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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룸이 밀집한 우리 동네 주택가, 높지 않은 건물과 건물 사이 주차장에는 고요한 암흑이 고여 있었다. 쌀쌀한 밤 날씨였지만 등허리에 축축이 땀이 배어왔다. 태오의 입술에선 달착지근한 유자청의 맛이 풍겼다. 우리 둘의 몸에는 지금 0.001퍼센트의 알코올 도수도 흐르고 있지 않았다. 카페에서 태오는 유자차를, 나는 페퍼민트 허브차를 마셨다. 유자에 성호르몬을 자극하는 성분이 들어있다는 설은 금시초문이었으니 태오가 나를 따라 택시에 올라탄 건 무엇에 홀려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러고 싶었기 때문이리라.(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요일 밤 열한 시쯤 택시를 타고 서울 도심을 가로지를 때면 참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토요일의 끄트머리임에도 거리는 자동차들로 가득했다. 이 시간까지 도로 위를 어기적거리며 교통정체를 유발하는 저 차의 운전자들은 죄다 뭘 하러 기어 나온건지 궁금해졌다. 나 역시 기를 쓰고 기어 나왔다 들어가는 주제에 말이다. 이런 식의 이율배반적 사고방식은 남녀관계에도 종종 적용된다. 예컨대 극장에서 내 손을 잡고 있던 태오가 서둘러 손을 놔버린 데 대한 앙금이 가슴 속에 남아있으면서도, 내가 먼저 그의 손을 잡아버릴 수도 있다는 발상의 전환은 하지 못하는 것이다.
마침 우리가 탄 택시의 뒷자리는, 그의 무릎과 내 무릎을 가까이 붙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비좁았다. 유자가 아니라면 혹시 페퍼민트에 미묘한 성분이 포함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불투명 회색 스타킹에 싸인 내 허벅지가 그의 리바이스 타입원 청바지와 닿을 듯 말 듯 밀착했다. 노골적으로 유혹하려는 뜻은 아니었다. 그 다음에 어떻게 하겠다는 구체적 의도도 없었다. 다만 나라는 여자의 매력이 그에게 아직도 유효한지를, 이렇듯 소심하게 한번 확인해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의 몸이 조금 고통스럽기를 바랐다면 나는 나쁜 여자일까, 불쌍한 여자일까.
택시에서 내려, 어두운 골목 한편의 남의 건물 주차장 뒷마당에서 우리는 부둥켜안았다. 부둥켜안는다, 라는 동사의 어감은 정겹고 또 질퍽하다. 그를 안자, 그의 입술의 보드라움과 그의 하체의 무거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의 윗니와 나의 아랫니가 딱딱 소리를 내며 맞부딪쳤다. 단풍잎 같은 태오의 손이 얇은 반코트 속을 파고 들어왔다. 어디서 멈춰야 하는 거지?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서도 나는 계산하려 애썼다. 쉬운 여자가 되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숄더백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태오가 흠칫 놀라며 내게서 몸을 뗐다. 재인이었다. 나는 전화기를 꺼내어 한 손으로 배터리를 뽑았다. 하재인, 가만두지 않겠어. 기껏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바람 빠진 고무풍선처럼 피시식 죽어 버린 듯했다. 갑자기 태오가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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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꽃이 없었다. 그에게서 받은 첫 번째 선물. 카페 화장실의 세면대 위나 택시 뒷좌석에 오도카니 놓여 있겠다.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 무언가를 스르륵 놓고 오는 건 나의 특기였다. 덜렁이처럼 질질 흘리고 돌아온 것에는 어쩌면 ‘마음’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가 사는 원룸빌라로 우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지금, 집 상태가 어떻더라? 속으로 바삐 더듬어보았다. 남자를 데리고 들어가지 않겠다는 것은, 독립할 때 스스로에게 한 약속이었다. 또한 무엇보다 방이 무척 지저분했다. 이틀째 싱크대에 방치돼 있을 설거짓거리들, 마구 구겨진 채 침대 위에 켜켜이 쌓여 있을 옷가지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우렁각시라도 다녀가지 않았다면 좁디좁은 내 방 안은 피폭된 바그다드 시내를 방불케 할 터였다.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서 끝낼 수밖에. 태오에게 바이바이 손을 흔들고 사뿐사뿐 계단을 올랐다. 일층과 이층 사이 계단참에서 문득 눈앞이 흔들렸다.
