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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은 비가 와도 아름답더라
1. 설악산의 안개 속 풍경
遂陟歡喜巓 드디어 환희령 정상에 오르니
坐無草可藉 깔고 앉을 만한 풀조차 없다네
扶杖立斯須 지팡이 기대 잠시 동안 서서
騁目窮高下 산의 위아래를 모두 바라본다네
峕崒幾疊巒 가파르게 솟아 있는 몇 겹의 산봉우리
馳逐或迎迓 내달리듯 혹은 맞이해주는 듯
挺拔揷蒼穹 뽑아서 푸른 하늘에 세워놓아
未嘗屈腰髂 일찍이 허리를 굽힌 적 없다네
褒鄂整冠劒 포공(褒公)과 경공(鄂公)이 관과 검을 가지런히 하고
彷彿聞叱吒 꾸짖는 듯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 구사맹(具思孟, 1531~1604), 「한계산(寒溪山)」에서
주) 포공(褒公)은 위지경덕(尉遲敬德, 585 ~ 658)이고, 경공(鄂公)은 단지현(段志玄, ? ~ 642)인데 두 사람 모두
당의 개국공신이다.
▶ 산행일시 : 2024년 5월 20일(월), 비, 바람, 안개
▶ 산행인원 : 3명(악수, 하늘재, 가은)
▶ 산행코스 : 장수대,대승폭포 전망대,1,360m봉,남교리 갈림길,1,362m봉,응봉 갈림길(1,363m봉),아니오니골
합수점, 온 길 뒤돌아감
▶ 산행거리 : 도상 11.9km
▶ 산행시간 : 10시간 53분(06 : 10 ~ 17 : 03)
▶ 교 통 편 : 가은 님 승용차로 가고 옴
▶ 구간별 시간
06 : 10 – 장수대, 산행시작
06 : 40 – 대승폭포 전망대
07 : 07 – 아침( ~ 08 : 05)
09 : 10 – 대한민국봉 아래 1,360m봉
09 : 22 – 남교리 갈림길
09 : 50 – 응봉 갈림길, 1,363m봉
12 : 06 - 아니오니골 합수점, 점심( ~ 13 : 06)
14 : 50 – 응봉 갈림길, 1,363m봉
15 : 35 - 대한민국봉 아래 1,360m봉
16 : 33 – 대승폭포 전망대, 장수대 0.9km
17 : 03 – 장수대, 산행종료
2. 대승폭포, 이처럼의 물줄기를 보기가 쉽지 않다
3. 나도옥잠화
4. 연령초
5. 설악산 안개 속 풍경
6. 큰앵초
오늘 일기예보에 서울 날씨는 하루 종일 ‘구름 많음’이었다. 그런데 설악산의 날씨는 이와 달랐다. 오전 오후에 2~3
시간씩 비가 내린다고 했다. 강수량은 1mm 내외로 그리 많은 양은 아니지만 하루 종일 음울한 날씨가 될 터였다.
나는 그런 줄을 모르고 서울 날씨의 연장으로만 보고 비에 대해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는데, 하늘재 님은 수시로
설악산의 날씨를 점검하고 이에 만반의 대비를 하였다.
어제 계룡산 산행이 생각보다 힘들었다. 밤늦게 집에 와서 곧바로 곯아 떨어졌다. 02시 30분 알람을 꿈결에서도
듣지 못했다. 전에 없던 일이다. 아내가 나를 깨웠다. 부랴부랴 배낭 메고 집을 나섰다.
새벽 설악산 가는 길은 퍽 조용했다. 서울도 고속도로도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서울양양고속도로를 동홍천
IC에서 빠져나와 들른 화양강휴게소는 불이 꺼졌으나 커피자판기는 가동 중이었다.
06시 10분에 장수대에 도착한다. 장수대의 좁다란 주차장에는 대여섯 대의 승용차가 이미 왔다. 날은 밝았고 구름이
끼었으나 주변 경관은 명료하다. 고개 들어 바라보는 첨봉인 삼형제봉 연봉이 위압적이다. 장수대탐방지원센터
자동문을 열고 들어서면 우리더러 어서 오시라 맞이하는 하늘 가린 늘씬한 소나무 숲을 나는 좋아한다. 나에게만
그럴까, 이 숲길을 지날 때면 저절로 힘이 솟는다. 사열하듯 천천히 둘러보며 지난다.
