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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호수♡마리아
■마르코 1,12-15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 제1독서에 누구 이야기가 나왔습니까? 노아.
요즘 제가 창세기 강의하고 있는데 딱 나오니까 반갑죠?
오늘 노아는 방주에서 나온 후 제단을 차리고 제사를 지냈죠.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다시는 홍수로 모든 살덩어리들이 멸망하게 하지 않겠다는 징표로 뭐를 보여주셨죠? 무지개.
레인보우를 쫙 뜨게 하면서 여러분들 지금 불필요한 살덩어리들 많잖아요,
그것을 못 빼게 하시겠다는 말이냐고 강론 때 물었었죠.
며칠 전 성령 회관에서 피정할 때도 언급했지만, 노아가 40일 동안 비 내리는 동안만 방주 속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물 빠질 때까지 150일 이상 더 있었죠.
하루는 덜커덩하면서 산 중턱에 배가 걸렸겠죠.
노아는 역청 문을 뜯어내고 문을 여는 순간 얼마나 긴장이 됐을까?
노아는 그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여기 있는 암수 한 쌍씩 말고는 다 멸하신다고 했지만, 아니야. 그래도 밖에 나가면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은 사람이 있을 거야.’
여러분 같으면 그런 생각 안 드셨겠어요?
이 넓은 지구에 우리 식구들과 이 배 안에 있는 짐승들 외에 아무것도 없으리라고 생각 못 하고,
그렇게 들어오자고 해도 안 들어왔던 내 친구, 걔는 수영 선수잖아. 살아남았을 거야. 어느 나무 꼭대기에라도 매달려 있을 거야.
그런데 딱 문을 열고 나갔더니 어땠습니까?
무인지경(無人之境), 사람이 없어요.
그야말로 여기 표현대로라면은 살덩어리들은 아무것도 없어.
그때 노아의 방주는 기뻤을까요? 아니면 슬펐을까요?
내가 볼 때는 두려웠고 무서웠을 거야.
‘이제 이 지구가 내가 주인이다.’ 이런 기쁨보다
‘거봐. 그놈들 아주 싸지. 말해도 그렇게 안 들어가더니, 내 말 들었으면 살았을 것 아냐?’ 하는 의기양양한 마음보다
깊은 슬픔과 무서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아무것도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어떤 때는 축복이 올 때는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어요.
‘요즘 왜 이래? 내가 왜 이렇게 기쁘지?’
두렵죠, 언제 이 기쁨이 유리처럼 부서질까.
요즘은 내가 평화롭지만, 그 평화가 언제 깨질지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죠.
아무리 일이 바빠도 밥은 안 먹더라도 화장실은 안 가더라도 강의는 들어야 합니다.
나는 내가 강의하고도 처음에는 피드백으로 들어요.
내가 혹시 말실수한 것은 있나 발음이 정확하지 않은 것이 있나.
그다음에 두 번째 세 번째 들을 땐 내가 배우는 느낌으로도 들어요.
그냥 글자 하나에 얽매여 언어적으로 성서학적으로의 해석은 학자들이 할 일이고
나는 사목자이기 때문에 양들을 어렵게 만들면 안 되기에 이야기식으로 풀어냅니다.
오늘 제2독서 베드로 1서의 말씀인데 딱 오늘 와닿는 구절은 21절이에요.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
그냥 단순히 더러운 거 닦아내는 게 아니다. 그죠?
예수님의 부활에 힘입어서 하느님께 자꾸만 오염돼 가고 있는 이 양심을 좀 깨끗하게 해달라고 청하는 일이
바로 세례의 본질이라고 베드로 사도는 얘기하고 계시죠.
오늘 복음은 짧아요.
전례력으로 올해가 무슨 해입니까? 나해, B해라고도 하죠.
나해 사순 제1주일 복음은 몇 줄 되지 않지만, 아주 중요한 워드가 4개 있어요.
첫 번째가 광야, 두 번째가 40, 세 번째가 회개, 네 번째가 복음을 믿어라.
