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 고개를 들다. 머리 속의 난쟁이가 쿵쿵쿵 발을 구르고 있다. 오늘은 뜀틀이라도 뛰려나? 지긋지긋해하며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른다. 그나저나 이 여자는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집중하려 애쓴다. 눈을 뜨고서 졸고 있는 것만 같던 나른한 눈빛의 여자는 갑자기 엄청난 비밀을 토해내듯 남자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느릿느릿 속삭였다.
“전 뼈 하나가 없어요.”
아아. 난쟁이가 뛰어오르나 보다. 아까보다 더욱 멍해진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며 이 남자 한마디 대꾸하다.
“무슨?”
여자의 얼굴에 천천히 몽글몽글한 미소가 퍼져 나간다. 조그만 입술에서 통통한 두볼로 부드럽게 쳐진 눈꼬리로 동글동글 웃음이 번지더니 마침내 크고 순해보이는 눈동자에 조금전까지의 몽롱함을 몰아내고 어떤 종류인지 도통 이해하기 힘든 생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온몸에 진이 빠진 채로 소파에 파묻히듯 늘어져 있던 이 남자 가만히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다.
“그거 알아요? 성인의 몸은 206개의 뼈로 만들어져 있는 거. 척추 26개, 두개골 22개, 설골 하나, 갈비뼈25개랑 가슴뼈, 에 또... 또 까먹어버렸네. 헤헤.”
여자 갸웃갸웃하며 손가락을 꼽아보더니 헤헤거리며 웃는다. 그 여자처럼 말을 느리게 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그리고 처음 본 사람한테, 그것도 ‘나 건드리면 재미 없수.’라고 이마에 써 있는 것처럼 무뚝뚝하게 구겨져 있는 인상의 남자한테 그딴 헛소리를 지껄이는 여자는 처음 보았다. 이 남자 이 까페를 박차고 나갈까 심각하게 고민하다.
“음... 어쨌든 제 몸엔 뼈 하나가 모자라요.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아요?”
웃음짓던 여자의 눈에서 느닷없이 굵은 눈물이 방울져 여자의 커다란 머그컵에 똑하고 떨어진다. 갑자기 난쟁이도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작게 몸을 웅크리고 숨을 죽인다. 머리 속이 조용해짐과 동시에 당황해버린 이 남자 허둥대다.
“상실이요.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없는 상실감......있잖아요. 전요. 어릴 떄 약간 아팠어요. 다리가요. 다리 한쪽이 너무 아파서 초등학교도 2년 정도 쉬고 집에만 있었죠. 뭐 딱히 학교 따위 가고 싶진 않았지만 그 또래 개구진 아이한테 방구석에만 있으라는 건 너무 잔인하잖아요? 뭐 어쩔 수 없었지만. 우리 집 그리 풍족하진 않아서 차로 어디 데려다주고 그런 거 꿈도 못 꿨거든요. 겨우 아빠가 낡은 중고 오토바이 하나 구해서 학교로 실어나르다 비가 오면 그마저도 힘드니까 집에 있었어요. 집에 있는 시간 동안 난 너무 외롭고 심심했어요. 시골이라 아무것도 없었죠. 놀거리도 없었구 또래 아이들은 당연히 밖으로만 나돌며 뛰어 놀았을테니 친구도 없었구.”
신기하다. 여자의 말투는 느리고 약간의 기분 나쁘지 않은 울림이 있고 이 많은 말을 하면서도 자기 페이스를 조금도 잃지 않는다. 언제 울었냐는 듯 큰 눈은 말끔하게 개여 있다. 이 남자 여자의 길게 늘어지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귀 기울이다.
“어느 날인가, 난 내 병 이름이 궁금했어요. 소아마비는 아니랬는데 엄마도 영어라구 못 외운다구 그랬었거든요. 그래서 정기 진찰 받으러 가서 의사 선생님께 물어봤더니 레그퍼티스씨병이라는 거예요. 들어본 적 있어요?”
갑자기 여자가 남자를 빤히 바라본다. 둥근 눈에 장난기를 담고서. 갑자기 스트레이트로 날아오는 여자의 시선에 이 남자 커피 한 모금을 들이키다 목에 걸려 컥컥대다.