데크계단 오르면서 왼쪽 계곡 깊숙이 보이는 사중폭포(四重瀑布)가 산골을 울린다. 하얀 물줄기가 오늘은 대폭의
그것이다. 대승폭포 가는 길 곳곳에 설악산을 다녀가서 이곳의 절승을 읊은 옛 사람들의 시를 소개한 시판을 세웠
다. 가쁜 숨을 고를 겸사로 발걸음 멈추고 일일이 들여다본다.
유하 홍세태(柳下 洪世泰, 1653~1725)의 「삼연이 설악산 산수의 명승을 말하면서 이미 설악산 깊은 곳에 집을 마련
했다는 말을 듣고 짓다(聞三淵談雪岳山水形勝。盖已置屋其深處云)」이다.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 1653~1722)
은 당쟁으로 아버지 김수항(金壽恒)을 비롯한 집안의 여러 사람이 화를 입자 벼슬을 그만두고 설악산 영시암에 은거
한다. 삼연의 이 설악산 은거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설악산이 널리 알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寒溪瀑比朴淵雄 한계폭포 박연폭포 웅장함과 비견되니
落勢銀河掛半空 떨어지는 기세는 은하수가 하늘에 걸려 있는 듯
萬壑四時吹亂雪 골짜기에는 사계절 내내 어지러이 눈처럼 날리고
蒼崖白日鬪雙虹 푸른 절벽엔 한 낮에 쌍무지개 뜬다지
다음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화가인 능호관 이인상(凌壺館 李麟祥, 1710~1760)의 「한계관폭(寒溪觀瀑)」 의 일부다.
神嶽千峯擁 신령스런 큰 산 천 개의 봉우리가 옹위하며
天河一氣分 하늘의 강 하나의 기롤 나누었다
다음은 서파 오동일(西坡 吳道一, 1645~1703)의 「한계관폭(寒溪觀瀑)」 의 일부다.
雖嫌勢減雷千鼓 천 개의 북 울리는 듯한 우레 같은 소리 줄어든 건 아쉽지만
且愛形如玉一條 한 줄기 옥 같은 저 모습은 사랑스럽구나
擬待秋來山雨足 산비 넉넉히 내리는 가을 오기를 기다려
快看狂沫噴層霄 미친 듯한 포말이 하늘에서 뿜어 내리는 걸 장쾌하게 보리라
다음은 삼연의 문인이고 고성군수를 지낸 모주 김시보(茅洲 金時保, 1658~1734)의 「대승폭(大勝瀑)」의 일부다.
願起空中臺 원컨대 하늘에 누대를 지어
逈臨千尺勢 아득히 천 길 형세에 임하기를
千尺徒噴薄 천 길 높이에서 쿵쿵대며 쏟아질 뿐
散落未成潭 흩날려 떨어져 연못도 만들지 못한다
다음은 운석 조인영(雲石 趙寅永, 1782~1850)의 「한계폭포(寒溪瀑布)」다.
瀑布如飛飛若浮 날아가는 듯한 폭포, 공중에 떠 있는 듯
層峰老木半天幽 층층 봉우리 나무 우거져 하늘은 컴컴하다네
7. 장수대 주차장에서 바라본 삼형제봉 연봉
8. 대승폭포 아래 암벽
9. 대승폭포
10. 안산능선 가는 길
11. 연령초
12. 나도옥잠화
14. 아니오니골 가는 길
16. 설악산의 안개 속 풍경
배낭에 든 게 별로 없는데 무겁다. 몸도 무겁다. 데크계단 오르기가 쉽지 않다. 어째 데크계단이 더 가팔라진 것만
같다. 이러하니 이따가 이 길을 내려올 일이 걱정이다. 그때는 배낭이 훨씬 더 무거울 텐데 말이다. 대승폭포 관폭대
는 가리봉 관산대이기도 하다. 안개구름은 가리봉과 주걱봉, 삼형제봉을 먼저 덮친다. 대승폭포(옛날에는 한계폭포
라고 했다)가 모처럼 그 수려한 모습을 드러낸다. 대승폭포를 본 옛 사람들 눈의 그 정확함에 새삼 감탄한다. 다른
한편 마치 긴 한 폭(幅)의 비단폭을 걸쳐놓은 것 같다.