첫 번째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광야.
성서적으로 광야는 두 가지 의미가 있죠.
첫 번째는 은총의 장소예요. 두 번째는 유혹의 장소예요.
왜 은총의 장소냐?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에요.
그래서 유명한 성인의 수도원들은 지금도 다 광야에 있어요.
샤를 드 푸고라고 하는 현대 영성 신학자이면서 영성의 대가이신 그분도 결국에는 하느님을 만난 데는 광야였다.
이렇게 광야는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은총의 장소다.
그러면서 동시에 유혹의 장소죠.
광야는 인간의 몸이 견디기 어려운 조건이지요.
낮과 밤의 일교차가 수십도 나요.
밤에는 영하까지 떨어지고 낮에는 30도, 40도까지 올라가.
그래서 생물이 자랄 수가 없어요.
전갈 뱀밖에 못 살아요. 물이 부족해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모세한테 이끌려서 1년 2년도 아니고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헤맸어요.
그때 얼마나 난리법석을 떱니까?
우상숭배하고, 저놈 말 안 들을 걸 우리 끌려 나왔다, 이집트 노예 생활할 때가 훨씬 좋았다.
그렇죠, 배고프다.
그리고 하느님을 원망하기 시작해요.
이렇게 광야는 이중성의 의미를 갖습니다.
영과 육이 함께하는 우리 인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어떤 삶을 살건 간에 신앙인이 되려면 자기만의 광야가 꼭 있어야 해요.
우리 몸이 하느님과 내가 만나는 장소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내 몸이 정기적으로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또 주일만이 아니라 평일 미사 참석하면서 성체를 모시려 하는
내 아름다운 내 거룩한 몸뚱아리.
그때는 내 몸이 유혹의 몸이 아니라 거룩한 몸이죠.
반대로 분노가 차올라서 주먹질하고, 손가락질하고, 내 입에서 거친 말이 나와.
그럴 때는 내 몸뚱아리는 바로 유혹의 장소입니다.
우리의 집이 하느님과 사람이 만나는 은총의 장소가 될 수도 있고, 나를 죄짓게 하는 유혹의 장소가 될 수도 있겠죠.
또 내가 만나는 내 지인들이 나를 축복의 길로 이끄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나를 악의 길로 이끄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광야’라는 것은 물리적이고 자연적으로 그냥 허허벌판만을 뜻하는 게 아니죠.
영적으로 광야라고 하는 것은 내가 몸담은 자리이고 누구나 광야에는 있어야 해요.
그 광야에서만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가는 레지오를 생각해 봅시다.
‘난 레지오 나가면 정말 주님 만나고 오는 느낌이야. 성모님이랑 가까워져.’
이런 레지오가 되어야지, 나갔다 올 때마다 ‘아 저건 아프지도 않고 꼭 나와.
저건 꼭 내가 얘기하면 뭐라고 한마디 지껄여. 짜증 나 레지오를 바꾸든지 휴가를 내든지 해야지.’
그때 그 레지오는 은총의 레지오가 아니라 나를 죄짓게 하는 레지오예요.
반 모임도 은총의 반 모임이 될 수도 있고 나를 유감에 빠뜨리는 반 모임이 될 수도 있죠.
어떤 경우에는 성당 자체가 그렇기도 하죠.
‘요즘 우리 성당 왜 이래? 왜 이렇게 분열이 많아?’
성당 가면 치유되고 행복해서 나와야 하는데, 분심만 들고 사제 강론도 복음을 전파하기보다는
너무 세상의 얘기만 하는 것 같고.
그래서 내 마음도 변화무쌍하듯이 이 광야는 참 변화무쌍해요.
아침에는 천국의 마음으로 나왔다가 연옥을 거쳐 지옥에 떨어져서 집으로 들어오기도 하죠.
결국 우리들의 신앙적인 노력이라고 하는 것은 유혹의 장소인 광야를 은총의 장소가 되는 확률을 높이는 것이죠.