“헤헤. 뭐 당연히 없겠죠. 첨에 그 단어를 들었을 때 무슨 뜻인지 몰라 멍해 있었어요. 엄마가 못 외운 이유를 알겠더라구요. 뭔가 어렵잖아요? 의사가 빙글빙글 웃으며 그러대요. 그 병을 첨 발견한 사람이 레그퍼티스씨라 그렇게 지은 거라구. 웃기죠? 음....있잖아요. 에스프레소를 처음 마셨을 때 난 그 이름만 듣고 상상했어요. 엄청 부드럽고 달콤한 커피일 거라고. 고향에서 올라와 처음 커피 전문점이란 곳에 갔더니 예쁘장한 아가씨가 뭘로 드릴까요? 그러는데 난 잔뜩 얼어가지구 ‘커피요’란 한마디밖에 못했거든요. 그 아가씨가 ‘에스프레소로 드리면 될까요?’하며 상큼하게 웃는데 그 ‘에스프레소’라는 단어가 너무 매혹적인 거예요. 세련되고 말캉말캉하게 입속에서 구르는 게 그 아가씨 하얀 치아만큼 눈부셨어요. 잔뜩 기대를 했는데 결국 나온 건 시커멓고 쓰디쓴 커피 원액이었죠. 뭐 이태리어로 무슨 뜻이 있다곤 하는데 어쨌든 이름이란 게 묘하게 웃긴 거예요. 헤~~.”
여자의 이야기는 앞뒤가 전혀 맞지 않고 이미 주제는 벗어난 거 같았지만(하긴 이 여자가 하는 얘기에 애초에 주제라는 게 있긴 한건지 아무도 모르지만 말이다.) 신기하게도 무엇을 말하려는 건지는 알 거 같았다. 그러고 보니 여자의 커다란 머그컵에 반정도 남은 카라멜모카의 달콤한 향기가 아까부터 테이블 위 공기 중을 떠돌고 있다. 훅 그 공기를 들이키며 이 남자 저도 모르게 쿡 웃음이 나다.
“에스프레소한텐 물론 실망했지만 말예요. 그래도 그 레그퍼티쓰씨는 느낌이 너무 친근한 거예요. 살아있었던 사람이었잖아요? 그 아저씨는 어떻게 생겼을까? 의사일테니 근엄하게 생겼겠지? 내 병을 알아냈을 정도니 속으로는 애들을 귀여워하는 털보 아저씨일 거야. 그렇잖아요? 병을 발견하려면 계속 애정과 관심을 갖고 지켜봤을테니 분명 무뚝뚝해 보여도 마음은 상냥할 거예요. 다른 아이들이 키다리 아저씨랑 톰 아저씨를 읽을 때 난 언제나 레그퍼티쓰씨 상상을 했어요. 혼자. 방안에서. 나만의 아저씨였으니까. 생각해 봐요. 그 아저씨를 알고 있는 애가 몇이나 되겠어요? 십만명의 한명인가 걸리는 병이랬으니까 아저씨를 알고 있는 아이는 나랑 같은 병을 앓고 있는 내 동지겠죠? 소수의 우리 동지만이 알고 있는, 우리를 사랑해주는 아저씨를 상상하면 괜히 가슴이 뿌듯했어요.”
여자는 앞에 놓인 조그만 시럽잔을 컵에 부었다. 그리고 오동통한 하얀 팔을 천천히 올린다. 카운터에서 멍하니 음악을 듣고 있던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자그마한 사내가 그걸 보고 슬로모션으로 일어난다. 이 까페에서만 시간이 두배는 느리게 흐르나보다. 여자의 한없이 느려터진 이야기에 걸맞는 한없이 느린 속도로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사내가 다가서자 여자 작은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말없이 휘어진다. 사내 역시 아무런 소리 없이 여자의 시럽잔을 가져가버린다. 잠시 두배로 느리게 흐르는 시간이 다시 조금 흘러간 후 사내는 낡아빠진 은색 커피 주전자를 가져와 여자의 컵에 가득 따르면서 역시 다시 가득 채워 온 시럽을 앞에 놓아둔다. 여자 그것마저 다시 컵에 부어버리고 헤~하며 웃자 묻지도 않고 남자의 식어빠진 커피위에 뜨거운 커피를 채워주던 사내 혀를 쯧쯧 차며 시럽잔을 가져간다. 두 번째로 날라온 시럽마저 전부 커피잔에 따라넣고서야 만족한 듯 흐뭇하게 스푼으로 커피를 저어대는 그 여자. 그 시커먼 에스프레소씨를 홀짝이던 이 남자(에스프레소라는 이름에 한번도 쓸데없는 상상을 품어본 적 없는) 지독한 달짝지근함이란 과연 어떤 맛일까 상상하다 이마를 살짝 찌푸리다.
