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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승우(安承禹, 1865. 9. 9.(음) ~ 1896. 6.) 선생은 경기도 지평(砥平)의 상동(上東, 현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 출신이다. 자는 계현(啓賢), 호는 하사(下沙)이며,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고려조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의 후손으로 대대로 유학을 공부해온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안종응(安鍾應)은 인근에서 문명을 자자하게 떨치던 학자로 호를 퇴앙(退央)이라 하였다. 어머니 덕수 이씨도 제천의 이름난 유학자 이민정(李敏政)의 딸이었다.
부친 안종응은 경사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의리와 명분에 따라 행동하는 참된 선비였다. 뒷날 안승우가 구국의 항일 의병전선에 투신할 수 있었던 데는 이러한 부친의 가르침과 지도가 큰 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안승우는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나고 매우 총명하였다. 10세 때 종들이 집안의 곡식을 훔쳐 달아나는 광경을 목격하고도 한참 오랜 뒤에 가서야 “즉시 발각하여 그 죄를 명백히 드러내면 우리 집안의 체모도 함께 손상될 것이니 역시 수치스런 일입니다. 지금부터는 의당 세밀하게 살펴 처음부터 막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그 사실을 알려 경계했다는 대목을 통해서 선생의 총명과 사려 깊은 성품을 짐작할 수 있다.
어려서 집안에서 가학을 공부해 오던 안승우는 15세부터 인근에 있던 이용강(李龍崗)의 서숙을 출입하며 본격적으로 공부하였다. 안승우가 처음 스승으로 섬긴 이용강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로 뛰어난 학문적 역량을 갖춘 큰 학자라기보다는 대체로 학동을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삼던 향촌의 평범한 선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린 시절 안승우가 한 공부는 주변 분위기로 미루어 주로 역사와 문학, 그리고 사서(四書) 등 기초적인 경학이었을 것이다.
안승우는 한때 과거시험을 위한 과문(科文)을 공부하기도 하여 벼슬길에 뜻을 둔 적도 있었다. 하지만 부친으로부터 “네가 아버지를 섬길 줄도 모르는데 어떻게 임금을 섬길 줄 알겠느냐!”라는 훈계를 듣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출세를 단념하고 도학 공부에 전심하였다. 이에 안승우는 지평의 이름난 학자인 금계(錦溪) 이근원(李根元)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이근원은 조선말 3대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의 문하에서 수학한 정통 도학자로 유인석(柳麟錫, 1842~1915) 의병장과 동문수학하여 교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이근원을 사사한 데 이어 안승우는 21세 되던 1885년부터는 역시 이항로의 적통을 이어받은 대학자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 1832~1893)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학문의 전수 과정에서 안승우는 특히 유중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부친 안종응의 명으로 유중교를 찾아뵙고 나서 “위정척사와 화이인수(華夷人獸)의 구별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 몸과 마음이 멍하여 살 길을 구한 것 같고 침식을 잊기에 이르렀다.”라고 소회를 밝힌 점에서도 그러한 정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후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10여 년 간 안승우의 행적은 자료상 잘 드러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 기간에는 유중교의 문하에서 학문에 전심하였던 것 같다. 이 기간에 드러나는 단편적 기록에 의거해 안승우의 행적을 추적해 보면 1889년에는 화서학파에서 성지처럼 여기던 가평의 대보단(大報壇)을 찾아 제향에 참례하였고, 제천으로 내려온 유중교가 1893년 작고한 뒤에는 선사(先師)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백방으로 주선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 즈음 정화용(鄭華鎔), 홍사구(洪思九) 등 문인사우들과 함께 제천 봉양의 백련사(白蓮寺)에서 공부했다는 것으로 보아 이 사찰이 안승우의 학문 연마의 근거지가 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안승우가 장성하던 무렵, 일제의 국권 침탈로 인해 국운은 날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1876년 조선의 문호를 강제로 개방시킨 이래 일제는 침략의 강도를 점진적으로 높여갔다. 특히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기화로 청일전쟁을 일으키면서 그 동안 감추고 있던 침략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안승우가 의병을 일으키려고 결심한 것은 청일전쟁 개전 직전인 1894년 6월 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무단 점거한 갑오변란을 계기로 해서였다. 이 소식을 들은 안승우는 시국을 개탄하며 유중교 문하에서 함께 공부한 서상렬(徐相烈), 이범직(李範稷) 등 동문들과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주위의 만류로 중지하였다. 그 뒤 1895년 3월에 변복령(變服令)이 공포되어 백색의 전통 의복을 흑색의 ‘오랑캐 의복’, 곧 양복(洋服)으로 바꾸어 입게 하자 이를 크게 탄식하였으며, 이어 1895년 8월에는 일본 낭인들에 의해 국모인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11월에는 상투를 자르게 한 단발령이 공포되었다.