물론 그 확률을 높이는 것에 성령의 도우심도 필요하지만, 우리의 노력도 기본이 되어야 하죠.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광야에서 짜증 부리게 만들어요.
여러분 집에서도 짜증 부리게 만들고. 주에서도 성모님 못 만나게 하고,
반 모임 할 때도 세속적인 눈으로 사람만 판단하게 만들어요.
광야는 그런 장소예요.
우리의 몸이 사람을 살릴 수도 있지만, 우리의 몸으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잖아요.
요즘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용감한 형사들’이라는 프로를 보았어요.
강력계 형사 둘이 나와 자기가 겪었던 사건을 이야기하는데, 몇 편 보고 내가 이제 안 봐.
꿈에도 이상하게 나타나, 내 목도 막 잘리고, 무서워요.
그런데 거기 나온 형사들은 진짜 얼굴이 다 굳어 있어요.
웃지 않아, 웃어도 억지로 웃어요.
늘 피를 보고, 죽은 현장을 보고, 인간이 얼마만큼 잔인해질 수 있는가를 보는 사람들이 강력계 형사들이에요.
한평생 수십 년을 그렇게 살았다고 해봐요.
때로는 나 때문에 가족들이 위협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
그래서 항상 그 형사들이 마지막으로 하는 얘기는 ‘25년 동안 집도 자주 못 들어가는 나를 이해해 준 아내 누구에게 감사하고,
아버지 노릇 못한 나를 이해해 준 우리 자식들 아무개 사랑해’ 하는 말로 끝나요.
아마 PD가 일부러 이런 설명하라고 그러는 것 같아요,
그 프로를 보면서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우리의 몸덩이가 어떻게 그렇게 극과 극을 달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돼요.
우리가 조금만 긴장을 늦추면 머릿속에서는 나도 모르게 그야말로 궤도를 이탈한 열차처럼 탈선의 길로 가고 있어요.
행동으로는 저놈을 안 죽여도 머릿속으로 죽일 수 있잖아요.
‘가다가 그냥 콱 자빠져 돌부리 뾰족한 곳에 정수리가 콱 박혀라.’
어휴, 무섭죠.
용감한 형사에 그런 말 나와요.
살인자, 피의자가 자백하는데, 그런 마음으로 죽였대요.
또 무서운 얘기가 19년 전에 교통사고로 어느 한 사람한테 피해를 당하였죠.
그래서 합의를 봤는데, 합의를 상대편이 안 지킨 거예요.
그렇게 19년이 흘렀어.
그런데 두 번 우연히 만나요.
뚝방에서 한 번 만나고, 또 한 번은 목욕탕에서 만난 거예요.
목욕탕에서도 합의금 내놓으라고 싸우고, 결국에는 1월 2일인가 아무튼 사무실에 있는 사람을 찾아가서 살벌하게 죽여요.
그리고 결국에는 잡혔는데 뭐라 그러는지 압니까?
죽일 놈 죽인 거래요. 저놈은 거의 20년 세월을 나를 가지고 놀았대.
죽일 놈 죽인 거고 난 잘못한 거 없대요.
하느님 대신 내가 심판한 거라고, 그래서 형사들이 입이 쩍 벌어졌죠.
말이 이상하게 자꾸 가는데 아무튼 광야는 두 가지 의미예요.
은총의 장소임과 동시에 유혹의 장소다.
그래서 어두움인 마귀는, 약한 본성은, 또 원죄의 성향은 나를 자꾸 광야에서 딴짓하게 만들어요.
그럴 때 우리는 하느님을 향해서 돌아서야죠.
두 번째 단어가 뭐라고 했습니까?
‘40일’
40일은 성경에 사실 많이 나옵니다.
아까도 얘기했듯 유대인들이 40년을 광야에서 헤맨다 그랬잖아요.
그런데 일수로 따져서 40일은 이제 몇 개인가?
