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인이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있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저절한 항일운동의 일상을 산 분들을 생각하니 시인의 말을 곱씹어보게됩니다. 3.1만세운동 바로 다음 해에 일본군 30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엄청난 전과를 올려 세상을 놀라게 한 청산리대첩의 영웅 김좌진 장군이 왜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으며 그가 몸 담았던 ‘북로군정서’의 지도자 서일 총재는 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는지, 김좌진 장군과 함께 청산리 전투를 이끈 홍범도 장군은 어찌하여 잊혀지고 말았는지 차근차근 되짚어 봐야 하겠습니다.1920년 10월 청산리대첩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게 아닙니다. 4개월 전에는 봉오동전투에서도 일본군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습니다. 일본군 157명이 죽고 200여 명이 중상을 입었는데 비해 홍범도의 독립군은 전사 4명, 부상 2명에 그쳤다고 합니다. ‘신출귀몰 날으는 장군’이라고 불리며 살아있는 전설의 인물이 된 홍범도 장군은 1895년 을미의병 때부터 함경도 지방에서 산포수 의병부대를 결성하여 지속적으로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였다고 합니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 강제 해산에 반발하여 일어난 정미의병 때부터 1910년 경술국치 때까지 37회 전투를 벌였다고 하니 가히 국내 의병 항쟁의 구심이라 할 만합니다. 일본군이 간도지방의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2만 명(6000 명 청산리 전투 투입)의 병력을 동원한 걸 보면 함경도지역과 간도지역의 의병활동이 얼마나 활발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청산리대첩은 4반세기에 걸친 끈질긴 의병 항쟁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청산리 전투’하면 ‘김좌진 장군’만을 거의 반사적으로 연상하게 되는데, 이는 잘못된 역사 교육에 기인한다고 봅니다. 김좌진 장군의 군대는 이회영에 의해 세워진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무관들에 의해 정규 군대로 편성될 수 있었으며 장군이 속한 항일의용군 부대 ‘북로군정서’는 일찍이 조선 민중들이 만주로 건너와 자리잡아 일군 용정, 연길 일대 한인촌의 후원에 힘입어 운영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청산리전투를 다룬 대부분의 팩션(사극)이 이런 역사적 사실을 입체적으로 그리지 못하고 다만 김좌진 장군을 영웅으로 미화하기에만 급급합니다.함경도 지방, 간도, 연해주 지방의 독립운동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조사를 하면 할수록 분열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낳은 이데올로기의 폐해가 주원인인 게 드러납니다. 일례로 청산리 전투를 다룬 라디오 드라마가 1960년대에 방송된 적이 있었는데 이 방송을 들은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이 황당한 날조극이라고 비난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중에는 청산리 전투에 참전한 실체험자가 많았거든요. 우리가 막연하게 알고 있는 역사가 사실과 다를 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의식마저 뒤틀리게 만들었다니 참 황망합니다. 이제부터라도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되찾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제의 시베리아 침략을 무산시켰을 뿐만 아니라 만주 지배마저 위협할 정도로 용맹했던 간도 연해주 지역의 조선 독립군의 전투를 다룬 영화 작품으로는 <일송정 푸른 솔은>이 유일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영화는 1920년 2월에 ‘북로군정서’가 세운 사관연성소 군사훈련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1920년 제1회 사관연성소 졸업생이 298명에 달해 그 규모가 상당했는데 영화의 졸업식 장면은 좀 초라해 보입니다. 사관연성소에서는 신흥무관학교의 교육과정을 그대로 옮겨와 정규 사관학교 못지않은 규모와 체제를 갖추었으며 북로군정서 병사들이 소지한 무기도 일본군 무기의 성능을 능가하는 최신의 것이었습니다. 영화에서도 그리고 있듯이 상해임시정부와 대종교의 지원으로 마련한 군자금으로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서 체코 군대의 무기를 구입하였기 때문입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오스트리아로부터 해방된 체코슬로바키아 군대가 본국으로 귀국하면서 피억압 약소민족으로서 같은처지에있던조선독립군에게무기를싼값에넘겨줬던것입니다. 