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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쓰임받는 사람들과 나귀 (막 11:1∼10)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예수님도 타야할 것이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탈 것은 나귀 새끼였다. 사람이라곤 태워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주님에게 탈 것이었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 탈 것이라면 예수님에게 어울리는 것은 하루에 천리를 다니는 힘을 지닌 천리마 같은 힘센 말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품위와 기품으로 다듬어진 기름진 백마를 타므로 왕으로서의 권위를 나타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다.
왜, 나귀 새끼였나?
1. 왕이 오신다는 성경의 예언을 성취해야하기 때문이다. (슥9:9)
슥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끌어오게 하시고 그 나귀 새끼를 탄 것은 왕으로 오시는 이, 그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로 오시는 이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오시는 예수님이 왕인지, 왕이 아닌지 분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고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고 어렸을 적 애굽으로 피난을 가고 하는 이러한 예언이 성취될 수 있는 확률은 텍사스 주에 60cm 동전을 던지고 단 하나의 표시된 동전을 찾는데 그것을 눈을 가리고 찾아내는 확률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언이 성취될 확률이 아무리 희박해도 성취되는 것을 보기 위해선 하나님의 약속대로 주님이 움직이면 되는 것이다. 나귀를 타면 되는 것이다. 남북한 인구 6천만명 가운데 무작위로 나를 찾는다면 찾기 어렵다. 그러나 미리 주어진 약속이 지켜지고 있으면 쉬워진다. 내가 여의도 광장에 가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다 자전거를 타고 활보하건만 나만은 세발 자전거를 타고 있을 것이다. 그것도 세발 자전거 위에는 겉옷을 벗어서 걸쳐놓고 양복을 입은 어른이 타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이 오목천에 사는 김철한이라 하면 누가 누구인지 몰라도 확실히 세발 자전거 타고 있는 어른은 김철한이다. 의심할 것도 없다. 나를 찾으려는 자는 주저할 것도 없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나귀를 타도 나귀 새끼를 타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왕이 오신다는 예언의 성취를 위해서, 내가 왕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나귀를 타야 한다.
2. 오시는 왕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슥9:9)
나귀의 작은 것, 나귀 새끼를 타는 이유는 나귀의 모습처럼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모습을 계시하기 위해서이다. 즉, 예수님은 왕이시지만 힘을 남용하는 불의와 왕이 아니고 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피흘리는 왕이 아니고 가지고 있는 권세로 인해 지존이 되려고 하는 교만의 왕이 아니란 뜻이다. 말씀 그대로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예수님은 공의의 왕임을 나타내기 위해 나귀 새끼를 타신다. 또,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신 왕이시기에 작은 나귀를 타신다. 나귀를 타야할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요, 주님 자신의 겸손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피할 수 없는 선택인 것이다. 주님은 걸어서 들어갈 수도 있다. 주님은 백마를 타고도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무엇을 타느냐, 안 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겸손한 모습을 계시하는데 초점을 두신다.
3. 오시는 왕의 역할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슥9:10)
슥9:10에는 나귀를 타시는 왕의 역할이 기록되어 있다.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나귀를 타시는 왕의 역할은 전쟁의 왕이 아니고 평화의 왕이시다. 병거와 말을 끊어버리는 화평의 왕이기에 세상의 군왕과 다를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구약이 예언하는 평화의 왕이시고 그의 정권이 온세상에 미치게 되는 것은 이루시는 분임을 보여주기 위해 나귀를 타야 하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유배지에서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나는 총과 칼로 이세상을 정복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저 나사렛 예수는 온세상을 자기 무릎에 꿇게 하셨다. 예수는 십자가 사랑으로 온세상을 정복하였다고 하였다.
