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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甲申政變)은 1884년 12월 4일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홍영식 등 개화당이 청나라에 의존하려는 척족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 한 무력 쿠데타인데 우리들은 보통
'김옥균의 3일천하'라고 부른다.
시장은 같은 종류들이 모여 있어 예를 들면 솥전(鼎廛)거리, 목물전(木物廛)거리, 건 어물전(乾魚物廛), 개전, 닭전골목 등이 있는데 그 중 소전만은 넓어야 되니 마당(場)이라는 말을 사용 우시장(牛市場)이라고 일컫는다
현대인들이야 관심 밖이고 웃을 일인데 물자가 귀하던 시절 내가 어릴 때 만 해도 파자마(pajamas)라고 헐렁한 잠옷을 입고 외출하는 것이 유행이었고 양복천의 색깔이 바래고 닳으면 실밥을 모두 자르고 뒤집은 후 다시 꿰매어 새 옷처럼 만드는 것을 일어로 우라까에(裏返;うらがえ)라고 했는데 그 당시 얼굴이 못 생긴 여자를 일컬어 ‘꼭 호박 우라까에 한 것 같다.’ 라고 말했다.
힘겹게 그 당시를 살던 사람들은 고령화되어 세상을 떠나니 위의 말들이 사라질 것 같다.
힘겹게 그 당시를 살던 사람들은 고령화되어 세상을 떠나니 위의 말들이 사라질 것 같다.
은어(隱語)는 어떤 계층이나 부류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자기네 구성원들끼리만 빈번하게 사용하는 말인데 자전거포라는 말끝에 생각나는 것으로 부속 도매상은 소매도 같이 하는데 만약 자전거를 고치러온 고객이 옆에 있다면 그들이 못 알아듣게 은어(secret language)를 사용하는데 ‘1’은 보(일어로 막대기; 棒) 9는 마루 보(丸 棒), 5는 일어 가다가나에서 '요와 리'글씨를 합치면 5가 되는 등으로 가격을 말하는데 '보요리'하면 15가 된다.
지게를 지는 사람은 저고리의 어깨가 먼저 해어지니 천 쪼가리를 덧대어 기운 옷을 입는데 장작을 지게로 매고 장날 시장의 길옆에다 너나없이 한 줄로 죽 세워 놓으면 제일 싼 것부터 차례로 팔리게 되며 원매자(願買者)의 집까지 배달한 후 쌓아주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물건의 가격을 다른 말로 금이라고도 하는데 뜬금이란 일정하지 않고 떠있는 가격이란 말이고 가금(加金)이란 말은 웃돈이란 말이다.
가난한 사람은 걸 맞는 생활은 하지 않으니 소금에 절인 고등어 한손(한 손으로 움켜 쥘 수 있는 양; 두 마리)을 사서 지게 가장자리에 짚으로 달아매어 집으로 오게 되는데 만약 생선일 경우 팔다 남아서 상하여 내장이 바깥으로 흘러내릴 정도라면 떨이로 헐값에 살 수 있으며 가난한 사람들의 몫이 되는데 그런 걸 먹을지라도 면역성이 강하여 배탈이라곤 없었다.
그당시는 노력을 많이 해보지만 얻어지는 결실은 미약했는데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반상에 대한 개화기가 찾아오는데 이전까지는 상넘이라고 하층 계급의 사람들은 돈이 있고 또 나이가 많아도 다른 평민들에게 존칭인 ‘하소!’를 하지만 평민은 상넘에게 비칭인 ‘하게’를 하여 괄시(恝視)를 받았으며 만약 맞먹으려 하면 멍석말이 동네매를 맞을 수도 있다.
만약 간음 사건이 탈로나면 남자는 빠지고 여자만 부정하다고 인정하여 동내에 조리를 돌리고 멀리 추방을 시키는데 칠거지악 중의 하나가 되는 것은 법을 만든 이가 남자이니 나면서부터 누리는 특권 때문이리라….
허리띠를 졸라매는 사람이 땅을 산다는 말이 있지만 반찬이레야 콩나물을 윗목에 키워 먹게 되는데 일단은 땅이 많아야 미덕을 가진 사람으로 인정이 되며 그 당시에는 배운 사람보다 돈줄을 쥔 자의 말발이 더 거센 시절이었으니 금력의 권위를 실감 했다.
그래서 나온 말이, 금니를 자랑하려고 이빨을 더 많이 보이게 하기 위하여 ‘도티(도끼)좀 빌려 주어요?,’ 하기도 하고 ‘아이고 머리야!’ 하며 왼손을 앞 이마위로 올려 손목시계 찬 것을 자랑하기도 했단다.
만약 명절의 단대목 장날, 제사상에 오를 건어물을 누가 더 큰 것을 사느냐가 빈부[貧富(빈字가 부字 앞에 온다)]의 형편을 가늠하며 말린 가오리, 대구, 문어 등을 굵직한 것으로 사서 짊어지고 오는 사람의 어깨 위에는 자연히 우쭐대는 힘이 주어진다.
