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님을 그리며
지난 5월 21일 새벽 2시 35분, 시어머니께서는 95년(1919년생)의 긴 삶을 마감하셨습니다. 시어머니와 함께 한 26년이란 세월을 되돌아보며, 다시 한 번 지나온 길을 생각해 봅니다.
제가 26살 되던 해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남편을 만나 처음 인사를 갔을 때 어머님은 거침없이 웃통을 벗어 옷을 갈아입으시며 저를 환대하셨습니다. 아마 내 집 식구다 싶으니 그 기쁨을 그렇게 편하게 표현하셨나 봅니다. 아직 어색한 나는 어쩔 줄 몰라 했는데 마흔이 지나고 나서야 어머님의 그 날 모습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시집가던 해 어머님은 예순 아홉이셨고 제가 맞은 어머님 첫 생신이 바로 칠순이었습니다.
철없는 며느리는 칠순의 나이가 얼마나 많은 나이인줄도 모르고 학교에 근무하네 하고 늦게 집에 오고 어쩌면 학교에서 이리 빙글 저리 빙글 돌면서 늦게 퇴근할 핑계거리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친정에서 자란 환경과 새로운 환경이 당연히 같지 않을 것인데 그것이 무엇이 힘들다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불만이 많았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철없이 보낸 30대였습니다.
어머님은 직장 다니는 며느리가 안쓰러워 제가 벗어 놓은 속옷까지도 찾아서 빨래를 하시는데 저는 그 마음은 아랑곳 하지 않고 부끄럽다는 생각에 이리 저리 숨기기에 급급했습니다. 이미 어머님은 저를 한 식구로 받아주셨는데 저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한발 짝 발을 뒤로 내밀고 시집식구라는 선을 그어두고 있었나 봅니다.
일흔이 넘어 얻은 손주가 얼마나 좋으신지 힘든 줄도 모르고 기쁨으로 오직 손주 돌보는 일에 전념하셨습니다. 다른 분들은 자기 생활이 있고 친구가 있어 아이를 돌보면서도 며느리에게, 딸에게 불만을 얘기하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어머님은 한 번도 힘들다고 말씀 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큰아이가 돌 무렵, 하루 퇴근하니 어머님 얼굴이 혼비백산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계셨습니다. 큰아이가 오토바이가 금방 선 줄도 모르고 좋아서 갔다가 연통에 화상을 입은 것이었습니다. 며느리에게 아이 잘못 보았다는 미안함 때문에 어쩔 줄을 모르셨던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고향이 전북 김제이신데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아들 따라 부산으로 오신 분이라 부산에는 친구도 없었고 오직 큰 외출이 일요일에 교회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몇 번은 교회 가자고 하셨는데 저의 인연이 아니었는지 그것만은 절대로 못하겠다고 완강히 버티는 며느리를 어머님은 기다리셨지요. 그 기다리는 마음도 모르고 한 번도 교회에 가지 않았으니 얼마나 속상하셨을까 싶습니다.
첫 애를 낳았을 때 어머님의 꿈은 손자 초등학교 가방 들고 나가는 모습을 볼 때까지 사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둘째도 낳았고, 어머님은 둘을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이 다 키워주셨습니다. 그 아이들이 자라 큰 아들은 벌써 26살, 둘째 딸아이는 24살이 되었습니다. 지난해 12월 둘째가 취직을 하여 첫 월급 탔다고 할머니께 용돈을 드리니 참으로 좋아하셨습니다.
용돈을 모아 오직 쓸 곳은 교회에 조금 헌금 하시고 우리 아이들 용돈 주며 경로당에 맛있는 것 사가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모이면 저희들 보고 쓰라고 주셨고 저희들이 조금씩 집을 넓혀 갈 때면 꼭 필요한 것을 사라고 있는 돈을 다 주셨지요.
비록 글을 배우지 못하시고 귀가 잘 들리지도 않아서 찬송가 하나 바르게 부르지 못하셔도 성경책을 꼭 챙기시고 주일에는 열심히 교회에 가시며 그 신심은 일심이셨습니다. 어느 날 제가 절에 다니는 것을 아시고도 처음엔 알면서도 모른 척 해 주셨지요. 간혹 한 집에 종교가 둘이면 안된다는데~~ 라는 말씀은 하셨지만 가지 마라고는 하시지 않으시며 저를 인정해 주셨습니다.
