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한(金斗漢)
한국 조직 폭력배의 시조이자 한 시대를 풍미한 협객이다
누구나가 알듯이 독립 운동가로서 유명한 독립군 대장 백야 김좌진 선생님의 아들로서 말 그대로 장군의 아들이다
김좌진 장군은 조선말기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개화 정치가 김옥균 선생님의 양자이다 이런 명문의 집안 출신이었던 김두한은 그러나 어린 시절 불행한 일생을 산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아버지인 김좌진 장군이 사망하였기 때문 18세의 어린 나이에 김두한은 쌍칼의 부하가 된다.
당시 한국 주먹은 구마적과 신마적이 양분하여 통치했다
쌍칼이 신마적에게 패한 후 김두한은 한국 최고의 주먹이었던 신마적을 때려 잡는다 신마적은 명문대 출신의 난폭한 깡패이다
신마적을 때려잡은 김두한은 곧 그 위세가 대단했던 구마적을 때려 잡았다
김두한의 별명은 잇뽕 즉 한방이라는 뜻으로 한방이면 누구든지 나가 떨어진다는 뜻이다 이로서 그는 불과 18세의 어린 나이에 우미관을 중심으로 한국 주먹계를 장악한다 이후 종로일대에 상인들을 괴롭히던 일본인들을 두들김으로서 그는 명실상부 조선의 협객이 된다
많은 일본인들과 대결 승리한다 1945년 해방이후 그는 민주주의를 주장하며 당시 반공세력들을 제거한다
그후 50년대를 기점을 하여 정치계에 입문 국회의원이 된다
그는 55세로 생을 마감하면서 그 누구에게도 패하지 않은 조선 제일의 협객인 것이다. 1918∼1972. 제3대 및 제6대 국회의원. 독립운동가 좌진(佐鎭)의 아들이다. 서울 교동국민학교를 졸업하였으나 고아나 다름없는 부랑아생활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민족항일기 말기에는 종로를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주먹왕으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김좌진의 아들임을 긍지로 삼아 일제의 무기고를 폭파하거나 조선인 상인을 보호하는 등의 협객으로도 행동하였다. 광복 이후 이승만(李承晩)·김구(金九)·신익희(申翼熙) 등이 주도하는 대한청년단의 감찰부장을 맡아 반공대열의 최선봉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반공투쟁과정에서 살상행위를 서슴지 않아 미군정청에 의해 사형언도를 받고 오키나와 미군부대에 수감되었다. 사형집행일을 불과 며칠 앞두고 대한민국정부수립을 맞아 그 집행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정부수립 이후에도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 최고위원, 대한학도의용군 참모장 등을 역임하면서 반공·노동운동을 계속하였다. 1954년 종로을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제3대민의원에 당선되었고, 1965년에도 제6대국회의원보궐선거에서 당선되는 등 정치사에도 행적을 남기었다. 용산구의 보궐선거로 제6대국회에 등단하자마자 한독당내란음모사건과 관련되어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으나 야당은 물론 공화당까지 석방결의안에 106표의 찬성표를 던져 석방되었다. 그러나 국회에서 사카린밀수사건을 논란중일 때 국무위원에게 똥물을 뒤집어씌운, 이른바 국회오물투척사건으로 의정사상 전대미문의 오점을 남기고 다시 서대문감옥에 수감되는 기이한 행적을 남기었다. 결국 1966년 의원직을 사퇴함으로써 그의 독특한 정치생활은 막을 내렸다. 정계은퇴 후 고혈압으로 1972년 11월 죽었다. 묘지는 서울 수유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