“이제 거의 완치됐다고 생각하고 레그퍼티쓰 아저씨도 점점 잊어갔죠. 학교도 다시 정상적으로 다녔고 친구들도 많이 만났어요. 그런데 언제나 난 뭔가 부족했어요. 모든게 다시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데 말이죠. 부유하진 않았지만 부모님도 아팠던 애니까 더 애정을 가져줬고 학교 성적도 그런대로 괜찮았어요. 근데도 항상 뭔가가 허전했어요. 워낙 성격이 덜렁거리기도 하지만요. 물건도 자주 잃어버리고 나도 뭘 생각하는지조차 모르면서 생각에 잠겨 있다 혼난 적도 많거든요. 엄마가 잔소리로 맨날 그랬죠. 넌 나사가 하나 빠졌나보다라구. 그렇게 칠칠맞으면 시집가서 잘 못 산다구. 헤~.”
습관적으로 바보처럼 헤헤하고 웃는 여자의 목소리는 특유의 콧소리가 섞여 부드럽게 주위를 울렸다. 순간순간 미세하게 흔들렸다 다시 견고하게 그러나 따뜻하게 되돌아가는 공기에는 한줌의 긴장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남자의 두개골 속에서 제 멋대로 날뛰던 난쟁이도 깊고 편안한 남자의 호흡에 맞춰 잠든지 오래다. 이 남자 신기한 듯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어 보다.
“난 참 잠이 많았어요. 시간이 날 때마다 몸을 작게 말고서 잠들었죠. 주말이나 방학 때는 거의 하루에 15시간씩 잤어요. 늦잠을 자다 엄마가 깨우면 겨우 일어나 아침을 먹고 얼마 안 있어 또 낮잠을 자는 식이었죠. 야단도 많이 맞았고 어디 아픈거나 아닌가 걱정도 들었지만 뭐 그 외엔 건강했으니까요. 성적이 좋았던 것도 잔소리를 줄이는데 한몫 거들었구요. 그 덕에 보충수업도 빼먹고 집으로 돌아가 일찍 잘 수 있었죠. 취미 생활이 잠이었어요. 대학 때는 집을 나와 혼자 학교 앞에서 자취를 했었어요. 축제같은 게 겹쳐 공휴일이 많아지면 난 거의 이삼일 동안 학교도 안 가고 맘 편히 잠들곤 했죠. 밥도 안 먹구요. 그래서 친구들이 곰이라고 불렀어요. 겨울잠을 너무 자주 자서 탈이었지만요. 잠들면 언제나 외로웠어요. 현실이 아니라 꿈 속에서 너무 외롭고 고독했죠. 의미 불명의 꿈을 꾸면서도 뼈 속까지 시리게 춥고 사무치게 외로워서 잠에서 깨어나면 그대로 목놓아 울기도 했어요. 서럽게 통곡을 하면서요. 그런대도 잘 수 밖에 없었어요. 잠이 날 야금야금 좀먹는 듯한 느낌에 자지 않으려구 애써도 결국 또 긴잠을 자고 또다시 우주에 홀로 깨어있는 듯한 거대한 고독을 맛보게 되죠. 그래도 나를 사랑해주는 친구들이 있긴 해서 일어나면 날 걱정해 주기도 하고 안아주기도 했어요. 뭐 그 외엔 건강했으니까요. 성적은 꽤나 괜찮아서 다행이 졸업은 했고 평범한 직장도 잡았죠. 하긴 잠자는 시간 외엔 공부를 했으니까요. 다른 애들처럼 미팅이나 연애나 술은 거의 가까이 할 시간이 없었지만요. 하루는 누구나 공평하게 24시간 뿐이잖아요. 다른 취미 생활을 할 수 없었던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죠. 그래서 난 학창시절의 추억이라 부를 게 거의 없어요. 자고 공부했던 게 내 시간의 전부였으니까.”
