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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득사의(見得思義)
얻을 것이 생기면 옳은지 생각해 보라는 뜻으로, 나에게 이득이 있을 일을 만나면 먼저 옳은 일인가를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말이다.
見 : 볼 견
得 : 얻을 득
思 : 생각 사
義 : 옳을 의
孔子曰: 君子有九思.
공자왈: 군자유구사.
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 言思忠, 事思敬, 疑思問, 忿思難, 見得思義.
시사명, 청사총, 색사온, 모사공, 언사충, 사사경, 의사문, 분사난, 견득사의.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에게는 생각하는 일이 아홉 가지 있다. 사물을 볼 때는 분명하게 볼 것을 생각하고, 소리를 들을 때는 똑똑하게 들을 것을 생각하고, 안색은 온화할 것을 생각하고, 용모는 공손할 것을 생각하고, 말은 충실할 것을 생각하고, 일할 때는 신중할 것을 생각하고, 의심이 날 때는 물을 것을 생각하고, 화가 날 때는 화를 낸 뒤에 어렵게 될 것을 생각하고, 이득을 보게 되면 의로운 것인지를 생각한다.”
춘추시대의 노(魯)나라에도 부정과 비리가 뿌리 깊었다. 흉년이 들어 세수(稅收) 부족이 예상되자 노나라 애공(哀公)은 다른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증세(增稅) 타령을 했다.(논어 안연편 9장)
공자 제자 염구(冉求)마저도 노나라의 실력자 계손씨(季孫氏) 가문에서 일할 때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어 들여 계손씨가 재산을 불리게 만들었다.(논어 선진편 17장)
공자의 제자 자화(子華)가 제(齊)나라로 사신을 떠나게 되었다. 염구는 자화의 어머니에게 곡식을 보내주자고 공자에게 요청을 했다. 염구는 공자가 말한 양보다 몇 배의 곡식을 자화의 어머니에게 보냈다. 사실 자화는 살림살이가 넉넉한 형편이라 도움이 필요 없는 데도 동학이라는 이유로 더 많은 곡식을 보낸 것이다.(논어 옹야편 4장)
노나라 정공은 제나라가 여악(女樂), 즉 여성 가무악단을 보내자 고위 공직자들과 함께 연일 공연을 관람하느라 정사를 내팽개쳤다. 오늘날 말로 하면 국정 최고 책임자가 경쟁국의 미인계에 놀아나 본분을 잃어버린 처사이다.
공자는 노나라의 위정자와 제자들 사이에 만연된 비리를 뿌리 뽑기 위해 구사(九思)를 제시했던 것이다. 이어서 공자의 제자 자장(子張)의 말한다.
子張曰: 士, 見危致命, 見得思義, 祭思敬, 喪思哀, 其可已矣.
자장왈: 사, 견위치명, 견득사의, 제사경, 상사애, 기가이의.
자장이 말했다. “선비가 위험한 것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 이득이 되는 것을 보면 그것을 가지는 것이 과연 의로운지 어떤지를 생각하고, 제사를 지낼 때는 자신의 태도가 공경스러운가를 생각하고, 상을 당했을 때는 자신의 마음이 애절한가를 생각한다면 괜찮게 되었다고 하겠다.”
제자가 스승에 이어서 같은 말을 한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이익 앞에 흔들리는 현상이 많았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익과 이득이 생기면 넙죽 받아먹을 것이 아니라 도의에 맞지 않으면 받지 말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공자가 모든 이익을 부정적으로 보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오늘날 식으로 공자가 반기업의 정서를 대변한다고 볼 수 없다. 공자는 도의에 맞지 않은 부를 부정했을 뿐이다. 오히려 공자는 정의로운 사회에서 가난한 삶을 부끄럽게 여기기까지 했다.
조선 시대 아이들의 수신서라 할 수 있는 이이(李珥)의 격몽요결(擊蒙要訣)이라는 책이 있다. 격몽요결에는 선비가 되기 위한 처세훈인 구용구사(九容九思)가 있는데, 그 가운데 구사(九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구사(九思)는 학문을 닦고 지혜를 더하기 위한 지표로서 생각을 함에 있어서 신중을 기하여 하라는 가르침이다.
시사명(視思明)은 사물이나 현상을 볼 때나 인식을 할 때는, 명확히 보아야 할 것을 생각하여, 판별하여 알아야 함을 가르치는 것이다.
