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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성지순례 6일차
(2023.3.21)
47. 명동주교좌성당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 대성당은
명실 공히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이자 심장이다.
이곳은 한국 교회 공동체가 처음으로 탄생한 곳이자
여러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진 곳이기도 하다.
1898년 5월 29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조선 교구장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역사적인 축성식을 가졌다.
기공 후 무려 12년 만에 완공된 명동 성당은
순수한 고딕 양식 건물로 그 문화적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1977년 11월 22일 사적 제258호로 지정된 명동 성당이 준공된 후
그 지하 묘소에는 1900년부터 기해 · 병인박해 당시
믿음을 지킨 순교자들의 유해를 안치해 왔다.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첫 입국해
기해년 1839년 9월 12일 순교한 성 앵베르 주교와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는 새남터에서 군문효수의 형을 받은 후
한강변 모래밭에 매장되었다.
순교한 지 약 20일 후 7-8명의 신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세 순교자의 유해를 거두어
지금의 서강 대학교가 소재한 노고산에 4년간 매장했다.
그 후 유해는 1843년에 삼성산으로 이장되었다가
1901년에 이곳으로 모셔졌다.
시복을 앞둔 1924년에 무덤이 다시 발굴되어 이들의 유해는
대부분 로마와 파리외방 전교회 등으로 분배되고
이곳에는 현재 그 일부만이 모셔져 있다.
이들 성인 외에도 지하 묘소에는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1805-1839년),
성 김성우 안토니오(1795-1841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 그리고 이 에메렌시아(?-1839년)와
무명 순교자(?-1839년) 1명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또 병인박해 때인 1866년 3월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성 남종삼 요한과 홍봉주 토마스의 시신은 왜고개에 매장되었다가
절두산 순교 기념관 성해실로 모셔지기 전 1909년
이곳 지하 묘소에 잠시 머물러 있기도 했다.
▲ 왼편으로 1889년에 완공된 주교관이 보인다.
명동성당 신축 공사가 시작되기 전 모습이다(좌)
명동성당 건립에 앞서 1888년 성당 구내에 처음으로 세워진 인쇄소 건물로,
경당 겸 사제 숙소로 쓰였다(우)
48. 한국 천주교회 창립 터 - 수표교 인근
한국 천주교회는 중국 북경에서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세례성사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베드로, 1756-1801년)이
1784년 겨울, 수표교(水標橋) 인근 이벽(세례자 요한, 1754-1785년)의 집에서
이벽과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정약용(사도 요한) 등에게
세례식을 베풀면서 시작되었다.
이로써 평신도에 의한 자발적인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그 해 가을, 서울 명례방에 살던 통역관 김범우는
이들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에 입교하고
자신의 집에서 교회 예절 거행과 교리 강좌를 열게 된다.
그럼으로써 수도 한복판에 겨레 구원 성업의 터전을 닦았고 바로 이곳에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산 역사인 명동 대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는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적 시작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
서울시의 협조를 얻어 2011년 8월 28일 현 서울시 종로구 청계천로 105 건물 앞
삼일교와 수표교 사이 청계천변 인도에 기념표석을 건립하였다.
1784년 당시 이벽의 집이 서울 수표교, 현재의 서울시 중구 수표동 43번지와
종로구 관수동 152번지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는
정약용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의 기록에 근거해
그 근처에 기념표석을 건립한 것이다.
49. 김범우집터
■ 명례방 공동체와 명동 대성당
100년 전인 1898년 5월 29일.
서울 남부 명례방(지금의 명동) 언덕 위에 세워진
명동 대성당(사적 제 258호)이 축성된 날이다.
당시 대성당의 건립은 지난 1세기 동안 박해를 받아 온 한국 천주교가
완전히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뿐만 아니라 '뾰족집'의 상징인 종탑은 이후 신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한국인들에게 평화의 의미로 이해되어 왔으며,
근래에 들어서는 민주화의 요람이요
억압받는 민중들이 해탈을 염원하는 장소로 여겨져 왔다.
바로 이곳의 복음사는 200여 년 전에 형성된 신앙 공동체로부터 시작된다.
