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네 종류의 마음 본문: 누가복음 8:9-15
이시대는 대 배반의 시대
[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 상태로 남는 것을 넘어,
진리를 알던 자들이 의도적으로 진리를 버리고 떠나는 시대적 현상]
하나님 중심의 신앙에서
**'인간 중심'**의 신앙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 인간의 성공, 인간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도구로 기독교를 전락시킵니다.
겉으로는 기독교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나,
그 속에는 그리스도의 주권이 없는 상태입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충돌하기 싫어서 복음의 날카로운 면
(죄, 심판, 지옥, 거듭남)을 깎아내는 시대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미움받지 않기 위해 세상과 똑같은 소리를 내는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성경은 이를 '세상과 벗된 것'이라 부르며 간음이자 배반이라고 정의합니다.
종교적인 행사, 화려한 건물, 체계적인 시스템(넓이)은 넘쳐나지만,
더 이상 한 영혼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역사와 죄를 향한 통곡(깊이)은 사라진 시대입니다.
복음의 비유도 이와 같습니다.
지적 호기심으로 접근하는 자에게는 고대 신화에 불과하지만,
영혼의 굶주림으로 주님께 매달리는 자에게는 영생의 문을 여는 유일한 열쇠가 됩니다.
1. 서론: 비유의 목적 – 감추어진 진리
여러분, 주님께서 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까?
제자들의 질문에 주님은 충격적인 대답을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타인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10절).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입니다.
주님께서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는 단순히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성경에 따르면, 비유에는 **'계시'**와 **'은닉'**이라는 상반된 두 가지 목적이 동시에 들어 있습니다.
1. 진리를 갈망하는 자[겸손]에게는 '계시' (Open)
성령의 도우심으로 마음이 열린 사람들에게 비유는 진리를 더 선명하고 입체적으로 깨닫게 합니다.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인 이미지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2.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심판과 은닉' (Hide)
이것이 비유의 무서운 측면입니다.
주님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을 거부하고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진리가 감추어지게 하셨습니다.
이는 진리를 발로 밟는 자들에게 더 이상의 거룩한 것을 주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지능이나 학문적 넓이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오직 겸손하게 무릎 꿇는 자에게만 허락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령의 조명이 없는 자들에게 복음은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을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깨달아진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다는 증거입니다.
2. 세 종류의 가짜 신앙 (비극적 불신앙)
길가와 같은 마음 (12절):
사탄은 즉각적으로 움직입니다.
마귀의 가장 무서운 전략: '무관심’입니다.
말씀을 듣긴 하지만, "나랑 상관없는 이야기"라며 마음의 길가를 딱딱하게 굳힙니다.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하면서도 '교회 활동'이나 '도덕적 삶'에 만족하게 만듭니다. "나는 이 정도면 괜찮아"라는 교만을 심어주어,
그것이 '믿음'이라는 생명으로 변하기 전에 서둘러 가로챕니다.
복음을 듣지만, 그것이 지성에만 머물 뿐 의지와 감정에 전혀 닿지 않는 상태입니다.
마귀는 당신이 복음을 '철학적'으로 감상하는 것은 허용하지만,
'믿어 구원을 얻는 것'은 죽기보다 싫어합니다.
마귀의 입장에서 구원은 자기 영토와 백성을 빼앗기는 굴욕적인 패배입니다. 그래서 그는 죽기보다 싫은 마음으로 그 권리를 놓지 않으려 발악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일입니다.
한 죄인이 회개하고 구원을 얻는 것은 하늘에서 큰 잔치가 벌어지는 일이며, 하나님의 자비와 능력이 가장 찬란하게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바위 위와 같은 마음 (13절):
이들은 복음을 들을 때 '기쁨으로' 받습니다.
감정적인 흥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뿌리가 없습니다.
이를 **'피상적인 기독교'**라고 경고합니다.
피상적인[본질은추구하지 않고, 겉으로 드어난 현상]
기독교란, 복음의 겉모양은 갖추었으나
그 알맹이인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와 **'근본적인 존재의 변화'**가 빠진 신앙 상태를 의미합니다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근원적인 반역'**으로 보았습니다.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는 영적 수술을 위한 '절개'와 같습니다.
내 죄가 얼마나 추악한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왜 필요한지도 결코 알 수 없습니다.
탕자가 자신이 돼지 쥐엄나무 열매조차 먹지 못하는 비참한 존재임을 깨달았을 때 아버지의 품이 가장 소중했듯이,
죄의 깊이를 깨달은 사람만이 은혜의 높이를 경험합니다.