그래. 세상에는 깨뜨리기 위해 존재하는 약속도 있는 것이다. 나는 어둠을 향해 돌발적으로 몸을 돌렸다. 저만치 휘적대며 걸어가는 태오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커다랗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2부-선택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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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 집 정말 좋아요.”
신발을 벗자마자 그는 순수한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의 시선을 따라 둘레둘레 눈을 옮겨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작고 좁고 수수하기 그지없는 원룸일 뿐이다. 침대에서 세 걸음 걸으면 싱크대고 싱크대에서 네 걸음 걸으면 화장실이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 나오는 싱글 여성들의 보금자리와는, 대한민국 마포와 그리스 산토리니만큼이나 거리가 멀었다.
“혼자만의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주 들어요. 나도 빨리 독립해야 되는데.”
“지금은, 그럼 부모님이랑?”
5분 전까지 서로의 입술을 격렬하게 탐하던 남녀가 나눌 만한 문답은 아니다. 태오가 조그맣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찬장 한 귀퉁이에서 기적적으로 레드와인을 발견했다. 언젠가 대형할인마트에 갔을 때 카트에 담아두었던, 한 병에 만 원짜리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더라면 크리스털 와인 잔이라도 장만해두는 건데. 아기 곰 푸가 그려진 머그잔에 포도주를 따라 대접하려니 낯이 뜨거웠다.
“엇, 되게 맛있어요.”
“그냥 별로 안 비싼 건데.”
“에이, 나는 그런 거 잘 모르겠더라고요. 별로 안 먹어봐서 그런가, 내 입맛에는 싼 게 더 잘 맞는 것 같아요.”
태오가 서글서글하게 대꾸했다. 어떤 남자와는 만날 때마다 술을 마시게 되고, 어떤 남자와는 만날 때마다 같이 자게 된다. 그리고 만날 때마다 술을 마시고는 같이 자게 되는 남자도 있다. 오늘 밤만은 어떻게든 말똥말똥하게 보내고 싶었다. 술이 깨고 마법이 풀린 후에, 껄끄러운 피해의식에 휘말려 전전긍긍하고 싶지 않았다.
와인은 지나치게 들척지근했다. 나는 그것을 투명한 생수처럼 단숨에 들이켰다. 태오가 모자를 벗고 헝클어진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쓸어 넘겼다. 기다란 팔다리 때문일까, 어떤 동작을 취해도 그에게서는 저녁 해질 무렵 드넓은 체육관에서 홀로 연습하는 발레리노와 같은 우아함과 무심함, 나른함이 배어나왔다. 거부하기 힘든 울림이 가슴 속으로 서서히 번져나갔다. 나는 이 아이가 좋다, 좋다, 좋다. 나는 이 아이에게 끌린다, 끌린다, 끌린다. 그러므로 앞으로 일어나리라 추측되는 일은 모두, 나의 자발적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리라. 솔직하게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파워나 시간 따위가 전부는 아니라는 걸, 남자들은 왜 모를까. 태오는 본능적으로 여자가 원하는 바를 아는 아이였다. 그는 나를 편안하게 빨아들였다. 그와 합쳐져 있는 동안, 내 몸 속에 갇혀있던 또 다른 내가 갸르릉 신음소리를 내면서 부드럽게 휘어진다. 그의 몸 안에서 나는 내 몸을 소스라치듯 느낀다. 싸구려 매트리스가 쉼 없이 삐걱댔다. 마지막 순간 그는 황황히 내게서 떨어져나가 혼자 힘으로 마무리했다. 보통의 한국 남성들에게서 기대하기 힘든 윤리감각이었다.
태오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욕실로 들어갔다. 작고 탄탄하게 올려 붙은 엉덩이가 섹시하다. 나는 키친타월을 뭉텅이로 뽑아 더럽혀진 침대 시트를 꾹꾹 눌러 닦았다. 슬며시 욕실의 바닥상태가 걱정되었다. 정식으로 화장실청소를 한 게 언제인지 가물가물했다. 수돗물 쏟아지는 소리에 이어 변기에 오줌 줄기 떨어지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팬티를 입고 돌아온 태오가 아무렇지도 않게 침대 한가운데 길게 드러누웠다. 내 침대는 싱글 사이즈였다. 위아래로 포개지면 모를까, 아무리 꼭 끌어안고 잔다 해도 성인 남녀 두 명이 숙면을 취하기에는 무리였다.
“이리 와요, 안아 줄게.”
