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구 주먹’ 안상민씨(42)는 안토니파의 보스로 생활해 왔던 자신의 과거를 솔직하게 고백한 자서전적 소설 ‘거물’(도서출판 서지원)을 출판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그는 스무살이 되기도 전에 서산 일대를 주먹으로 평정하고 80∼90년대에 서울로 진출해 명동, 이태원, 강남 등을 차례로 장악한 탁월한 싸움꾼으로 유명하다.
안토니파 보스로 있으면서 국내에 단 한 대밖에 없는 방탄차를 타고 다닐 정도로 그 위세를 떨쳤던 그가 수배 당할 때에는 ‘방탄차를 타고 다니는 폭력배 대부’라고 신문지상을 떠들썩하게 장식하기도 했다.
10여년간의 수형 생활을 하면서 자기 반성과 아내의 헌신적인 노력, 주먹계의 변화에 대한 회의 등으로 돌연 97년 은퇴를 선언했다.
현재 그는 조직 폭력배 퇴치에 앞장서면서 청소년 범죄 예방을 위한 선도 활동에 힘쓰고 있다.
- 주먹세계는 어떤 식으로 입문하게 됐나.
“중학교 1학년 때까지 말을 더듬었다. 어렸을 때 녹용을 많이 먹고, 다락방에 올려 놓은 꿀을 반병 정도 먹고 잔 적이 있다. 그 뒤 언어장애가 왔다.
어린마음에 남들에게 말더듬는다는 놀림을 받기 싫어서 운동(종합무술)을 배웠다. 그때부터 싸움을 시작했다.
이때 김두한씨 책을 보고 감명받아 건달계에 입문했다.”
김두한이 일본 유도사범 마루오카와 종로에서 맞붙었을 때 자신에 대해 “조선 제1의 협객”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이처럼 당시 건달들은 협객의 기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안상민씨는 바로 이점에 감명을 받았던 것으로 보였다.
- 결혼은 언제했나.
“81년도에 결혼했다. 당시 22세였다.
서산에서 소꼽친구로 사귀면서 초등학교 6년을 같이 지낸 사이다.
중학교 때 서울에 올라온 뒤 서산에 있는 현재의 집사람에게 자주 전화하고 방학 때마다 서산에 내려가서 만났다. 나는 언제나 쫓아다녔고 우리 집사람은 도망 다니는 형태였다. 아마 그래서 더욱 끌렸던 것 같다.”
- 주로 어느 지역에서 활동했나.
“서산은 너무 좁기 때문에 ‘최고의 주먹이 되기 위해 우물안 개구리가 되지 말자’며 70년 말에 서울로 올라와 명동에서 생활했다. 80년대에 전두환 전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자 잠시 서산으로 내려갔다가 82년도에 다시 상경했다. 그리고 이태원, 강남에서 활동했다.
서울 올라와서는 호남식구들과 함께 생활했기 때문에 어려운 점은 없었다.
충청도 대표로 서울 올라가서 생활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천안 조일환(김두한씨의 마지막 후계자)선생 등 서산 지역 원로들이 ‘너는 충청도 대표니까 충청도 자부심을 걸고 생활하라’고 격려해 줬다.
- 주먹계를 은퇴하게 된 배경은.
“내 인생 중 30대를 감옥에서 보냈다. 나는 아들이 둘인데 우리 집사람이 전부 키운 것이다. 우리 집안 형제들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 먹여 살렸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한편 나는 감옥에서도 요시찰 대상(거물급들은 감옥 안에서 다시 조직을 형성할 우려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기 때문에 6개월에 한번씩 감옥을 옮겼다. 거의 전국 각지의 교도소를 돌았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집사람은 그 바쁜 와중에도 꾸준히 면회를 왔다. 아내에 대해 미안하면서도 고마운 감정 때문에 은퇴한 것이다.
또 전국적으로 너무 많은 폭력조직이 생겨 회의를 느꼈다. 그래서 은퇴했다.
- 지난 10월30일 인천에서 생긴 화제사건 이면에 조직폭력이 개입됐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들은 건달도 아니고 깡패도 아니고 흉악범이다. 건달에 대한 정의도 모르는 흉악한 범죄집단인 것이다.
보통 건달은 의리가 있어야 되고, 정의와 의협심이 강하고, 약자가 불리하면 참지 않고 주먹을 쓴다.
요즘은 자기들 이권에만 눈이 어두운 범죄집단이 너무 많다. 백주 대낮에 ‘사시미칼’을 들고 서로 상해를 입히는 것은 건달의 자질이 없는 사람들이다. 건달은 칼을 들면 안된다.
예전에는 진짜 건달들을 존경하고 흠모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요즘같은 조폭은 존경받는 사람이 없다.”
- ‘안토니파’라고 불리는 배경은.
“검찰이 단순히 내 별명 ‘안돈’을 부른 것이 전혀 다르게 개칭된 것이다.
서산지역에서 돈을 많이 벌어 복받으라는 의미로 ‘돈족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김씨에게는 ‘김돈’, 박씨에게는 ‘박돈’이라고 불렀다. 나는 ‘안’가기 때문에 ‘안돈’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안돈’이 ‘안토니’로 바뀌면서 ‘안토니파’가 된 것이다.”
-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야쿠자들에게 냉정하게 거절했던 사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86년 가을쯤으로 기억된다. J누님과는 85년부터 알고 지냈다. 일본 야쿠자가 사업상 유대관계를 가지자고 유혹했는데 이를 거절했다.”
안상민씨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자서전적 소설인 ‘거물’에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재일교포 3세인 호시노,‘월하인’의 주인 J누님, 야마구치파의 간부인 고다마가 등장한다.
고다마는 술을 한 순배 돌리고 한국에 히로뽕을 제작해 달라고 부탁한다. 한화로 4억원을 지원할 의사가 있다는 것. 안상민은 이를 거절하기 위해 40억을 요구했다.
그런데 고다마는 곧 그 돈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거절하기로 마음먹었던 안상민씨는 한화가 아닌 엔화로 40억이라 재차 요구했다. 역시 아무리 야쿠자라도 자신들의 능력을 넘어서는 요구라고 판단하고 무시당했다고 느꼈다.
이로써 한국에 마약공장이 생기지 않게 된 것이다.
그냥 돌아갈 수 없다고 판단한 고다마는 안상민씨에게‘한 수 가르쳐 달라’고 청했다.
안상민씨는 도전을 한 고다마에게 한 수 가르쳐 줬다. 어떻게 상대방의 명치를 가격할 수 있는지를 몸소 배운 고다마는 안상민씨에게 무릎을 꿇었다.
- 청소년들의 ‘일진회’의 회장의 꿈이 조폭두목이라고 말하는 학생들이 많다.
“큰일이다.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되고 차라리 진정한 건달을 하는 것이 낫다. 진정한 건달은 남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되고, 사회의 지탄을 받는 행동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청소년 선도에 앞장서고 있다. 매일 서산 우범지역을 순찰하고 그러면서 청소년들에게 미래를 생각해서 이런 생활을 하지 말라고 훈계한다.
특히 이 말을 하고 싶다. 제발 무기(칼, 총 등)를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보신용, 호신용으로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나중에 공격무기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격무기로 변하는 순간 상대는 물론이고 자신도 파멸의 길로 빠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