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님의 달 성모 성월을 맞이하여 여러분 한 분 한 분 마음 안에 성모님의 따뜻한 사랑이 깃들이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2001년 3월 25일 고(故) 정주영 회장의 영결식이 서울 중앙병원에서 있었습니다.
7000여명의 추모객이 영결식장을 메웠고, 북한에서까지 조문 사절단을 보내 왔다고 합니다.
영결식이 거행되던 중 살아 생전에 그분이 남긴 말들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마치 요즘 텔레비전 광고에 정주영 회장님이 등장하는 것처럼 그분의 모습을 보여 주는 시간이었던 것이지요.
그 장면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한 기자가 "몇 세까지 살고 싶으십니까?"라고 묻자, 환하게 웃으면서
"백오십 세까지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생(生)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여주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대답을 들으면서 저는 몇 년 전 소떼를 이끌고 북한을 방문하던 그분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주변 사람의 부축을 받아가며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그때 '회장님은 하루하루 가는 것이 얼마나 아까울까?
그 많은 재산과 권력을 뒤로한 채,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하루하루가 빠르고 아쉬울까?'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물론 당시나, 또 돌아가시기 전이나 그분의 심경이 어떠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백오십 세까지만 살았으면…'이라고 대답하신 것으로 보아 모든 것이 아쉬웠을 것 같습니다.
자신의 재산으로 '시간'을 살 수만 있다면 자신의 전 재산을 주고라도 '시간'을 사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한번쯤 가져보는 소망일 것입니다.
아직 어린 여러분에게는 조금 거리가 먼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불로장생의 꿈은 인간 모두의 마음 한켠에 담겨진 꿈일 것입니다.
저는 고(故) 정주영 회장의 죽음을 바라보며,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무엇에 마음을 두면서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물론 정주영 회장님의 삶에 대한 평가를 하자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 부분은 역사에 맡기고).
과연 그분이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자신있게 말하며 돌아가셨을까? 하는 질문을 하면서
(누릴 수 있는 것 다 누리고, 해볼 것 다 해보았으니까 괜찮다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살았으니
이제 하느님께 돌아가도 괜찮다는 의미에서의 죽어도 여한이 없다)
우리들 각자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 한번쯤 되돌아 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고인이 우리에게 남기고 가신 가장 좋은 선물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정주영 회장님에게 죽음의 그림자는 분명 장애물이었고, 걸림돌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 장애물을 뛰어넘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그에게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있었고, 그에 대한 의문점이 생전에 풀렸다고 한다면
죽음이 그에게는 결코 걸림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관문이 오히려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디딤돌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이렇게 다를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관문의 디딤돌이고, 다른 하나는 이 세상의 삶이 끝장나는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바로 이 돌, 즉 걸림돌과 디딤돌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우리 삶 안에 존재하는 걸림돌과 디딤돌에 대하여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돌'하면 생각나는 성경의 인물이 한 분 있는데 누군지 아십니까?
'반석'이라는 의미를 가진 베드로(Petrus)입니다. 베드로는 마태오 복음 16장 13절에서 28절까지의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당신이 누구인지 제자들에게 묻자, 예수님의 신원을 정확히 말한 제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선언하시며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이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의 길을 가로막았다는 이유에서입니다.
베드로 안에는 사탄의 모습, 즉 장애물의 모습과 반석인 디딤돌의 모습이 모두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의 제자들 중 가장 심한 말을 들었던 베드로, 그리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면서 스승을 배반했던 베드로,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잘못을 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스승이신 예수님께 다시 돌아갔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결정적인 약점, 스승을 배반했다는 커다란 약점, 커다란 걸림돌을 반석인 디딤돌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배반한 베드로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십니다.
약점투성이인 그를 통해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결정적으로 배반한 또 다른 제자를 알고 있습니다. 바로 유다입니다.
두 명 다 예수님의 제자였고, 두 명 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배반한 인물들입니다. 하지만 둘은 달랐습니다.
유다는 배반한 후 베드로처럼 스승이신 예수님께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유다는 스승이신 예수님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며 영특한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개 무식한 사람들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유다가 조금은 똑똑했나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돈을 관리하는 일을 맡겼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는 똑똑하다기보다는 잔머리를 잘 굴리는 자였던 것입니다.
잔꾀에 능통한 그는 자신이 스승을 팔아넘긴다 하더라도 스승은 분명히 풀려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지켜본 예수님, 죽은 사람을 낫게 하고 병자를 고쳐주시는 예수님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거뜬히 풀려나고도 남았던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이 고자질을 한다 하더라도 스승에게는 아무런 해가 없을 것이고,
오히려 자신의 꾀로 말미암아 은전 서른 닢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스승은 그의 기대를 저버리고 자신이 가야할 길을 가십니다.
십자가의 길, 스승의 죽음을 목격한 그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
만일 그가 자비 지극하신 아버지의 사랑을, 어떠한 잘못이라도 용서해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알았더라면
주님께 돌아가 용서를 청할 수 있었을텐데... 유다는 그것을 이겨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걸림돌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영원한 죽음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유다, 겉으로 예수님을 배반했던 점에서는 같았지만 내용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우리들의 삶 안에 다가오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통, 넘어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에 다가오는 여러 가지 사건들 역시 걸림돌이 될 수도, 디딤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처해 있는 나의 모든 상황들, 가정환경, 엄마 아빠의 불화, 집안에 닥친 엄청난 시련, 불안정한 교육제도,
여러분을 곤경과 역경에 빠트리고 좌절하게 만드는 것들이 그 자체로는 걸림돌도 디딤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걸림돌이 될 수도 있고 디딤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돌들을 디딤돌로 만들 수 있는 소년 소녀 레지오 단원들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