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무드 Talmud 67회
♥ 탈무드적 승리
여기에선 두 사람의 유대인 망명자에 대해서 언급해보고자 한다. 두 사람 다 주머니에 동전 한 푼 없는 빈털터리로 고향에서 쫓겨나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두 사람은 미국에서 최고의 각료가 되었다. 한 사람은 재무장관을 지낸 마이클 브루맨탈(64대)이다. 그는 나치 독일에 쫓기어 배편으로 중국 상해로 도망쳐갔다가 당시의 일본 관헌의 보호를 받아 미국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또 한 사람은 헨리 키신저이다. 키신저 일가도 나치에 의해 독일에서 쫓겨나 무일푼으로 미국에 도착했다. 그리고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하버드 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대통령 특별보좌관을 거쳐 국무장관(56대)으로까지 승진하였다.
망명자로서 미국의 각료가 됐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는데, 그 성공의 이유는 그들 두 사람에게는 모두 <탈무드적 발상의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탈무드적 발상이야말로 두 사람의 성공을 가능하게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탈무드 발상의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것은, 동전에는 반드시 표리의 두 면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라는 이면에는 과거가 있으며 미래는 현재와 표리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어두운 경우라도 밝은 면이 있으며, 밝은 경우에도 부분적으로 어두움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요컨대 모든 사물과 모든 문제에는 언제나 두 가지 면이 있다.
탈무드의 금전에 대한 항목 가운데에는 '돈은 사람들 사이를 굴러다니니까 둥글다'고 하는 격언도 있는데, 동시에 '모든 사물은 동전과 같이 두 면(표리)이 있다’고 하는 말도 있다. 이 표리라는 사고방식을 시간의 문제에 적용시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탈무드의 다른 페이지를 넘겨보면 '보트의 노를 저어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보트의 뒤를 보고 앉아야만 된다'고 하는 말도 있다. 이것도 또한 전진하기 위해서는 과거가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말이다.
이 탈무드적 발상을 몸소 실천한 사람을 소개하겠다.
영국에서 하층계급에 속하는 생활을 하고 있던 유대인 일가가 있었다. 이 일가는 동유럽의 포그룸에서 박해를 피하여 이주해 왔었다. 양친은 손수레에 잡화를 싣고 끌고 다니면서 행상으로 생개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에겐 아이가 모두 열한 명이나 있었는데, 그 열 번째 아들은 머리가 아주 좋고 활력에 넘쳐 있었다. 그러나 학교 성적이 너무 나빴고 다른 학교로 옮겨도 늘 성적이 뒤졌다. 그렇다고 해서 그 아이의 머리가 나쁜 것은 아니었으며, 단지 학교의 수업방식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관련한 비슷한 예로 아인슈타인이 있다. 그 또한 유대인이다. 천재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는 그도 학교에서는 항상 낙제점에 가까운 점수만 받았다. 아마도 틀에 박힌 학교 규칙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만약 아인슈타인이 평범하고 성실한 학생이었더라면 나중에 대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담임인 여교사는 성적표에 다음과 같이 기입하였다. ‘이 아이가 장래에 성공한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계의 교육사상 이처럼 평가를 잘못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모든 고정화된 개념으로는 위대한 것이 아무것도 생길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면 여기에서 그 런던의 유대인 일가의 아들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부친은 그 아들에게 선물을 주었다. 유대인은 한 시기를 매듭지을 때마다 반드시 선물을 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 부친은 아들에게 극동(極東)행 배의 3등실 편도 승선권 한 장을 축하선물로 주었던 것이다.
그때 부친은 아들에게 두 가지 조건을 붙였다. 하나는 금요일의 샤바트가 시작되기 전에 반드시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다. 두 번째는 부친 자신도 나이도 먹었고, 또 열 명의 형제자매가 있으므로 집안 살림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여행중에 생각해 주기 바란다는 것이었다.
이 아들은 18세의 나이로 런던에서 혼자 배를 타고 인도 · 말레이시아·싱가포르를 거쳐 극동으로 향했다. 그는 도중에 아무데에서도 내리지 않고 배의 행선지 종점인 일본의 요코하마까지 곧바로 갔다. 그것이 1880년대의 일이었다.
그는 주머니 속에 넣어둔 5파운드의 돈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일본에는 물론 아는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고 숙식할 집도 없었다. 또 그 시대에는 일본에 있는 외국인이라야 기껏 요코하마와 도쿄 등지에 사는 수백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소난의 해안에 도착하여 금방 주저앉을 것 같은 무인 판잣집으로 기어들어가 처음 며칠을 지냈다. 거기에서 그가 이상하게 여긴 것은 매일 일본의 어부들이 물가의 모래를 파고 있는 모습이었다. 눈여겨보았더니 그들은 모래 속에서 조개를 캐고 있었다.
굉장히 아름다운 조개였다. 순간 여러 가지로 가공하거나 다듬으면 단추라든가 담배 케이스 등 아름다운 상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기도 열심히 조개를 줍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조개를 가공해서 부친에게 보내면 부친은 그것을 손수레에 싣고 런던 거리에 팔러 다녔다. 당시의 런던에서는 이것을 진기하게 여겨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얼마 후 부친은 손수레를 끌고 다니면서 팔던 장사를 그만두고 조그마한 가게 하나를 얻었다. 이 가게가 이층집이 되었고, 다음에는 삼층집이 되었고, 후에는 처음 런던의 빈민가인 이스트엔드에 있었던 점포를 웨스트엔드로 옮기는 등 이 조개껍질을 밑천으로 한 장사는 나날이 번창해 나갔다.
그 사이에도 일본에 있었던 그의 아들은 상당한 돈을 저축할 수 있었다. 이 청년의 이름은 마커스 사무엘이고, 히브리 이름으로는 모르데카였다.