청사총(廳思聰)은 남의 말이나 세상사를 들을 적에는 총명하게 들을 것을 생각하여야 한다는 의미로서 말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경청을 해야 함을 가르치는 말이다.
색사온(色思溫)은 대인관계에 있어서 속에 들어 있는 것을 표현 할 때는, 온화하게 표현을 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가르침이다.
모사공(貌思恭)은 용모는 단정히 하여야 하며, 행함은 공손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을 함을 가르치는 말이다.
언사충(言思忠)은 말을 할 때는 진실하고, 실천 가능한 말만 하겠다는 것과 충성된 말인지를 생각을 하면서, 말을 하라는 가르침이다.
사사경(事思敬)은 일을 할 때에는 신중하고, 성실하게 완수를 하겠다는 생각을 하여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말이다.
의사문(疑思問)은 의문이나 의심이 나는 일이 있을 때, 언제든지 문의를 할 것을 생각하여야 한다는 점을 가르치는 말이다.
분염사난(忿思難)은 화가 났을 때나, 분한 일이 있을 때, 더 큰 어려움이 있거나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나 않을까를 생각하여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견득사의(見得思義)는 이득이 생기는 일이 있을 때, 나에게 오는 득(得)이 의로운 것인가 또는 옳지 않는 지를 생각 하여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길 가다가 처음 보는 사람이 뭔가를 준다면 우리는 받을까 받지 않을까? 아마 상대가 건네려고 해도 우리는 손조차 내밀지 않은 채 뒷걸음치며 황당해하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내용물이 뭔지 몰라도 그렇지만 받는 것 자체가 직감적으로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받을 만한 노력을 들이지 않고 받는 것이 부당하다고 보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기본적으로 주고받는 거래(去來) 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물론 가족과 친구는 거래가 아닌 정의(正義)가 우선시되는 사이기는 하지만 그도 점차 거래로 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게 되어가고 있다. 오고가는 것이 대등해야 한쪽이 억울하지 않고, 공정해야 어느 쪽도 불만을 가지지 않게 된다. 아울러 대등과 공정이 보장되면 누구하고라도 거래가 성사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는 대등하지도 않으며 공정하지도 않은 거래가 숱하게 있다. 일을 시켜놓고 임금(賃金)을 제때 주지 않거나 아무 일을 하지 않고서 임금을 꼬박꼬박 지불받거나 잘 봐달라며 인허가를 담당하는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는 등 비리, 부패, 부정 등과 관련된 일이 숱하게 있다.
견득사의도 주고받는 거래에서 되새겨볼 만한 말이다. 흔히 공짜 싫어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지만 이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이다. 받을 만하지 않은데 받았다가는 나중에 몇 배의 책임으로 되돌아온다.
최근에는 고위 공직자가 되려면 국회 청문회를 거쳐야 한다. 간혹 그 과정에서 몇 년 전 또는 수십 년 전에 받았던 뇌물이 문제되어 낙마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견득사위가 아니라 견득불사의(見得不思義) 했기 때문에 인생의 정점에서 순식간에 나락으로 굴러떨어지게 된 것이다.
자장(子張)이 들려주었다. “공동체의 일꾼은 위기가 닥치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얻을 일이 생기면 옳은지 어떤지에 생각을 집중하고, 제사 지낼 때는 경건함에 집중하고, 상례 중에는 슬픔에 집중한다. 그러면 충분하지.”
子張曰; 士見危致命, 見得思義, 祭思敬, 喪思哀, 基可已矣.
자장왈; 사견위치명, 견득사의, 제사경, 상사애, 기가이의.
자장(子張)은 공자(孔子)의 제자다. 위(危)는 위태롭다, 위험, 위기의 뜻이다. 치(致)는 내놓다, 내던지다는 뜻이다. 치명(致命)은 목숨을 내놓다, 희생하다는 뜻으로 절대적 양보, 절대적 희생을 가리킨다. 사(思)는 생각하다, 생각의 뜻으로 여기서는 집중하다, 초점을 두다의 뜻이다.
견득사의와 같은 구절로 견리사의(見利思義) 견위수명(見危授命)이 있다. 득(得)과 리(利)는 의미상 서로 바꿔 쓸 수 있으므로 두 구절은 사실 같은 내용을 말하는 것이다.
