두고 예닐곱 개의 방이 다닥다닥 들어서 있고 그 방하나가 곧 한가구이며 세대가 됐던 70년대의 주택, 드라마의 주 무대는 바로 그 벌집이다. 집주인은 장애가 있는 아들 노주현의 신부감으로 고향마을의 순진한 처녀 곰례를 불러들인다. 곰례가 새로 만난 이웃들은 중국집 배달부부터 다방레지까지 다양한 직업을 가진, 하지만 하나같이 아직은 성공하지 못한 사회기층민이다. 도회생활에 지쳐 때론 그악스럽기도 하지만 근본은 한없이 인간적인 사람들. 그들과 정을 나누며 도시생활을 헤쳐가던 곰례가 결국 잃어버린 뿌리를 찾아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으로 드라마는 끝난다.
곰례 역의 정윤희는 당시 장미희 유지인과 트로이카 시대를 구가하던 영화계의 톱스타였다. TBC의 쇼 프로그램 ‘쇼쇼쇼’에서 위키리와 더블엠씨를 보는 것으로 방송에 입문해 ‘칸나의 뜰’로 탤런트 신고식을 마쳤을 무렵이었다.
하지만 정윤희는 소탈하고 솔직한 성격으로 팀 분위기를 잘 만들어 줬는데. 그 예쁘다는 정윤희도 분장을 하고 보니 영락없는 시골처녀였던 모양이다.
춘천역에서 곰례가 고향을 떠나는 장면을 찍던 때였다. 검정치마에 흰저고리를 입고 숯검댕을 칠한 채 보따리 하나를 들고 촬영 대기 중이던 정윤희를 보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미친 여자는 아까도 있더니 지금까지도 있네?”
정윤희를 못알아본 것이다.
여하튼, 제몫을 해준 정윤희를 비롯해 배우들은 궁합이 잘 맞았다. 조연급들의 캐릭터 하나하나가 살아나면서 지지고 볶으며 살지만, 그것이 살아가는 맛이 되는 서민들의 이야기를 푸근하고 재미나게 보여줬다. 우리들 살아가는 모습이 그러하듯이, ‘야 곰례야’는 그렇게 70년대 말 서민드라마의 한 페이지를 넘겼다.
연출자 정병식 프로듀서는 ‘야 곰례야’의 시청률이 높았던 이유로 8시만 되면 통금이 시행됐던 79년 10.26 이후의 특별한 상황을 꼽기도 하지만(사람들이 TV 보는 것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거야 플러스 알파에 불과했을 것이다. 재미없는 드라마를 사람들이 볼 리는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시대극을 제외하고는 재벌가와 신데렐라가 필수 조건인 요즘 드라마를 보면서, 오늘날 서민드라마의 여건을 생각해본다. 사람의 삶이 살아있는 그런 드라마 말이다.
노주현 배우/탤런트
배재고등학교 80회 (본명:노운영) 수상경력 TBC연기대상, KBS연기대상(남자최우수연기상) 데뷔작:아내의 모습
노주현에게도 배재 다닐때의 추억이 있다. 그가 배재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지금 한창 철거공사중인 청계천은 복개되지 않은 상태였다. 도랑 치고 가재 잡고, 광교 등 청계천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서 친구들과 연싸움을 즐기던 때다.
“연싸움을 할 때 사금파리를 곱게 빻아 부레풀로 연실에 묻히면 최고였어요. 실이 뻣뻣해지지도 않고, 사기 조각도 잘 붙어서 다른 연은 상대가 안 됐지요. 어머니 몰래 사기그릇 훔쳐서 연싸움을 하다가 들켜 혼나기도 했죠.
노주현동문은 바쁜 방송일정 속에서도 배재중·고교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온 삼보수산 대표 선문훈씨와 인쇄업자 황규명씨는 그의 오랜친구이다. 그래서 다른길을 걷고 있는 이들과 가끔 옛생각을 하며 대포 한잔씩하며 어린시절로 되돌아 가곤한다.