스위트한 목소리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설마 이 비좁은 데서 자고 가겠다는 뜻은 아니겠지? 오오, 갈수록 나는 내가 무서워진다
2부-선택의 시대
“나는 빅맥 먹어야겠다. 이상하지, 술 먹은 담날에는 느끼한 게 당겨요.”
태오의 웃음은 밤이나 아침이나 여전히 해맑았다. 내가 감자프라이를 깨작대며 뜨거운 블랙커피를 입술에 가져다 대는 시늉만 하고 있을 때 빅맥을 뚝딱 해치운 그는 콜라를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심지어 리필까지 받아왔다. 그가 손을 뻗어 내 뺨에 묻은 티끌을 다정히 떼어내 주었다. 어쨌거나 우리는 이제 제법 그럴듯한 연인이 된 것 같다. 비록 어젯밤 한 30여 분간 같이 침대에 누웠다가 그가 잠든 틈을 타 방바닥에 담요를 깔고 자긴 했지만 말이다.
시작하는 연인들은, 일요일 오후에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까? 태오가 손목시계를 보았다.
“집에서 난리 났겠다. 주일 아침에 안 들어왔다고요.”
“으응?”
“식구들이 다 같은 시간에 예배보거든요. 오늘은 일곱 시 예배는 놓쳤고 열한 시까진 가야죠.”
불과 몇 시간 전, 몸과 몸을 붙이고 있던 남자가 갑자기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러 가야 한다니. 정말이지 나는 그에 대해 너무나 모르고 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아직 신실한 믿음은 없지만 부모님에게 이끌려 웬만하면 출석을 하는 편이라고 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남자친구의 종교생활에 대해 간섭할 의지 같은 것은 절대로 없었다. 단지 그를 배웅하고 혼자 걸어 들어오는 골목길이 유독 쓸쓸하게 느껴졌을 뿐이다.
집에 돌아와 핸드폰을 켰다. 켜자마자 문자메시지가 여러 통 쏟아져 들어왔다. 배터리를 빼두었을 때 걸려온 전화번호들이, 캐치콜 서비스에 의해 액정에 순서대로 찍혔다. 재인에게서 온 전화가 두 통, 분당 집에서 온 전화가 일곱 통이었다. 음성메시지도 있었다.
“은수야. 무슨 일이니. 엄마, 경찰에 신고한다. 빨리 연락해라.”
마는 초주검이 된 목소리였다. 가만 생각해 보니 이번 토요일쯤 집에 들르겠다는 약속을 한 것 같았다. 한나절 동안 연락이 안 되었을 뿐인데 이 무슨 난리인가. 내 전화를 받은 엄마는 땅이 꺼져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별일 없는 거냐고 재차 묻더니 “어쨌건 살아있으니 됐다, 됐어”라고 했다. 흡사 유괴당한 아이의 생존을 확인한 분위기였다. “금방 올 거지? 지금 쌀 안친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가야겠지만, 휴우, 귀찮다. 밥벌이를 하며 독립해 사는, 서른 넘은 딸년을 언제까지 걱정하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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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에 들어서는 나를 보자 엄마는 곱게 눈을 흘겼다. 아버지는 화가 덜 풀린 눈치였다. “한심한 짓이나 하고 다니려면 당장 짐 싸서 들어와.” 한심한 짓? 아버지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양심 한쪽이 찔리기도 하면서 괜한 반항심이 솟구쳤다. “엄마가 당장 달려가 보자는 걸 억지로 말렸어. 잘했지?” 어젯밤 내 행적에 대해 뻔히 안다는 듯 오빠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새언니는 ‘나 피곤함’ 이라고 이마에 써 붙인 표정으로 눈인사만 하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말을 연 이틀 시집에서 보내는 셈이니 기분 좋을 리 없겠지. 나는 어색하게 조카 지호를 안아 올렸다. 두어 달 만에 보는 지호는 부쩍 자란 듯했다. 녀석에게서 향긋하고 달콤한 냄새가 풍겼다. 그러나 예쁜 건 길어야 삼십 분이다. 세 살배기답게 온 집안을 도도도 뛰어다니고 꺅꺅 소리질러대는 걸 보면서 정신이 하나도 없어졌다.
식구들 모두 식탁 앞에 모여 앉았다. 오늘 아침 맥도날드 테이블의 나와, 이 가족식탁의 나. 그 사이의 거리를 헤아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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