아이는 배가 고프면 참지 못한다. 당장 먹을 것을 달라며 아우성을 친다. 그런 아이도 단식을 한다. 예컨대 갖고 싶은 장난감이 있는데 부모님이 사주지 않으면 토라져서 밥을 먹지 않는다. 다음에 사면 되지 않느냐고 아무리 달래도 밥을 먹지 않는다. 눈앞에 밥이 아니라 장난감이 없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것이 강렬하면 배고프다는 사실이 중요도에서 뒤로 밀려날 수가 있다.
누군가 물건을 건넬 때 성인은 무엇에 의지해서 받지 않을 수 있을까? 자장(子張)은 받아야 되는지 안 되는지 옳고 그름을 따져보라고 요구했다. 이는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건네는 것이 나에게 절실하고 귀중한 것이면 나는 그 사실에 눈이 가려져 의(義)에 집중하기 쉽지 않다. 평소에 그렇게 갖고 싶던 좋아하는 화가의 진품을 누군가 건네면 내겐 옳고 그름을 넘어서 갖고 싶은 욕망이 활활 타오를 수 있다.
이때 의(義)라는 도덕규범 만큼이나 높은 인격도 사람의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쉬울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고사(故事)가 있다. 바로 사지(四知)다.
후한(後漢) 시대 양진(楊震)이 태수로 부임하기 위해 임지(任地)로 가는 도중에 날이 저물어 객사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곳의 현령 왕밀(王密)이 양진을 찾아와 황금을 내놓으며 지난날 신세를 진 거에 사의를 표시했다. 양진은 깜짝 놀라며 받지 않으려고 하자 왕밀이 아무도 모르는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변명했다. 이에 양진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그대가 알고 내가 안다.”며 황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天知, 地知, 子知, 我知.
천지, 지지, 자지, 아지.
조선시대 정약용(丁若鏞)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사지(四知)를 이어받아서 논의를 확장했다. 뇌물은 아무리 비밀리에 주고 받더라도 들통이 난다며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고 상대가 안다’는 사지를 주장했다.
天知, 神知, 我知, 子知.
천지, 신지, 아지, 자지.
아울러 그는 공직 생활을 잘하려면 네 가지를 두려워해야 한다며 사외(四畏)를 주장했다. ‘의를 두려워하고, 법을 두려워하며, 상관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두려워하라.’
畏義, 畏法, 畏上官, 畏小民.
외의, 외법, 외상관, 외소민.
이성적 판단만큼이나 누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은 사람을 단속할 수 있다. 그만큼 제대로 주고받는 것이 인간사에서 어렵다는 것이리라. 일찍이 일본의 시브사와 에이아치는 <논어와 주판>을 통해서 논어(論語)가 대변하는 도의와 상공업이 목표로 하는 이익이 조화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의리합일을 통해 일본에서 메이지유신 이후에 사회 주도 계층으로 등장한 상공인이 타락하지 않을 수 있다고 보았다.
우린 살아가면서 남에게 받을 때보다 무언가 베풀 때가 더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건 내가 가진 것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부끄러움에 처하지 않게 하면서 배려를 실천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자 마을에 사는 거지보다는 가난한 마을에 사는 거지가 더 행복합니다. 그건 배고픔의 가치를 공유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은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배고파 보지 않은 사람은 배고픔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으니 말입니다.
정말 높은 사람은 직위로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높은 자리에 있더라도 스스로 겸손을 실천하는 사람이고, 진정한 부자는 금 수저에 금 잔을 사용하며 온갖 호사를 떠는 사람이 아니라, 검소하며 묵묵히 남을 도울 줄 아는 사람입니다.
허생전(許生傳)의 말미(末尾)에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습니다.
허생은 실로 오랜만에 변씨를 찾아갔다. “그대는 나를 기억하겠소?”
변씨는 놀라며 말했다. “그대는 얼굴빛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군. 만 냥을 몽땅 털린 모양이구려.”
허생은 웃으며 말했다. “재물로 인해서 얼굴이 좋아지는 것은 그대들에게나 있는 일이요. 만 냥이 어찌 도(道)를 살지게 한단 말이오.”
그러고는 10만 냥을 변씨에게 주면서 “내 하루 아침의 주림을 견디지 못하여 공부를 끝내지 못했소. 그것이 부끄러울 따름이오.”
변씨는 크게 놀라 일어나서 절했다.
물론 소설속의 이야기이지만 책벌레로 가난하게 살아온 허생은 재물 앞에 초연하고 한양에서 최고 부자인 변씨는 돈 앞에 절을 하고 있습니다.
