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올인합시다
- 김혜경-
얼마 전 친구는 아내가 자녀교육에 올인한 듯하다며 애꿎은 술만 들이키는 것을 보았다. 아이들이 몇 학년이냐고 물었더니 큰애는 5학년이고 작은애는 3학년이라고 했다. 한 달에 두 아이에게 드는 학비는 150만 원 정도이고, 아내의 생활은 대부분 두 아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남편으로서 아내의 올인이 아무래도 비정상적인 것 같아 염려스럽다는 취지에서 말을 했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주변에서 자녀?·?남편?·?친구에게 올인했다가 자녀가 성장해 부모 곁을 떠나거나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거나 친구가 등을 돌려 상처받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본다. 최근에는 어느 젊은 부부가 게임에 올인해 어린 아기를 죽게 만든 사건도 있었다. 이런 슬픈 올인 외에도 발전을 위한 올인도 있다. 자기가 하고 싶어하는 일, 좋아하는 일에 올인했다가 직업으로 성공하는 예가 그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 지금 하는 일에 올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일도 성공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은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이 예수님께 올인하는 장면을 이야기하고 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집도 부모 형제도 자녀도 땅도 모두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대가로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았다.
내가 세상에서 가치 있고 해볼 만하다고 거기에 올인해 그 대가로 아무리 큰 성공을 거둔다해도 과연 그것이 예수님께 올인해서 얻게 될 ‘영원한 생명’?과 비교할 수 있을까?? 얼마 전 처음 쳐본 볼링이 생각난다. 엉뚱한 곳에 올인해 도랑으로 빠지던 공의 신세가 아니라 제대로 된 곳에 올인해 한방에 스트라이크를 날려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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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세 가지 소원에 관한 동화를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세 가지 소원만 들어주시면 얼마나 행복할까?’를 자주 생각했던 형제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이 소원을 들어주시겠다고 이 형제님 앞에 정말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 형제님은 당황했지요. 세 가지 소원이 이루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막상 어떤 소원인지를 생각하지는 않았거든요. 그 순간 주룩주룩 비가 내렸고, 내리는 이 비가 안 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습니다. 평소 비를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비를 좋아하지 않는 경우를 자주 봐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첫 번째 소원을 말했습니다.
“하느님! 저희에게 항상 비가 오지 않는 좋은 날씨만 주십시오.”
이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비가 오지 않으니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것입니다. 농부들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의 불평불만이 쏟아집니다. 이 형제님은 두 번째 소원을 말합니다.
“하느님! 낮에는 좋은 날씨를 주시고, 밤에만 비가 오도록 해주십시오.”
그런데 이번에는 밤에 일하는 사람들의 불평불만이 쏟아집니다. 결국 그는 마지막 세 번째 소원을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 그냥 원래대로 해주세요.”
이 형제님의 세 가지 소원은 아무 쓸모가 없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해도 실제로 도움이 되는 것을 소원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단지 하느님께서 최고의 길로 나를 인도해주심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고백합니다.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을 따름으로 인해 현세에서는 박해를 받을 수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길인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이끌어주신다는 약속을 해주십니다.
바로 주님의 인도하심을 굳게 믿고 끝까지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독서의 말씀처럼 거룩하신 하느님을 따라 거룩한 우리가 되는 길이 됩니다.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행복합니다(에쿠니 가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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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찌가 첫째에게
-오민환-
어제에 이어 오늘은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등장합니다. 열두 제자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이러한 그의 역할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마르 8,29; 9,5; 11,21 참조).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는 베드로의 말은 어제 복음의 부자와는 차별되는 자의식의 당당한
표현으로 들립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더 어렵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의 한숨 섞인 반응이 나온
뒤인지라 더욱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스승님이 말씀하신 대로 모든 것을 다
버렸으니 무엇을 받을 수 있을지 궁금하였습니다. 주님과 복음을 따르는 제자가
받을 보상에 대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현세에서 백 배의 축복과 내세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보상에는 마치 욥의 운명처럼 살아
있는 동안 박해와 고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의 보상은 현세에서 이룰 형제적 공동체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한마음 한뜻으로 자기의 소유를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궁핍한 사람은 하나도 없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썼다는
초대교회의 형제적 공동체 생활이 그 보상이 아니었나 싶습니다(사도 4,32-37
참조). 종말론적 기다림(희망)은 공동체를 위해 함께 나누는 의무를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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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따름에 따르는 것
-김찬선신부-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이 말은 앞선 복음에서 주님 따르기를 거부한 사람을 보고
베드로가 하는 말입니다.