노주현동문은 2001년 SBS 시트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를 시작으로 코믹한 이미지 쌓기에 나섰다. 요즘엔 시트콤 ‘똑바로 살아라’에서 눈치 없고 둔한, 때로는 유치한 연기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고 있다.
의도한 대로 그는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다. 항상 단정하고 중후한 멋에 잔뜩 무게가 실렸던 중년의 이미지를 훌훌 털어버린 것. 그는 요즘 그 변화를 피부로 느끼고 있다.
“방송국에 견학 온 아이들이 나를 보면 ‘악악’거리면서 덤벼듭니다. 그만큼 편하게 생각하는 거죠. 예전 같으면 시선을 피했을 법한 아주머니들도 애써 웃음을 참으며 빤히 쳐다봐요. 조금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어요. ”인터넷 팬클럽도 생겼다. 컴맹인 데다 시간도 별로 없어 제대로 관리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예상치 못한 젊은층의 ‘폭발적인 인기’가 그저 좋을 뿐이다. “옛날처럼 계속 무게만 잡고 있었다면 나한테 라디오 진행자 섭외가 왔겠습니까.”노주현 동문은 지난해 11월부터 전문MC 뽀미언니 왕영은씨와 KBS 제2FM(106.1Mhz) ‘안녕하세요 노주현 왕영은입니다’를 진행하고 있다. 2003년 4월부터는 iTV ‘노주현 노사연의 노노토크’를 맡았다. 지난 1995년 방송을 떠났다가 1999년 말 복귀한 그에게 요즘은 제2의 전성기다.
“연기는 거의 대부분 대사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겁니다. 하지만 라디오 진행은 절반 이상을 내 맘대로 할 수 있기 때문에 나만의 색깔을 표현할 수 있지요. 그런 점이 좋습니다.”하지만 모든 이들이 그의 변화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그의 이미지 변신은 실제 삶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부인 최성경씨는 그게 무척 못마땅하다. “신혼 때는 60대 할아버지하고 사는 느낌도 있었지만 참 좋았어요. 과묵하고 예의바른 남편이었죠. 그런데 요즘 너무 많이 변했어요. 말도 많아지고 평소에 안 쓰던 말도 자주해요. 못마땅할 때가 많아요.”이런 부인의 불만 때문일까. 아니면 이제 다시 솔직한 자신의 모습을 되찾고 싶은 마음에서일까. 노주현동문은 지난해 9월 말로 종영될 시트콤 ‘똑바로 살아라’를 끝으로 당분간 코믹연기는 삼갈 작정이다.
오랜 연기생활을 한 노주현동문. 그는 드라마 ‘아내의 모습’으로 데뷔해 ‘아씨’로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20대를 풍미했다. 1983년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프리랜서’ 선언을 했다가 잠시 고비를 맞은 적도 있지만 다음해 ‘사랑과 야망’을 통해 곧바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많은 사회 경험과 오랜 연기생활의 다양한 역활을 해본 그가 코믹시트콤이라는 새로운 장르에 도전해 성공한 노주현동문
“처음 출연약속할 때 ‘딱 1년만 합시다’ 했었는데, 끝난다니까 아쉽기도 하네요.” 노주현은 70~80년대 ‘한국대표 미남배우’였다. 배용준 차인표 송승헌이 요즘 하는 역할은 그가 이미 거쳐온 길이었다. ‘아씨’ ‘마부’ ‘형제’ ‘사랑의 굴레’ 같은 굵직굵직한 드라마에서 그는 여지없이 바람에 머리칼을 휘날리며 우수에 찬 표정으로 등장했다. ‘야, 곰례야’에서 맡았던 대장장이 역할이 거의 유일하게 거친 캐릭터였다.
“코믹 연기를 잘 할 수 있을까 걱정도 했는데 그럭저럭 해낸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술술 풀리지는 않았지만, 몇 달 지나니까 적응이 되더라구요.” 그는 이전만 해도 시트콤 연기를 “‘전혀 다른 세계 이야기’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박영규가 ‘순풍 산부인과’에서 인기를 끌 때도 “저렇게 ‘오버’해야 하나” 하면서 “내가 할 건 아니다”라고 했단다.