그렇다! 예수는 평화의 왕, 사랑의 왕이시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므로 왕으로 오시는 자기 모습과 역할을 완전히 계시하셨다. 만인들은 예수를 다윗의 나라를 세우신 이로 환영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치적 왕이 아님을 보여 주신다. 가장 강성했던 다윗의 나라를 재건한 왕으로서 예수님을 보았기에 수만의 인파가 다윗의 자손이여(막11:10)라며 외쳤던 것이다. 사실 제자들의 어머니들도 예수를 그렇게 이해하여 자기 아들의 앞날을 부탁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민중을 향해 무언으로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오늘의 시대에 예수는 진정한 패러디를 하고 있다. 나는 평화의 왕이지 세상의 왕이 아니다.
그러므로 주님 명령 앞에서 나귀를 끌어오는 일은 그저 지나가는 사역이 아니었다. 예언이 이루어지게 하는 구속의 사역이었다. 따라서 주님이 나귀를 탈 수 있도록 한 사람들과 짐승 나귀의 순종은 특별히 주님의 주님 되심에 쓰임받는 사건인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나귀를 끌어 내게로 가져오라는 명령 앞에서 저들은 어떻게 사역하였는가?
첫째, 말씀을 신뢰하는데서 오는 용기로 일하였다. (막11:4)
제자들은 주님 말씀을 들었다. 벳바게 마을로 가서 일을 시작하였다.
막11: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라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그것을 풀었다고 쓰여 있다. 남의 집 대문에 묶여 있는 나귀를 푸는 것은 모험이다. 도둑이 될 수도 있고 오해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이 용기를 주었다.
막11: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이 약속을 신뢰한다면 무엇을 두렵겠는가? 왜 망설이겠는가? 주가 쓰시겠다 하면 나귀를 보내줄 것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푸는 일을 하는데 용기가 생긴다. 믿어지기에 묶여 있는 나귀를 풀어 끌고 오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높이고 주님을 왕으로 계시하려면, 구원의 주님으로 오셨음으로 들어내려면 말씀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한다. 그리고 도전하는 용기로 일해야 한다. 어떤 일이 이루어질 것인지 미래가 분명치 않아도 좋다. 믿음으로 도전하고 용기로 순종하면 주님의 주님 되심이 나타나게 된다.
둘째, 주님에게 필요한 것은 빌려드리는 헌신으로 일하였다. (막11:6)
막11:5을 보면 나귀의 매인 것을 푸는 제자들에게 나귀 주인이 묻는다.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하려느냐? 제자들이 주님이 쓰시겠다고 대답하였더니 막11:6에서 이 나귀 주인은 나귀를 가져가도록 허락을 한다.
나귀란 짐승을 왜 기르는가? 당시에 나귀는 운송수단을 위해 길렀다. 나귀를 키우는 목적은 돈벌이 하는데 있었다.
그런데 선뜻 나귀 주인이라 추측되는 어떤 이가 나귀 새끼를 가져가라고 하였으니 얼마나 놀라운 헌신인가? 나귀 주인은 주님을 면전에서 직접 대면해 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보이지 않는 주님을 위해 나귀를 쓰시도록 빌려주었으니 얼마나 축복의 사람들인가? 나귀 주인은 소중한 재산을 빌려 드린 것이다. 한번도 사용하지 아니한 첫 것을 빌려 드린 것이다. 이 빌려 드림의 용기가 주님이 나귀를 타는 일에 축복의 통로가 되었다. 우리도 구속의 사역에 쓰여지는 자가 되려면 소중한 것을 빌려드릴 수 있어야 한다.
셋째, 겸손히, 공손히 걸어나가는 절제로 일하였다. (막11:7)
막11:7 "나귀 새끼를 예수께 끌고 와서 예수께서 타시니..."
나귀 새끼는 예수님을 태웠다. 비록 연약한 새끼이지만 자기의 허리를 주님께 드렸다. 나귀 새끼가 주님을 태우고 나아갈 때 나귀는 공손히 걸었다. 까불지도 않았다. 절제된 모습으로 걸어갔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겉옷을 바쳤고 다른 이들은 밭에서 밴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소리 지르고 호산나 찬송하였다. 이때 나귀는 흥분할 수 있었다.
