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순 金弼淳(1878 ~ 1919)】「독립운동가 주치의, 서간도 지역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총력」
1878년 6월 25일 황해도 장연군(長淵郡) 대구면(大救面) 송천리(松川里)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김필순(金弼順)을 사용하였다. 부친은 김응기(金應淇, 聖瞻)이고 모친은 안성은(安聖恩)이며, 남동생은 인순(仁淳), 여동생은 순애(淳愛), 필례(弼禮)이다. 1891년 11월 정경순(鄭敬淳)과 결혼하였다. 한편 독립운동가 김규식(金奎植)은 처남이고, 김마리아(金瑪利亞)는 조카이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1886년 언더우드를 만난 이후 1894년 세례를 받았다. 1895년 언더우드의 도움으로 배재학당에서 수학하였고, 1899년 제중원에 입학하였다. 1908년 6월 3일 김희영(金熙榮)·박서양(朴瑞陽)·신창희(申昌熙)·주현칙(朱賢則)·홍석후(洪錫厚)·홍종은(洪鍾殷)과 함께 세브란스의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였다. 세브란스의학교에 재학하면서 황성기독교청년회와 상동교회를 오가며 활동하였다.
도산 안창호와 의형제를 맺고 1907년 신민회 조직에 참여하였으며, 세브란스병원에 재직하면서 자택을 제공하여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후원하였다. 특히 김형제상회를 운영하며 안창호에게 1907년 도쿄(東京)에서 열리는 박람회의 참여경비를 제공했고, 상회의 한 층을 사무실로 제공하기도 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이동녕(李東寧)·전병현(全秉鉉) 등과 함께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힘썼다. 또한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치치하얼(齊齊哈爾)에 북쪽에 있는 제중원이라는 의미로 ‘북제진료소(北濟診療所)’라는 병원을 열어 부상당한 독립군을 치료하였다. 그리고 내몽고에 수십만 평의 토지를 사들여 100여 호의 한인들을 이주시키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항일 무장독립운동의 기지로 만들었다. 이후 의료업에 종사하면서 독립운동을 이어오던 도중에 1919년 9월 1일 일본인 조수에 의해 독살당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