여자는 달디단 커피를 너무나 맛있게(아깝다는 듯 쪽쪽 빨아먹는 느낌이랄까?) 마시면서 슬며시 웃는다. 눈가에 잔주름이 그 결을 따라 부드럽게 처진다. 이 여자는 언제나 이 표정으로 웃어왔음이 분명하다. 아마 잠을 잘 때 울먹이는 얼굴 빼고는 항상 웃어왔을 것이다. 그만큼이나 여자의 얼굴 근육은 언제나 익숙한 일을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미소짓는다. 이 여자는 남자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 뒤척일 수 밖에 없었던 수많은 밤들을 모른다. 남자가 불면증이란 희대의 적과 싸울 때 누군가가 남자에게서 훔쳐다준 잠을 자느라 여자는 늘 그렇게 바빴나 보다. 이 남자 여자를 괘씸하게 여기다.
“사회인이란 명찰을 달고 나니 별안간 잠이 달아났어요. 너무 바빠서 잘 시간도 없었지만요. 어차피 취미 생활도 시간이 나야 하는 거잖아요? 꿈이 여전히 참혹하게 외로운 것 빼면 뭐 괜찮았어요. 문득 문득 하늘을 보거나 길을 걸을 때 가슴이 쾡해지곤 했지만 난 알았거든요. 내게 뭔가 부족하단 걸. 그래서 언제나 허전함을 안고 살 수 밖에 없다는 걸. 그걸 인정하고 나면 서글프긴 해도 편해졌죠. 뭐 그냥 평범하게 결혼이란 것도 했어요. 평범한 남자랑 선이란 걸 봐서요. 평범한 날들도 무심코 흘러갔죠. 그런데 언젠가부터 왼쪽 다리가 삐걱대기 시작했어요. 아팠던 다리가요. 정말 삐걱대는 거예요. 기름칠을 못한 기계처럼 잘 걷다가도 다리가 삐끗. 잘 뛰다가도 다리가 삐끗. 삐끗삐끗삐끗삐끗.”
여자는 재미있어하며 노래처럼 흥얼흥얼댄다. 이 남자 난데없이 여자의 잘 익은 둥근 볼을 손가락으로 괜히 찔러보고 싶어지다.
“그래서 병원에 갔더니 뭐랬게요? 헤~~. 바로 그 추억의 레그퍼티쓰씨가 등장했답니다. 아저씨가 발견한 그 병 때문에 왼쪽 다리에 뼈가 하나 자라지 못했대요. 그 공간이 그대로 텅 비어있는 거예요. 하필 뼈와 뼈를 잇는 고리가 없는 거예요. 나사가 하나 없으니 삐걱거리는 건 당연하잖아요? 결국 엄마 말씀이 사실이었던 거예요. 휴~~.한마디로 나사 빠진 계집애였던 거죠.”
이 남자 갑자기 소리내어 웃어버리다.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더니 의사가 난감해 하면서 이러더군요. 특별한 치료방법은 없고 다리를 쓸 수 있을 만큼 다 써먹고 나서 오면 인공관절인가 뭔가를 다리뼈 사이에 넣어주겠다나요.
레그퍼티쓰 아저씨는 어쩌다 이따위 병을 발견했을까요? 엄청 힘들어했겠죠? 병은 알아냈지만 치료법은 없다는데. 아저씨 참 상냥한 사람일텐데, 불쌍하죠? 뭐 그리하여 지금도 이 다리를 끌고 다니고 있지만 여전히 가끔 삐끗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상한 건 한 군데가 뻥 뚫려 있던 하얗게 드러난 내 다리뼈의 엑스레이 사진을 보고 난 이후 다시 잠이 몰려오기 시작한 거예요. 그건 옛날보다 더 심각했어요. 점점 엄청난 기세로 잠의 파도가 날 집어삼켜버려 결국 나라는 인간은 껍데기만 남아있는 느낌이었죠. 하루동안 거의 제 정신일 때가 없었고 항상 잠에 취해 있는 기분이었어요. 어쩔 수 없이 회사도 그만뒀고 남편이란 사람도 나를 못 견뎌하길래 이혼해 줬어요. 엄마의 두 번째 말씀도 맞았던 거예요. 결국 시집가서 못 살고 나와버렸으니까요.“
여자는 느긋한 어투로 긴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고 그것이 결코 우스운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남자는 점점 뭔가 모르게 기분이 유쾌해지고 있었다. 이 남자 소파에 편안히 몸을 파묻으며 슬쩍 미소짓다.