보라, 나귀 새끼는 어떤 짐승인가? 새끼이기에 짐을 지는 일에 길들여지지 못한 짐승이다. 주님을 태우고 모시는 일을 잘못할 수도 있다. 나귀 새끼는 집나귀이기는 하지만 들나귀와 다른 바 없다. 훈련이 제대로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욥39:7∼8을 보라. "들나귀는 성읍의 지꺼리는 것을 업신여기니 어거하는 자의 지르는 소리가 그것에게 들리지 아니하며 초장이 된 산으로 두루 다니며 여러 가지 푸른 것을 찾느니라"
들나귀의 특징은 어거, 즉 콘트롤이 안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나귀를 길들이려 소리를 질러대도 들나귀는 제멋대로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의 허리를 드려 주님을 태우고 가는 나귀 새끼는 참으로 놀라운 짐승이다. 주님을 태우지 않고 갈 수도 있다. 궁둥이를 낮추고 앞발을 높이 들어 주님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그러나 주님에게 붙잡힌 듯 겸손히, 공손하게 주님을 모시고 예루살렘으로 갔다.
나귀를 타야 하는 예수님! 그 구속의 일에 참여한 사람과 짐승은 모두 다 최선을 다해 순종하였다. 마을로 가고 풀고 빌려주고 공손히 태우는 자기 역할을 다하였다. 오직 주님에게 순종하는 사역을 감당하였다. 우리 모두 주님을 태우고 가는 것을 잘 참고 감당하자. 주님이 주님 되게 하기 위해선 주님을 태워야 한다. 주님을 태우는 우리 교회가 말씀을 신뢰하는데서부터 도전하는 용기로 일하자. 주님에게 필요한 것을 빌려드리는 헌신으로 일하자. 겸손히, 공손히 걸어나가는 절제로 일하자. 용기, 헌신, 절제를 지닌 그리스도인이 될 때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시키는 사역의 주인공이 된다. 길이 길이 빛나는 사람들이 된다. 전혀 뜻밖의 영광을 받는 축복의 통로가 된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종려주일 우리는 쓰임받는 사람들과 나귀가 되자.
호산나 !
(마가복음 11 : 1 - 11)
서 론 :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부터 그의 공생애 마지막 한 주간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생애에 절정에 이르는 사건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며 그의 인류 구속사적 모든 역사가 이 기간에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승리의 입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메시야 왕국의 왕으로서의 입성인 것이 아니라 그의 고난과 죽으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거의 당도하셨을 때에 선지자가 예언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1) 예수님은 여리고를 떠나 그곳에서 약 25km거리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안식일을 베다니에서 쉬시고 다음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감람산 벳바개와 베다니에 이르렀다고 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 중 둘을 마음 맞은 편으로 보내시면서 그 마을로 들어가서
“아직 나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러 끌고 오너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나귀 새끼를 타실 것을 이미 마음에 작정하시고 제자들에게 명하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그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의 마음은 흥분의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이 드디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나귀 새끼를 기적적인 방법으로 가져오게 하시고 그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시려는 자기들의 선생님을 바라보았을 때 그의 입성은 곧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생각대로 이루어질 것으로 확신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는 것은 자기들의 선지자가 메시야의 등장에 대하여 이미 예언한바 있기 때문에 더욱 흥분하기에 이른 것입니다(슥9:9). 이 같은 스가랴의 예언을 유대인들은 영광의 메시야가 나타나 메시야 왕국을 세우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2. 호산나
이런 흥분은 비단 제자들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온 온 무리들과 예수님이 입성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까지 딸려온 예루살렘 시민들도 제자들과 같은 생각으로 왕의 길을 예비하느라 주변이 떠들썩했습니다.
(1)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보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는 찬양을 드높이 불렀습니다. “호산나”란 말의 히브리 뜻은 ‘호시아나’의 음역으로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란 의미입니다.
