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1762~1836)이 강진에서 19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할 때 백련사 주지인 혜장선사(1772~1811)를 만나고 아암(兒庵)이란 호를 지어준다. 절 주변으로 야생차가 많아 산 전체가 다산(茶山)이었으며 아암에게 차를 배우게 된다. 초의선사(1786~1866)는 아암의 제자이며 자연스럽게 정약용에게 시와 글을 배웠다. 서울에 있는 정약용의 지인들에게 초의를 소개해 주었고 그로 인해 초의선사는 추사 김정희(1786~1856)와도 만나게 된다.
혜장선사는 정약용보다 열 살 어리고 제자인 초의선사보다는 14살이 많다.
초의선사와 절친인 추사 김정희는 동갑이다. 정약용이 추사보다 24세가 많으니 아버지 벌이고, 당대의 대학자이며 실학자이고 추사의 스승인 박제가 역시 실학자였다. 추사와 정약용 선생과 많은 복선으로 인해 그를 흠모한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의 아들과는 교우를 하지만 두 사람은 한 번도 만나지 못한듯하다.
추사가 제주 유배지에서 돌아와 그간 척을 졌거나 마음속에 흠모했던 분들께 비문이나 현판을 써준다. 약용 선생님이 계셨던 초당에는 "보정산방(寶丁山房)"을 써주었다고 한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다산초당의 현판은 1957년 복원하는 과정에서 집자(추사의 글씨에서 한 글자씩 찾아서 문장을 만든 것)를 해서 서각 한 것이라 한다.
집자를 해서 서각을 했다고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짧은 소견으론 즉과도인(卽果道人)이라 쓴 것은 감상하는 관람객들을 기망(欺罔) 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생전에 다산이란 호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국민의 대부분이 다산 정약용으로 알고 있다.
잘사용하지 않았던 다산 호를 붙이고 집자한 다산초당 현판을 건 것은 복원에 참여한 사람의 사견에서 시작되었으나 한번 잘못 붙여진 지명은 바로 잡기 힘들다는 것을 지리산 유람록 답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
글을 정리하는 내내 나도 모르게 다산 선생이라 몇 번 써서 다시 수정했다.
입에 붙은 습관이 그만큼 무서운 것이다.
정약용의 대표적이 호는 사암(俟菴)과 열수(洌水)이다.
오히려 그의 진짜 호가 어색한 건 나만 그런 게 아닐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진실이라 믿고있던 것들도 외곡,변조가 된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보다 면밀한 조사를 통해 바로 잡아가길 바래본다.
"다산초당 유적 보존회 중요한 내용들을 살펴보면
1957년 3월 7일 다산초당 착공일
1957년 5월 26일 다산초당 상량식
1958년 4월 25일 다산초당 준공일
1959년 5월 5일 다산초당 낙성일
이러한 일정으로 다산초당은 복원건립 된다. 다산초당 유적 보존회 기록에는 초당의 현판과 주련에 대한 기록도 상당부분 밝히고 있어서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단기 4290년(1957) 12월 4일 수요일(음10월13일) 산정리 고서화가 김영리 씨를 심방하였더니 다산초당 현판의 글씨는 김추사 서(書)에서 집자 하는 것이 합당하다 하며 자기가 이미 집자에 적당한 서자를 마음속으로 정하고 있으니 이를 본떠 가라 하여서 현판 글자와 주련 글자를 본떠서 왔다"라고 쓰고 있다.
김영하 씨가 재은씨에게 추사 글씨를 집자해 주어서 그것으로 장흥군 용산면 어산리에 살고 있는 다산초당 복원 도편수 이수길의 손자 목수 이두만에게 각을 맡겨서 다산초당 현판과 주련의 각을 해서 오늘날 초당의 상징이 된 다산초당의 현판과 주련이 있게 되었다"
출처: 강진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