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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의 대화를 꾸며내어 글을 작성했습니다.
'공'사상을 통한 아니카 이의 <방산충>연작 감상문.
여러분들에게 소개하고 싶었던 작품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 작품을 같이 보시며 이야기를 나눠보죠. 바로, "아니카 이"라는 작가의 <방산충> 연작입니다. 아래 링크를 보시죠.
꽃을 튀기고 박테리아로 작업하는 아니카 이 아시아 첫 미술관 개인전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 리움 미술관 ANICKA YI LEEUM
오묘하게 생겼는데요? 동그란 모양에 촉수까지 달린 걸 보니 뭔가 해파리 같기도 하네요.
본 작품은 <방산충>이라고 하는 제목의 연작입니다. 연작은 쉽게 말해서 시리즈작품이라고 보시면 되죠. 영상속에서 이뤄진 전시에 가보면 저렇게 생긴 생물들이 전시장에 둥둥 떠다니고 있습니다. 섬세하게 짜여진 광섬유 표면을 따라 빛이 깜빡이면 내부의 기계장치가 드러납니다. 실제로 보면 영롱한 빛을 발하며 촉수를 리드미컬하게 밀고 당기며 움직이는 저 자체가 정말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천천히 호흡을 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해서 한편으로는 뭔가 종교적인 엄숙함마저 느껴질 정도죠.
방산충? 방산충이 뭐죠? 방산은 방위산업의 줄임말이 아니었나요?
음은 같지만 뜻은 다릅니다. 쉽게 말하면 약 5억년 전, 캄브리아기에 처음 등장한 단세포 동물성 플랑크톤이라고만 알면 충분합니다. 작가는 이 미생물에게 영감을 받아 작업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아니카 이(1917~현재)는 주로 이러한 작업물을 전개해왔습니다. 기술과 생물, 그리고 인간의 감각을 활용한 실험적인 작품들을 선보이죠. 이 작가를 이야기할 때 많이 거론되는 주제가 단연코 재료인데요, 우리는 보통 미술가 하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나요? 대개는 하얀 캔버스에 붓과 물감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떠올리죠. 그렇지만 그녀는 다릅니다. 그녀는 개미나 흙 속의 미생물을 재료삼거나 때로는 과학기술을 활용하여 앞서 보신 바와 같이 미생물을 재현한 기계를 만들기도 하죠. 이 작품을 그저 기계로 치부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겠습니다만. 아무튼 아니카 이는 비인간, 생물과 기계, 그리고 인간의 경계를 허물고 인간중심주의적 사고관에 도전하는 작가죠.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겠습니다.
재료만큼 전시의 제목도 특이하네요,<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 이게 무슨 뜻인가요?
전시의 제목은 작가에 의하면 불교의 수행법 중에 간화선에서 사용되는 화두의 형식을 빌려왔다고 합니다. 주로 수수께끼 같은 문장이 특징이죠. 그것도 머리가 많이 아픈 수수께끼죠.
왜죠? 보기만 해도 아찔하고 복잡해 보이는 수학 공식이라고 적혀있나요?
오히려 반대입니다. 아주 친근한 일상의 언어로 표현된 문장들이지만 논리적으로 분석하려 들면 큰코다치는 수수께끼죠.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수행자가 조주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중국으로 오신 뜻(무엇을 전하려오시는가?)이 무엇입니까?" 라고 묻자 조주 스님이 대답하죠. "저 뜰 앞에 잣나무란다."
엥? 그게 무슨 대답이죠? 갑자기 잣나무가 왜 나오나요? 달마 대사가 잣나무 하나 때문에 중국으로 왔다는 뜻인가요?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전혀 말이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화두를 풀기 위해선 잠시 우리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해석이 분분하지만 대다수의 해석에 다르면 수행자와 조주스님의 앞에 멋진 한 그루의 잣나무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수행자는 눈 앞에 잣나무도 보지 못하고 달마 대사가 온다는 소식에 정신이 팔려있었죠. 뭔가 깊은 뜻이 있는걸까? 대단한 진리같은 것을 설하러 오시나? 하면서 말이죠. 그때 스님이 수행자에게 저 뜰 앞에 있는 멋진 잣나무를 보라고 하신 거죠. 뜬구름 잡는 관념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순간에 깨어있는 것이 진리라고 하신 겁니다.
그럴듯하네요. 확실히 평소 우리가 생각하던 방식대로 생각하면 그냥 말도 안돼는 이야기처럼 들려요.