청일전쟁 이후 일제가 군사, 정치 양면에 걸쳐 입체적으로 국권을 침탈하는 등 망국적 위기상황에 직면하게 되자, 안승우는 “5백 년 종묘사직이 지금에 와서 망하게 되었으니 이 일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라고 하며 통분하였다. 또 유중교 사후에 화서학파의 수장(首長)이 된 유인석은 문인사우들을 제천의 장담(長潭)에 소집하였다. 유인석은 “이제 성토하다 죽고 거의하다 죽으리니, 선왕의 도를 수호하다 죽는 것은 선비의 의리다.”라고 성토했다. 이에 유생의 신분으로 변복령이라는 ‘대변고’에 정당하게 행동할 수 있는 방안을 숙고한 끝에, 첫째, 거의하여 일제를 소탕하는 방안, 둘째, 고국을 떠나 국외로 가 대의를 지키는 방안, 셋째, 의리를 간직한 채 자정(自靖)하는 방안 등 ‘처변삼사(處變三事)’를 결정하였다. 이와 같은 세 가지 행동 방안은 수구파 지식인들의 기본적인 행동강령이 되었다.
안승우는 처변삼사 가운데 의병을 일으키는 거의(擧義)의 방안을 선택하였다. 이때 지평에서는 단발령이 발포된 직후 열혈지사 이춘영(李春永, 1869~1896)이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선생을 찾았다. 하지만 당시 안승우는 제천의 장담에 있었으며, 대신 선생의 부친 안종응이 이춘영을 맞았다. 이춘영은 지평의 포수 김백선(金伯善)을 만나 보라는 안종응의 조언을 듣고 김백선을 만나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약속하였다. 김백선 역시 지평군수 맹영재(孟英在)의 단발 명령을 거부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춘영은 김백선과 함께 지평 포군 4백 명을 동원하여 안창(安昌, 현 원주시 지정면 안창)에 집결하였다. 그곳에는 이춘영의 장인 김응수가 군비를 마련해 놓고 의병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처럼 긴박한 상황에서 장담에 있던 안승우는 부친으로부터 거의를 위해 안창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에 선생은 이범직(李範稷), 원철상(元澈常), 신지수(申芝秀) 등 동지들을 안창에 모이도록 통지하고, 자신도 급거 안창으로 올라와 거의에 합세하였다. 안창에 모인 의병은 1896년 1월 12일(음 1895년 11월 28일) 드디어 거의를 선포하였다. 의진은 곧바로 원주로 내려와 군청을 공격하고 무기를 탈취하자, 군수 이병화는 황급히 도망갔다. 이어 남하를 계속한 의진은 제천을 점령하였다. 제천군수 김익진도 도망하였기 때문에 무난히 입성할 수 있었다.