“그런데 결혼 생활이 완전 쫑나는 순간부터 의식이 명료해지기 시작했어요. 언제나 흐릿하고 공중에 발을 딛고 있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는데 말이죠. 조금씩 잠이 줄어들더군요. 점점 잠자는 시간보다 깨어있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음......... 아담은 자기 갈비뼈를 꺼내서 여자를 만들었다는데 내 뼈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있을까요? 당연히 있어야 할 게 없는 나는 당연히 불완전한 인간이겠죠?”
자기가 불완전함을 얘기하면서도 여자는 아이들에게 전래동화를 이야기해 주듯 여전히 특유의 나른한 미소에 따뜻함을 담고 있었다. 이 남자 처음 만난 여자에게 편안함을 느끼는 자신에게 내심 깜짝 놀라다.
“나는 엄청 둔해요. 옛날부터 그랬어요. 눈치가 없다고도 할 수 있죠. 분위기 파악도 잘 못하고 남의 기분도 잘 못 맞추죠. 기본적인 감각 기관 수준도 형편없어요. 전혀 예민하다고 할 수 없죠. 예를 들어 발자국 소리 말예요. 난 여자랑 남자의 발소리조차 구분하지 못해요. 분명 무게 차이가 있으니까 울리는 소리의 둔중함도 다를텐데 이론상으론 알지만 역시 전혀 모르겠어요.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발자국 소리를 내면서 뒤에서 걸어오고 있던 사람이 내가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일 때는 막 울고 싶어져요. 갑자기 그건 착각이었단 걸 구두굽 소리와 함께 번쩍 깨달아버리게 되거든요. 내가 알 수 없는 발소리를 가진 그 사람이 갑자기 무서워지기까지 하죠. 내 왼쪽 넙적다리 속 구멍난 공간으로 내 오감과 마음과 심장의 피가 조금씩 새어나가는 기분이 들어요. 결국 내가 느꼈다고 생각했던 사랑이란 것도 그 작은 구멍으로 함께 소리없이 새어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건지도 몰라요. 내 다리 속의 블랙홀은 정말 대단하죠? 계속 채워지지 않는다면 내 모든 것을 빨아들일지도 모르죠.”
정말로 뭔가 엄청난 것에 탄복하듯 둥그렇게 뜬 눈이 더욱 커진다. 여자의 느린 목소리는 숙면을 취할 때의 느린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이면서도 편안하게 울린다. 여자의 이야기는 어딘가 몹시 서글펐다. 그럼에도 아직은 마음을 바닥에 내던지지 않은 채 따뜻하고 커다란 두 손으로 감싸고 있는 듯한 슬픈 듯한 안정감이 느껴진다. 여자는 졸린 듯 창밖 햇살에 시선을 주며 조그만 입을 한껏 벌려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켠다.
“롭스의 작품을 본 적이 있어요. 꽃이 달린 모자를 쓰고서 치마를 입고 춤을 추는 해골 그림이었죠. 아마 죽음의 춤이라는 제목이었던 거 같은데 그 남자에게 여자란 존재는 사탄이었나 봐요. 유혹적이면서도 치명적인 독이 있는. 그래서 증오스러운. 어찌 할 바를 몰라 그저 나약하게 성호를 그어대며 기도문이나 중얼거릴 수 밖에 없는. 그래서 다시금 더없이 약한 남자로서의 자신에게 환멸을 느낄 수 밖에 없던. 그러면서도 매혹되어 버리는. 결국 집착하게 되는.
그 해골도 꽤 예쁘더라구요. 늘씬하게 잘 빠진 것이. 그 여자의 몸은 정확히 206개의 뼈로 이루어져 있는 걸까. 사악한 기를 뿜어내는 그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혹적일 수 있는 건 완벽한 뼈대로 이루어진 완전한 여자여서일까요?“
멍한 표정으로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거 같은 여자. 그러다 이내 풀썩 웃어버린다. 그러나 조금은 쓸쓸해 보이는.......여자. 이 남자 불쑥 한마디를 내뱉어 버리고 아차 하다.
“당신은 하나가 빠져서 사랑스러워요.”