사관연성소 졸업식을 마치고 무기 운반대가 도착하자마자 북로군정서 부대는 십리평을 떠나 백두산 청산리로 이동할 수밖에 없는 긴박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1920년 6월에 벌어진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에서 크게 패한 일본군은 대대적인 토벌 계획을 세우고 만주 군벌 장작림에게 조선 독립군 토벌을 강압한 것입니다. 그러나 군벌 내 이견이 많았고 토벌군 단장 맹부덕은 조선 독립군과 비밀 협약을 맺어 무력 충돌을 피합니다. ‘독립군은 시가지나 국도 상에서 군인 복장으로 무기를 휴대하고 대오를 지어 행진하지 않는다. 중국군은 토벌에 나서기 전 독립군의 근거지 이동에 필요한 시간을 준다’는 내용 등을 합의했던 것입니다. 이 합의에 따라 만주의 독립군들은 백두산 청산리로 이동하게 됩니다. 일본군은 만주 군벌 내부 사정을 파악하고 독립군 토벌에 일본군을 직접 투입하기 위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 훈춘사건을 조작합니다. 만주의 마적단(도적떼)을 부추겨 훈춘의 일본 영사관을 공격하게 하고 이를 빌미로 군대를 파견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시베리아, 서간도, 조선 등지에서 일본군 2만 정도가 북간도로 진주해 오게 됩니다. 이 대부대 병력 중 6천 정도의 병력이 청산리전투에 투입되어 조선 독립군과 일대 격전을 벌였지만 참패를 하게 됩니다. 영화는 일본군과 싸우다가 처절하게 죽어가면서도 물러서지 않는 독립군의 장렬한 모습에 청산리 전투의 생존자 이우석 옹의 대사가 겹쳐지면서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때 엄호를 맡았던 동지들은 모두 전사를 했거나 실종을 했어요. 이제 나도 머지않아 저 세상으로 가겠지요. 헌데 이 늙은이 죽기 전에 한 가지 아쉬운 게 있어요. 나라가 반쪽으로 갈라졌단 말이요. 요즘 젊은이들은 그래도 마음이 편한지 모르겠는데 우리같이 반평생을 남의 땅에서 고생한 사람들은 그게 자꾸 서럽단 말이요. 우리 후손들 모두 똑똑하고 능력도 많은데 어서 이 나라를 한 나라로 합쳐지게 힘들 좀 써 봐요.”이 대사를 들으면서 가슴이 짠해졌습니다. 이렇게나마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온 몸을 바친 순국선열들의 거룩한 정신을 접하게 되어 감동받지 않을 수 없었지만 한편으로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이 작품은 1983년 만들어졌는데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계몽 영화로 보여 관객들의 외면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감춰진 역사적 사실을 밝혀내어 역사의 진실에 다가서게 하는 데에 한 점 보탬이 된 점도 없었습니다. 역사 왜곡으로 논란이 되었던 60년대 방송 드라마에 비해 진일보 한 점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게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친일 모리배 이광수가 청산리대첩 때문에 경신대참변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무고한 조선인이 무수히 죽었을 뿐이라고 비하한 데 대해 어떻게 항변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근래 연변 조선인과 중앙아시아 고려인 사회에서 발굴한 여러 사료와 증언을 토대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실상이 많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김좌진 장군의 수하에 있었던 이범석의 증언(회고록 ‘우등불’)에만 기대어 우리가 청산리 전투에 대해 잘못 알게 된 측면이 있습니다. 중국 조선족 역사 연구를 이끈 연변대학교 박창욱 교수는 “이범석 씨는 대한민국의 국무총리를 담당한 국가 수뇌의 신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좌진의 공로를 과대평가하고 홍범도와 그 연합부대의 공로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도리어 홍범도 부대는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고까지 역사를 왜곡하였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청산리 전투를 실질적으로 지휘한 자는 김좌진이 아니라 홍범도였으며 청산리 전투의 마지막 격전장 어랑촌 전투에서 북로군정서는 거의 괴멸하다시피 했고 홍범도 장군의 지원이 없었다면 김좌진 장군은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게 정설로 자리잡고 있습니다.2010년 KBS에서 방송한 청산리 독립전쟁 승전 90주년 특별기획 <불멸의 전쟁>은 이러한 연구 성과를 반영한 작품으로 역사의 진실에 가깝게 다가갔다고 봅니다. 