첫 번째 처음에 등장하는 것이 오늘 1 독서에 나왔던 노아의 나무 상자 배가 그렇죠
노아 방주의 이야기를 통해서 40일의 의미는 뭐냐?
심판이에요. 심판하고자 하는 목적은 정화하기 위해서 그렇죠.
그리고 나중엔 부활까지 이르러요.
노아의 방주 문을 열고 나오는 그 노아는 부활한 사람이에요.
부활한 사람, 정화와 심판과 부활이 바로 노아 방주의 이야기죠.
그래서 이 40일 동안 우리는 누구를 심판해야 해요?
내 남편, 내 새끼, 돈 떼먹고 돈 안 갚는 바로 그 여자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 자신에게 준엄한 검사가 되어야 합니다.
변호사가 아니야. 우리는 늘 자기 자신을 변호하잖아.
‘괜찮아, 그거보다 더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너 그건 죄도 아니야.’
하지만 다른 사람의 잘못에는 정말 꼬투리 하나까지 잡으려고 검사 노릇합니까?
그래서 적어도 이 40일 동안만큼은 본인 자신에게 묻어 있는 그런 여러 가지 얼룩들 더러움과 위선을 벗어버리고
하느님 앞에 보여드려야 합니다.
40일 동안은 자신을 심판하는 기간이지, 자기 자신을 들어 올리는 기간이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이러한 심판을 해야만 본인 자신이 정화돼요.
그래서 고해성사를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부활을 맞이할 수 있다는 얘기겠죠.
또 이 40일이 등장하는 것은 ‘모세의 십계명’ 얘기죠.
모세가 신하의 산꼭대기에서 40일 동안 비바람 맞아가면서 단식하면서 40일 동안 하느님의 목소리를 기다려요.
그래서 모세를 통해서 드러난 40일의 의미는 ‘은총을 받기 위한 준비 기간’으로 나옵니다.
모세는 매 끼니 뷔페 불러 맛있게 먹으면서 주님 기다린 거 아니에요.
모세가 있었던 곳은 꽃밭이 아니에요.
집 짓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산꼭대기에서, 영하 떨어지는 비바람을 맞아가면서
모세는 얼마나 산 밑으로 내려가고 싶었겠습니까?
그렇지만 모세는 40일을 버텼어요. 40일 동안을 단식으로 버텼어요.
거기에 관한 결과로 하느님 목소리를 들었죠.
‘나는 야훼다.’
‘야훼’는 무슨 뜻이요?
‘스스로 존재하는 자다’, ‘자존자다.’ 라는 뜻입니다.
누구에 의해서 창조된 사람이 아니라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또 뭘 선물로 받습니까?
천국을 올 수 있는 티켓을 받아요. 그것이 바로 십계명이죠.
이 10가지의 지름길로만 오면 나 있는 대로 쉽게 올 수 있어.
여러분들 생각해 보세요.
어느 사람이 이사 가서 집들이한다고 친구에게 전화했어요.
‘영자야 나 새집으로 이사 갔는데, 다음 주 월요일 집들이 하니 아파트 몇 동 찾아와.’
그리고 딱 끊어버렸어.
요즘은 내비게이션이 있지만, 예전에는 얼마나 찾아다니기 힘들었습니까?
가다가 물어야 하고, 복덕방 있으면 또 묻고.
그런데 자상한 자매는 친구 부르며 이렇게 말하죠.
‘영숙아, 나 어디 이사 왔는데, 너희 집에서는 대략 한 1시간 걸릴 거야. 몇 번 버스 알지?
그거 타고 어디서 내리면 그 앞에 CU가 있고, 그 CU 옆에 있는 오른쪽 길을 따라서 한 30m 오면 단독주택 3채가 있는데
대문 색깔이 다 다르단다. 노란 대문이 바로 우리 집이야.’
이렇게 자세하게 안내받으면 그 친구는 고생하면서 집을 찾아갈까요?
아니죠. 가면서 고마워해요.
‘아유 계집애, 학생 때도 그렇게 자상하더니 역시!’