1784년 봄 이승훈(베드로)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그 해 겨울,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세례자 요한)의 집에서 형성된 신앙 공동체가
곧 명례방으로 이전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대성당 서쪽에 자리잡고 있던 명례방 마을에는
당시 김범우(토마스)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이벽의 집이 비좁아 집회 장소로 적당하지 않자
자신의 집을 집회 장소로 제공하였다.
50. 좌포도청터
좌포도청터 입니다.
조선시대 한양과 인근지역의 방범과 치안을 담당하던 기관입니다.
그러기에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박해의 역사 살아있는 장소입니다.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 병인박해 등의 역사가
벽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치는 종로3가역 9번출구앞입니다
종로성당
1801년 시작된 신유박해를 시작으로
조선 왕조의 근간인 성리학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한 지배층의 탄압으로
천주교 교인들은 줄줄이 처형되었습니다.
특히 천주교인들과 외국인사제들은 성 안의 좌우 포도청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했고 처형되었는데
순교한 이들을 기념하는 성당이 종로성당입니다.
현재 아이러니하게도 성리학의 근본이라 할수있는
종묘와 종로성당이 나란히 서있습니다.
서울대교구는 2013년 2월 28일 서울 좌 · 우 포도청을 관할구역에 둔
종로성당을 포도청 순례지 성당으로 지정했습니다.
51. 광화문 124위 시복터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북측광장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 집전으로 이곳 광화문 광장에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이 열렸습니다.
52. 형조터
서울시 종로구 세종대로 175 세종문화회관 앞 바닥돌
광화문 앞은 조선시대 육조거리가 위치했던 곳입니다.
형조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행정기관
6조(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중 하나로
법률의 제정과 시행을 맡은 기관이었습니다.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명례방 집회(김범우의 집) 참석자들이 형조로 압송되었을때부터
이곳에서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문초가 시작되었습니다.
형조(刑曹)는 한성부 서부 적선방(積善坊) 에 있으며,
현재의 종로구 세종로 81번지 3호 (세종문화회관자리)에 있었다.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많은 천주교인들이 형조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다.
그 시작은 정조가 즉위한 지 9년째 되던 1785년에 발생한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신자들이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서 집회를 갖던 중,
형조의 금리들에게 발각되어 형조로 압송된 사건이었다.
이후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최필공 토마스, 최필제 베드로, 윤운혜 루치아,
정철상 가롤로 등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고, 김천애 안드레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윤지헌 프란치스코 등은 전주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신문을 받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남명혁 다미아노, 김효임 골롬바,
김효주 아네스,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 등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전장운 요한, 최형 베드로 성인 등도 형조를 거쳐 갔다.
형조 터 표시는 5호선 광화문역 세종문화회관에서
세종로공원 쪽 도로 바닥에 매입되어 있다.
53. 의금부 터
서울시 종로구 종로 47 (종각역1번출구 SC은행 본점 앞 화단)
의금부(義禁府)는 조선 시대에 중대한 범죄를 다루던 사법 기관입니다.
천주교 박해시기, 천주교 신자들 중 중죄인, 즉 주교와 신부, 평신도 지도자들은
임금의 특별한 명령으로 의금부로 압송되어 신문을 받았다.
박해 당시, 이승훈(베드로, 1756-1801),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1759-1801),
황사영(알렉시오, 1775-1801년), 조동섬 유스티노(1738∼1830) 등
많은 천주교 신자가 의금부에서 고초를 겪었고
대부분 이곳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위치는 지하철 1호선 종각역 1번출구 우측 화단에 표석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54. 전옥서 터
서울시 종로구 청계천로 41 (1호선 종각역 6번출구 화단)
전옥서는 형조 아래에서 감옥과 죄수를 관리하던 관서입니다.
미결수를 구류하는 곳으로 형조에서 심문을 받고
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전옥서에 구금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에 죄인을 수감하였던 감옥으로 문종 때 전옥서로 개칭하였다.
전옥서는 감옥과 죄인에 관한 사무를 관장했던 관서였다.