음식 솜씨가 얼마나 좋으시던지 저희 어머님을 아시는 분들은 한결같이 그 맛있는 김치며 찌개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시골에서 생활하시던 분이라 조금만 먹을 것이 있어도 여러 사람들을 불러 먹이기를 좋아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 집은 호남 분들의 고향 같은 집이기도 했지요.
경로당 할머니들 사이에도 먹을 것을 많이 들고 오는 할머니로 통했지요. 집에서 조금만 먹을 것이 생겨도 나누어 드셨습니다. 용돈이 조금 더 생기면 야쿠르트라도 사가지고 가서 나누어 드셨고요.
비록 공부를 하시지 않아 세상의 돌아가는 일은 모르셔도 사람의 도리를 아시고 현명하시며 남들과 더불어 사는 법을 아셨습니다.
당신에게 무엇을 해달라고 요구하시지도 않으시고, 우리들의 결정에 따라 주시며 느긋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기다리셨습니다. 성품이 너그럽고 노래 흥얼거리기를 좋아하셔서 소파에 앉으면 1시간이 넘게 어렸을 때 불렀던 노래며 “오송자가 와 이리 늦게 오노?” 라는 말도 노래로 하셨지요.
요즘 유튜브의 좋은 글들이 유행하는데 오래 사는 방법 중 친구가 많아야 한다고 많이 말합니다만, 저의 어머님을 뵈면 그것도 좋지만 단순하고, 느긋하고 긍정적으로 사는 것이 장수의 비결이라고 웃으며 말합니다.
몸집이 크신 편이라 늘 무릎이 아파서 고생을 하셨지요. 혈압이 있어 혈압약을 드셨지만 아흔이 넘도록 병원에 입원한 적이 없을 정도로 건강하셨습니다.
3년 전 폐에 물이 차서 입원을 하신 뒤 그 뒤로는 기력이 약해지시면서 집안에서만 생활을 하셨습니다. 다시 아이가 되어 간다는 말처럼 처음에는 지팡이로 집안을 걸으시더니 점점 기력이 떨어지니 보행기에 의존하여 집안을 걸어야했고, 그러다 화장실 출입을 할 수 없어 방안에서 변기에 의존하여야 했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남은 자존심으로 기저귀 차기를 강력하게 거부하시며 그나마 일어나셔서 변기에라도 애써 앉으셨는데 마지막엔 그 자존심마저도 없이 기저귀에 변을 보시고는 편안해 하셨습니다. 다행인 것은 정신을 맑으셔서 가시는 전날까지 말씀도 하시고 저희들을 다 알아보셨습니다.
올 3월부터 병원에 입원했다가 다시 집으로 오시기를 번갈아 하실 동안 제가 한 일은 매일 아미타경과 보현행원품을 독송하여 드리는 일이였습니다. 비록 부처님을 하나님으로 고쳐 읽기도 하고 마지막에 아멘~ 하면 어머님도 아멘~ 하시면서 아주 편안해 하셨습니다. 고통이 오면 저를 불러 기도를 하라고 하시며 독경소리에 잠이 드시고는 하셨지요. ‘마하반야바라밀’ 염불을 하다가 어머님께 따라해 보라고 하니 그것은 처음 듣는 것이라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나무아미타불’을 했더니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했던 습이 있어서인지 ‘나무아미타불’을 잘 따라 하셔서 함께 하기도 하고 염불을 천천히 하면 편히 잠을 드셨습니다.
