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27일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사도행전 20,28-38
요한 17,11ㄷ-19
부모는 자녀 때문에 거룩해진다
영화 ‘비투스’(2006)는 아이큐 180의 천재 소년 비투스의 이야기입니다.
부모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 아이의 천재성을 자랑하며 만족해합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천재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15세도 안 되었는데도 대학 수업이 재미없어 강제졸업을 해버려야 하는 처지이기에, 친구가 하나도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 비투스는 평범한 삶이 늘 그립기만 합니다.
아버지는 비투스가 이젠 공대에 재입학하기를 원합니다.
비투스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할아버지 한 분밖에 안 계십니다.
할아버지는 비투스에게 날개를 만들어줍니다.
만들어진 새의 날개를 어깨에 끼고 비투스는 2층에서 뛰어내립니다.
그 사고로 다친 곳은 전혀 없지만 비투스는 평범한 아이큐의 아이가 된 척합니다.
건강하고 평범한 아이로 되돌아온 비투스에 부모는 크게 실망합니다.
그러나 친구들과 같이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된 비투스는 매우 신이 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회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하여 가정이 어렵게 됩니다.
비투스는 평범해진 척 하며 부모를 속이는 것을 그만두고 천재적인 머리를 이용하여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주식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름 모를 투자의 귀재가 되어 아버지 전 회사를 인수하고 아버지를 사장으로 앉혀 줍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기대가 컸던 엄마를 위해 다시 피아노를 시작하여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부모를 영광스럽게 합니다.
그때 할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시고 이 모든 사실을 기록해 놓은 편지를 받습니다.
아이가 평범하지 않은 삶을 힘들어했음에도 부모가 아이를 다시 본인이 싫어하는 천재의 삶으로 돌아오게 만들어야 했던 사실을 알고는 부모도 크게 뉘우칩니다.
사실, 인간관계에 있어서 더 성숙해지는 사람이 상대의 부모가 됩니다.
비투스는 어렸지만, 부모를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할 수 있었던 부모의 부모였던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 때문에 거룩해지게 됩니다.
자녀를 위해 자신을 포기할 수 있음이 곧 거룩함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먹힘으로써 자신의 거룩함을 자녀도 지니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이름’은 ‘본성’을 의미하고, 아버지께서 아드님께 주시는 본성은 곧 ‘신성’, 즉 성령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아버지께로부터 받으시는 성령으로 제자들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만들어서
서로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청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성령을 받은 이들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습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거룩해지면 반드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비투스가 부모를 위해 다시 특별해진다면 이제 보통 사람들로부터는 외면당하고
미움과 질투를 받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녀들을 이렇게 거룩하게 만드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거룩하게 하십니다.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를 보고 배웁니다. 부모를 먹고 자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부모가 거룩하지 못하면 자녀들도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자녀를 사랑한다면 부모는 자녀에게 좋은 양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를 위해 거룩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채변봉투를 가져오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날이면 온 교실에 화장실 냄새로 가득 찹니다.
개똥을 퍼간 아이들은 구충제를 한 움큼 받기도 합니다.
대부분이 그런 시절이었는데, 우리 집도 재래식 화장실이었기 때문에 채변 봉투에 변을 담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나뭇가지로 변을 채취하다가 그만 비닐봉지를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나뭇가지로 해 보려고 했으나 채변봉투가 더러워지기만 했습니다.
이때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아버지는 긴 손으로 그 냄새를 다 맡으며 봉투를 건져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구토가 쏠리는 냄새가 나는 듯합니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자녀를 위해 그렇게 더러운 곳으로 내려가는 것이 거룩함입니다.
부모는 자녀 때문에 힘들지만, 그 자녀 때문에 또한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자녀를 많이 낳지 않으려는 이때, 우리는 또한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만들 수 있는 대상이
우리를 힘들게 만들 자녀들일 수 있음도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저도 이번 코로나 이후에 만약 유튜브를 하지 않았다면 몸은 편했을지라도 훨씬 거룩하지 못한 삶을 살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 글을 읽고 동영상을 보시는 분들에게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나를 고생시키는 그 자녀가 바로 나를 거룩하게 만든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나중에 주님 앞에서 봉헌할 수 있는 열매는 나를 먹고 거룩해진 자녀들뿐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5월27일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사도행전 20,28-38
요한 17,11ㄷ-19
저 위에서 기쁜 얼굴로 다시 만납시다!
고난의 여정이었지만 동시에 기쁨의 여정이었던 바오로 사도의 전도 여행이 오늘도 계속됩니다.
대축제인 오순절을 예루살렘에서 지냈으면 하는 바오로 사도의 바람 때문이었는지,
발걸음을 재촉하는 분위기가 역력합니다.
에페소에서의 냉대와 박해 속에 겨우 목숨을 건진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로 갔습니다.
그리스에서 석달 가량 머문 뒤에 시리아로 가려했으나, 유다인들이 바오로 사도를 해칠 계략을 짜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됩니다.
할수 없이 바오로 사도는 마케도니아를 거쳐 돌아갑니다.
그야말로 기약없는 고난의 행군입니다.
필리피에서 트로아스로, 트로아스에서 또 다시 배를 타고 아쏘스로, 아쏘스에서 미틸레네로, 미텔레네에서 사모스 섬으로, 그 다음 날에는 밀레토스로 넘어갔습니다.