박해시기 많은 천주교인들이 형조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고,
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전옥서에 수감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유관검 등이
형조에서 의금부로 이송되었다가 전주에서 참수되었고,
강완숙 골롬바, 최필제 베드로, 김현우 마태오 등은
형조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서소문에서 순교하였다.
기해박해 때에는 남명혁 다미아노 성인과 정정혜 엘리사벳 성녀가
형조에서 심문을 받은 후 참수되었고,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인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은
의금부에서 형조로 이송되어 처형될 때까지 전옥서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이호영 베드로 성인은 4개월 동안 전옥서에 갇혀 있다가 옥사하였다.
병인박해 때에도 많은 순교자들이 전옥서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전장운 요한 성인과 최형 베드로 성인 등은 의금부에서 신문을 받은 후
형조로 이송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서소문밖에서 참수되었다.
55. 우포도청 터
서울시 종로구 종로6 (광화문 우체국 앞 화단)
포도청은 조선시대의 경찰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좌포도청, 우포도청으로 한성부를 나뉘어 관할하였습니다.
좌·우포도청은 조선 중종 때 인 16세기 초
서울과 인근 지역의 포도와 순라를 담당하도록 설치한 기관으로,
임금 거동시의 호위를 맡거나
유언비어 유포, 위조 엽전 제조, 도박, 밀주 행위 등을 단속하였다.
포도청은 이후 350여 년간 존속되다가 갑오개혁 때인
1894년 7월에 폐지되었으며, 이후 경무청으로 개편 되었다.
신자들에 대한 교수형이나 백지사형에 의한 처형은
주로 포도청의 옥에서 이루어졌다.
한국 성인 103위 가운데서도 23명이나 이곳에서 옥사했다.
즉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수록되어 있는 <순교자 일람표>에 따르면,
좌·우포도청의 옥에서 교수형이나 백지사형을 받아 순교한 신자들의 수가
형장에서 참수형이나 효수형을 받아 순교한 신자들보다 훨씬 많았다.
56. 경기감영 터
서울시 종로구 새문안로9 적십자병원 정문 옆 (서대문역 4번출구)
경기도 도청이라 할 수 있는 경기감영은 조선시대 외관(外官)의 하나로서
경기감사 또는 경기관찰사가 있던 관아입니다.
경기지방의 신자들은 서대문밖 반송방에 위치한 경기감영으로 이송되어
형벌과 문초를 받았습니다.
57. 서소문밖네거리순교성지
◆서소문 밖 - 최대의 순교 성지
서소문 밖은 바로 임금의 궁성이 있는 한양의 공식 처형지였다.
창업이래 조선에서는 갖가지 모반 사건과 범죄, 정변 등으로
수많은 죄인들과 억울한 사람들을 처형하였다.
사형수는 크게 모반죄와 일반 범죄로 나뉘어졌는데,
그중 모반죄의 경우는 형장이 일정치 않았지만
나머지 사형수들은 주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형이 집행되었다.
"서경"에서 말한
"형장은 사직단 우측에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따른 것이다.
서소문 밖 형장은 현재 서소문로와 의주로가 교차하는
서소문 공원 인근에 위치해 있었다.
경복궁에서 바라볼 때는 이곳이 바로 사직단 우측이었기 때문이다.
또 한양의 성문 밖이란 점도 있었고,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이었으므로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줄 수 있는 효과도 있었으며,
최종 판결을 내리는 형조나 의금부와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형장으로는 아주 적격이었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 이래 서소문 밖은
가장 먼저, 가장 많은 신자들이 처형된 순교터가 되었다.
그들은 포도청으로 끌려가 1차로 문초를 당하거나 형벌을 받고
형조나 의금부로 이송되어 판결을 받았다.
그런 다음 형조의 옥인 전옥서(지금의 광화문 사거리 동쪽 서린동 소재)에
갇혀 있다가 사령들에 의해 끌려 나와 형장으로 향하게 되었다.
"처형이 결정된 신자들은 옥에서 끌려 나와
수레 한가운데 세워진 십자가에 매달렸다.
십자가의 높이는 여섯 자 정도로,
신자들은 양팔과 머리칼만 잡아 매인 채 발은 발판 위에 놓여지게 된다.