초파일에 절에 갔다 병원에 갔더니 기력이 확연히 떨어지신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아침 일찍 병원에 갔더니 더 많이 기력이 떨어지시길래 간호사에게 어머니의 상태를 물었더니 1주일을 넘기기 힘들거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몇 달 전부터 오래 사실 거라는 믿음은 없었지만 이제 1주일후면 어머니와 이별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슬픔이 북받쳐 와 남편과 함께 많이 울었습니다. 한 참 후 정신을 가다듬고 다인실보다는 1인실로 옮기는 게 좋을 듯 싶어 바로 1인실을 신청하여 옮겼습니다. 다인실에 있다 보니 독경도 염불도 마음대로 할 수 없기도 하고 마지막 가시는 길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멀리 있는 가족들에게 모두 연락을 하고는 급히 모였습니다. 다들 어쩔 줄 모르는데 제가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자세히 말씀 드리니 저를 따라 돌아가며 염불을 하고 독경을 하며 어머님과의 좋은 추억들을 말씀하기도 하고 감사의 말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기를 이틀이 지난 5월 20일, 밤 12시를 넘길 수 없을 정도로 어머니의 호흡은 점점 희미해져만 갔습니다. 가족들은 어머니가 12시를 넘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시 염불을 하고 아미타경과 보현행원품 독경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가쁜 숨이 고요해 지시며 편히 주무셨습니다. 잠시 남편이랑 교대를 하고 눈을 부치려는데 급히 부르는 소리에 가보았더니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호흡과 맥박을 재는 기계는 일직선을 그었다가 천천히 곡선을 그었다가 하더니 찍~~~ 소리를 내며 어머니와의 이별 시간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2013년 5월 21일 새벽 2시 35분! 어머니는 편히 잠든 모습으로 저희들과 이별을 하셨습니다. 모였던 가족들은 북받치는 슬픔을 견디면서 제가 설명해 준 대로 큰소리로 울지는 않았습니다.
카페에서 공부하였듯이 가신 뒤에도 귀는 그대로 들린다는 말에 돌아가면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당신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우리들은 다들 걱정없이 어머님 덕분에 다 잘 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훌륭하게 키워주셔서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미안합니다. 아미타 부처님, 예수님 만나 손 꼭 잡고 가십시오.…”
입사 준비로 바빠 못 내려온 큰아이는 전화로 큰소리로 할머니께 마지막 인사를 드렸습니다.
독경도 하고 염불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2시간 동안 함께 어루만져도 보고 소중한 추억들을 큰소리로 말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천천히 발끝부터 식어서 정수리까지 체온이 식어가는 것을 함께 어루만지니 우리들의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어머님 얼굴도 정말 편안하셨고요.
12년 전 중환자실에 계셨던 친정어머니를 보낼 때는 우리 가족 중 공부한 사람도 없었고 오늘 저녁을 넘기기 어려우니 대기하라는 말씀에 모두 병실 밖 복도에서 대기하다 “들어오셔요.”라는 소리에 우르르 들어갔더니 5분도 채 되기 전 어머니는 운명하셨고, 우왕좌왕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병원측에서는 곧바로 어머니를 덮어서 안치실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어머니를 황망히 보내는 게 서운하고 허망 했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보내는 것인가 보다라고 생각하며 공부하지 않은 자신을 모르고 울고만 다녔습니다.
제가 이렇게 긴 글을 올리는 것은 혹여 가족 중에 가시는 분들이 계실 때 미리 조용한 1인실로 옮겨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갖고 호흡이 멈춘 후에는 적어도 2시간 정도(시간이 많을수록 좋겠지요.)는 그대로 모셔놓고 가족들과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고 좋은 말씀을 들려 드리는 것이 좋을 듯 싶어 저의 어머님을 보낸 경험을 여러분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올립니다.
최복임 어머님,
광명의 나라, 무량한 수명인 아미타 부처님의 품에 안기시며 세세영영 부처님 시봉 밝은 날 되시기를 발원 드리옵니다.
어머님,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며느리 오송자 두손 모아 올립니다.
첫댓글 26년을 함께 한 세월이라 아직은 그 빈자리가 너무 큽니다만 그러고 있을 수만은 없기에 그 마음을 모아 매일 기도 공양 올리며 못난 글을 올립니다. 철없이 굴었던 일들이 너무 많아 다 올릴 수 없습니다.
친정어머니를 보내고 났을 때 고아라는 마음에 끈이 풀린 연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때는 그래도 시어머님이라도 살아계시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의지할 부모님이 아무도 안계시니 그 마음 표현이 잘 안되네요. 살아계실 때 더 많이 할 걸~~~ 후회 많이 합니다. 열심히 기도공양 올리고, 형제간의 우애를 지키는 일을 더 많이 하겠습니다. 못난 글 읽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최복임님의 왕생극락을 발원합니다.
