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도덕적 딜레마를 통한 윤리적 명암
바히드 잘릴반드의《신원불상》
김 문 홍
미시적 관찰을 통한 거대담론
이란 영화는 다른 나리에 비해 그 소재와 주제가 독창적이다. 헐리웃 영화처럼 상업적 자본주의의 서사적 재미에 빠지지도 않고, 인간과 사회구조의 표층적인 문제에 메스를 가하는 일도 별로 없다. 그들의 사회와 일상 속에 내재하는 사소한 도덕적 문제들을 제시해 놓고, 그것들에 대한 인간의 도덕적 딜레마를 즐겨 다루고 있는 것 같다. 즉, 이란의 영화는 거대담론을 거시적 관찰과 폭로로 메시지를 전하기보다는 미시적 관찰을 통해 거대담론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 같다. 마치 철학을 주제로 한 한 편의 수필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여기서의 철학은 관객에게 주고자 하는 일종의 테마이자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런데 철학의 난삽한 주제를 어렵게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쉽고 구체적인 장면들을 통해 알기 쉽게 전달해 주는 매력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바히드 잘릴반드의《신원불상 No Date, No Signature 》(2017, 104분)도 바로 그런 유형의 영화에 속한다. 한 편의 철학적 수필이나 우화를 읽는 느낌이다. 법의학 센터에서 시신 검의를 전문으로 하고 있는 의사 카베 앞에 한 아이의 죽음이라는 도덕적 딜레마를 던져 놓고, 그가 어떤 대응과 반응을 해 나가는가에 대한 관찰의 과정이 이 영화의 주요 내러티브이다. 여기에 아내이자 함께 법의학 센터에 근무하고 있는 의사 사예, 그리고 아이의 아버지라는 인물을 개입시켜 그의 딜레마에 객관성을 부여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의 부인 사예와 아이의 아버지는 하나의 관찰자로서 존재하며 갈등의 중요한 매개체로 작용하고 있다.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이러한 세 인물의 관찰자적 시선으로 전개되고 있다.
카베의 시선 : 도덕적 딜레마에 놓인 양심의 균열
법의학 센터의 의사 카베는 퇴근하는 길에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한 가족과 충돌하게 된다. 그는 접촉 사고로 당황하면서도 자신의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신속하게 해결한다. 목 부위의 통증을 호소하는 아이에게 응급조치를 하고, 곧바로 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후속 조치도 하고, 파손된 오토바이를 고칠 수 있도록 손해배상의 돈도 지급한다. 다만 보험 만기가 다 된 자동차라는 법적 조치의 위기감과 접촉사고라는 현실적 제약 때문에 앞장서서 조치하지 못한 자신의 행동이 조금 미안하고 불편할 따름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의 권고대로 곧바로 병원에 가지 않았고, 다음 날 아이는 갑자기 시신이 되어 법의학 센터에 도착하게 되고, 이를 목격한 의사 카베는 도덕적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이 작품에서 의사 카베는 스스로 도덕적 딜레마에 자신을 밀어 넣는 양심적 인간의 태도를 상징하고 있다. 아내가 집도한 시신 부검 결과로 식중독이 근본적 사인으로 밝혀지고 아이의 시신이 가족의 오열 속에 매장되면서 사건은 일단락된다. 그런데도 의사 카베는 자신의 접촉 사고로 손상된 아이 목의 경추도 사인의 주요한 원인이 될 수 있다며, 시신을 재 부검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아내고 자신이 직접 부검에 임한다. 부검 결과는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목 경추가 주요한 사인이었느냐고 묻는 아내의 질문에 그는 대답을 회피한 채 침묵을 지킨다. 침묵은 곧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예고한다.