여자는 의아한 듯 남자에게 시선을 주다 얼굴의 근육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꽃망울이 서서히 열리듯 마침내 얼굴 전체에 화사한 웃음을 피워 올린다. 활짝 웃는 여자를 보며 멋쩍어 하던 이 남자 뭐 이대로도 좋지 않을까 생각하다.
한참 말이 없던 그들. 침묵도 나쁠 건 없다. 각자 창문 밖을 바라본다. 어색하지 않은 뭔가 모를 익숙하고 친밀한 공기가 그 조용한 공간을 가득 채운다. 갑자기 전화벨 소리. 남자 자신의 핸드폰을 바라보며 살짝 이마를 찌푸리다.
“네.” “네.” “걱정 마세요.” “알겠어요.”
나직한 목소리로 딱 자르듯 대화를 마치고 전화를 끊어버린다. 휴~~.한숨이 나온다. 이 나이가 되도록 노모에게 잔소리 듣는 자신의 처지도 처지거니와 걱정거리를 싸매고 있는 노모에게도 죄송스런 마음이 없지 않아 가슴 한 구석이 묵직하게 내려앉는다. 여자가 갑자기 몸을 일으킨다. 카운터의 사내에게 다가가 몇 마디 건네며 웃자 사내 불퉁불퉁한 얼굴로 뭐라고 대꾸하더니 오른손 주먹으로 가볍게 콩콩 여자의 머리를 쥐어박는다. 여자 살짝 혀를 내밀더니 나가버린다. 남자 당황해서 사내에게 급히 계산을 치루려 하자 무뚝뚝한 목소리로
“됐수. 따라가보슈.”한다. 남자는 속으로 왠지 모를 부아가 치밀었다. 한마디 하려고 하자 사내 귀찮다는 듯 손을 들어 훠이훠이 내쫓는다. 여자를 놓칠 거 같아 이 남자 아무 말도 못하고 뛰어나가다.
여자는 걸음도 느리다. 세월아 네월아다. 한없이 여유롭고 느긋한 걸음걸이다.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지만 남자는 피식 웃으며 멈춰선 채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여자 뭔가 중요한 걸 생각해낸 듯이 아차 걸음을 멈추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나를 찾나? 남자 왠지 약간 기뻤으나 여자는 이내 편의점으로 들어가 버린다. 내심 김이 빠져버린 이 남자. 그러나 언제나 그래왔던 양 익숙하게 편의점 한쪽 옆에서 담배 한대를 꺼내들고 여자를 기다리다.
편의점에서 나온 여자가 갑자기 발돋움을 하고 남자의 눈을 빤히 바라본다. 남자 흠칫 놀라 켁켁거리자 여자는 빙그레 웃으며 남자의 손가락 사이에 있던 담배를 빼앗더니 빨대 꽂은 우유 하나를 손에 쥐어 준다. 그러곤 다시 걷기 시작한다. 우유 하나를 맛있게도 빨면서. 이 남자 빨대로 뭔가 빨아먹는다는 대단히 생소한 기분에 사로잡히며 뒤따라 걷다.
덕수궁 돌담길. 천천히 걸어가던 여자 갑자기 철푸덕 바닥에 주저앉아 버린다. 남자 약간 놀랐으나 여자의 태평한 얼굴에 안도하며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그 옆에 털썩 앉는다. 무릎을 끌어 앉고 봄날의 병아리마냥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우유를 마시는 여자. 연인들의 산책 코스로 유명한 그 덕수궁 돌담길에 그 많은 벤치들을 버려놓고 청승맞게 그 담에 쪼그리고 앉은 남녀. 이 남자 조금 아주 조금 쪽팔려하다.
“이 자리가 광합성하기 좋거든요. 우유를 마시고 이렇게 햇빛을 받으면서 숨구멍을 한껏 열어놓으면 영양분을 듬뿍 섭취할 수 있답니다.”
광합성을 하려면 물을 마셔야 되는 거 아닌가. 왜우유인거야.....근거도 없는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에 심각하게 고민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한심해 하다 이 남자 그래도 열심히 남은 우유를 마시다.
“아까 까페 주인 말인데요. 누군지 알아요?”
장난스런 표정의 여자. 이 남자 내심 조바심이 나다.
“내 전남편이예요.”
이 남자 의아한 듯 여자를 바라보다.
“나랑 헤어진 후에 졸음 바이러스가 옮아갔는지 회사에서 매일 졸다가 쫗겨났대요.하하.
