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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환의 명시감상
물음으로 가는 길
박노해
엄니 나는 어느 별에서 보내왔어
성아 배꽃이 왜 하양게 울어
뻐꾸기는 왜 소리만 보인당가
잠든 아부지를 왜 땅에다 심어
세상의 모든 것은 물음이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건 물음이 있다는 거였다
물음이 멈춘 나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 내가 맞닥뜨린 세상은
묻는 것이 금지되고
묻는 내가 불온해지고
물음 자체가 죄가 되는 시대였다
멈추지 못한 물음으로 나는 고독해지고
가난한 내 사랑은 핏빛 사랑이었다
나는 물음을 멈추지 않았다
멈출래야 멈출 수가 없었다
괴로운 노동이 내 몸을 짓누를수록
물음은 내 안에서 더 크게 종 울려왔다
해고와 천대와 군화 발에 피 흘리면서
나는 세상을 향해 목숨으로 부르짖었다
멀리서 가슴 떨리는 메아리가 있었다
그 답이 눈부시게 왔다고 생각한 순간
세상에, 물음으로 살아온 내가
물음을 물리치는 답안이 되어 있었다
밖에서 금지된 물음에 맞서
내 안의 물음이 금지되었다
*
푸른 물음이 끊기자
내 사람이 무섭게 메말라갔고
무너져야 할 세상보다
내가 먼저 금이 가고 있었다
나는 하루아침에 빛나는 길을 잃고
캄캄 벼랑 끝에 홀로 세워져 있었다
눈보라는 차갑고 아무것도 의지할 데 하나 없고
돌아설 수도 나아갈 수도 없는 시대의 끝간 곳
나는 차라리 온몸을 물음표로 내던졌다
한 말씀만 하소서!
얼음장 밑으로 시간은 차게 흐르고
나는 침묵의 불덩어리를 품고 참혹했다
나는 세상에서 잊히며 죽어 있었지만
목숨 건 물음이 있었기에 살아 있었다
나는 바탕 뿌리부터 하나하나 다시 물었다
저들을 향해, 세상을 향해, 던지는 물음을
묻는 나 자신에게도 돌이켜 물었다
처절한 물음은 나의 투쟁이고 나의 사랑이고
마지막 남은 희망이었다
*
물어야 길이 나온다
물음이 길을 가르쳐준다
아니 물음이 바로 길이다
사무치는 물음이 곧 사는 길
물음이 끊긴 길은 곧게 빛나도 죽은 길
나에게 죽음은 길이 없는 게 아니고
물음이 그치고 물음이 멈춘 것이다
나에게 두려운 건 답이 틀리는 게 아니고
내 안의 물음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물음이 없는 삶은 살아도 죽은 것
----「물음으로 가는 길」({오늘은 다르게}, 해냄, 2007년) 전문
박노해(본명 박기평, 세례명 가스발) 시인은 1957년 전라남도 함평에서 태어났고, 선린상업고등학교 야간부를 졸업했다. 1984년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을 통해 ‘얼굴 없는 시인’으로 불리며, ‘노동해방운동의 기수’로 한 시대를 풍미한 바가 있다. 그는 1991년 ‘사노맹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6년여의 수배생활과 8년여의 감옥 생활 끝에 1998년 ‘8,15 특별사면’으로 석방된 바가 있다. 첫 시집 {노동의 새벽} 이외에도 두 번째 시집 {참된 시작}과 옥중 산문집 {사람만이 희망이다}, 그리고 대한민국 산문의 진수인 {오늘은 다르게}를 펴낸 바가 있다.
나의 [사색인의 십계명] 제2계는 다음과 같다.
제2계, 잘 질문한다;
외디프스가 그의 수수께끼를 풀었을 때에도 스핑크스는 자살을 할 수밖에 없었고, 오딧세우스가 그녀의 노래 소리를 들었을 때에도 사이렌은 자살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에게는 영웅적인 용기와 匕首가 필요하다.
모든 진리는 시간과 장소에 의해서 규정되는 잠정적인 진리에 불과하다.
우리 학자님들, 그대들은 왜 노벨상을 타지 못하고, 한국문학 이론을 정립하지 못하는 즐거움만을 만끽하고 계시는지요? 도대체가 아무런 명명의 힘도 없는 그대들이 한국 사회의 파산 상태의 주범들이 아니시던가요?