기독교는 도덕적으로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개량'이 아니라,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는 **'새로운 탄생(New Birth)'**입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맺을 수 없듯이,
타락한 본성을 그대로 둔 채 행동만 고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좋은 땅"이 된다는 것은 땅의 성질 자체가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마음과 새 영을 부어주셔서,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본성'을 갖게 하십니다.
누가복음 8장 15절의 "인내로 결실한다"는 말은 이 존재의 변화가 일어난 사람에게만 가능합니다.
겉으로만 바뀐 사람은 시련이 오면 본색이 드러나지만,
존재가 바뀐 사람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생명을 유지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와 변화 없이 그분과 교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이유는 단순히 천국에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연합하여 그분의 거룩함에 참여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독교는 사람을 조금 더 낫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며,
사탄의 노예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것입니다."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 (14절):
가장 위험한 상태입니다.
이들은 신앙이 자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생의 염려, 재물, 향락이라는 '가시'가 기운을 막습니다.
'이생의 염려'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적 의미는 **'마음이 나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현실적인 고민과 불안을 뜻하지요. 주로 성경에서 먹고 사는 문제, 건강, 자녀 걱정, 미래에 대한 불안 등
"염려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의 또 다른 이름“
신앙에 집중해야 할 에너지를 불안에 쏟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깊이'를 파고들지 못하게 하며,
기도의 호흡을 가쁘게 만들어 결국 영적 질식을 유발합니다.
재물은 그 자체로 악한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마음을 가장 강력하게 유혹하는 도구입니다.
재물은 신앙의 자리를 교묘하게 대체합니다. "돈이 있으면 이 사역도, 내 삶도 더 넓어지겠지"라는 착각을 줍니다.
그러나 재물을 쫓는 마음은 결국 신앙의 뿌리는 말라버리고, 겉모양만 남은 세속적 기독교인을 만듭니다.
재물이 많으면 모든 염려가 사라질 것이라 믿게 만듭니다.
하지만 재물은 얻을수록 '잃을까 봐 생기는 염려'라는 새로운 굴레를 만듭니다.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자만심을 심어주어, 겸손함과 감사함을 잊게 합니다.
목적이 되어버린 재물은 사람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재물의 종이 되게 만듭니다.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캐리는 인도 선교사로 떠나기 전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누군가 그에게 "당신의 직업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진짜 직업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구두 수선은 그 비용을 대기 위한 아르바이트일 뿐입니다."
캐리에게 재물과 직업은 사명을 돕는 도구였지, 사명을 찌르는 가시가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가 구두 수선으로 돈을 버는 데에만 마음이 나뉘었다면(염려와 재물), 인도의 수많은 영혼을 깨우는 '넓이'의 결실은 결코 맺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시는 우리가 '수단'을 '목적'으로 착각할 때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향락 (Pleasures): 순간의 즐거움이 주는 마비
여기서 말하는 향락은 건전한 휴식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향락은 반드시 타락한 쾌락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즐거워하는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취미, 편안함, 사람들의 인정, 안락한 삶의 방식 등 내 육신을 즐겁게 하는 모든 것입니다.
감각적인 즐거움에만 몰입하여 삶의 방향감을 상실하게 만드는 상태를 뜻합니다.
더 강하고 새로운 자극을 찾게 하여 일상의 소중함을 무디게 만듭니다.
현실의 고통이나 문제를 직면하기보다 일시적인 즐거움 뒤로 숨게 만듭니다.
즐거움의 순간이 지나간 뒤에는 이전보다 더 큰 정신적 허탈감을 남깁니다.
염려, 재물, 향락은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의 순환 고리를 형성합니다.
이생의 염려, 재물, 향락이라는 '가시'는 결국 **'깊이'**를 파괴하는 영적인 방해물들입니다.
가시는 복음보다 '세상의 것'이 더 시급하고 중요해 보이게 만듭니다.
잎은 무성할 수 있으나(교회 출석, 직분), 생명을 잉태하는 '열매'는 맺지 못합니다.
하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하려는 태도가 결국 영적 에너지를 상쇄시켜 아무런 영향력(넓이)도 없는 상태로 만듭니다.
복음과 세상을 동시에 소유하려는 '혼합주의'입니다.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열매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3. 참된 신앙의 증거: 착하고 좋은 마음 (15절)
어떤문제 ,계획, 목표 – 생각합니다. 좋은생각, 잘못된 판단...결정한곳으로 되지요...
정말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여리고 ] 경험하기 원합니까.
기도 하세요.
지혜가 생깁니다. 믿음으로 살수 있습니다.. 인도, 보호, 기적을 경험합니다.