수레가 광화문통을 옆으로 지나 서소문에 이르면
그 다음은 가파른 비탈길이다.
이 때 사령들은 신자의 발이 놓여져 있는 발판을 빼내고
소를 채찍질하여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달리게 했다.
수레는 무섭게 흔들리고 신자의 몸은
머리칼과 팔만이 십자가에 매달린 채 고통을 받게 된다.
현장에 이르면 옷을 벗기고 꿇어 앉힌 뒤
턱 밑에 나무 토막을 받쳐 놓고 목을 잘랐다."
(달래, [한국 천주교회사], 서설)
1984년 이 땅에는 103위 순교 성인의 탄생이라는
세계 교회사상 드문 하느님의 역사가 나타났다.
순교자들의 피로 세운 신앙의 터는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의 가슴속에 굳건히 살아 있다.
이들 103위 순교 성인들 중 44명의 성인 성녀와 함께
수많은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한국 최대의 순교지가 바로 서소문 밖 네거리이다.
서소문 밖에서의 순교사는 대략 세 단계로 나뉘어지는데,
첫 단계는 신유박해 초기부터 지도층 신자들을 대상으로 시작되었다.
그 결과 1801년 2월 26일에는 첫 순교자가 서소문 밖에서 탄생하였다.
한국 교회의 반석인 이승훈(베드로)과 명도회의 초대 회장인
정약종(아우구스티노) 등 6명이 순교한 것이다.
그로부터 석 달 뒤에는 여회장 강완숙(골롬바) 등 남녀 신자 9명이 순교하였고,
10월과 11월에는 황사영(알렉산델)의 '백서' 사건과 관련하여
황사영, 현계흠, 황심(토마스) 등 5명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이렇게 서소문 밖의 작은 개천가에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진 뒤에야 박해는 막을 내렸다.
두 번째 단계는 기해박해 때로,
1839년 4월 12일에 성 남명혁(다미아노) 등 5명과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던 성 김아기(아가다) 등 4명이 이곳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이어 6월 이후에도 계속 순교자가 탄생하였으며,
8월 15일에는 성 정하상(바오로)과 유진길(아우구스티노)이
다시 이곳에서 참수되었다.
이때 조선 교회의 지도자요 밀사 역할을 하던 정하상은
미리 체포될 것을 예상하고
"상제상서"(上帝相書)를 작성하여 품안에 지니고 있었는데,
이를 조정 관리들이 발견해 냄으로써
자연스럽게 '천주교가 진교(眞敎)'라는 호교론이 알려지게 되었으나,
박해로 눈이 먼 그들은 이를 묵살해 버리고 말았다.
기해박해 때의 처형은 11월 24일에 성 정정혜(바르바라) 등 7명이
순교의 화관을 받은 뒤에야 끝나게 되었다.
세 번째의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사람은
남종삼 성인 등 3명으로 나타난다.
전국적으로 가해진 대박해임에도 이곳에서 순교한 신자가 적은 이유는,
아무 때 아무 곳에서나 신자들을 체포하거나 투옥하고 처형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기록에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이름 모를 은화(隱花, 숨은 꽃)들이 서소문 밖의 형장에서
아무도 모르게 순교의 영광을 바쳤으리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58. 중림동약현성당(藥峴聖堂)
약현이란 만리동에서 서울역으로 넘어오는 곳에 있는 고개 이름인데
옛날에는 이곳에 약초를 재배하는 밭이 많았으므로
'약초밭이 있는 고개'라는 뜻으로 '약전현(藥田峴)'이라 불렀고
이를 줄여 '약현'이라 하였는데 점차 고개 부근의 지명으로 쓰였다고 한다.
우리의 순교자들은 서소문 밖 형장에서
이렇듯 잔인한 대우와 형벌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 첫 순교자들로부터 80여 년 뒤인 1887년 블랑 주교는
이곳 순화동의 수렛골에 교리 강습소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공소가 되고 4년 뒤에는 서울에서 두 번째 본당인
약현 본당(현 중림동 본당)으로 발전하였으며,
1893년에는 약현 성당(사적 제 252호)이 완공되었다.