그러나 ‘웬만해선…’에서 노주현은 정말 심각하게 ‘망가졌다’. 아버지 역 신구에게 볼을 꼬집히고, 동생 역 이홍렬과 방안을 뒹굴면서 장난을 쳤다. 그 결과 이 ‘미남배우’에게 벌어진 일은?
“예전엔 사람들이 절 마주치면 고개를 돌려 외면했어요. 어려워보였나봐요. 요즘엔 빤히 쳐다보며 실실 웃어요. 아이들도 와서 매달리고 말입니다.”
신구와 이홍렬, 박정수 등 동료 연기자들과도 호흡이 잘 맞았다고 한다. 개그맨 이홍렬은 “처음엔 저 양반하고 어떻게 코미디를 하나 걱정이 많았다”고 하는데, 이내 ‘콤비’가 됐다.
(출처:김재혁 S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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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희 그녀의 일상
출생 : 1954년 6월 4일 신장 : 160cm 학력 : 부산 혜화여자고등학교
출연영화 : 사랑의 찬가, 약속한 여자, 사랑하는 사람아 2,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수상 : 1981년 제 20회 대종상영화제 여우주연상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가족사항 : 남편 조규영(중앙산업 회장), 1남2녀 출생지 : 경남 통영
서울 압구정동의 65평 아파트 자택에서 ‘주부 정윤희씨’를 만났다. 화장기 없는 그녀에게서 톱스타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 전직 여배우는 여전히 강렬한 눈빛과 미모를 간직하고 있었다. 전성기 때보다 훨씬 편안한 표정과 함께.
결혼과 함께 무대 뒤로 사라진 배우 정윤희씨. 서울 압구정동의 한 아파트에서 세 자녀를 키우며 보통의 주부로 살아가고 있는 그녀를 만났다. 화려했던 톱스타의 흔적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아내, 엄마, 며느리로서 만족하며 살고 있는 올해 마흔일곱 살의 정윤희씨. 그녀의 너무나도 평범한 일상을 소개한다.
끊임없이 독자엽서에 ‘소식이 궁금하다’며 등장하는 이름이 있다. 바로 ‘정윤희’다. 1970∼80년대 최고의 여배우로 활동했던 그녀가 결혼과 함께 무대 뒤로 사라진 뒤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까닭이다.올해 마흔일곱 살의 정윤희씨는 서울 압구정동의 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중견 건설업체인 중앙산업 조규영 회장(54세)과 결혼, 2남 1녀의 세 자녀와 함께 오붓한 가정을 일군 것이다. 지난 7월 초, 정윤희씨는 ‘오랜만의 외출’을 했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마련한 ‘한국 영화 명배우 열전’의 주인공으로 초대된 것이다. 결혼 후 매스컴과의 접촉을 꺼려온 그녀는 행사 기간 중 팔순의 노감독이 온다는 소식에 잠깐 모습을 드러내곤 이내 사라졌다. 얼마 뒤 압구정동의 65평 아파트 자택에서 ‘주부 정윤희씨’를 만났다. 화장기 없는 그녀에게서 톱스타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 전직 여배우는 여전히 강렬한 눈빛과 미모를 간직하고 있었다. 전성기 때보다 훨씬 편안한 표정과 함께. “누추하지만 언젠가 한번 보셨으니까 부끄러울 것도 없어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우리 집은 변한 게 없죠? 그냥 이렇게 살아요.” 수년 전 이 아파트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변한 것은 없었다. 치장을 하거나 화려해 보이는 가구라곤 없이 수수한 모양새 그대로였다.