그러더니 그 까페를 차렸더라구요. 그 가게 별로 손님도 없어요. 내가 가면 맨날 단것만 먹는다고 야단치고 잔소리하고. 난 그 잔소리가 듣고 싶어서 또 찾아가고. 처음엔 갈 때마다 졸고 있더니 요즘은 많이 나아졌나봐요. 그 사람 나 만나서 잘 나가던 배 나온 아저씨에서 별 볼일 없는 홀쭉한 아저씨가 되어버렸는데 본인은 만족한다나 뭐라나. 이제 겨우 쫓기지 않고 살게 됐다고 그러는데 글쎄. 난 뭔가 조금은 미안해요. 뼈 하나 모자란 여자 만나서 206개의 뼈를 모두 가진 완전한 사람이 바보가 됐나봐요. 헤헤~. 나한테 맨날 시집가라고 구박해요.“
이 여자를 만나면 모두가 후유증을 앓게 되는 것일까. 벌써부터 평소의 자기답지 않은 스스로에게 불안감을 느끼던 이 남자 그래도 내심 안도하다.
“내가 받은 영양분들을 나눠 줄께요.”
우유룰 다 마시고 기분좋게 해바라기하던 여자 남자의 손을 살며시 잡는다. 오동통하게 살이 오른 여자의 손은 햇살을 흡수해서인지 기분좋게 따뜻하다. 이 남자 손끝으로부터 몸 속으로 번져가는 온기에 졸음이 밀려들다.
이 여자는 에스프레소보다 말캉말캉하고 레그퍼시쓰라는 그 서양 남자보다 상냥하고 따뜻하다. 이젠 내 얘기를 해야 하리라 잠시 생각했지만 남자는 어느 틈에 머리를 여자의 어깨에 기대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남자는 알까? 그 남자가 까페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 여자는 잃어버린 뼛조각을 찾았다는걸. 여자는 알까? 지난 10여년의 세월 동안 한번도 제대로 잠들지 못해 늘 신경질적이고 입만 열면 독설을 내어뱉어 남들을 상처입히고 스스로를 상처주던 남자가 처음으로 다른 사람의 말을 묵묵히 들어주고 지금은 여자의 어깨에서 깊이 잠들어 있다는 걸. 남자의 잠든 얼굴은 말개서 어린 아이의 그것같다. 쌕쌕 잘도 잔다. 엄마가 지켜주리라는 걸 조금도 의심해 본 적 없는 아기처럼 무방비하면서도 평온하다.
“당신은 행복해질 수 밖에 없어요. 완벽한 206개의 뼈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아름답게 이어져 있을테니까. 당신은 완전한 사람이예요. 그러니까 행복해질 거예요.”
여자는 가만가만 남자의 귀에 속삭인다. 곧 여자도 둥근 볼을 남자의 머리 위에 살짝 올리고 눈을 감는다. 여자 작은 입술을 벌려 나른하게 하품을 한다. 여름으로 달려가는 어느 날 저녁놀이 살포시 내려앉는 시간 거리의 사람들은 저마다 바쁘게 어디론가 흘러 들어간다. 한없이 시끄러우면서도 한없이 고요한 그 공간이 서서히 부드러운 붉은 빛으로 물들어간다.
짚신도 제 짝이 있다는 걸 여러분 믿으십니까? 분명 짚신은 제 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쉽게 짝을 만날 수 없는 이유는 이미 다른 사람이 자기 것이 아닌 짚신을 신고 있어서입니다. 그 사람도, 짚신도, 스스로의 있을 장소를 찾지 못해 방황하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도 발을 신발에 맞추려고 헛된 노력을 하고 집착이란 걸 합니다. 그래서 불륜이니 외도니 그런 말이 생기는 겁니다. 이혼은 실패가 아닙니다. 단지 진짜 짝을 찾기 위한 여정일 뿐입니다. 두발에 꼭 맞는 한 쌍의 신발을 찾고 싶으시다구요? 오늘도 당신을 찾지 못해 홀로 외롭게 떠돌고 있을 다른 한 짝을 저희가 찾아드리겠습니다. 망설이지 마십시오. 지금 바로 전화 주십시오. 재혼 전문 주식회사 ΟΟΟ입니다
첫댓글 재혼 전문 주식회사라...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