나는 이미 나의 [사색인의 십계명] 제1장에서 역설한 바가 있듯이, ‘愛知’의 첫 번째 조건은 깊이 있게 배우는 것이며, 두 번째 조건은 잘 질문한다는 것이다. 깊이 있게 배운다는 것은 잘 질문한다는 것이며, 잘 질문한다는 것은 깊이 있게 배운다는 것이다. 깊이 있게 배우지 못한 사람은 잘 질문할 줄을 모르며, 잘 질문할 줄을 모르는 사람은 깊이 있게 배우지를 못한다. 임마뉴엘 칸트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현상이지, 물 자체는 아니다’라고 말한 바가 있고, 헤겔은 ‘사물의 본질은 사물 자체 속에 폐쇄되어 있지만 그것은 다양한 현상들로 나타난다’고 말한 바가 있다. 요컨대 임마뉴엘 칸트는 영국의 철학자들의 말을 빌려, 다만, ‘현상론’을 피력해본 것이고, 헤겔은 칸트의 ‘현상론’을 정면으로 공격하고, 그 현상론을 넘어서서, 사물의 본질을 탐구할 수 있는 ‘현상학’----다양한 현상들을 탐구하면서 사물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는 현상학----을 역설해본 것이다. 잘 질문할 줄 모르는 사람은 우리 한국인들처럼, 타인의 사상과 이론만을 따라가는 노예에 불과하지만, 잘 질문할 줄 아는 사람은 타인의 사상과 이론을 뛰어 넘어서, 헤겔처럼, 마르크스처럼, 자기 자신만의 독창적인 사상과 이론을 정립하게 된다. 깊이 있게 배우고 잘 질문한다는 것은 이처럼 중요하고, 또한 그것은 진정한 ‘愛知者’의 전제조건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애지자’는 창조적 천재이며, 그의 지혜에 의하여 과거의 역사와 문화유산이 보존되고,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천세불변의 사상의 신전과 고급문화의 새싹이 움트게 된다. 잘 질문한다는 것은 깊이 있게 배운다는 것이며, 어느 누구도 감히 꿈꿀 수 없는 독창적인 사상과 이론으로, 우리 인간들의 지상 최대의 행복론을 연출해낼 수가 있다는 것에 다름이 아닌 것이다.
모든 물음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이며,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며, 그만큼 불순하고 위험한 것이다. 박노해의 물음에는 어린 왕자처럼, 순진함, 정직함, 천진함, 명랑함, 용기, 지적인 민감성 등이 살아서 숨쉬고 있다. 「해거리」, 「서로 눈을 마주봐요」, 「나 닮은 아이 하나 기르지 못하고」, 「산들바람처럼」의 시와 산문이 그렇지만, 「물음으로 가는 길」은 어린 아이의 동심이 그 무엇보다도 맑고 투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성아 배꽃이 왜 하얗게 울어”라는 동심이 자라서, “물음이 끝난 길은 곧게 빛나도 죽은 길”이라는 경구를 낳고, “잠든 아버지는 왜 땅에다 심어”라는 동심이 자라서 “해고와 천대와 군화발에 피를 흘리고”,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물음이 있다는 거였다/ 물음이 멈춘 나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라는, 시구를 낳게 된다. 그 물음은 상대적 완전성과 상대적 절대성에 맞닿아 있는 방법적 회의이며, 데카르트가 아닌, 하이데거적인 의미에서 새로운 존재의 탄생과 그 성숙을 의미하는 물음이다. 물음이 내면으로 향할 때는 “세상에 물음으로 산다는 내가/ 물음을 물리치는 답안이 되었다”라는 시구에서처럼, 자아의 반성과 성찰로 이어지고, 그 물음이 시인의 바깥으로 향할 때는 “해고와 천대와 군화발”이 암시하듯, 우리 인간들의 삶을 억압하는 사회적 모순의 문제와도 만난다. 그 물음은 우리 인간들의 존엄성과 행복을 위해서 열려 있는 물음이며, 따라서 그의 물음은 회의주의자의 물음도 아니고, 염세주의자의 물음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학연, 지연, 혈연을 통해서 야만적인 사색당파와 패거리를 짓고 사회적 불평등과 빈곤을 구조적으로 재생산해가는 사회이지, 그 물음을 진지하고 정직하게 수용하고 있는 사회가 아니다. “상징자본, 경제자본, 문화자본, 사회자본”을 통해서 지배 체제의 정당성만을 옹호하고 있는 권력자들과 자본가들과 학자들, 또 그 “오인의 메커니즘”(부르디외의 사회학 이해 나남출판사)을 통해서 상징적 폭력과 물리적 폭력을 합리화시켜 주는 여러 제도와 장치들, 자본가와 권력자에 기생하여 그들의 약육강식의 논리를 사상과 이념으로 정교하고 세련되게 무장시켜 주고 있는 학자들----, 바로 그들이 그 물음의 진실을 은폐하고, 그 물음의 주체자들을 전면적으로 관리하고 통제를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박노해의 물음은 힘에의 의지를 통해서 앎(진실)에의 의지를 추구하고 있는 물음이며, 그 앎에의 의지를 삶에의 의지(도덕에의 의지, 실천에의 의지)로 승화시켜 나가고 있는 물음이다. 