의진이 제천에 입성하자 안승우와 함께 동문수학한 많은 인사들이 합류함으로써 의진의 규모는 커져갔다. 이에 따라 편제를 갖추어 이순신 장군의 후손인 이필희(李弼熙)를 의병장으로 삼고, 서상렬(徐相烈)을 군사(軍師), 이춘영(李春永)을 중군장, 김백선을 선봉장에 각기 선임하였다. 이때 안승우는 군중 사무를 총괄하는 군무도유사(軍務都有司) 직책을 맡았다. 거의 초기에 이필희는 의병전쟁 시기에 발포된 여러 격문 가운데 백미로 평가되는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을 발포하여 전 국민에게 의병에 대한 지지와 응원을 호소하였다. 이 격문은 얼마 뒤에 유인석이 의병대장에 등단한 후 전국적으로 포고됨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사게 되었다.
제천에서 전열을 정비한 의진은 곧 단양으로 행군하여 군수 권숙(權潚)을 붙잡아 처단하였다. 하지만 단양까지 함께 행군했던 안승우는 곧 일부 군사를 거느리고 제천으로 돌아왔다. 의병의 근거지인 제천을 지키고 그 일대에서 군사를 추가로 모집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이필희가 이끈 의병 본진은 1월 22일, 지금은 충주호 나루터로 변한 단양 장회협(長匯峽)에서 공주병참 소속의 관군 1개 중대를 맞아 첫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후 계속되는 공세를 피하여 우선 서상렬과 이춘영은 죽령을 넘어 풍기로 들어갔다.
이때 제천에 주둔해 있던 안승우는 제천군수 정영원이 새로 부임하게 되자 주천(酒泉)으로 진을 옮겼다. 원주에서 일어나 영동지방으로 이동 중이던 민용호(閔龍鎬) 의병과 합진하여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평창으로 올라간 안승우는 방림, 진부까지 뒤따라갔으나 민용호는 합진을 거부한 채 대관령을 넘어 구산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이에 안승우는 유인석으로부터 회군하라는 요청을 받아들여 군사를 이끌고 영월로 내려와 의병 본진에 합류하였다. 이때 유인석은 선생 외에도 이정규(李正奎)를 영남으로 보내 서상렬과 이춘영도 영월에 모이게 함으로써 본진의 전열을 가다듬도록 조치하였다.
이때 안승우를 비롯하여 영월에 모인 이필희, 서상렬, 이춘영 등은 화서문파의 종장으로 의병에 투신한 이들의 정신적 구심체였던 유인석을 의병대장에 추대하였다. 이에 양모(養母) 덕수 이씨의 상중에 있던 유인석은 상복을 벗고 항일전선에 나서 항일수구를 의미하는 ‘복수보형(復讐保形)’의 기치를 높이 들게 되었다. 1896년 2월 8일의 일이다. 이로써 유인석을 정점으로 한 제천의병이 본격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전열을 새롭게 가다듬어 의진의 편제도 일신하였다. 새롭게 정비된 편제에서 안승우는 전군장을 맡았으며, 그밖에 이춘영은 중군장, 신지수는 후군장에 임명되었고, 선봉장에는 여전히 김백선이 포진해 있었다.
당시 제천의병은 안승우를 비롯하여 이춘영 등이 모집한 지평 민병 4백 명과 김백선이 이끈 지평 포군 수백 명이 주류를 이루었고, 그밖에 이문흠이 이끈 단양 포수 등 인근 각지의 민병들로 조직되었다. 이와 같이 제천의병은 의병장 유인석을 정점으로 하여 주로 화서학파 연원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각 지역 단위의 소규모 의병이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직 면에서는 연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영월에서 제천으로 회군한 의진은 즉시 충주를 공략할 준비를 갖추었다. 이 무렵 제천의병은 단양군수 권숙 외에 청풍군수 서상기(徐相耆) 등 소위 토왜(土倭)들을 참수하여 단죄함으로써 개화정책을 지지하던 관리들에게 경종을 울려 그 각성을 촉구하였다. 당시 호서의 중앙인 충주에는 관군 4백 명을 비롯해 일본군이 다수 집결해 있던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러므로 이곳을 점령하게 된다면 호서를 장악함은 물론 영남과 호남을 배경으로 서울로 북상할 기반을 확보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2월 16일 제천의병이 충주성을 공략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 무렵 원주 방면으로부터 승지 우기정(禹冀鼎)과 이호승(李鎬承)이 각각 민병 3천 명과 5백 명을 원조해 와 제천의병의 외형적 기세는 실로 대단하였다. 그러나 그 가운데 총을 가진 자는 4백 명에 불과해 실질적인 전력 면에서는 충주성 안의 관군에 비해 크게 열세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죽음을 각오한 의병들이 일시에 함성을 지르며 진격하자, 그 기세에 눌린 관군이 성을 버리고 달아났기 때문에 의외로 쉽게 충주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 충주성 점령은 제천의병이 거둔 전과 중에서 가장 큰 것이었다.