정확히 느끼셨습니다. 평소 우리가 생각하던 방식대로 생각하지 않고, 다르게 생각해볼 것, 새롭게 생각해볼 것, 이것이 화두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죠. 아니카 이의 전시 제목은 전시를 보면서 관객들에게 편견과 고정관념을 버리고 자신의 작품을 봐달라고 제안하는 것은 아닐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떤 고정관념을 버려야 하나요? 그냥 공중에 떠 있는 미생물 모양 기계잖아요. 그냥 보기 좋으라고 예쁘게 만들기만 한 것 같은데...
미생물 모양 기계라고 하셨는데, 과연 이 작품이 그저 생물의 모양을 딴 기계라고만 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생물이라고 할 수는 없을까요?
에이 무슨 말이예요. 기계는 그냥 기계죠.
그럼 몇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생물이란 뭘까요? 어떤 특징을 가져야 생물이라고 할 수 있죠?
당연히 살아있어야죠!
살아있다는 정의가 무엇일까요?
음... 일단 움직여야죠..?
기계도 분명 움직이는 걸요?
.... 그럼 또 뭐가 있을까... 아 맞아! 번식을 해야죠. 기계는 자식을 못 낳잖아요.
번식을 하면 생물이다! 그럴듯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노새를 아시죠? 수탕나귀와 암말이 교배해서 생기는 이종 교배종 동물 말입니다. 이들은 염색체 짝이 맞지 않아 번식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노새가 기계인가요?
아!... 흠... 그렇다면... 아 맞아! 과학시간에 배운적이 있어요. 자기 스스로 자신을 유지할 능력이 있다면 생명이 있다고 들었어요.
항상성 말씀하시는 거군요. 유지하는 성향이 있으면 과연 생명일까요? 태풍은 2주 가까이 에너지를 끌여들여 자기를 유지합니다. 그렇다면 태풍도 생명일까요?
음... 잘 모르겠네요.
괴롭힐 생각은 없었습니다. 다만 생명을 정의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과학계의 난제라고 합니다. 어디까지 우리가 생명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 말입니다. 과거 과학계에서 이러저러한 점을 생명이라고 정의하자라고 결정했지만 기술이 발달해 부차적으로 만들어진 컴퓨터 바이러스가 이 생명의 정의에 딱 들어맞게 된 겁니다. 컴퓨터 바이러스가 생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오늘날 새로운 과학기술이 끊임없이 도입됨에 따라서 이 생명의 정의가 더욱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관습적으로 생각하고 직관해왔던 생명의 이미지에 기대어 존재를 정의하고 있을 뿐이죠. 그것이 편하니까요. 어쩌면 작가는 우리에게 생명과 비생명을 가르는 우리의 관점을 내려놓고 자신의 작품을 보길 바랬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점에서 불교의 '공'사상, 즉 간단히 말해, 본래 정해진 것이 없다는 메세지와도 일맥상통하죠.
의도는 알겠지만 그게 무슨 쓸모가 있나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거는 이렇고 저거는 저렇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아무런 정해진 것이 없다는 생각으로 인생을 살면 너무 피곤하잖아요.
맞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특정한 관점을 가지고 사물을 바라볼 수 밖에 없습니다. 살아왔던 환경, 개인적인 가치관 등에 의해서요. 그것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그러한 인간 인식의 한계를 인정할 줄 알자는 거죠. 우리는 언제든 오류를 저지를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포스트 휴머니즘"의 메세지입니다. 아니카 이의 작품도 포스트 휴머니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죠.
포스트 휴머니즘은 들어본적 있어요. 포스트가 "~이후"라는 뜻이 있어서 휴머니즘의 이후라고 했던 거 같아요.
그렇게 이해하셔도 무방합니다. 포스트휴머니즘의 등장은 기후 재앙을 재촉한 인간중심주의 사고의 반성이 가져온 생각의 변화와 긴밀합니다. 인류는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대까지도 물질에 대해서, 그리고 물체의 운동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며 물질의 실재성과 객관성, 그리고 존재론 전반에 관심을 가졌죠. 그런데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일렁입니다. 버클리와 칸트로 대두되는, ‘인간의 인식을 벗어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인식론적 전회’가 확산된거죠. 이로 인해 인간의 시선은 차츰 물질로부터 고개를 돌리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은 인간의 인식에서 시작하니까 인간과 인간의 의식이 다른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되어버렸네요.
이것이 인간중심주의의 기초가 되었고, 현상학, 구조주의, 탈구조주의,해체론,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까지 도달하며 인간중심주의 관념은 더욱 더 인간의 사고방식의 깊고 견고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좋네요! 인간이 스스로 본 대로 느끼고 인식하면 인간이 세상의 주인공이라는 거잖아요!