그 무렵 온 세계의 비즈니스맨 사이에서 가장 큰 화제가 되었던 것이 석유였다. 때마침 내연기관이 등장하였고, 석유의 수요가 급증하고 있었다. 록펠러가 석유왕이 된 것도 이 시대였으며, 러시아 황제도 시베리아에서 석유를 탐사케 하고 있었다.
조개껍질 장사로 크게 성공한 사무엘은 이 석유의 채굴에 눈을 돌려 1만 파운드를 자본금으로 해서 계획을 세웠다. 그 자신은 석유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과 상의하며 인도네시아 근처라면 석유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하고, 인도네시아에서 석유탐사를 시작했다. 육감이 들어 맞았던지 아니면 행운이었던지 어쨌든 제대로 들어맞아 석유를 채굴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의 인도네시아는 석유를 난방용으로 쓸 필요가 없었고, 또 어두워지면 활동을 계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석유의 판매처를 어딘가 다른 데에서 구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라이딩선(船) 석유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일본에 석유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일본에서는 석유로 난방을 하기도 하고, 혹은 조명을 한다든가 하는 혁명적인 일이 일어났다.
그래서 이 장사도 역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석유를 인도네시아에서 일본까지 어떻게 운반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큰 골칫거리였다. 처음에는 2갤런들이 깡통으로 운반했는데, 원유를 운반하면 선박이 더러워지므로 운반 후 청소하는 일이 문제였다.
그리고 또 화재 위험도 크다는 이유로 선박회사에서 원유 운반을 꺼려했고, 운반한다 해도 운반비가 엄청나게 바쌌다.
그래서 사무엘은 자기 스스로 연구한 끝에 세계 최초의 유조선을 고안해냈다. 그리고 그는 세계에서 첫 번째로 유조선의 선주가 되었다. 그는 자기 소유의 유조선마다 일본 해안에서 자기가 캐냈던 조개 이름을 붙였다. 이에 대해서는 그 자신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는 가난한 유대인 소년으로서 일본의 해안에서 혼자 조개를 줍고 있었던 과거를 결코 잊지 못한다. 그 덕분에 나는 오늘날 백만장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석유사업이 성공하면 할수록 영국인 사이에서는 ㅠ대인이 석유업계에서 군림하고 있는데 대해 반발이 강해져, 마내 이 회사를 팔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당시 영국은 대해군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함대에 사무엘이 석유를 공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무엘이 회사를 팔게 되었을 때 몇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그하나는 소수 주주라 할지라도 반드시 유대인이 간부로 회사에 들어갈 것, 그리고 이 회사가 존속하는 한 조개이름을 상표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것으로 그는 항상 자기의 과거를 기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조개 마크를 붙인 석유회사가 바로 지금 세계 각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쉘(Shell) 석유이다.
사무엘도, 브루맨탈도, 키신저도 탈무드에서 배워 인생을 참되게 사는 지혜와 용기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으며, 탈무드적 발상을 실행했던 사람들이다. 특히 사무엘의 인생을 사는 방법에는 오늘날 동양의 셀러리맨이 배워야 할 시사적인 교훈이 내포되어 있다.
오늘날 세계는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하는데, 이 불확실성의 큰 원인은 과거와 현재 사이에 올바른 균형이 잡히지 않고 있는 데서 기인한다.
자기의 과거는 사무엘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큰 자산이 된다.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는 누구나 잘 모르고 있으므로 자기의 과거에 대해서 자신을 갖는 것은 절대로 필요한 일이다. 자기가 굉장히 고독하고, 자기 눈앞에 열려 있는 상황이 어떤 처지라 해도 <자기가 이제까지 걸어온 과거 속에서 자신감과 긍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의지하며> 살아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중론, 곧 다수의 의견이 반드시 올바르다고는 결코 볼 수 없으며 설사 다 한 사람이라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면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개체로서의 신선한 발상이 생긴다.
유대인에게는 많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유태인 개개인의 적이 아니다. 따라서 유대인은 만약 주위 사람이 자기 적이 된다고 해도 그것은 자기 탓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그러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그들의 문제이지, 자기 문제가 아니라고 명쾌하게 결론을 내려 버린다. 그리고 자기가 언제나 옳고, 자기 외에는 신뢰할 자가 없다고 판단하여 자기중심적인 생활을 한다.
여기에 비하면 동양인은 고독에 빠져 있다. 집단으로 일을 하고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사실은 자신감이 없고 고독하며 언제나 초조하다. 예를 들어 동양인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 술 마시는 법, 혹은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면 그로써 고독이나 초조감을 해소시키보다는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것 <동양인이 자기 중심의 생활을 보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생활에 단층이 생기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런 방식으로 살아나가면 긍지와 맞서는 용기 혹은 기회를 잡고 과감하게 자기를 주장하고,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든다고 하는 대담성을 잃게 된다. 유대인이 어떻게 해서 자기 인생에 자신감을 갖느냐 하면, 역시 <유대민족은 위대하다는 것을 기술한 탈무드를 심히 탐독하기> 때문이다.
훌륭한 고전이나 문학은 단지 비즈니스 면에서의 기지를 신장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것만은 아니다. 비즈니스라고 하는 것은 <원래 인간 사회에 있어서의 승부이므로 개체로서의 자기를 확립시킬 필요>가 있다. 조용한 자신감은 언젠가는 겉으로 드러나는 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민족으로서의 전통을 올바로 배우고, 거기에 민족의 긍지를 이해하여 <자기 자신이 자랑할 만한 인간이라고 하는 자신감을 확립하는> 일이다. 그것이 저절로 비즈니스의 재치와 결부될 것이다.
<편집: 강 전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