한 마을에서 자란 두 친구가 독립 투쟁에 몸 바치기 위해 간도로 떠났다가 헤어져서 각각 김좌진 부대와 홍범도 부대로 들어가 활동하다가 청산리전투에서 상봉하여 함께 싸우는 이야기는 참 감동적일 뿐만 아니라 역사의 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가 몇몇 걸출한 영웅에 의해 좌우되는 게 아니라 이름 없이 산화해간 민중에 의해 진일보한다는 것을 잘 형상화한 작품이었습니다. 적군마저도 그 전략과 용기를 칭송했다고 하는 홍범도 장군은 노비 출신에다 사냥꾼이라는 천민 신분으로 조국 독립에 투신했으며 독립군 부대를 꾸리면서 주둔지 주변 민가에 어떤 민폐도 끼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장교 제복을 입지 않고 장수와 군졸의 구분을 마뜩찮게 생각하는 분으로 어딜 가나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일송정 푸른솔은』에서 동네 아낙이 병사들의 주린 배를 채우려고 총탄이 빗발치는 전선으로 뛰어드는 장면은 이러한 홍범도 부대의 민중 의식을 잘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1921년 발행된 <독립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고 하니 이 장면은 사실에 기반하여 그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군인들은 적과 싸우느라 통 먹지를 않아 부녀자들이 울며 권하기를, 당신이 만일 이것을 먹지 않으면 우리 다 죽을 때까지 돌아가지 않겠노라 하며 기어이 음식을 먹도록 하여 일반 군인으로 하여금 큰 위안을 받게 했다.” (<독립신문>, 제93호, 일부 현대어 수정) 영화 속의 이런 감동적인 장면과 달리 군자금을 징수하기 위해 거류민들을 추달하기도 했다는, 김좌진 장군에 대한 불명예스러운 증언은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청산리대첩의 영웅이었던 그가 왜 이렇게까지 전락하여 동포의 손에 죽임까지 당했는지 그 비극의 역사를 통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청산리 전투에서 많은 병력을 잃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부대는 러시아로 넘어가서도 찬밥 신세가 되고 맙니다. 소비에트 공산군에 편입되기를 거부한 독립군 부대는 볼셰비키 공산군의 공격을 받아 다수가 죽거나 포로가 되고 살아남는 자들을 다시 북간도로 넘어오지만 결국 북로군정서 서일 총재는 통한을 이기지 못해 자결하고 김좌진 장군은 간도 조선인 민중의 미움을 사 동포의 손에 죽임을 당합니다. 홍범도 장군의 말년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장군은 볼셰비키 공산당에 입당하여 조선 독립군의 연합을 위해 노력하지만 자유시 참변을 막지 못하고 일선에서 물러났다가 레닌 사후 스탈린 정권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합니다.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레닌과 트로츠키로부터 조선 최고의 혁명 전사로 떠받들어졌던 명예는 한낱 물거품이 되고 말아 카자흐스탄 고려극장 수위로 노년을 보내다가 쓸쓸히 생을 마감합니다.봉건왕조시대, 제국주의시대, 세계대전, 사회주의혁명, 동서냉전시대, 19세기말 20세기 초 격랑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복벽주의자로, 공산당 빨갱이로, 매국노로 오명을 뒤집어쓰고 한 많은 생을 마감한 분들을 생각하면 시대의 풍파를 해쳐나가면서 주체성을 잃지 않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공감하게 됩니다. 부화뇌동 했다고 탓할 수 있을 만큼 우리는 이 시대 파고를 잘 읽어내면서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있는가요. 비타협적으로 고집스러워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고, 요리조리 눈치 보며 대세에 편승하려고 꾀를 부리는 것도 추합니다. 저는 지금 어디쯤에 와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역사의 진실이라는 게 이런 게 아닐까요. 전민족의 대동단결을 위해 강력한 구심이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굶주리고 있는 민중들에게는 탐관오리의 학정이나 제국주의 수탈이나 그게 그것으로 다르지 않을 수 있거든요. 민족 해방이나 민중 해방이 따로 갈 수 없으니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 따지는 것은 역사의 진실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라 되새기게 됩니다.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하여 독립운동에 몸 바친 숭고한 희생을 지워버리는 역사 서술은 우리 역사를 옹졸하게 만들 뿐입니다. 『명량』으로 엄청난 관객을 모았던 김한민 감독이 봉오동 전투를 다룬 영화를 곧 만들겠다고 하니 절름발이 역사의 잃어버린 한쪽을 되찾는다는 의미만으로도 주목에 값한다고 봅니다. 기대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