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모학생들의 동향과 의사를 잘 반영해 주었던
당시 동아방송에서 전한 3,24주동학생들의 생각을 통해서 보면 3,24시위는
1. 한일회담에 임하는 박정권의 굴욕적 자세에 대한 사전적 경고
2. 민족적 주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구국항쟁
3.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한국민족의 정당한 경고
4. 현 위정자에 대한 분노에 찬 의사표시였다.
또한 학생들이 요구한 사항도
1. 군사혁명 직후 기도했던 외국차관단을 다시 만들고
2. 실질적인 내핍생활을 제도화하고
3. 매판자본을 민족자본화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고
4. 기존 민족자본을 총동원하여 생산부문에 투자할 것 등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학생들은 심각한 경제문제를 우려하면서 민족자존의 민주주의를 요구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박정희정권도 6.3학생운동의 초기단계에서는
학생들과의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3월 26일 문교부와 학생대표의 면담에서 학생대표들은
1. 굴욕적 한일회담의 무조건 중지
2. 체일 대표 소환
3. 박대통령과의 면담
4. 연행된 학생의 즉시 석방을 요구했고,
이에 정부는 김종필을 소환하고 연행학생을 석방하는 등 학생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한편
박정희 대통령과의 면담을 주선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박정희정권은 결코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한일회담은 박정희정권의 독자적 결정 영역만이 아니라,
미국의 동북아시아 전략과 관련하여 추진되었으며,
국내적으로도 정치적 차원의 문제만이 아니라,
경제개발과 한일경제 협력문제 등
경제적인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된 정권의 운명을 좌우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정희정권으로서는 연행학생을 석방하고
김종필을 일시 소환하는 등 미봉적 조치를 취할 수는 있었으나
한일회담 자체를 중단할 수는 없었다.
출처: 나라사랑 이명박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