물론 인간중심주의는 과거 중세의 종교의 강요나 권력자들의 강요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판단하는 새로운 세계의 지평을 연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좋은점만 존재할까요? 다시 말해서 인간이 본 눈이 과연 정확하다고 볼 수 있는 걸까요?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소, 연어, 폐어, 이 중에서 나머지 두가지와 관계가 먼 동물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소죠! 나머지는 물고기잖아요.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답변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답은 연어입니다.
왜죠? 연'어', 폐'어' 둘 다 물고기잖아요!
비늘이라는 외피를 제외하면 연어와 폐어는 공통점이 거의 없습니다. 예를 들어 폐어와 소는 둘 다 호흡을 하게 해주는 폐와 유사한 기관이 있지만 연어에게는 없습니다. 폐어와 소는 둘 다 후두개(기관을 덮는 작은 덮개 모양의 피부)가 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연어에게는 후두개가 없죠. 그리고 폐어의 심장은 연어의 심장보다는 소의 심장과 구조가 더 비슷합니다. 그 외에도 많은 이유가 있지만 아무튼 폐어는 연어보다는 소와 더 가깝다고 합니다. 겉보기에만 그렇지 않게 보일 뿐이죠. 우리는 겉보기로 판단하여 그것이 당연하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보였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전형적인 예시입니다. 만약에 어떤 존재가 인간의 이런 오류가능성이 있는 판단으로 손해를 보거나 피해를 보는 경우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정말 그렇네요. 자신의 의식에만 몰두해서 타인을 대할 때 좀 더 신중해지지 못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까 잠깐 언급했던 '공'사상과 비슷한것 같아요. 생명과 비생명, 물고기와 짐승, 인간이 정했을 뿐,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잖아요.
정확히 보셨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관념은 수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습니다. 가축을 생명으로 존중하지 못해서 벌어진 도살과 동물실험과 같은 생명윤리는 당연하고, 자연으로부터의 끊없는 착취로 인해 기후위기는 가속화 되고 있습니다. 이 인간중심적 사고관은 인간끼리도 악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유색인종을 차별하고 착취하며,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등, 오늘날 수많은 전쟁과 학살이 일어나고 있는 이유도 결국은 인간, 즉, 자기 자신의 의식에 대한 과신이거든요. '내가 봤을 때 흑인은 열등해!', '유대인은 모두 죽어야 해!', '저 사람들은 악마야!' 라는 식으로요. 실제로 당대에는 이러한 잘못된 관념을 정당화하기 위해 엉터리 과학지식이 퍼져나가기도 합니다. 과거에는 비백인들은 백인들과 다른 두개골의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열등하다는 의견이 진실이고 과학이었습니다. 인간의 의식을 과신했을때의 부작용의 극단까지 간 경우죠.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인식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비판해야 하는 거군요. 내가 보기엔 당연하지만 누군가에겐 폭력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뿐만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AI가 인간의 역할 대부분을 대신하고 있어 인간의 지위가 위협받고 있죠. 이러한 점까지 더해져 인간중심주의는 침몰해가는 배에서 무게를 줄이기 위해 버려야 하는 도구에 불과해지기 시작합니다.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사고관은 오늘날에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거죠.
그렇게 인류는 더 이상 수동적인 수단이 아닌 자율적 주체로서 물질에 다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다만 과거와 차이가 있다면 앞서 언급한 ‘물질’의 범위에는 ‘물질’과 상호의존하며 살아갈 수 없는 인간 또한 포함하고 있습니다. 인간 또한 이 자연의 일부라는 것이죠. 오늘날의 인문학계가 전통적으로 인간을 자연의 일부라고 여겨온 동양철학에 주목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겁니다.
그래서 아니카 이 작가는 작품에 그런 메세지를 녹여낸 거군요. 생명같은 기계를 만들어서 우리의 습관적인 분별심을 허물기 위해서.... 확실히 요즘 기후위기니 뭐니하면서 혼란스러울 때 참 시의적절한 작품 같아요.
작품의 해석은 당연히 다양하지만 그렇게 저의 설명을 이해해주셨다니 정말 감사하네요. 그래서 미술작품을 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미술을 통해 긴 시간 인류가 품어온 생각의 흐름을 이해하고, 그것이 오늘날에는 어떻게 미술 작품에 반영되어있는지 알아봄으로써 삶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거죠. 아니카 이의 작품이 암시하듯 미래의 우리는 인간과 기계, 동물과 식물 모두가 평등한 조건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맞이하고 준비해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