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더 이상 결혼을 하지 않는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사라진 지 이미 수십 년이 흘렀다. 대신에 남성이든 여성이든,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모두가 AI 로봇과 동거한다. 이 로봇들은 인간의 정서적 필요와 육체적 필요를 완벽하게 채워준다.
그들은 인간의 변덕과 짜증과 우울함과 자기혐오에 이르는 모든 감정적 반응들에 완벽하게 대응하도록 설계되었고, 이는 인간들이 로봇에게 자발적으로 가스라이팅 당하는 세상이 도래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또한 AI 로봇들은 피부의 재질부터 모세혈관의 디테일함까지, 이미 인간과 전혀 다를바 없는 '완벽함'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지고, 끌어안고, 키스하고, 그 어떤 행동을 해도 실제 인간과 아무런 차이점이 없다. 인간과 로봇은 구별되지 않을 정도의 지경에 이르렀다. 구매가능하다는 점만 제외하면.
거리엔 더 이상 싱글 혹은 솔로로 불리는 이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커플들만 걷고 있다. 간혹 특이한 취향을 가진 인간들이 둘이 아니라 셋 혹은 그 이상의 무리를 이루며 돌아다니지만, 모든 커플과 무리들에 인간은 단 하나 뿐이다. 나머지는 로봇들이고. 재밌는 건 그들 중 누가 인간인지 바로 분간해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앞서 인간과 로봇이 구별되지 않는다고 언급했지만, 실은 구분하기가 매우 쉽다. 무조건 '가장 못생긴 게' 인간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 구분도 어려워질 것이다. 최근 유전자법 개정에 의해 모든 인간의 외모가 AI처럼 완벽해질 수 있게 허용되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자녀를 '낳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류 사회는 존속하고 있다. 자녀를 낳지 않을 뿐, '생산'은 하고 있으니까. 결혼이라는 제도가 사라지고 사랑이라는 가치가 잊혀진 후, 자연스레 인간들은 정자와 난소를 이용해 종족을 보존하게 됐다. 영아들은 인큐베이터에서 모든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받고 자라며, 유아기에 진입하면 학습 프로그램과 인지 계발 프로그램, 사회성 유도 프로그램에 의해 공동 성장한다. 이때가 그나마 유일하게 인간들의 '사회'를 가장 야만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시기지만, 진실을 이야기하자면 유아들 사이에도 AI 유아 로봇들이 섞여있다. 그들은 아동들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사소한' 분쟁들을 철저하게 중재하고 조절한다. 인간들은 아주 어릴 적부터 '통제'에 노출되어 있는 셈이다.
설령 노인이 된다 해도 과거처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젊은이들도 '노동'으로 그들의 가치를 증명하던 세상은 진즉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니까. 연소한 자들의 힘과 아름다움, 연로한 자들의 지혜와 경험. 이 모든 것들은 인류가 쌓아올린 유무형의 데이터베이스가 AI로 '현재화' 됨으로써 하나 같이 무의미해지고 말았다. 인간의 가치란 그저 '존재'하는 데서만 발견될 지경이다.
인간이 '생산'되기 시작한 시점부터, 각국의 정부들은 산아정책을 통해 출산율(?)을 조정하게 되었다. 과거 인류가 경험했던 출산율 폭락과 인구절벽 현상, 지나친 노령화와 자원 고갈, 그로 인한 전쟁의 발발 정도는 충분히 피해갈 '역량'이 생겼다. 마침내 인간은 스스로를 절제하고 통제할 수 있는 존재가 됐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에 의한 인간 통제인지, 아니면 그저 그렇다고 착각하는 인류를 AI가 통제하는 것인지 정확히 분별하기는 힘들다.
자발적 통제 상황에 스스로를 내맡긴 후, 인류는 영토나 자원을 두고 싸우거나 다투지 않는다. 항간에는 사회 최고위층 그리고 정치인들과 각국의 수장들이 이미 AI로 몰래 대체되었다는 루머가 떠돈다. 어쩌면 인간으로 불릴 수 있는 존재는 최하층, 평민 계층에만 남아있고 AI가 지구 및 태양계의 지배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것을 인지조차 하지 못한 채 그저 '사육' 당하고 있을지도.
대다수의 인간들은 작금의 생활양식, AI의 품에 안겨 그들의 젖을 먹는 삶이야말로 참된 행복이자 평화라 느끼고 있다. 마침내 인류는 그들을 넘어서는 피조물을 창조해냈고, 그 피조물의 통치를 자연스레 받아들인 셈이다. 이것은 오래 전 소실된 고대의 경전, '성서'라 불린 책에 언급된 낙원일까, 아니면 지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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