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부요한 보물
고린도후서 4:7-12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2주일이다. 가족예배를 드린다.
지난 주일예배 시간에 몹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2층에서 무얼하나 궁금했는데, 카페에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교회학교에서 신약성경 골든벨을 했다.
처음에는 꽤 여럿이 판을 벌인 듯했다. 그런데 결국 고학년 남학생 3사람의 3파전이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두고 신과 흥을 벌인 아이들이 참 귀하다. 애석한 차점자들은 그날 상을 주었고, 1등상은 오늘 시상식을 한다.
나도 그런 시절이 기억에 남는다. 평창대화감리교회에 다니던 5학년 때 성경퀴즈대회를 했다. 결국 두 사람이 결승전에 올랐다. 남녀 대결이었다. 얼마나 막상막하였는지 준비된 성경문제가 다 떨어졌다고 한다.
마지막 퀴즈라며 선생님이 즉흥적으로 문제를 냈다. “교회 정문으로 들러가면 예배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몇 개인가요?” 무조건 먼저 손을 들었다. “7개요” 그냥 때려 맞췄다. 분하게 1등을 놓친 그 여자 친구 이름은 정혜영인데, 나중에 듣자니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다고 한다. 조금 미안하였다.
나중에 계단을 올라갈 때면 은연중 계단 수를 헤아리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그런 영향이 스며들었을까. 싶다.
아이들도 교회에서 경험이 평생 그의 삶에 스며들 것이다. 그러니 열심히 판을 벌여 주고, 칭찬하고, 상을 주고, 자랑하고, 서로 사랑하면 좋겠다. 그렇게 교회를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1)
바울은 자신의 사도 직분을 변호한다. 또한 같은 이치로 그리스도인의 인생을 격려한다. 그의 직분은 복음, 곧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하는 사명인데, 진리를 전한다는 기쁨과 자부심으로 가득하다.
바울에게 그의 직분이 아름다운 것은 희망을 전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희망의 전파자였다. 사도 바울은 대단한 낙관주의자였다. 만약 자기의 생각과 판단에만 의존한다면 그 감정은 쉽게 깨질 수밖에 없다. 믿는 구석이 자기 자신의 신념뿐이라면 얼마나 허술한가?
바울은 인생을 질그릇으로 비유한다. 곧 사람은 흙을 구워 만든 항아리와 같은 존재라고 비유한다. 질그릇은 쉽게 금이 가고 깨지기 쉽다. 인간의 약함을 드러내는 아주 적절한 상징이다.
언젠가 옹기를 수집하는 분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가장 값싸고 서민적인 그릇인 옹기는 쉽게 이가 깨어지고, 손잡이가 떨어져 나가기 때문에 사람들이 별로 값어치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한다. 게다가 옹기그릇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쉽게 버리고, 다시 바꾸고, 부수기 때문에 오래 보존된 옹기가 없다는 것이다. 그 결과 청자와 백자는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따지지만, 옹기는 4-50년 만 되면 그만큼 골동품적인 가치를 인정한다고 하더라. 역설이다.
바울은 깨어지기 쉬운, 보잘 것없는 질그릇 같은 인간을 향해 격려한다. 비록 우리는 질그릇처럼 연약하지만, 그 능력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7).
삶의 한계상황, 위기와 위협, 고난과 아픔 중에도 당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깨어져, 버림받기 쉬운 질그릇과 같지만 그 안에 보배가 담겨 있다고 말한다.
그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다. 비록 질그릇처럼 연약하나 ‘예수의 생명’이란 영원한 보배를 담았다는 것이다. 보배가 담긴 질그릇은 결코 버림받지 않는 법이다. 바울은 참 보배야말로 내 몸에 간직된 예수의 죽음과 예수의 생명임을 강조한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10).
2)
세상의 으뜸 지혜인 잠언은 충고한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이시니라”(잠 16:9).
사람의 계획은 내 마음과 의지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누구든 내 마음대로 살지 못한다. 쉽게 병들고, 갑자기 상하고, 어쩌다 사고를 겪는 위험한 세상이 되었다. 건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무너지고, 멀쩡한 회사도 쉽게 흔들거린다. 그래서 사람의 몸이든, 가정이든, 공동체든 늘 자가 점검하고, 개선해 나가야 한다.