자기들은 이 사람과는 다르다는 의기양양함이 느껴지고,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인정을 받으려는 마음이 느껴집니다.
얄팍함과 가벼움이 느껴지지만
나무라기에는 너무도 인간적인 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저도 제가 한 작은 선에 대해 얼마나 으스대고 칭찬받으려 하며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우월감을 느낍니다.
다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고 고상한 척하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정말로 싫어하는 구린내 나는 위선입니다.
이에 비해 베드로는 너무도 단순 솔직하게 그것을 입으로 드러냅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전혀 나무라지 않고
따름에 따르는 상을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면 상이 따른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상이 내세에서 주어지는 영원한 상급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주어지고 그것도 백배로 주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것이고,
이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아까워 아무 것도 포기하지 못하고
결국 예수님을 따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믿고, 어떤 사람이 믿지 못합니까?
마르코복음에는 마태오와 루카복음에는 없는,
“박해도 받겠지만”이라는 말이 중간에 나옵니다.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면 박해도 따르겠지만 보상도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곧 바로 백배로 되돌려 받는다면
누구나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버리고 나서 바로 받게 되는 것은 박해입니다.
그리고 이 상실과 박해의 嚴冬이 너무 길고 추울 때
이 상실과 박해는 끝나지 않을 것 같고
그 다음에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과 믿지 못하는 사람은
상실과 박해 다음의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과
그렇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인 것입니다.
이번 정부의 대북 강경 조치로 지금 저는
실낱같이 희망을 걸었던 모든 것들이 무망하게 되었습니다.
평양에 갈 수 없고
평양에 있는 평화 봉사소를 운영할 수 없고
간염 백신을 보내는 일도 할 수 없고
제 3국을 통해서 곡물을 보내는 일도 당장은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끝난 것이라고 보고 이 일을 접어야 하나?
다른 일을 하라고 하느님께서 이런 파국을 허락하신 것인가?
“현세에서 박해를 받겠지만...
백배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믿고 더 기다려야 하는가?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경험을 놓고 볼 때
이 시련의 때가 바로 믿음의 때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와 같은 시련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이때 “그러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라고 하는
베드로 사도의 권고를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고 주님의 때를 희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제 베드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적이 없어도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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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양승국신부-
<버리고 버리고 또 버리고>
오늘도 베드로는 또 다시 크게 오버를 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좀 있으면 60점이라도 받을텐데, 괜히 "나서서" 크게 야단맞을 건수를 만듭니다.
엉겁결에 튀어나온 말이었겠지만 베드로는 나중에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한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뒤이어서 나온 베드로의 말이 너무 속보이는 말이어서 생략했으리라고 추정되는데, 아마도 이런 질문이 뒤따랐겠죠.
"이제 저희에게 돌아올 몫은 어떤 것입니까? 적어도 장관 자리 하나씩은 생각해 주시겠지요?"
베드로가 그 말을 내뱉은 이후, "진정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만을 따랐겠는가?" 복음서를 따라가 보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똑똑히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물론 베드로가 그물을 버렸고, 가족을 뒤로했고, 살던 집을 떠나왔지만 결코 모든 것을 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정으로 버린다는 것은 외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내적인 결단을 요구합니다. 비록 베드로는 많은 것을 버렸지만 결점투성이의 인간 조건은 그대로 안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비록 베드로가 생업을 포기했지만 예수님을 통해 또 다른 방식으로 성공해보겠다는 인간적인 야심을 그대로 지니고 따라온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베드로는 남들보다 늘 앞서야 한다는 지나친 강박관념, 그 알량한 자존심을 모두 등에 짊어지고 따라온 것입니다.
이토록 문제점이 많았던 베드로의 성소였기에 예수님께서는 극단적인 처방을 써가면서까지 베드로의 성소동기를 정화시키는데 총력을 기울이셨던 것입니다. 때로 칭찬도 하고 인정도 하지만 때로 과격한 언사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저 역시 "이제 모두 버렸노라"고 노래를 부르면서도 온전히 버리지 못한 제 현실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곤 합니다.