반상의 격차가 높아 결혼을 할 적 에도 반촌(양반촌)사람인가?, 민촌(서민촌)사람인가? 따지는데 선비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양반(東班과西班, 班=파자하면 상서로운 구슬을 나눈다는 뜻, 이조시대의 관료 체제 동반 서반, 그들의 후손이라는 뜻이다)이라는 신분에 국한되어 있으며 평민들을 상인(常人)으로 부르지 않고 상넘으로 부르며 아무리 인격과 학식과 덕망을 겸비해도 선비가 될 수가 없으며 그 총중(叢中)에서도 어려운 한문을 많이 아는 자가 최고이었지만 한일합방이후에는 조선에 신분제도가 없어지니 누구든지 출세를 할 기화가 균등하게 배분이 되는데 초기의 장성들은 군관학교를 나와서 출세를 한 사람들이된다.
내가 군에 있을때 같은 내무반에 천위환이라는 나보다 고참(선임)이 있었는데 하기 좋은 말로 ‘천방지축마골패’라고 놀렸으니 그는 상심(傷心)을 했을 것이고 이 또한 폐습이 아닐 수 없는데, 이 7가지 성을 가진 자를 천성(賤姓)이라고 비하니 성씨로 사람의 귀천을 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들이다.
들은 이야기로 약하고 속이 빈 겨릅대(뼈 색갈인 대마초 줄기의 속)를 천방지축으로 흔들면 부러지니 패한다(天方地軸 麻骨 敗)라는 말이 있는데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자칭 자기의 몇 대 조상이 무슨 벼슬을 한 누구이며 내가 그분의 몇 대 손으로…. 라고 가통을 들먹여 미확인된 조상을 확대지향성으로 삼아 자기의 위상을 높이려는 어리석은 8불출(8삭 동이)도 있고, 확인 불능이니 자기 집은 모두 부자라고 말한다.
17세기에는 7.4%의 양반이 1958년에는 48.6%로 증가했다고 하니 자화자찬 격이며 당(唐)나귀를 타고 머슴에게 고삐를 잡혀야 양반으로 행세를 했고 가장 활동적인 옷과 거리가 먼 장죽(長竹; 긴 담뱃대)을 입에 물고 도포(소매가 커서 물건을 넣고 다님)를 입고 통영(경남에 위치)갓을 쓰는데 말총(horsehair)으로 만들어 자칫하면 망가지는데 노동과는 거리가 멀게 치장을 한 사람들이 행세를 할 때 이었고 비가오더라도 뛰면 아니 되고, 언제나 천천히 걸어야 품격을 갖추는 것이고 ‘양반은 짚불은 안 쪼인다.’라는 말도 있는데, 처음 대하는 사람이라면 상스럽지 않으려고 말끝에 “여쭈어라”라는 말을 삽입 하여 중간에 하인을 통하여 말을 전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던 시절도 있다.
경주김씨 시조 김알지는 금함(金函)에서 나왔다고 하여 김(金), 박씨는 고허촌장 소벌공에게 발견된 박과 같은 알에서 나왔다고 박(朴)인데 신화이지만 그레도 배꼽은 있을 것 이라는 추측이며 역사책의 구지가(龜旨歌)에 보면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아니옷 내여는 구워서 먹을래.”로 되는데 여러 부족들이 왕을 갈망해서 나온 노래이며 머리수(首)에서 온 김수로(金首露)왕이라 칭한다.
고려 중기 문종 9년(1,055)에 ‘성이 없는 사람은 과거볼 자격을 주지 않았다’하는 것을 보면 이때부터 성을 쓰기 시작한 시기로 보며 조선 초기 까지 천인계급에서는 성을 쓰지 않았다고 하며 태조는 신라인 김씨가 권능(權能)으로 보필하여 권(權=저울추, 권세; 권력과 세력으로 통한다)씨성을 하사하여 안동권씨의 시조라고 하며 동국여지스람에 그때 목천(木川)사람들이 자주반란을 일으켜 미워하여 성을 주었다는데 우[소牛(于氏)], 상[코끼리象(尙氏)], 돈[돼지豚(頓氏)], 장[노루獐(張氏)]등으로 고쳤다고 하며 이웃집을 말 할 때 무슨 ‘댁(宅)’이라고 벼슬이름이나 시집오기전의 고향마을 이름에 댁 자만 부치면 누구의 집인지를 알 수 있었으나 비천한집사람들은 택호(宅號)를 갖지 못한다.
이름이 천할수록 오래 산다하여 아이들의 이름을 붙인‘개똥이 엄마’, ‘점백이 아버지’등으로 통하는데 아들을 낳으면 '머슴아이'라고 천명(賤名)으로 부르며 남자는 또 태어나라고 또(又, 또우)자를 써서 또출(又出), 또바위(又岩)등이며, 남자가 더이상 필요가 없으면'끝출[末出]. 끝생[末生]이가 된다.
여자아이도 계집(집에 계시다 에서온 말)아이라고 낮잡아 부르며 그만 낳으라고 끝(末, 끝말)자를 써서 끝남이(末妊; 말임, 아이밸 임), 만약 계집종이라면 들어온 달을 부쳐 1월이면 ‘일월이’, 3월이면 ‘삼월이’가 된다.
내사 들어본 말 중에서 가장 어색한 말은 기억이 잘 안날적에 누가 한 말 “거식이 아들 머식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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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배님 감사합니다
날씨가 너무 더워졌어요
건강챙기시고 행복하세요.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
특이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