충주성을 점령한 의병은 먼저 충주관찰사 김규식(金奎軾)을 처단하였다. 그리고 서상렬, 원용정, 홍선표 등을 영남지방에, 이범직을 호서지방으로 각각 소모사(召募使)로 파견하여 각지의 민병을 모아 그 활동영역을 확대시키고자 하였다. 이때 영남지방에는 안동의 김도화(金道和), 예안의 이중린(李重麟), 예천의 박주상(朴周庠), 순흥의 강익(姜釴), 풍기의 김교명(金敎明), 영천의 정규섭(丁奎燮), 봉화의 금석조(琴錫祚) 등 7개 고을 의진이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영남으로 내려간 서상렬은 이들 의진을 연합, 그 맹주가 되어 상주 태봉(台峰)에 있던 일본군 병참을 공격하였다. 또, 호서로 파견된 이범직도 삭발을 심하게 강요하여 주민들로부터 원성을 크게 산 천안군수 김병숙(金炳肅)을 처단하는 등 그 기세를 떨쳤다.
하지만 충주성을 장악한 의병은 점차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그 동안 관군과 일본군의 집요한 공격을 받아 전력이 크게 소모되었을 뿐만 아니라 보급로를 차단당해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이에 의진은 부득이 3월 4일 충주성을 포기하고 달천(達川)을 거쳐 청풍을 지나 제천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 동안 수안보 전투에서는 중군장 이춘영을, 충주 방어전투에서는 주용규를 잃어 전력에 큰 손실을 가져왔다. 안승우는 제천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중군장에 임명되어 의진의 버팀목 역할을 맡게 되었다.
제천으로 돌아온 뒤 안승우는 전열을 가다듬고 군사들을 재정비하는 일에 혼심의 힘을 기울였다. 또한 최후의 보루인 제천 방어에도 만전을 기하였다. 의병장 유인석은 원도상을 제천 수성장으로 임명하여 본진을 수비토록 하는 한편, 제천으로 통하는 각처 요로에 부대를 분산 배치하여 적의 공격을 차단하였다. 이 무렵 의병이 제천에 집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주변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의병들이 제천으로 모여들었다. 문경의 이강년(李康秊)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 합진한 것을 비롯하여 영춘의 권호선, 원주의 한동직, 횡성의 이명로 등의 의병장들이 각기 휘하 의병을 거느리고 제천으로 합류해 왔다. 이후 제천의병은 5월 26일 제천을 상실할 때까지 3개월 동안 제천을 중심으로 수안보, 가흥, 음성, 단양 등지에서 관군 및 일본군과 크고 작은 전투를 벌여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특히, 제천의병은 일본군 병참이 있던 가흥창(可興倉)을 공략하고자 수차에 걸쳐 공격을 결행하였다. 그러나 전력을 집중하지 못한 채 산발적인 공세만 이어져서 결국 가흥창 공략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선봉 종사인 민의식(閔義植)이 선봉장 김백선과 중군장인 안승우 사이를 이간질하는 획책을 부렸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이러한 분위기 아래 독자적으로 가흥창 공략에 나섰던 김백선은 본진에 증원군을 요청하였으나 중군장으로 있던 안승우가 미처 원군을 보내지 못하였다. 김백선은 이에 격분하여 술을 마시고 칼을 휘두르자 의병장 유인석이 그를 군율로 다스리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안승우는 한때 곤궁에 처하기도 하였다.