우리 인간들의 삶의 양식과 의식 구조가 하나의 수수께끼이듯이, 그의 물음은 하나의 모범답안을 작성하고자 하는 물음도 아니고, 돈과 명예와 명성만을 추구하는 물음도 아니다. 그 물음은 박노해 시인과 우리 인간들의 존재론적 성숙과 공동체 사회의 행복에 맞닿아 있는 물음인 것이다. 우리 인간들의 의지가 자기 보존 본능에 충실한 힘에의 의지이듯이, 우리 인간들의 물음에는 새로운 인간, 새로운 삶의 추구라는 대전제 아래, 어떠한 불이익, 불명예, 고통, 좌절, 실패, 두려움, 공포 앞에서도 결코 용기를 잃지 않겠다는 신념이 진하게 배어 있다. 박노해의 물음은 동심에서 나오고, 그의 동심은 순진함, 정직함, 천진함, 명랑함, 용기, 지적인 민감성 등에 맞닿아 있다. 박노해의 티없이 밝고 순수한 마음은 그의 용기에서 솟아나오고, 그의 용기는 사회주의의 혁명가로서, 또는 성자의 영웅주의로서 이 세계를 떠받쳐 주는 건강한 초석이 된다. 그의 순진함, 천진함, 명랑함은 어린 아이의 표정과 사회주의의 혁명가, 혹은 문화적 영웅의 표정이 겹쳐져 있다. 그렇다. “물어야 길이 나온다”, “사무치는 물음이 곧 사는 길”이라던 그의 용기는 「그대 미래를 품었는가」라는 아름다운 산문에서처럼, “긴 호흡으로 재창조하는 삶”을 이룩해낸 영웅들, 즉 예수, 붓다, 간디, 등소평, 만델라, 마르크스로 만개를 하게 된다.(반경환, 「박노해 비판」, 비판, 비판 그리고 또 비판, 새미출판사를 참고할 것)
박노해의 질문이 내면으로 향할 때는 자아의 반성과 성찰로 이어지고, 그 물음이 시인의 바깥으로 향할 때는 우리 인간들의 삶을 억압하는 사회적인 모순의 문제와도 만나게 된다. 그는 그 질문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존재론적 성숙을 이룩하게 되고,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현대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해결해내려는 사회주의의 혁명가, 즉, 문화적 영웅의 길로 걸어가게 된다. 그의 질문은 상대적 완전성과 상대적 절대성에 맞닿아 있는 방법적인 회의이며,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인간의 삶과 그 행복을 연출해내려는 방법적인 수단이다. 비평이란 질문이 양식화되어 있는 모든 학문의 물질적 토대이며, 나는 언젠가, 어느 때는 ‘질문의 사회학’을 정립해보고 싶다는 소망을 간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진정으로 알지 못해서 그것을 알려고 던지는 질문, 어느 일의 궁극적인 목적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진행 과정을 알아보려는 질문, 상대방의 진심을 알고 있으면서도 다시 한 번 확인의 차원에서 다짐을 해두고자 하는 질문, 궁지에 몰린 동료나 이웃을 도와주고자 하는 유도성 질문, 상대방의 장점을 더욱 더 강화시켜 주고자 하는 질문, 어느 누구도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만큼 그의 최종적인 승리가 확실해지고 있을 때 그를 단 한 방에 K.O패 시켜버리려는 질문 등----, 요컨대 이러한 질문의 유형들은 얼마나 다종다양하며, 우리 인간들의 삶 속을 파고 들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이것이 무엇이지요? ‘질문의 사회학’에 대한 기초 자료조사는 어느 정도 되어가고 있는지요? 이 다음에 장, 차관이 되더라도 우리 아버님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돼요? 순찰 중에 떼강도를 잡지 못한 것은 크나 큰 실수이지만, 철조망에 걸려 넘어졌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일이 아니었던가요? 그분은 주경야독으로 오랫동안 연구한 끝에, 세계에서 최초로, ‘미적분 방정식’을 정립하지 않았던가요? 아니, 이 보세요, 그분의 미적분 방정식은 라이프니츠의 이론을 하나하나 모조리 표절한 것이 아니었던가요? 이문열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하고 한국문학의 최정상에 올라설 수가 있었지만, 그 작품은 황석영의 「아우를 위하여」를 모조리 표절한 것이 아니던가요? 이 ‘표절의 공화국’인 대한민국은 세계적인 대석학들이 단 한 사람도 없고, 우리 한국인들의 백만 두뇌는 모조리 무력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던가요? 