대승폭포 포말이 날리는 건가? 얼굴에 싸락눈 같은 물방울이 떨어진다. 자세히 보니 부슬비다. 일기예보보다 일찍
비가 내린다. 그렇다고 우리의 행보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비에 젖은 돌길이 미끄럽다. 숲속에서는 듣는 빗소리는
약간 소란스럽다. 대승폭포에서 좀 더 올라간 소폭이 있는 등로 옆 공터가 우리들의 아침식사 자리다. 하늘재 님이
준비해온 타프를 치고 어둑하여 램프를 매달아 밝힌다. 산중에 이보다 더한 정취가 있는 산장이 있을까?
어묵 끓이고, 그 국물에 우동을 삶는다. 으슬으슬하던 속이 금방 따스해진다. 타프에 소낙비가 쏟아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도란도란 정담 나눈다. 그간 적조했던 악우들의 소식을 듣는다.
작년 이맘때도 꼭 이랬다. 이 이른 아침에 대승령에서 내려오는 3명의 젊은 등산객들을 만난다. 그들의 행로를 물었
다. 귀때기청봉을 넘어오는지, 넘으려다 뒤돌아오는지. 귀때기청봉을 넘으려고 했는데 비를 만나 뒤돌아오는 길이
라고 한다. 그 뒤로 내려오는 몇 명의 등산객들도 마찬가지다. 남의 일이지만 아쉬운 노릇이다.
등산로가 가팔라지기 시작할 무렵 왼쪽 풀숲 사면으로 난 옛길을 찾는다. 전에는 ‘등산로 아님’이라는 표지가 있었는
데 그게 도리어 누가 보더라도 등산로라고 알아챌 수 있었다. 그 표지가 없고 보니 옛길이 헷갈린다. 어둑하거니와
비에 젖은 낙엽은 인적을 가렸다. 무덤 2기 나오고 그 위로 인적이 뚜렷하다. 엷은 능선을 오르다 사면 돌기를 반복
한다. 돌길 오르고 너덜 사면 옆 가파른 슬랩을 기어오르기도 한다. 오르다말고 둘러보면 안개 속 풍경이 그윽하다.
약간 더 살이 붙은 능선을 잡는다. 한동안 넙데데한 길이 이어진다. 안산능선이 가까워질 때쯤에는 다시 가파른
오르막이다. 곧 안산능선 대한민국봉 직전 귀룽나무가 꽃 핀 공터다. 날이 맑다면 대한민국봉 아래 전망바위에 올라
가리봉 연봉 연릉의 장쾌한 모습을 보련 했는데 안개가 만천만지하여 거기 가는 발품을 덜었다. 곧장 남교리 갈림길
을 향한다. 등로 옆 풀숲의 연령초와 큰앵초, 두루미풀꽃이 발길 붙든다. 엎드려 얼른 눈맞춤하고는 부지런히 일행
을 뒤쫓곤 한다.
남교리 갈림길 지나고 응봉 갈림길인 1,363m봉 가는 길이 여간 사납지 않다. 지난겨울 기록적인 폭설에 쓰러진
나무들 말고도 박새마저 쓰러져 등로를 막았다. 풀숲과 잡목 숲 헤쳐 인적을 찾곤 한다. 이래서 때 이르게 비에 흠뻑
젖는다. 속옷은 물론 등산화 속도 젖었다. 오는 비보다는 풀숲 헤쳐 온 비에 더 젖는다. 오늘 종일 그랬다. 또한 산기
운이 차디차다. 그저 걷고 걸어 추위를 견딘다. 응봉 갈림길 1,363m봉을 지나면 등로는 더욱 고약하다. 하늘재 님은
지도를 연신 들여다보고 가은 님은 나침반으로 방향을 확인한다.