하느님께서 ‘얘들아, 나 있는 대로 올라와라. 여기 엄청 좋단다.’
말만 하고 길을 안 알려주셨다면 우리 많이 고생할 거예요.
십계명의 핵심은 흠숭과 존경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흠숭, 인간끼리 상호존중하고 살아가느냐 그것이 십계명이죠.
그래서 모세를 통하여 은총을 받기 위한 준비 기간, 여러분들이 사순절 동안 준비를 하셔야 해요.
그 준비는 뭘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오늘 여기 온 것도 준비죠.
그전에 보면 어떤 교우들은 40일 되면 딱 술을 끊어요.
그렇게 술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아무리 꼬셔도 술 안 먹어요.
어떤 분은 40일 동안 담배를 딱 끊어요.
또 어떤 분은 40일 되면 다른 방에 들어가요. 금욕 생활해요.
또 어떤 사람은 아예 텔레비전을 끊어요.
또 어떤 사람은 40일 동안 침묵을 지켜요.
또 어떤 사람은 40일 동안 성지순례 몇 군데를 해야겠다 하면서 도보로 다녀요.
이렇게 나름대로 은총을 받기 위한 준비를 해야죠.
짜장면 시켜 먹으면서 모세가 기다린 거 아니에요.
은총 받기 위해서 편안하게 침대에 누워서 기다린 거 아니에요.
비바람 맞아가면서 입술 부르트며 먹지 않으면서 하늘만 쳐다보면서 기다렸죠.
그랬더니 결국 하느님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잖아.
하느님의 이름을 들은 사람이에요.
하느님이 당신의 이름을 모세한테 가르쳐 주세요. ‘나는 야훼다.’
그리도 십계명판을 내려주셨죠,
그걸 들고 내려왔더니 이 유대의 동족들은 개판!
금송아지 만들어 제사 지내고 난리법석을 떨고 있는 거예요.
세 번째로 40일이 등장하는 것은 신약에 와서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과 싸우면서 40일을 버티신 거죠.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난 40일의 의미는 유혹과 시련의 시기예요.
사순절을 잘 지낸 사람은 어느 시기보다도 축복을 많이 받을 거라는 걸 마귀가 알아요.
그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40일 동안 분노하게 만들고, 슬프게 만들고, 우울하게 만들고, 화나게 만들고, 기도 안 하게 만들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마귀는 공격해요.
마귀는 여러분들이 하느님에게 가려고 하는 노력보다 수백 배 여러분들을 지옥에 떨어뜨리려는 준비하고 사는 존재들이에요.
마귀랑 지능으로는 못 이겨요. 힘으로도 못 이겨요.
마귀를 이기는 유일한 힘은 거룩한 기도, 거룩한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 거룩하신 것처럼 내가 거룩해지는 것뿐이지.
그래서 예수님의 광야에서 40일 동안은 유혹과 시련의 시기다.
그래서 미리 준비하라는 얘기입니다.
누가 내 속을 뒤집어 넣을 때, 이게 바로 유혹이구나 하며 담대하게 내가 대처해야죠.
또 대개 안 그럴 것 같은 사람이 갑자기 나를 괴롭힐 때가 있어요.
믿었던 사람이 내 뒷담화를 하고 다녀요.
그럴 때 얼마나 배신감, 슬픔, 그런 것이 몰려오겠어요?
그럴 때는 그냥 담대하게 기도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어둠은 물러가요.
악을 이기는 건 선밖에 없고, 어둠을 이기는 건 빛이 들어와야 하죠.
악한 것이 두 개가 모이면 더 큰 악이 되고, 두 어둠이 서로 부딪히면 더 걷잡을 수 없는 큰 어둠으로 빠져요.
만고의 진리지만 우리는 그 순간이 닥치면 나도 모르게 그냥 ‘원죄의 성향’이 나오죠.
합리화시키고 상대편한테 탓 돌리고, 그런 것들이 나오죠.