세 아이 학교 보내고, 성당 나가고일주일에 한두 번 골프 치는 것이 일상
올해 대학에 입학한 딸 윤경양이 엄마를 대신해 차를 준비했다. 기자에게 커피 취향을 물은 정윤희씨는 “윤경아, 설탕, 프림 다 넣고 엄마가 가르쳐준 대로 한번 해봐”라며 웃었다. “이제 이런 것도 조금씩 가르쳐요”라며. ‘도대체 기삿거리가 될 게 없다’는 그녀의 일상은 너무나 평범했다. 아침 6시쯤 일어나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대학 1학년, 고등학교 2학년(아들), 초등학교 6학년(아들)인 세 아이를 챙겨 학교에 보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일주일에 한두 번 친구들이나 친하게 지내는 학부형들과 골프를 치고 시장도 직접 다니고 아이들 돌아오기 전에 귀가해서 저녁 준비를 하고, 일요일마다 성당에 나가는 것이 변함없는 그녀의 일상이다. 다른 엄마들처럼 그러다보면 시간이 금방 간다는 것. 요즘은 방학이다보니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하지만 아이들이 어릴 때는 모든 것을 엄마에게 의지했는데, 나이가 들어가며 엄마와 얘기하는 시간도 적어지고 자기들 세계가 생기는 것 같다고. 가끔 그런 아이들에게 섭섭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건강하게 커가는 모습이 대견스럽다. “윤경이는 미대에 진학해서 도예를 전공하고 있어요. 틀에 박힌 생활만 하다 대학생이 되니 너무 좋아해요. 가끔 엄마 생활에 관심을 가질 정도로 컸죠. 고2인 용우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고 막내 용민이도 준비물 같은 것을 스스로 챙기면서 재미있게 학교 생활을 하고 있어요.”
요즘 가장 큰 걱정거리는 팔순의 시어머니가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남편이 3남 1녀 중 둘째여서 큰댁에 사시는 시어머니는 예전처럼 매일 오시지는 않지만 가끔 손주들을 보기 위해 들르신다고. 결혼하고 힘들었던 게 시댁의 가풍을 익히는 일이었다. 근검절약이 철저하고 같은 세대보다 좀더 구시대적으로 산다고 보면 되는 가풍이다. 지금 아파트는 13년째 살고 있다. 같은 단지 내에서 거실 바닥을 아파트 지을 때 그대로인 상태로 살고 있는 집은 자기 집밖에 없을 것이라고 한다. 명색이 건설업체 회장 집인데도 말이다. 바닥 일부가 썩어 바꾸는 게 어떻겠냐고 했을 때 남편은 “10 중의 9가 멀쩡하고 1이 썩었는데 어떻게 바꿀 생각을 하느냐. 생각이 잘못된 사람이다”라며 수리를 하도록 했다. 가구들도 새것으로 바꾼 것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수년 전과 비교해 유일하게 바뀐 것은 소파 천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결혼할 때 장만한 소파인데 그동안 두 번 정도 천갈이를 했다고.
결혼 초 적응 힘들었던 건 시댁 가풍 시간이 지나며 옳다는 생각에 말없이 따라
남편 조규영 회장도 검약이 몸에 밴 스타일이다. 양복 바지 짜깁기를 많이 해 세탁소 아저씨에게 부끄러울 정도다. 얼마 전 백화점 세일 행사 때 남편의 바지를 하나 사서 슬쩍 걸어놓았다가 혼이 난 적이 있다. “예쁜 것 하고 싶으면 당신이나 하라”고 한다는 것. 그래서 3만원짜리라고 거짓말을 했다고. “처녀 때 제가 얼마나 펑펑 쓰고 살았겠어요. 결혼하고 첫 월급을 받았을 때 일주일 쓰고 나니 없었어요. 시댁 식구들이 얼마나 한심했겠어요(웃음). 그래도 어머님이나 애 아빠가 잘 참고 이끌어주셨어요. 결혼 초에는 이런 가풍을 이해 못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옳다는 생각을 했어요. 옳은 거니까 따라가는 거죠. 안 그러면 살 수 있겠어요?(웃음).” 인자하면서도 심지가 굳은 시어머니는 여고 선생님을 하셨는데, 3남 1녀의 자식들을 키우며 언제나 ‘이것 먹어라!’가 아니라 ‘이것 먹어볼래?’의 권유 방식으로 교육을 해왔다. 며느리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법이 없었다고. “결혼 초에는 살림을 못해 쩔쩔맸어요. 처음부터 제가 살림을 잘할 리가 없잖아요. 그래도 어머님이 잘 이끌어주셨어요. 친정 어머니 이상으로 잘해주셨죠. 저는 친정 부모님이 다 안계시니까 막연하게 그리워했던 어머니를 시어머니에게서 느꼈으니까요. 그런 어머님이 몸이 편찮으셔서 걱정이에요.” 시어머니도 근검절약이 몸에 밴 분이다. 시집와 첫 명절 때 세뱃돈으로 1만원을 주셨다.