18. 연령초
19. 설악산의 안개 속 풍경
27. 설악산의 안개 속 풍경, 가은 님
작년 풀숲 그 자리에 백작약은 올해도 피었다. 한 송이다. 비가 오니 순백의 꽃봉오리는 다물었다. 나도옥잠화는
비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비를 즐기는 것 같다. 나도옥잠화(Clintonia udensis Trautv. & C.A.Mey.)는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잎은 뿌리에서 나고 6~7월에 흰 꽃이 긴 꽃줄기 끝에 핀다. 어린잎은 식용한다. 높은 산의
그늘에서 자라는데 강원, 경남, 제주 등지에 분포한다. 제비옥잠이라고도 한다. 국생종은 나도옥잠화의 보호방안으
로 20여 곳 이상의 자생지가 있으나 개체수가 많지 않고 기후변화에 따른 자생지 환경의 악화가 우려되어 자생지
확인과 유전자원의 현지내외 보전이 필요하다고 한다.
생사면을 누빈다. 박새초원이다. 안개 속 시계는 불과 몇 미터다. 혹시라도 서로 헤어지게 되면 아니오니골 합수점
에서 만나기로 한다. 거기가 우리의 점심자리다. 그래도 서로 연호하여 대강의 위치를 파악하며 나아간다. 배낭은
꼬박 메고 다닌다. 배낭을 벗어놓으면 자칫 잃어버릴 수도 있다. 배낭이 점점 무거워진다. 계곡 가까운 가파른 사면
을 길게 트래버스 하여 기어이 아니오니골 합수점에 다다른다. 이때는 비가 오기를 잠시 멈췄다.
고기 구워 얼추 배를 채운 다음 후식으로 비빔면을 조리하여 먹으려는데, 비빔면은 삶은 면발을 찬물로 행구는 등
차게 먹어야 제 맛이겠지만 당장 추워서 달달 떨고 있는 판에 도저히 그렇게 해서는 먹지 못할 것 같다. 라면처럼
끓인다. 그래도 아주 맛있다.
온 길 뒤돌아간다. 그새 멀리도 내려왔다. 허리 굽혀 초원 살피면 연령초와 나도옥잠화, 큰앵초가 화사하게 반기고,
허리 펴고 주위 둘러보면 안개 속 농담의 풍경이 ‘인간세상이 아닌 별천지다(別有天地非人間)’이다.
노거수인 주목을 만난다. 내가 지금까지 본 주목 중 가장 우람하다. 어쩌면 두위봉에 있는 천연기념물인 주목보다
더 오래 되고 더 크지 않을까 한다. 이런 노거수를 만나면 두고두고 기분이 쇄락하다.
갈 때는 잡목 숲 헤치는 고역을 올 때보다 두 배 이상 겪는다. 배낭은 올 때보다 더 무겁고, 등산화는 발가락이 간지
럽도록 벌컥거리고, 바지자락은 다리에 찰싹 달라붙고 칙칙 감긴다. 낮은 포복하여 쓰러지고 부러진 나뭇가지를
통과하기 여러 번이다.
시간이 산을 간다. 대승령에 내려 돌길을 내리기보다는 안산능선에서 내리쏟는 편이 낫다. 고도를 낮추니 기온이
올라간다. 대승폭포에 이르러서는 껴입었던 겉옷 벗는다. 설악산 골골은 운해에 잠겼다. 가경이다. 데크계단 주춤
주춤 내리고, 물소리 더욱 크게 들리는 사중폭포를 먼발치로 바라보고 장수대 문을 나선다.
실로 오랜만에 원통 사우나에 들른다. 뜨뜻한 욕조에 산행 내내 떨었던 몸을 담그니 짜릿짜릿한 감촉이 뼛속까지
짜르르 스민다. 이래서 산행하는 이유 중 하나가 알탕 또는 사우나탕에 들기 위해서다. 인제에서 제일이라는 맛집으
로 간다. 보쌈에 막국수를 먹는다. 굳이 설악산 곰취를 꺼내지 않아도 입에 착착 달라붙는다. 한 가지 아쉬운 건
가은 님이 운전 때문에 하산주 탁주를 마실 수 없다는 점이다. 서울 가는 길. 엷은 졸음에 오늘 설악산 안개 속 일이
한바탕 꿈만 같다.
28. 연령초
29. 대단한 노거수인 주목
30. 나도옥잠화
31. 백작약
32. 안산능선에서 대승폭포 가는 길
35. 가리봉은 안개에 가렸다
36. 대승폭포 아래 암벽 주변
37. 사중폭포 아래 무명폭포
38. 장수대 주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