이 영화는 도덕적 딜레마 앞에 놓인 의사 카베의 윤리적 갈등을 통해 양심 앞에서는 늘 떳떳해야 한다는 인간의 윤리적 건강성을 강조하고 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가라는 근원적 윤리에 대한 조그만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사예의 시선 : 빈자의 삶에 대한 이기적 태도
함께 법의학 센터에서 의사로 근무하고 있는 그의 아내 사예는 타인의 삶에 대한 방관자로서의 이기적 태도를 상징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그녀는 이미 식중독이 사인으로 밝혀져 죽음이 객관적으로 처리되었는데도, 이에 의문을 제기하고 자신의 양심에 질문을 던지는 카베의 태도가 못마땅하다. 그녀에게는 남편이 스스로 곤경에 빠지기 위해 안달하는 어리석은 인물로 비치기 때문이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려는 남편의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사예 역을 맡은 배우의 표정연기가 이 영화에서는 그야말로 압권이다. 한 치의 감정 표현도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으려는 무표정, 그리고 일말의 온기도 찾아볼 수 없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무감정으로서의 굳은 표정연기가 그러한 인물형을 잘 표현하고 있다. 타인의 삶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으려는 고스도치 형의 이기적인 지식인의 유형이 섬짓하게 다가오고 있다. 남편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터전이 타인으로부터 훼손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기적 방어기제의 발로에 다름 아니다.
이 영화에서의 사예라는 인물은 사회 속의 있는 자들과 지식인들의 사회적 책임과 소명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소외된 가난한 이들을 이대로 방관만 한 채 두고 볼 것인가, 아니면 같은 인간으로서 연민과 사랑으로 끌어안을 것인가에 대한 윤리적 결정을 촉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함께 살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위기를 모른 체 방치한다는 것은 사람의 갈 길이 아니라는 것을 사예라는 이기적 인물을 통해 은유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 아버지의 시선 : 이란 사회의 비인간적인 삶에 대한 연민
아이를 잃은 아내는 남편이 아이를 죽였다고 추궁한다. 남편이 값이 싼 죽은 닭을 아이에게 먹였기 때문에 아이가 식중독으로 죽었다는 것이다. 그는 곧장 닭 공장으로 달려가 죽은 닭을 판 사내를 발견하고 싸운다. 아이의 아버지가 “그래 나는 개만도 못해. 그러니까 죽은 닭을 판 거지.”라며 울부짖는 장면은,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의 극단적인 생존의 위기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대목이다.
병들어 죽은 닭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그런 닭을 먹으면 위험할 것이라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그 닭을 산다. 값이 싸서 넉넉하게 배를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값싼 닭 한 마리와 인간의 생명을 물질적인 측면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몰가치적이고 비정한 시선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역설적 이율배반이다.
결국 아이 아버지의 폭행에 의해 닭을 판 사내는 죽고 그는 구치소에 수감된다. 이 영화에서 아이 아버지는 이중적 상징 기호로 작용하고 있다. 하나는 이란 사회의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시선이고, 다른 하나는 의사 카베가 도덕적 딜레마 앞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를 관찰하는 객관적 시선이다. 앞의 것이 가난에 대한 의문제기라는 정치 사회적인 시선이라면, 뒤의 시선은 인간의 양심에 대한 감시자로서의 내면적이고 심리적인 상징이다.
이 영화의 엔딩 시퀀스는 관객들에 대한 감독의 질문이나 다름없다. 이런 도덕적 딜레마에 빠질 경우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내 잘못이 아니라며 모른 체 하고 옆으로 비켜 설 것인가, 아니면 나의 사소한 생각과 행동이 일조하여 그러한 구조적 모순에 이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고 양심을 찬찬히 들여다 볼 것인가? 이 영화의 주인공인 의사 카베는 어떻게 보면 참 우직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런 우직함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지켜주는 버팀목이라는 것을 이 영화는 묵시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문득 이런 말이 떠오른다.
“사는 대로 생각하기보다는 생각한 대로 살아야 한다.”
첫댓글 우직한 의사 카베 같은 사람이 우리 사회에도 많아져야 하겠습니다. 좋은 영화 소개 감사합니다.
<이란의 영화는 거대담론을
거시적 관찰과 폭로로 메시지를 전하기보다는
미시적 관찰을 통해 거대담론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 같다.>
이 글에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