오랜 여독과 박해와 매질로 온 몸이 병든 바오로 사도에게 있어 참으로 혹독한 여행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반도를 횡단하는 먼거리를 도보로 걸은 후에는 하루 쉴만한데, 바오로 사도는 그 다음 날 이른 아침 또 다시 배에 오릅니다.
기도로 꼬박 밤을 지새운 후, 날이 밝으면 어김없이 행장을 꾸리곤 했습니다.
밀레토스에 도착한 바오로 사도는 64 Km나 떨어진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을 초대합니다.
그리고 감동 깊기로 유명한 ‘고별 연설’을 행합니다.
이 연설은 바오로 사도가 교회 지도자들에게 하신 유일한 연설입니다.
눈물없이 들을 수 없는 고별 연설은 사도행전 20장 17~38절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지상에서는 더 이상 만날 기약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바오로 사도의 음성은
비장함으로 가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고통과 박해를 받게될 남아있는 제자들과 양 떼를 생각하니 깊은 슬픔과 측은함이 밀려와 바오로 사도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립니다.
“나는 성령에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여러분 가운데로 들어가 양 떼를 해칠 것임을 나는 압니다.
그러니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물로 타이른 것을 명심하며
늘 깨어 있으십시오.”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일이 없습니다.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은 이 두 손으로 장만하였다는 사실을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2~35절)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이 살았던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한 진솔한 고백, 전도 여행길에 겪었던 고초들, 남겨질 양 떼를 향한 사랑에서 우려나온 바오로 사도의 염려가 아무런 가감없이 잘 소개되고 있는 명설교입니다.
고별 연설이 끝나자 그 자리에 함께 했던 에페소 교회 원로들은 복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그런 모습을 본 바오로 사도는 무릎을 꿇고 그들과 함께 기도를 시작합니다.
이 지상에서는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다들 흐느껴 울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지상에서의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면서
바오로 사도를 배 안까지 배웅하였습니다.
“그간 정말 감사했습니다. 제 불찰을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부디 건강하십시오.
저 위에서 기쁜 얼굴로 다시 만납시다.”
고통과 시련, 그러나 기쁨과 감사로 가득한 바오로 사도의 선교 여정을 묵상하면서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모든 것이 잘 갖춰진 여건 속에서 왜 좀 더 적극적으로 선교활동에 임하지 못했던가 하는
자책감이 밀려왔습니다.
지칠줄 모르는 선교 열정으로 활활 불타올랐던 바오로 사도와 쥐꼬리만큼 일하고도 ‘피곤해 죽겠다! 힘들어 죽겠다!’가 입에 붙은 제 모습이 크게 대조되어 많이 서글펐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5월27일 [부활 제7주간 수요일]
복음: 요한 17,11-19 : 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11절)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지켜주셨던 이들을 이제 아버지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지켜주시기를 기도하신다. 그리고 그들은 하느님께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베드로의 믿음도 지켜졌다. 움츠러들었었지만 곧바로 회개가 뒤따랐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청하신다. 하나라는 말은 ‘어떤 조화를 이룬 상태’를 말한다. 서로 다른 것들이 모여 조화로운 상태, 일치된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제자들이 주님의 사랑 안에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지켜오셨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께서 주신 것을 하나도 잃지 않을 것(요한 6,39 참조)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요한 6,37)라고 하셨다. 그들이 잃는 자가 되는 것은 그분이 버리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떠나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선택의 결과이다. 그래서 “멸망하도록 정해진 자 말고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12절) 하신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13절) 이 기쁨은 바로 일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다. 주님께서는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다. 그들이 참으로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을 때, 기쁨은 충만해지고 이것이 장차 올 세상의 평화와 복됨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차지하려면 이 현세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충실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말씀을 전해 주셨는데, 세상은 제자들을 미워했다. 그것은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14절)세상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 때문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2코린 4,18)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부터 우리를 미워했다.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이다. 우리는 새로이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게 산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다. 이제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우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15절) 하고 기도하신다. 아직은 세상에 있어야 하는 그들을 악에서 지켜달라고 하신다. 그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지만 세상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17절)라고 기도하신다. 세상에 속하지 않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것은 그들이 더욱 성덕 안에서 자라게 하시려는 것이다. 더욱 거룩하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진리를 본받음으로써 덕을 갖추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그 진리는 아버지의 말씀이며 그 말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18절) 예수께서 파견하신 이들은 사도들이다. 사도라는 말은 ‘파견된 이’를 뜻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죄 많은 인간과 비슷한 모습으로 보내시고, 그분의 아들은 당신께서 죄의 더러움으로부터 거룩하게 해 주신 이들을 파견하셨다. 사도들을 파견하신 것은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이며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그 아버지의 말씀은 바로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19절) 제자들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거룩하게 한다는 말씀은 아버지께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친다는 말씀이다. 모든 제물은 거룩하다고 한다. 특별히 거룩한 이들은 하느님을 위해 따로 떼어진 이들이다. 그러기에 “이들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라는 의미도 그들도 제물로 바친다는 의미이다. 제자들의 머리가 그렇게 된다면 지체들도 그렇게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로마 12,1)라고 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이 거룩하게 되도록 언제나 깨어있어야 한다. 우리는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질 것이다. 진리는 한 처음부터 계시던 하느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육 안에서 하느님에 의해 거룩해지는 동시에 당신의 신성으로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시기도 하다. 우리가 그분 안에서 더욱 거룩해지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도록 하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