한편, 전국 각지에서 항일의병이 일어나 활동하고 있는 동안 중앙에서는 중대한 정국의 변화가 일어났다. 을미사변 이래로 친일내각에 포위되어 불안과 공포 속에서 전전긍긍하던 국왕이 의병 탄압을 위해 경군(京軍)이 지방으로 출동한 틈을 타 2월 11일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김홍집 친일내각은 무너지고 이범진, 윤치호 등을 중심으로 친러 내각이 조직되었다. 새 내각은 그 동안 어수선해진 민심을 수습하고자 단발령을 철회하는 한편, 의병 해산을 목적으로 한 선유위원을 각 지방으로 파견하였다.
이처럼 어려워진 상황에서도 안승우는 제천의병의 전력을 증강하기 위해 분투하였다. 안승우의 주도로 제천 일대에서 군사를 지속적으로 모으는 한편, 이병회, 이희두 등의 도움으로 다양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또 주변 각지에서 전개되던 소규모 전투에 군수물자와 병력을 공급하고 병기를 제작하는 일을 주관하였다. 이러한 전력 강화 활동과 함께 안승우는 또한 전몰 의병들을 제사지내고 그 유가족을 구제하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오늘날 제천의 7의사총에 잠든 전망 사졸들을 제사할 때 지은 다음 제문의 일단을 통해서도 안승우의 간절한 우국충정을 짐작할 수 있다.
안승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관파천 이후 제천의병은 여러 측면에서 활동에 제약을 받아 점차 그 기세가 누그러졌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문제는 민심이 점차 의병을 외면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단발령 직후 처음 의병이 일어날 때 무한히 의병을 모열(慕悅)하던 민심이 단발령의 철회 이후 오히려 의병을 부담스러워 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던 것이다. 민심의 이반은 의진의 사기와 직결되었다.
이처럼 사기가 떨어지고 규율이 흐트러져갈 즈음, 서울에서 군대를 이끌고 내려온 선유사 장기렴(張基濂)이 수차에 걸쳐 의병 해산을 종용해 왔다. 제천으로 내려온 장기렴의 경군(京軍)은 김하락 등이 주축이 된 남한산성 의진을 격파한 뒤 그 여세를 몰아 남하한 부대였다. 장기렴은 단발령이 철회되고 을미사변의 원흉격인 김홍집 이하 친일파들이 축출된 지금에는 활동 명분이 없어졌으므로 즉시 의진을 해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리에 대해 의병장 유인석은 “십적의 무리가 포열해 있는 것이 전과 같고, 왜적의 병참이 배치되어 있는 것이 전과 같고, 복색을 바꾼 것이 전과 같고, 관제의 변혁과 주군의 혁파가 전과 같다.”라고 하여 의병 해산을 완강히 거절하였다. 일제와 결탁한 집권세력이 개화정책을 수행하고 있는 상황 하에서는 결코 의병을 해산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유인석이 보여준 해산 거부 이유와 논리는 곧 안승우가 견지한 사상, 신념과 그대로 일치하였다. 의리, 명분론적 관점에서 항일투쟁의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였던 것이다.