지금도 액수는 변함없이 1만원이다. 어른들은 1만원, 아이들은 5천원으로 정해져 있다. 며느리 생일 때 시어머니는 5만원을 주신다. 그것도 지금까지 변함없는 액수다. “제겐 남들 5백만원보다 소중하게 느껴져요”라며 웃는다. 이 가정의 생일 파티는 누구 생일이든 똑같은 모양새라고 한다. 꽃다발과 함께 단골 한식집으로 온 식구가 가서 냉면을 한 그릇씩 먹으면 끝이라는 것. 그러면 돈을 벌어 다 어디에 쓰는 것일까. 운동과 먹는 것에 아끼지 않는단다. 가족들 건강과 안전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 것. 양복 바지를 짜깁기해 입는 조회장은 아내가 9년 동안 탔던 승용차를 벤츠로 바꿔주었다. 정작 본인은 국산 중형차가 적당하겠다고 했는데도 말이다. 동네 근처만 오가며 5년째 타고 있는 벤츠는 앞으로 5년은 더 탈 생각이라고.가끔 부부가 함께 골프장에 나가기도 한다. 18세 때부터 골프를 친 조회장은 실력이 수준급이고 배우 시절부터 치긴 했지만 자신은 ‘여자로서 다른 사람에게 방해 안 될 정도’의 실력이라고 한다. 일하면서 외로움을 많이 느꼈던 정윤희씨는 가족애가 끈끈한 집안으로 시집와 허전한 부분을 모두 채우게 됐다. 어느 날 자신의 생활이 감사하다는 생각에 성당에 나가게 됐고 세례도 받았다. 성당에 함께 나가자는 아내의 권유에 남편은 가끔 성당 앞에까지 아내를 데려다주는 것으로 ‘성의 표시’를 하곤 한다.
보수적이고 표현 안 하는 남편 변함없는 모습에 믿음 깊어져
결혼생활이 행복하다고 느꼈을 때 성당에 나가게 됐고 세례도 받았다. 성당 한 행사에 참석해 활짝 웃는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조회장은 표현이 없는 편이라고 한다. 바깥일을 집에서 얘기하는 법이 없어 사업이 잘되고 있는지 어떤지도 모른다고. 보수적인 면 때문에 결혼 초에는 많이 힘들었다. “아침 일곱 시 딱 그 시간에 출근해 제시간에 들어오는 사람이에요. 요즘은 일주일에 절반쯤은 좀 늦지만요. 자신에게 철저한 사람이구요. 운동을 좋아하는데 헬스를 쉬는 법이 없어요. 보통 사람 같으면 가끔 빠지기도 하잖아요. 그런 법이 없어요. 질릴 정도라고 하면 좀 심한가요(웃음). 그런데 변함이 없으니까 신뢰가 가요. 믿음이 점점 깊어지는 거예요. 한마디로 심신이 건강한 사람이에요. 남자는 그래야 될 것 같아요. 내 아이에게도 그런 남편을 얻어주고 싶어요. 아이들에게도 엄하고 보수적이지만 자상한 면도 많거든요.” 큰아들 용우군의 현재 꿈은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고 막내아들 용민이는 꿈이 왔다갔다한다. 부모로서 어떻게 키우고 싶다는 생각은 없고, 본인들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생각이다. “주위에선 유학 안 보내느냐고, 뭘 셋을 다 데리고 사느냐고 납득이 안 된다는 분들도 있는데, 아직 유학을 보낼 생각은 없어요. 공부 잘하고 성실하면 보내지만 놀기만 하고 게으르면 보내지 않는다는 게 아빠의 확고한 생각이에요.” 주부로 살면서 처음엔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들 때문에 불편한 점이 많았다. 살림하다보면 집에서 입은 채로 시장도 가야 하고 화장 안 한 채 다니는 것이 보통인데, 화장하고 꾸미고 나갈 때는 ‘어머! 정윤희야, 아직도 여전해, 그래도 정윤희인데!’ 하는
한국 영상자료원 행사에 참석해 사인을 해주고 있는 '주부 정윤희씨' 행사 성격이 어떻든지간에 그녀는 최대한의 성의를 표시했다.
