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등의 기원 / 안이숲
손등에 여름 장마가 지나가는 중이다 여자의 손은 수영에 능숙하다 배영과 접영은 기본기, 가까운 해변은 하루에도 몇 번씩 다녀올 수 있다
결혼을 하면 여자의 손등은 바다가 된다 깊은 물을 조심해야 해, 바다에 익사하지 않으려면 가끔씩 뒤집기를 해야 한다 거품 치는 파도를 잘 타 주어야 한다 딸아이가 엄마 하고 부를 때 손등은 출발 준비를 마친다 손이 춤추는 일은 여자의 권리이자 의무이므로 손등에는 커다란 서핑보드가 들어와 살고 있다
손등은 파도에 끄떡 않는 갯바위 같다 우직한 여자의 오래된 손등에 검은 따개비가 핀다 바닷가 백사장에 누워 햇볕을 받으면 손등은 햇빛 가리개가 된다 누군가 기대기에 좋은 벽이 된 다 다섯 개의 문을 가진 유람선이 된다 자꾸만 기대고 싶은 손등을 풀면 마른 바다를 다시 만난다 바닷물에 손등을 푹 담그면 손등은 바다를 건너는 연륙교가 되어 마침내 먼 섬까지 다리를 놓을 수 있다
여자에게 손등은 때로 무인도, 등대에 불이 켜지면 손등은 바다를 바라보는 한 채의 집이 된다 그 여자의 손등은 시간이 지날수록 삐걱거리는 안방의 골마루가 된다 시집간 딸아이가 자주 드러누웠던 마룻바닥은, 햇살이 닿아 반들거린다 손등을 펴면 먼 바다를 건너온 모레가 쌓인다
깡마른 그 여자 손등에 사막이 생긴다 선인장 꽃이 핀다 ― 시집 『요즘 입술』 (실천문학사, 2023.12)
* 안이숲 시인(본명 안광숙) 1972년 경남 산청 출생. 경상대 대학원 졸업. 2021년 계간 《시사사》 등단. 시집 『요즘 입술』. 2017년 김유정 신인문학상, 2019년 평사리문학대상, 2021년 천강문학상 대상 수상 계간 《시와사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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