이제 우리는 '깊이'에 도달합니다.
주님은 좋은 땅을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라고 정의하십니다.
여기서 '착하고 좋다'는 것은 도덕적 완벽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 앞에 정직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자신을 포장하거나 합리화하지 않고,
말씀의 거울 앞에 자신의 추함과 비참함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마음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본래 길가나 바위 같아서,
오직 성령의 쟁기로 갈아엎어진 마음만이 '착하고 좋은 마음'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수용성 있는 마음입니다.
참된 신앙은 '듣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지키는 것'**으로 증명됩니다. 붙잡음 (Retention): '지키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굳게 붙잡다'는 뜻입니다.
마귀가 말씀을 빼앗아 가려 할 때, 혹은 세상의 염려가 덮쳐올 때, 그 말씀을 영혼의 닻처럼 붙들고 놓지 않는 의지적 결단입니다.
피상적인 신앙인이 말씀을 '스쳐 지나가는 감정'으로 소비할 때,
참된 신앙인은 그 말씀을 '지성'으로 이해하고 '감정'으로 사랑하며 '의지'로 굴복하여 자신의 존재 안에 깊이 저장한다고 말합니다.
인내 (Perseverance): 결실은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씨앗이 땅속 어두운 곳에서 썩어 뿌리를 내리는 시간이 필요하듯,
성도의 삶에도 '보이지 않는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련의 태양과 유혹의 가시 속에서도 끝까지 견디는 힘은 오직 그리스도께 깊이 뿌리박힌 영혼에게서만 나옵니다.
결국 사역의 넓이(30배, 60배, 100배)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인내한 결과로서 하나님이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경작하신 마음: 본래 인간의 마음은 모두 '길가'나 '바위' 같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그 마음의 밭을 갈아엎으실 때만(중생),
말씀이 뿌리 내릴 수 있는 '착하고 좋은 마음'이 됩니다.
말씀을 '지키는' 삶: 참된 신앙은 말씀을 듣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말씀이 내 존재를 장악하게 하는 것입니다.
참된 신조(Creed)를 가진 자는 반드시 참된 삶(Conduct)의 열매를 맺습니다.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은 사역의 '넓이'를 결정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상급입니다.
중요한 것은 **'뿌리의 깊이'**입니다.
존재의 근거가 '환경'이 아닌 '그리스도'에 있음
영국의 한 고성(古城) 마당에는 수백 년 된 거대한 참나무가 있었습니다. 어느 해 기록적인 태풍이 몰아쳐 마을의 수많은 나무가 뿌리째 뽑혔습니다. 사람들은 그 참나무도 쓰러졌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참나무는 잎사귀 몇 개만 잃었을 뿐 당당히 서 있었습니다.
학자들이 조사해 보니, 그 나무는 지상으로 뻗은 가지의 길이만큼이나 지하로도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었습니다. 특히 그 뿌리는 지하 깊은 곳에 흐르는 암반수 층을 꽉 붙잡고 있었습니다.
뿌리가 얕은 식물은 비가 오면 기뻐하고 가뭄이 오면 곧바로 시듭니다.
하지만 뿌리가 깊은 나무는 지면의 날씨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감정의 기복, 사역의 성공 여부, 사람들의 평판(넓이)에 내 존재의 가치를 두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이라는 지표면이 메말라 있을 때도,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서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을 길어 올리는 능력이 바로 뿌리의 깊이입니다.
"위로 자라기(성장) 위해서는 반드시 아래로 먼저 내려가야(겸손)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뿌리가 내려가는 과정은 단단한 흙을 파헤치는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이는 내 자아의 고집을 꺾고,
내 의지를 파쇄하며,
하나님의 주권 앞에 철저히 굴복하는 **'회개의 깊이'**를 의미합니다.
내가 죽은 그 깊이만큼, 그리스도의 생명은 내 안에서 견고하게 자리 잡습니다.
나무의 크기는 지상에 드러난 가지로 판단받지만,
그 나무를 지탱하는 힘은 땅 밑에 숨겨진 뿌리에서 나옵니다.
남들이 보는 공적인 예배나 사역의 현장보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과 단둘이 보내는 **'독대의 시간'**이 더 치열함을 뜻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과 깊이 사귀는 사람만이,
환난의 바람이 불 때 쓰러지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켜낼 수 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시간에 기도의 뿌리를 암반 되신 그리스도께 내린 사람만이,끝까지 인내하며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더 깊이 내려가십시오.
당신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깊어질 때,
오늘 이 시간, 오직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밭을 깊이 기경해 주시기를 간구합시다.
하나님이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인내로 결실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