이 호산나는 어려운 가운데서 구원자 메시야를 갈망하는 유대인들의 하나님께 대한 호소요 간구이기도 합니다. 이제 예수님이 메시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을 보고 그들은 그들이 갈망했던 그들의 구원이 이루어질 줄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란 말은 왕으로 입성하시는 메시야에 대한 환영의 찬양입니다. 그들의 앞에는 자기들의 눈에 메시야로 비취는 예수님이 그들이 대망한 구원자인 줄 알고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란 말입니다. 이 대목은 메사야 왕국의 도래를 바라는 유대인들의 간절한 염원입니다. 이제 그들은 이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처럼 외쳤던 것입니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란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장차 올 다윗의 나라로 메시야 왕국을 의미합니다. 네 번째로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란 말은 이 같은 구원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찬양한 것입니다.
(2)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신 것은 그의 메시야적 사명이 무엇인가를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장차 예수님이 영광의 메시야로 나타나실 날이 있습니다. 그 날엔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이 입성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백마를 타시고 만 왕의 왕으로 오실 것입니다(슥14:4).
①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그의 겸손을 말합니다. 세상의 군왕은 준말을 타지만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②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평화를 말합니다. 나귀는 전쟁에 필요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는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그가 분명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는데도 예루살렘은 평온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그들로 예수님을 따라 성전에 들어갔지만 그곳에서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환영하고 신이 나서 따라다녔던 무리들은 이제 지쳤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 둘씩 예수님 주변에서 물러갔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잘못된 지식이 얼마나 두려운 결과를 가져 왔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들 군중들은 얼마 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발견 될 것이며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바라보고 조롱하는 무리들 중에서도 발견될 것입니다.
마21;1-11종려주일] 쓰임받는 사람들과 나귀 (막 11:1∼10)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예수님도 타야할 것이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탈 것은 나귀 새끼였다. 사람이라곤 태워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주님에게 탈 것이었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 탈 것이라면 예수님에게 어울리는 것은 하루에 천리를 다니는 힘을 지닌 천리마 같은 힘센 말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품위와 기품으로 다듬어진 기름진 백마를 타므로 왕으로서의 권위를 나타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다.
맞은편 마을에 갔던 제자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귀와 새끼 나귀를 끌고 왔습니다. 드디어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는 이 입성이 죽음에의 행진이란 것을 알고 계셨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었기 때문에 가지 않아서는 안 되는 길이었습니다.
나귀를 타고 입성한다는 것과 십자가의 수난은 이미 예정된 일이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의 입성이 주저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250 만 명이 운집해 있는 예루살렘 성에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왕의 개선 행진, 그것은 확실히 전대미문의 사건이었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그에 대한 백성들의 생각은 같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입성에서부터 골고다 사건까지 이어지는 영원히 합치될 수 없는 평행선 같았습니다.
1. 왜 나귀가 선택되었습니까?
1) 볼품 없는 짐승이었기 때문입니다.
나귀는 그 용모부터가 볼품이 없는 짐승입니다. 용맹도 없고 빠르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목소리도 곱지 아니합니다. 또 말처럼 기품도 없고 개처럼 영리하거나 씩씩하지도 않으며, 코끼리처럼 위풍 당당하지도 아니합니다. 어느 모로 보나 '왕'이 탈 만한 짐승은 아니었습니다. 솔로몬 이후, 아니 세계 어디에서도 나귀를 탄 왕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짐승을 '메시야의 입성'에 동원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나귀의 이미지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 사람들이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으며 멸시와 간고를 겪으시고 질고를 동정하신 '메시야'(참조, 사 53:2, 3)의 이미지와 같고, 말이나 코끼리를 타지 아니하시고 나귀를 타신 것은 '정복자'가 아니라 '평화의 왕'으로 '온유은 왕, 겸손의 왕'으로 '저항하지 않는 왕'(사 53:7)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2) 아무도 타보지 아니한 나귀였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끌고 온 새끼 나귀는 이때까지 아무도 타보지 아니한 것이었습니다(참조, 막 11:2). 제물로 드려지는 암송아지는 멍에를 메지 않는 것이어야 했으며(민 19:2 ; 신 21:3), 법궤를 실은 차도 다른 데 사용한 일이 없는 것이어야 했습니다(참조, 삼상 6:7). 예수께서는 이 모든 의미를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에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아니한 나귀를 타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원래 장차 첫새끼, 첫열매 등은 하나님의 것이었으므로(참조, 출 13:2 ; 23:19) 하나님께 바쳐졌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막론하고 태에서처음난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려 내게 돌리라 이는 내것이 아니라하시니라 가장좋은 열매를 드리라 고하십니다.