세 번째 워드가 뭐라 그랬죠? 회개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 지 두 가지만 얘기해 드릴게요.
첫 번째 우상숭배에 빠져 살았던 것, 회개하세요.
우상이 뭡니까? 하느님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다 우상이에요.
그것은 자식이 될 수도 있고, 내 취미생활이 될 수도 있고, 돈이 될 수도 있고, 내 아픈 몸뚱아리가 될 수도 있고,
또 내 상처가 하느님보다 윗자리에서 나를 지배할 때도 있어요.
하느님보다 윗자리에 있는 것은 전부 우상이에요.
저녁 만과, 가톨릭 기도서에 있는 것을 외우는 건 1분이면 끝나요.
그것이 저녁 기도가 아니죠.
오늘 하루 살면서 내가 주님을 얼마나 첫째 자리에 모시고 살았던가, 오늘 나를 지배했던 것이 무엇이었나?
하루 종일 돈 생각 돈 걱정, 하루 종일 자식 걱정, 하루 종일 내 몸뚱아리 걱정.
현대판 우상은 금송아지가 아닙니다.
옛날 우상은 쉽게 내가 우상에 빠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지금은 형체로 안 나타나기 때문에 더 쉽게 빠지는 거예요.
우상이 아닌 것처럼 느끼게 되는 거죠.
그다음에 회개할 것 두 번째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었던 것이 있는가 회개해야죠.
특히 먼 데 사람이 아니라 내 가장 가까운 사람, 내 아내에게 남편에게.
여러분들 사람은 신발 신고 문을 열고 나가면 포장하기 시작해요.
집 안에서는 어차피 내꼬라지 다 아니깐 막 해요, 말도 거칠어지고.
성당에서 어느 형제가 아주 짱이야, 매너도 좋고 자매님들이 그 형제를 너무 좋아해.
그러니까 그 형제의 부인 만나면 뭐라고 그러겠어요?
‘어떻게 시집을 잘 갔어? 당신 남편 정말 성당에서 최고야. 행복하지?’ 하면, 뭐라 답하겠어요?
‘너도 한 달만 살아봐라. 내 남편이랑. 길게도 얘기 안 한다.’
그 사람의 본성은 집 밖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집 안에서 나타나요.
그래서 우리는 집 안에서는 차가운데 나가면 위선으로 포장해요.
집에서도 사랑이 많고, 밖에서도 사랑이 많아. 이게 최고예요.
그런데 집에서도 못 됐는데 밖에서도 못 됐어.
이것은 위선은 아닌데 뭐가 잘못된 사람이죠.
다른 사람이 상처 주었던 거 회개해야 해요.
오늘 주님께서 회개한 다음에 복음을 믿으라고 그랬죠.
복음을 믿는 전제 조건이 회개예요.
여러분들 후회와 회개의 차이점을 내가 수도 없이 했는데 기억하세요?
후회는 자기중심적인 것으로 내가 잘못한 것이 슬픈 것이고, 회개는 내가 잘못하여 하느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슬픈 것이죠.
대부분 신자는 회개까지 못 가요.
고백소에서 들으면 99퍼센트가 회개가 아니라 후회하다 나가는 거예요.
후회는 뭐냐? 아까 얘기했지만 자기가 그 죄에 떨어진 것을 못 견디는 거예요.
자존심이 상하는 거죠.
‘이 등신아, 너 성사 본 지 며칠 됐다고 그 죄에 떨어져 고백소애 또 들어가니?’
그때 후회는 하느님 입장은 아무런 생각도 없어요.
그러나 회개는 뭐냐?
내가 그 죄에 떨어졌을 때 주님이 얼마나 마음 아프셨을까?
내가 냉담하는 동안 내 안에 계신 성령이 얼마나 애타셨을까?
내가 입을 함부로 놀리며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었을 때, 성모님이 얼마나 뒤에서 손을 빌면서 나를 잡으셨을까?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옛날 교우들은 고백소에 들어와서 이렇게 고백했어요.