재물 앞에 약해지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본성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죽어서 관 뚜껑을 덮은 뒤에야 자손과 재물이 쓸데없는 것임을 알게 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적당함을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나무는 여름에 그 무성했던 잎을 다 떨구고 겨울을 맞이합니다. 만약 꽃과 잎사귀가 귀하다 하여 있는 그대로 겨울을 맞이한다면 뿌리의 흡수보다 잎의 증발이 심하여 고사를 하거나 매서운 겨울바람 앞에 뿌리째 뽑힐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율곡(李栗谷)과 이황(李滉)이 성리학(性理學)을 양분하고 있지만, 이율곡은 가난하였고 이황은 부유하게 살았습니다. 그 가난한 이율곡이 이런 말을 남깁니다. 견득사의(見得思義), 이득을 보면 의로운가를 생각하라. 이익이 있는 곳에 범죄가 들끓게 마련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산 정약용은 그의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인간의 행위 기준은 옳고 그름, 이익과 손해의 두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이 두 가지를 서로 조합하면 네 가지의 상황이 나온다.
옳고도 이익이 되는 상황(제1의 상황), 옳으나 손해가 되는 상황(제2의 상황), 옳지 않으나 이익이 되는 상황(제3의 상황), 그리고 옳지도 않고 손해가 되는 상황(제4의 상황)이 바로 그것이다. 제1과 제4의 상황은 문제될 것이 없다. 시비와 이해가 엇갈리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제2와 제3의 상황이다. 시비와 이해가 엇갈릴 때 무엇을 기중으로 삼느냐인 것이다. 다산의 결정은 옳고 그름을 우선하였고, 이익과 손해를 그 다음의 기준을 삼았다. 하여 제2의 상황을 제3의 상황보다 위의 단계로 보았다.
군자의 판단은 이와 같다. 군자는 이익이 되는가를 생각하지만 그에 앞서 그것이 옳은가 그른가 판단한다. 반면, 소인은 행위를 함에 득이 되는가가 우선적인 기준이 된다. 옳고 그름은 보조적인 기준일 뿐이다. 하여 그의 판단은 제3의 상황이 제2의 상황보다 앞서는 것이다.
시비의 기준이 이해의 기준에 앞선다는 고자의 말씀이다.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팔베개를 하고 누워있어도 즐거움이 또한 그 가운데 있도다. 의롭지 않으면서 부귀하게 되는 것은 나에게 뜬구름과 같도다.”
옳아야 당당할 수 있고 당당해야 자유로울 수 있다. 군자는 마음의 자유를 최고의 즐거움으로 여긴다. 하여 거친 환경에 처해 있어도, 행위가 옳고 마음이 당당하면 군자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 見(견)은 회의문자로 见(견)은 간자(簡字)이다. 안석궤(几; 책상)部는 사람을, 目(목)은 눈을 뜻한다. 見(견)은 눈의 기능으로, 보는 일을 말하는데, 이쪽으로 부터 보는 것을 視(시), 저쪽으로 부터 나타나 보이는 것을 見(견)으로 나누어 썼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나타날 현(現), 볼 시(視), 뵐 근(覲), 볼 관(觀), 뵐 알(謁), 나타날 현(顯),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숨을 은(隱)이다. 용례로는 보고서 깨달아 앎을 견해(見解), 듣거나 보거나 하여 깨달아 얻은 지식을 견문(見聞), 남에게 거절을 당함을 견각(見却), 실지로 보고 학식을 넓힘을 견학(見學), 남의 일을 보고 배워서 실지로 연습하는 것을 견습(見習), 사물을 관찰하는 입장을 견지(見地), 남에게 미움을 받음을 견오(見忤), 얼른 스쳐 봄을 별견(瞥見), 분실이나 유실을 당함을 견실(見失), 책망을 당함을 견책(見責),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한다는 견금여석(見金如石), 눈앞에 이익을 보거든 먼저 그것을 취함이 의리에 합당한 지를 생각하라는 견리사의(見利思義), 모기를 보고 칼을 뺀다는 견문발검(見蚊拔劍), 위험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는 견위수명(見危授命), 항상 잊지 않음을 이르는 견요어장(見堯於墻), 물건을 보면 욕심이 생긴다는 견물생심(見物生心), 나라의 위급함을 보고 몸을 바친다는 견위치명(見危致命) 등에 쓰인다.