바울은 위기를 겪는 사람을 향해 권면한다. 누구나 온전한 생명을 소망한다면 너 자신이 질그릇과 같은 존재임을 인정하라. 생명은 내게 주어진 단 한 번의 기회이니, 만약 네 인생의 질그릇을 인정한다면 무엇으로 그 질그릇에 채울 것인지 고민하라고 한다.
바울은 질그릇 비유를 하면서 겉모습만 보고 평가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담았느냐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겉사람과 속사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누구나 겉만 있지 않고, 속도 존재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외적 본성과 내적 본성이 있다. 겉의 모습이 있다면, 속의 모습도 있는 법이다. 성경의 표현대로 하면 낡아지는 겉사람과 새로워지는 속사람을 뜻한다.
성경은 말한다. 그러므로 눈앞에 보이는 것에 속지 말라. 겉사람만 고집한다면 그 순간 너머의 풍성한 생명을 지닐 수 없다. 이 비유는 진정한 속사람의 부요함이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다.
당장 보이지 않으나 영원한 소유를 얻기 위해 살라. 예수님은 풍성한 생명, 영원한 생명을 말씀하신다.
바울은 말한다. 내 눈앞의 위기와 현실은 어느새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위기도, 슬픔도, 두려움에도 너무 쉽게 좌절하지 말라. 겉사람은 낡아지지만, 속사람은 나날이 새롭다.
여러분은 그런 진정한 속사람의 부요함을 사모하기를 바란다. 질그릇에 보배를 담은, 그리스도로 충만한, 그리스도로 부요한 그런 삶을 채우는 진정한 속사람으로 자라나기를 바란다.
3)
마를로 모간은 <무탄트>에서 이렇게 충고한다. “평생을 사는 동안에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의 영원한 본질은 무엇인가를 발견하는데 우리가 실제로 소비하는 시간은 너무나 적다.”
막 감옥에 들어 온 무기수가 있었다. 어둡고 좁은 공간에 주어진 그는 교도소장에게 부탁하였다. 교도소 마당 귀퉁이에 밭을 일굴 수 있게 해달라고 여러 번 청원한 끝에 마침내 허락받았다. 그는 해마다 씨앗을 뿌렸다. 양파를 심었고, 장미도 심었고, 한 해 두 해 정성을 기울였다. 밭을 가꾸며 자기 마음을 돌보았다. 그리고 27년이 지난 후에 석방되었다. 1993년에는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하였다. 넬슨 만델라 이야기이다. 만델라는 부서지기 쉬운 자기 질그릇 안에 보물을 품은 사람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요하고, 풍성한 은총을 누리시길 원하신다. 그러니 내 안에 보물을 채우기를 소망하라. 보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14).
바울의 삶은 본보기이다. 그의 삶은 자주 도전받고, 박해를 당했으며, 죽음의 위협을 받았다. 마치 연약하고 보잘 것없는 모습이 질그릇과 같았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한다(16)고 증거한다.
그런 산 경험을 통해 바울은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참 생명을 택하라고 전한다. 모름지기 사도는 예수의 생명을 전하기 위해 늘 자기 몸을 죽음에 맡기는 사람이다. 그는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분이 그와 모든 사람을 다시 살리실 줄 믿는다.
그러니 네가 마주한 현실이 전부가 아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 너머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라! 어려움을 겪는 현실이 전부가 아니니, 눈에 보이는 현상 너머 보이지 않는 것을 보라는 것이다.
바울은 묻는다. 거짓 생명, 썩을 생명, 사라질 생명을 택할 것인가? 참 생명, 진실한 생명, 영원한 생명을 택할 것인가? 참 생명을 택하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온전한 생명, 풍성한 생명이 있다. 예수님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보물이고, 내 인생의 부요한 보물이다. 우리 어린이들과 어른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은총이 나로 하여금 참 생명을 사랑하고, 내 질그릇 안에 부요한 보물을 채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