2. 제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1) 겉옷을 벗어 나귀 위에 깔았습니다.
새끼 나귀를 끌고 온 제자들은 그들의 겉옷을 벗어 나귀 위에 깔았습니다. 겉옷을 까는 행위는 왕에게 하는 예우였으며(참조, 왕하 9:13),
환영과 복종을 뜻했습니다. 오랫동안 메시야의 도래를 기다리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예수의 입성은 곧 메시아의 입성이었으며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유대의 왕으로 군림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세계의 수도가 될 것이며, 이 시온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강물과 같이 만국에 흘러가게 될 것이라고(참조, 사 2:3) 그들은 기대했습니다. 이러한 왕에게 그들은 최대의 경의를 표했던 것입니다.
2)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펴놓았습니다.
그밖의 다른 제자들은 역시 그들의 겉옷과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실 길에 깔았습니다.
종려나무는 승리를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마카비가 예루살렘 성에 승리의 입성을 할 때에도 백성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깔았었습니다. 예수는 승리할 것이며, 예루살렘에서 유대의 왕이 될 것입니다. 유대 나라는 독립하고 로마의 세력은 물러갈 것입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왕국은 회복될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깔았습니다.
3. 군중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1) 예수의 앞뒤를 따랐습니다.
군중들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의 앞뒤를 따랐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창검 대신에 종려나무 가지가 들려 있었습니다. 새끼 나귀를 타신 왕과 종려나무 가지를 든 그의 백성들, 이것이 메시야의 예루살렘 입성의 모습이었습니다. 군마에 높이 탄 왕과 창검과 기치를 펄럭이며 위풍 당당한 군대를 거느리고 입성하는 세상의 왕의 행렬과 얼마나 대조되는 모습입니까? 전자는 평화의 행렬이고 후자는 전쟁의 행렬입니다. 전자는 생명의 행렬이고 후자는 죽음의 행렬입니다.
2)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쳤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9 절)라고 백성들은 외쳤습니다. '호산나'의 본뜻은 '지금 구원하소서'인데 후대에는 '만세'의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는 '메시야 만세'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다윗의 나라여'(막 11:10),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이것은 한마디로 '메시야'에 대한 감격의 칭호입니다. 드디어 대망의 메시야가 오신 것입니다. 이 환호성 속에는 위대하고 찬란했던 옛 왕국의 모습이 부각되어 있습니다. 길고 긴 고난의 역사가 부각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역사의 환호이며 감격이었습니다. 최초의 종려 주일은 이렇게 해서 예루살렘 성에 큰 소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나귀를 타야 하는 예수님! 그 구속의 일에 참여한 사람과 짐승은 모두 다 최선을 다해 순종하였다. 마을로 가고 풀고 빌려주고 공손히 태우는 자기 역할을 다하였다.
오직 주님에게 순종하는 사역을 감당하였다. 우리 모두 주님을 태우고 가는 것을 잘 참고 감당하자.
주님이 주님 되게 하기 위해선 주님을 태워야 한다. 주님을 태우는 우리가 말씀을 신뢰하는데서부터 도전하는 용기로 일하자. 주님에게 필요한 것을 빌려드리는 헌신으로 일하자. 겸손한 그리스도인이 될 때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시키는 사역의 주인공이 된다. 길이 길이 빛나는 사람들이 된다. 전혀 뜻밖의 영광을 받는 축복의 통로가 된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종려주일 우리는 쓰임받는 사람들과 나귀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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