이는 1898년에 완공된 명동 성당(옛 종현 성당: 첫 번째 본당)보다 6년 앞선 것으로
1892년 한국교회 최초의 서양식 벽돌 건축물로 완공되었다.
59. 노고산성지
젊은이들의 거리 신촌.
이곳에는 해발고도 106m의 그리 높지 않은 산,
노고산이 있다.
바로 서강대학교가 자리한 곳이다.
예수회가 설립한 서강대학교는
교회의 정신을 바탕으로 젊은이들을 양성해온 터전이다.
서강대학교 입구에서 왼쪽 길을 들어서니 등하교하는 학생들 왼편으로
서강대 가브리엘관 앞의 작은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작은 정원처럼 보이는 이 공간에 서 있는
3개의 조각에는 성직자 3명의 얼굴이 새겨져있다.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 성 모방 베드로 신부,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
서강대가 예수회에서 설립한 학교이니
예수회 출신의 성직자인가 하는 생각도 할 수 있지만,
파리외방전교회 출신인 이 3명의 성직자들은
예수회와도, 서강대와도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들이다.
바로 170여년 전 우리나라 땅에 천주교 박해가 극심하던 시기,
우리나라의 신자들을 돌보고자 찾아온 선교사들이다.
■ 신자들을 사랑한 세 명의 선교사
서강대학교가 세워지기 120여 년 전,
노고산에 이 성인들이 묻혔다.
조선대목구 제2대 교구장으로서
우리 땅의 신자들이 처음으로 맞이한 앵베르 주교,
앵베르 주교보다 앞서 박해 중인
조선의 신자들을 돌보던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
우리가 103위 한국성인호칭기도 중에 범라우렌시오,
나 베드로, 정 야고보라고 부르며 전구를 청하는 성인들이다.
3분의 성인을 처음 안장한 곳이 바로 이 노고산이었다.
성인들의 유해는 4년 동안 노고산에 묻혀있다
성인들의 유해를 수습한 신자 중 한 명인
박 바오로가 자기 집안의 선산인 삼성산에 이장했다.
성인들의 유해는 1901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겼다가
명동 성당 지하 묘지에 안장됐고,
현재는 절두산순교성지 지하 성해실에 모셔져 있다.
▲서울대교구 노고산성지에 있는
성 앵베르 주교(맨 왼쪽)와 성 모방 신부(가운데), 성 샤스탕 신부의 현양비.
서울특별시 마포구 서강대학교 캠퍼스 내 자리잡은 성지는
새남터에서 순교한 세 성인의 유해가 4년 동안 안장됐으며,
이밖에도 많은 순교자들의 유해가 묻혔던 곳이다.
노고산성지를 끝으로 순례를 마무리 지으면서 점심 약속장소로 이동했다.
제주에 한 달 살이하러 오셨던 황모니카 부부와 좋은 인연을 갖고 있었다.
당시 우리집도 방문하고 함께 식사도 했는데,
서울에 오면 꼭 한번 만나자고 하셔서 오늘 일정을 빨리 마치고
함께 점심식사를 하기위해 위해서다.
홍대근처 일식점인데 손님으로 가득차 있었다.
회사근무 중이신데도 안토니오 형제님은 시간을 내어 주신 것도 고마운데,
순례가 끝나 홀가분하게 마시고 싶었던 마음을 아시고
술 한잔 같이 하는 배려도 해 주셨다.
두 분 부부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이로써 국내성지 순례도 끝이났다.
처음 시작할 때는 마칠 수 있을까 걱정을 했는데
작년 대림시기, 그리고 사순시기동안 은총을 많이 받은 것 같다.
특히 그립고 고마운 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이제 차분히 남은 사순시기 잘 보내고 기쁜 부활을 맞을 준비를 해야겠다.
▼ 2023년 6월 23일 목포성지 산정동 성당에서
성지순례 축복장 수여식이 있었다.
참석하고 싶었지만 여러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해
본당으로 전달된 주교님 축복장을 받았다.
아내 바울리나가 아주 기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