▶ 得(득)은 회의문자로 두인변(彳;걷다, 자축거리다)部와 貝(패;화폐)와 寸(촌;손)의 합자이다. 得(득)은 돈이나 물품을 손에 넣어 갖고 있는 일, 옛 모양은 貝(패)와 又(우);手(수)를 합(合)한 자형(字形)이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얻을 획(獲),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잃을 상(喪), 잃을 실(失), 덜 손(損), 떨어질 락(落)이 있다. 용례로는 쓸 만한 사람을 얻음을 득인(得人),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꼭 알맞음을 득중(得中), 아들을 낳음을 득남(得男), 딸을 낳음을 득녀(得女), 얻음과 잃음을 득실(得失), 뜻을 이루어 자랑함을 득의(得意), 투표에서 표를 얻음을 득표(得票), 사람으로써 알아야 할 것을 배운 후에는 잊지 않도록 노력하여야 함을 득능막망(得能莫忘), 뜻한 것을 이루어 뽐내는 기색이 가득함을 득의만만(得意滿滿), 뜻한 바를 이루어서 기쁜 표정이 얼굴에 가득 참을 득의만면(得意滿面), 농나라를 얻고 나니 촉나라를 갖고 싶다는 득롱망촉(得隴望蜀), 얻은 도끼나 잃은 도끼나 매일반이라는 득부실부(得斧失斧), 얻은 것으로는 그 잃은 것을 메워 채우지 못한다는 득불보실(得不補失), 한 가지 일을 알면 다른 열 가지 일을 잊어버린다는 득일망십(得一忘十),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을 잊는다는 득어망전(得魚忘筌) 등에 쓰인다.
▶ 思(사)는 회의문자로 田(전; 뇌)와 心(심; 마음)의 합자(合字)이다. 思(사)는 생각하다의 뜻이다. 옛날 사람은 머리나 가슴으로 사물을 생각한다고 여겼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생각할 륜/윤(侖)이다. 용례로는 돌이키어 생각함을 사고(思顧), 생각하고 궁리함을 사고(思考), 사유를 통하여 생겨나는 생각을 사상(思想), 정을 들이고 애틋하게 생각하며 그리워함을 사모(思慕), 마음으로 생각함을 사유(思惟), 여러 가지 일에 관한 깊은 생각과 근심을 사려(思慮), 생각하여 헤아림을 사료(思料), 생각하여 그리워함을 사련(思戀), 늘 생각하여 잊지 아니하고 마음속에 간직함을 사복(思服), 생각하고 바람을 사망(思望), 사물의 이치를 파고들어 깊이 생각함을 사색(思索), 서로 엉킨 많은 생각이나 생각의 실마리를 사서(思緖), 정의의 길을 그려 생각함을 사의(思義), 한 시대의 사상의 일반적인 경향을 사조(思潮), 생각이 바르므로 사악함이 없음을 사무사(思無邪), 어떠한 문제를 생각하여 해석이나 구명하는 방식을 사고방식(思考方式), 사모해 잊지 않음을 사모불망(思慕不忘), 여러 가지 일에 대한 생각과 사물을 제 분수대로 각각 나누어서 가름을 사려분별(思慮分別) 등에 쓰인다.
▶ 義(의)는 회의문자이나 형성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나(我)의 마음 씀을 양(羊)처럼 착하고 의리있게 가진다는 뜻을 합(合)하여‘옳다’를 뜻한다. 羊(양)은 신에게 바치는 희생의 양으로 양을 바쳐 신에게 비는 의식(儀式)이 나중에 바르다, 의로운 일의 뜻이 되었다.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떳떳하고 정당한 도리를 말한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옳을 가(可), 옳을 시(是)이다. 용례로는 의로운 사람을 의인(義人), 의로 맺은 형을(義兄), 반드시 실행해야 하는 일을 의무(義務), 정의를 위하여 거사함을 의거(義擧), 수양 아버지를 의부(義父), 의를 위하여 일어난 군사를 의병(義兵), 정의감에서 우러나는 용기를 의용(義勇), 강자를 누르고 약자를 도우려는 마음을 의협(義俠), 의를 위하여 분발함을 의분(義奮), 의리와 지조를 굳게 지키는 사람을 의사(義士), 정의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기개를 의기(義氣), 의기에 불타 일어나는 용맹을 의기지용(義氣之勇),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 당연함 의리당연(義理當然), 의가 있는 사람은 어버이를 거역하지 않음을 의불배친(義不背親), 의로써 利의 근본을 삼음을 의이건리(義以建利), 의는 바다와 같고 은혜는 산과 같다는 의해은산(義海恩山)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