‘제가 이러이러한 죄로 인하여 예수 성심을 아프게 했나이다.
내가 이런 죄를 지어서 성모 성심을 아프게 했나이다.
제가 이렇게 함부로 살아서 내 안에 계신 성령을 욕보였나이다.’
그전에 그렇게 고백성사를 봤어.
지금 하느님 마음 아프시다고 하는 것 얘기하면서 성사 보는 사람 거의 없어요.
주일 몇 번 빠졌어요? 욕했어요. 끝이야.
그것도 안 하는 사람도 많죠.
내가 어떤 때 대신 해줄 때도 있어요.
그리고 우리 죄 보면 나 때문에 다른 사람 죄짓게 하는 것도 있죠.
내가 참았으면 저 사람 저렇게 화 안 냈을 텐데.
그래서 옛날 고백성사 경문에는 ‘남이 나로 인하여 지은 죄에 있을 터이니, 신부는 이 죄인을 도무지 벌하고 사하소서’ 그랬어요.
그런데 반대죠.
내가 며느리 때문에 죄지은 것만 30분을 떠들다 나가요.
며느리가 나 때문에 마음 아파한 건 얘기 안 해.
‘할머니, 할머니 죄를 얘기해요. 남의 죄 얘기하지 말고. 누구 고발하러 들어왔습니까?’
‘신부님, 내가 이것을 설명해야만 내 죄가 마지막에 나와요.’
‘과정은 하느님이 알고 계시니 할머니가 지은 죄만 얘기하세요.’
이번 판공성사 볼 때는 제발 미리 고백할 것을 적어 들어가 횡설수설하지 마세요.
또 어떤 인간은 들어오자마자 ‘죄인은 신부에게 사하고 벌하소서.’ 해요.
그만큼 고백소에 들어오면 정신이 없으니 적으라는 얘기예요.
정말 조용한 시간에 성찰하여 내 죄를 적고 통회하세요.
그리고 고해소에 들어와서는 군더더기는 다 떼어버리고 고백하세요.
고해성사 들어오기 전에 하느님과 나와의 그것이 이루어져야 해요.
고백소에서는 공적인 죄의 사함을 받는 거예요.
개인 면담이 아니잖아요.
마지막 워드 복음을 뭐라고 그랬어요?
복음을 읽으라고도 아니고, 복음을 쓰라고 그래도 아니었죠.
복음을 믿어라, 외워라가 아니라 복음을 믿어라.
그런데 사실 읽으라는 말 안 해도, 외우라고 쓰라고 말 안 해도, 이것이 선행돼야만 믿을 수가 있어요.
성경을 읽는 목적은 믿음 때문에 그래요.
성경을 쓰는 목적도 믿음 때문에 그래요.
성경을 외우는 것도 복음을 믿기 위해서예요.
결론을 얘기하신 거예요.
회개한 다음에 복음을 믿어라, 그 말은 뭡니까?
지식이 아니라, 성경은 체험하는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거죠.
유명한 히브리서 하나 읽고 각론 끝내겠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 13절.
이것보다 성경에 대해서 무서운 말도 없고 축복의 말도 없고, 왜 내가 성경을 읽어야 하는지,
읽을 때 성경이 내 안에 어떻게 파고드는지, 이 말보다 더 위대한 성경은 없어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서 그 속에 품은 생각을 드러냅니다.’
광야, 40일, 회개, 복음.
아주 간단한 마르코 복음이지만, 마르코 복음을 원복음으로 제일 처음 쓰인 복음이죠.
하지만 어느 긴 복음보다도 더 힘이 있고 우리가 40일 동안 어떻게 어디서 살아야 하는지,
뭐 하며 살아야 하는지, 또 뭘 믿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지금 얘기한 걸 100% 전부 다 사시며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노력은 해야겠죠.
여러분들 그렇게 사시도록 축원합니다.
아멘
♣2024년 사순 제1주일 (2/18)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첫댓글 주님! 이 고운 손길에 축복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