참령(參領) 장기렴이 이끄는 관군은 5월 26일을 기해 마침내 제천성 공략에 나서 대규모 공세를 취하였다. 황석촌(黃石村)을 장악한 뒤 대덕산(大德山)을 통해 북창(北滄) 나루를 건너 제천으로 들어온 경군은 남산에 인접한 고장림(古場林)까지 진격하며 의진을 압박하였다. 이에 안승우는 고장림에 맞닿아 있는 남산에 진을 치고 본진을 지휘하며 관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였다. 전투가 벌어지자 안승우는 최일선에서 직접 화약을 넣어 포군들에게 나눠주며 전투를 독려하였고 한때 세 차례나 경군을 고장림 밖으로 몰아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후 들어 비가 내리자 전황이 급격히 불리해졌다. 의병들은 우천으로 인해 화승총을 쓸 수 없게 된 것이다. 결국 의진은 와해되고 제천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안승우는 전투가 한창 벌어지던 중 오른쪽 다리에 탄환을 맞았다. 부상을 입은 채 경군의 대장소에 끌려간 안승우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강개한 어조로 우국충정의 소신을 당당히 밝히며 장기렴의 불의를 성토하였다.
생사를 초탈하여 안승우가 보여준 강경한 의열과 불꽃같은 투지가 잘 드러나 있는 것이다. 이에 안승우는 경군들에 의해 타살되어 32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또 안승우가 피체될 때 선생의 문인으로 중군의 종사로 있던 19세의 청년 장수 홍사구(洪思九)도 스승을 지키다가 함께 장렬히 순국하여 그 성명을 후세에 길이 전하였다.
방치되어 있던 안승우의 시신은 순국 다음날 수습되었다. 전란의 와중에 미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형편에서 동지 박정수는 이튿날 제천읍 남쪽의 갈마곡(渴馬谷)에 들어가 양지바른 언덕에 버려진 여러 시체 가운데서 안승우의 시신을 찾아내어 역시 동지인 이용규(李容奎)와 함께 경황 중에 제천 화산(華山)에 임시 매장하였다. 뒷날 안승우의 묘는 고향인 양평군 양동으로 이장되었다.
안승우가 의진의 군무를 총괄하면서 전력 증강은 물론 군사들의 기율과 사기 진작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안승우의 순국 직후에 의진이 즉시 서북 행을 떠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곤궁해진 상황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안승우의 일대기를 정리한 동문의 동지인 박정수(朴貞洙)가 “공이 순절한 후로 의병의 세력이 크게 꺾여서 가는 곳마다 달아나고 패하였다.”라고 언급한 대목도 진중에서 안승우가 차지하고 있던 크나큰 비중을 대변해 준다.
일생토록 안승우는 학자로서 처신했던 선비였다. 하지만 선생이 지은 글은 흩어져 일부가 빠져 없어져 버리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은 하사유고(下沙遺稿) 정도이다. 이를 저본(底本)으로 삼고 기타 안승우의 유문을 모아 2004년 제천 내제문화연구회에서는 『하사집(下沙集)』을 발간하였다. 또한 안승우의 의병 활동을 기록한 실기류로는 동문 박정수가 편찬한 『안공하사실기대략(安公下沙實記大略)』과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下沙安公乙未倡義事實)』이 있고, 역시 동문인 이정규가 지은 『육의사열전(六義士列傳)』 속에 안승우의 약전이 포함되어 있다.
안승우가 의기와 애국심을 부친 안종응으로부터 물려받았듯이, 선생의 의병정신은 또한 아들 안기영(安基榮)에게 이어졌다. 1907년 안기영은 제천의진에서 부친과 함께 활동했던 이강년 의진의 종사(從事)가 되어 항일전에 참여하였다. 안기영는 특히 이강년 의병장이 1907년 봄 재기할 당시 자신의 집을 군사 소모(召募)의 거점으로 제공하는 등 적극적으로 의진에 동참하였다. 결국 안승우의 가문은 3대에 걸쳐 항일의병에 투신한 것이다. 이에 선생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된 것을 필두로 부친 안종응과 아들 안기영 모두 1999년에 건국포장에 추서됨으로써 안승우의 가문은 정부로부터 3대 의병 집안으로 공인받은 셈이다. 그리고 안승우의 문인 홍사구도 1963년 그의 애국헌신과 충절을 기려 독립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