이처럼 잘 질문한다는 것은 모르는 것을 배운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지만, 기존의 사상과 이론의 존재론적 근거를 통째로 베어버리고 새로운 사상과 이론을 창출해내겠다는 의지도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잘 질문한다는 것은 비평의 전제조건이며, 비평은 그 질문이 양식화되어 있는 모든 학문의 물질적인 토대이다. 문학비평, 미술비평, 영화비평, 철학비평, 과학비평, 정신분석비평, 경제비평 등, 그 모든 학문들은 이 비평의 토대에서만이 생성되고 소멸되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평이란 이 세상의 사물의 의미와 우리 인간들의 사상과 이론을 평가하는 것이며, 그것은 비평가의 비판철학을 통해서 관철된다. 만일, 비평이 이 세상의 사물의 의미와 우리 인간들의 사상과 이론을 평가하는 것이라면, 비평가는 그 비평의 대상과 그 주체자들에 대한 신비의 베일을 걷어내는 작업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비평의 손길은 매우 따뜻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 더없이 날카롭고 싸늘할 수도 있다. 어쨌든 비평이란 사물의 의미와 그 가치----사상과 이론의 의미와 그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며, 비평가는 우리 인간들을 인도하는 진리의 사제인 것이다. 비평가의 비평은 상대방의 약점을 집중적으로 공격함으로써 그것을 보완할 수 있게 해주며, 또한 상대방의 역비판을 야기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약점을 보완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서로간의 생사를 넘어선 싸움을 통해서 ‘논쟁의 문화’를 활성화시키고, 모든 독자들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고 그 ‘논쟁의 문화’에 참여할 수 있게끔 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잘 질문한다는 것, 즉 비평가의 사명이란 이처럼 엄청나고도 중대한 것이다.
나는 일찍이 비평의 기능을 정화기능과 강화기능, 그리고 성화기능으로 설명을 한 바가 있다. 정화기능은 그 주체자의 더럽고 추한 때를 맑고 깨끗하게 씻어주는 기능이며, 강화기능은 그 더럽고 추한 때를 씻고 새로운 장점을 구축해주는 기능이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화기능은 그 장점이 극대화된 결과, 언제, 어느 때나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고 궁극적으로는 문화적 영웅(부처, 예수, 대서사시인 등)으로 수직 상승시켜주는 기능이라고 할 수가 있다. 가령, 예컨대, 나의 플라톤 비판은 플라톤의 약점을 씻어주는 정화기능이며, 그리고 만일, 플라톤이 그 약점들을 극복하게 된다면, 그를 더욱 더 강하고 튼튼하게 단련시켜주는 강화기능이 될 것이다. 따라서 플라톤은 더욱 더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비판의 정신으로 그 모든 논쟁의 무대에서 언제나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고, 우리는 그 사상의 신전을 우러러보면서, 언제, 어느 때나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며, 찬양과 찬송을 하게 될 것이다. 아아, 플라톤이여, 소크라테스여! 이제는 수천 년의 역사와 그 시간의 무게를 떨쳐버리고, 그대들의 무덤 속에서 뛰쳐나와, 그 모든 것을 낙천적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이 반경환이를 단 칼에 베어버리고, 또 베어버려 보려므나! 그러면, 나는 그때마다 더욱 더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정신으로 무장을 하고, 나의 낙천주의 사상의 칼날을 더욱 더 날카롭고 예리하게 그대들의 심장에다가 들이대게 될 것이다. 논쟁은 만물의 아버지이며, 우리 인간들은 오늘도 그 논쟁의 핏줄로 살아가고 있다. 아아, 반경환이여, 비판을 받고 또 비판을 받아 보아라! 그러면 그대가 얼마나 더럽고 추악하게 타락했는가를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아아, 반경환이여, 비판을 하고 또 비판을 해보아라! 그러면 그대는 더욱 더 낙천주의 사상의 주인공이 되어갈 수가 있을 것이다.