시모를 같이 살며 모신 것도 대단한데
지극 정성으로 가시는 길 배웅하는 모습에 감동의 눈물이 흐르네요. 평소에 공부많이 하고 반듯한 삶을 살고 뒷모습이 아름답다 생각했었는데 대단하십니다.
그 뜻을 깊이 새기며 마하반야바라밀~~
보문님의 글을 읽으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겹쳐 눈물이 하염없이 흐릅니다.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자신이 지어놓은 업대로 간다는 경전의 말씀들이 또 다시 가슴에 새겨집니다.
보문님! 그간 애 쓰셨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최복임영가시여!
세세생생 부처님 시봉 밝은 날과 같이 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대단히 감동적인 글입니다...시어머님 신심이 대단하셨고 보문님 그처럼 정성을 들이셨으니 좋은 데 가셨을 듯...나무아미타불
시어머님과의 인연이~ 부럽고 보문님의 신심에 감탄 드립니다. 감명의 글이
삶을? 꾸리는데.도움이 되겠습니다~~~_()()()_
꼭 보현행자로 다시 오실겁니다..마하반야바라밀.._()()()_
한번도 뵌적도 없는 보문님의 시어머님이시지만 마치 잘 알던 분이 돌아가신듯 합니다. 보문님의 글에서 보현행자의 향훈을 느낍니다. 반듯하게 공부 잘 하신 우리 보문님, 시어머님 공양 잘 하셨으니 반드시 극락왕생하셨을 거에요.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시아본사 아미타불..._()()()_
마치 제가 모시던 어머님마냥 허전합니다. 친정어머니에게도 그만큼 따라하지 못할 정도로 몸으로 보현행원을 실천하시는 보문님!! 글로만 읽는 것으로도 벅차서 헉헉대는 스스로가 부끄럽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처처에서 오시는 부처님...
감사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보문님 감사드립니다. 이렇듯 나누어 주시니 저희들의 마음도 향기로워 집니다. 흐르는 눈물 추스르고 저도 따라서 그리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어머님 극락왕생 하시기를 간절히 발원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보문님께 참 많이 배웁니다 그동안 수고많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어머님께서 아미타부처님 품안에서 다시태어나 영생복락 누리시길 발원합니다 나무아미타불
여러분들 격려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좋은 곳으로 가셔서 편히 계시리라 확신 합니다.
빛으로 돌아오소서 !!!
나무아미타불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보문법우님 감동적인 글 감사합니다...그 곱고 자비로운 마음이 부처님이십니다...
부디 밝은자리 한자리 하소서...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
참으로 대단하신 보문님이십니다. 어머니가 극락왕생하시길 빕니다. 일러 주시는 그 귀한 말씀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스스로를 되돌아 보고 반성합니다. 저도 시어머니가 가족들을 다 돌보아 주시고 계시는데 그 은혜를 모르고 늘 찡찡거리고 철 안든 딸마냥하니 부끄럽습니다. 작은 거 부터 실천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시아본사 아미타불 _()()()_
보문님! 감동적인 글 고맙습니다.
시어머님의 명복을 다시 한 번 빕니다. -나무아미타물 나무아미타물 나무아미타불-
어제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시어머니 문제로 괴로워하길래 보문님의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친구도 대단하다며 가만히 듣고 있었습니다. 이글을 출력해 다시 보내주어야 겠습니다.
저에게도 80념으신 부모님, 90넘으신 시어머님이 계십니다.
항상 나 힘들고 불편한 것만 먼저 생각하게 되는 자신을 반성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잘 모실 수 있도록 편히 해 드릴 수 있도록 발원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얄바라밀 마하반얄바라밀 _()()()_
20년전 20대에 부모님을 보내고 고아라는 생각으로 살면서 지금은 연로하시지만 건강하고 돌아가신 친정부모님만큼 아껴주시는 시부모님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글입니다. 보문님 감동적인 글 감사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이 글을 찾아 다시 읽습니다. 보현선생님,보문님. 연무심님 덕분에 저도 더 기쁘게 잘 보내드릴 수 있었던것 같아요. 더 흐릿해지기전에 저도 나누어야겠어요.
고맙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