반응이지만 그냥 나가면 ‘어머! 정윤희 아냐, 정윤희가 어쩌다 저렇게 됐어?’ 하는 반응이니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더라는 것. 하지만 지금은 ‘얼굴이 두꺼워져서’ 개의치 않고 다닌다. 일일이 신경을 쓰다가는 불편해서 생활이 안 될 것 같더라는 것. 그래도 가끔 알아보는 사람들 때문에 가족들에게 불편을 주는 것 같아 미안하다고. 그러나 정작 세 자녀는 엄마가 영화배우였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딸 윤경양은 한국영상자료원 행사 때 엄마와 함께 가 엄마가 출연했던 영화를 보며 슬프다고 눈물을 흘리고, 끝났을 때는 좋아하더라는 것.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배우에서 어떻게 하루아침에 주부로 변신할 수 있었을까. 다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녀는 “그럴 생각 없어요”라고 잘라 말한다. 그리고 되묻는다. “지금 내가 나가서 무슨 일을 하겠어요?”라고. “배우로서 최선을 다하지 못한 점에 대해 많이 후회했지만 미련은 없어요. 그래서 지금 현재에 충실하려고 해요. 주부로서 최선을 다하는 거죠. 아이들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고, 살림하고…. 아이들에게도 ‘엄마는 배우로서 최선을 다하지 못해 후회하고 있다. 공부도 때를 놓치면 엄마처럼 후회하게 된다’고 말해요.”
아이들 건강하게 잘 자라는 것이주부로서 제일 큰 바람
20대의 모습만 팬들의 기억 속에 남겨둔 채 ‘배우 정윤희’도 나이가 들어간다. 스스로의 표현대로 50을 바라보고 있다. 누구보다 화려한 젊은 날을 보낸 왕년의 톱스타는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자연스럽게 생각해요.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만큼 저도 나이가 들어가는 거니까요. 알차게 그날그날 열심히 살려고 노력해요. 아이들이 아직 어리니까 하루가 빨리 지나가요.” 성당에 갈 때마다 그녀는 아이들 모두 잘 자라고 식구들 모두 건강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아직까진 부부 모두 건강한 편이지만 주위에 아픈 사람들이 늘어가니 건강을 걱정할 나이가 된 것 같단다.
수년 전이나 지금이나 ‘주부 정윤희씨’의 생활엔 큰 변화가 없었다. 기자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해서인지 “심심하게 살죠?”라며 웃는다. 그러니 어찌 보면 심심한 인터뷰가 돼버렸다. 얼마나 자극적인 기사가 많은 세상인가. 그러나 본인이 만족하며 열심히 살고 행복해하는 모습은, 설사 심심한 기사가 되더라도 변화가 없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일 것이다. “독자 엽서에 제 이름이 나온다는 건 너무 안 보이니까 궁금해서 그러시겠죠. 관심 가져주시는 것은 고맙죠. 너무 평범하게 잘살고 있고 지금 생활에 감사하고 있어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조용히 있으면 아주 잘살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주시면 고맙겠어요."
(출처: 여성중앙 2001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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