모든 문화가 힘에 의해서 구축되고 그 힘에 의해서 성장해나가듯이, 비평 역시도 힘에 의해서 구축되고 그 힘에 의해서 성장해나간다. 실증주의 비평, 현실주의 비평, 정신분석 비평, 구조주의 비평, 탈구조주의 비평, 현상학적 비평, 그리고 나의 낙천주의 비평 등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비평이란 모든 분야에서 그 힘을 기르는 수단으로 작용을 하며, 어떠한 총과 칼과 화약 냄새도 없이 힘과 힘이 맞부딪치는 처절한 생존경쟁의 장이 된다. 정치, 경제, 문화, 예술, 역사, 스포츠, 오락, 심지어는 연애까지도 그 비평의 장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성장해나갈 수가 없다. 비평만이 위대하고 비평만이 고급문화의 최종적인 심급인 것이다. 신생아의 첫 울음 소리는 그 비평의 장에 내던져진 것에 대한 두려움의 산물일는지도 모른다. 아아, 우리 학자들이여, 어서 빨리 그대의 날카롭고 예리한 ‘비판의 칼날’(질문의 칼날)을 들고 비평의 장에 나서 보아라! 바로 그러면, 그때에는, 그대는 소크라테스처럼, 플라톤처럼, 가장 위대하고 가장 훌륭한 철학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깊이 있게 배우고 잘 질문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 넣는다는 것이며, 자기 자신만이 최종적인 승리자가 되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약하기 때문에 힘을 원하고 빈 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도움을 필요로 하고, 또 그리고 어리석기 때문에 판단력을 필요로 한다고 루소는 말한다. 우리 인간들의 최대의 약점은 힘(지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며, 그 힘 때문에 자유롭고 선량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힘을 가진 자는 신처럼 자유롭고 선량할 수 있지만, 힘이 없는 자는 예속되어 있고 사악하다라고, 루소는 또 말한다. 따라서 힘이 없으니까 신을 창조해놓고 그 예배의 형식으로 종교를 안출해낸 것이며, 그 종교의 교리에 우리 인간들을 묶어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그 종교의 마력을 벗어나는 힘은 이 비평의 힘에서 나온다. 그대 신이여, 그 허깨비의 환영을 벗어던지고, 이 세상에서 사라져가 버려라! 바로, 이 내가, 너를 비판하는 내가 신이란 말이다. 나는 이미 신성모독자의 존재론과 그 행복론을 역설한 바가 있다. “나는 신성모독을 범한다, 고로 존재한다”와 “세계는 나의 범죄의 표상이다, 고로 행복하다”라는 제일급의 명제가 바로 그것이다.
박노해 시인은 노동자 시인으로서 한국문학사상 그만의 독창적이고도 독특한 시와 산문의 진수를 선보인 바가 있는 데, 그것은 그가 오랜 절차탁마의 과정 끝에 앎과 행동을 극단적으로 일치시켜 나갈 수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안다는 것은 행동한다는 것이며, 행동한다는 것은 그 앎을 실천한다는 것이다. 박노해 시인의 [물음으로 가는 길]은 ‘질문의 사회학’을 쓰고 싶을 만큼 나의 지적 욕망을 자극시킨 시이며, 모든 비평의 예비학으로서 그 물음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 이 글은 나의 [사색인 십계명} 제1장의 특정부문의 글이며, 나의 생각들을 약간 덧 붙이고 추가한 글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의 ‘명시감상의 독자들’에게 이 글만큼은 꼭 소개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