완전히 버렸다면 보다 완벽한 평화를 누릴텐데, 아직 완전히 버리지 못했기에 아직도 이토록 부끄러운 갈등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오늘 다시 한번 크게 비우자고 다짐합니다. 다시 한번 모든 것을 버리자고 약속합니다. 버리고 버리고 또 버리면 결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최종적으로 남게 되리라 확신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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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출판사에서 온 전화였지요. 사실 이번에 저의 여섯 번째 책이 출판되는데요, 이 책에 넣을 저의 약력을 좀 써서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암담했습니다. 여섯 번째의 책을 썼다는 것 외에는 뭐 내세울만한 특별한 약력이 전혀 없거든요.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요즘 그 흔하다는 박사 학위조차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무난하게 고등학교 졸업하고 신학교에 들어가서는 쭉 다니다가 신부가 된 아주 평범한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강의 나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당이나 회사에 강의 부탁을 받아서 가면, 진행하시는 분이 제게 약력을 묻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거쳤던 곳을 이야기해드리지요. 그러면 그분께서는 ‘뭐 특별한 약력이 없냐?’는 식으로 저를 뻔히 쳐다보십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저는 이렇게 말할 뿐입니다.
“그게 다에요.”
책을 내고 강의를 할 때, 좀 특별한 약력이 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가졌던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저의 평범한 경력을 들으면 시시하고 별 것 없는 사람으로 생각할 것 같기 때문이었지요. 그런데 문득 이러한 평범한 저의 과거가 바로 지금의 나를 더욱 더 돋보이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평범한 과거의 삶으로도 지금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기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단한 과거의 삶을 가지고 지금 화려하게 사는 것은 쉽겠지요. 그러나 평범하고 또 어려운 삶을 가지고서 지금 화려하게 사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결국 평범하고 어려운 과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 더 자랑스러워 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지금의 고통과 시련 역시도 잠시 뒤에 다가올 미래에는 자랑스럽고 감사할 시간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한 차원에서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이 잘 이해됩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지금의 이 순간의 삶이 항상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화려하고 멋지게 보이는 사람이 계속 그 모습을 간직하며 사는 것도 아니고, 지금 힘들게 살아가는 그 모습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과거가 되는 그 모든 것들이 그렇게 중요한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지금이라는 이 현재에 어떻게 하면 더욱 더 충실할 것인가를 걱정해야 하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제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평범함을 오히려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지금 어렵고 힘든 나의 삶이 하나의 벌이 아닌, 하나의 커다란 축복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들은 화려하고 멋지게 다가올 미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꼴찌임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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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사람
-조명준 신부-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권고합니다. 여기서 ‘거룩하다’는 말의 성서적 의미는 ‘세상 것과 섞이지 않게 따로 구별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분인 이유는
세상의 속된 것과 구별된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로서
거룩한 우리들도 세상의 욕망에 물들지 않도록 권고하는 제1독서의 맥락에서
오늘 복음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과 형제와 자매와 부모, 자녀와 토지를
버리라는 말씀을 우리 사회의 현실에 적용해보면, 신앙 때문에 사적인
이익을 위한 ‘학연, 지연, 혈연’ 등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나라 인구의 1/4이 그리스도교 신자이지만 여전히
학연, 지연, 혈연에 기대어 ‘법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결정들이 이루어지고,
이것들이 성공의 조건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신앙인이라면 이 세 가지에
의지한 불공정한 경쟁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처음에는
꼴찌가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첫째가 되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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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양승국신부-
<여백 예찬>
한적한 평일 오후, 고궁 안마당을 거닐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겨우 담하나 넘어왔을 뿐인데, 분위기는 완전히 딴판입니다. 시야에 와 닿는 모든 풍경들이 소란스런 바깥세상과는 너무나 대비되기에 어리둥절해집니다. 갑자기 타임머신을 타고 머나먼 딴 세상에 와있는 착각 속에 빠집니다, 낯선 공간에 익숙해지기 위해 꽤 시간이 요구됩니다.
‘텅 빈 충만’이란 단어가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시간도 천천히 흘러갑니다. 공간도 텅 비어있습니다.
고궁의 매력은 이렇게 ‘텅 비어있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시골 생활에 익숙해서 그런지 도심 속을 걸어가다 보면 그 ‘빽빽함’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디 한 군데 여백이라곤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옵니다.
삶에는 어느 정도 여백이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여백과 더불어 우리네 삶은 더욱 풍요로워 집니다. 인생에 어느 정도 결핍도 필요합니다. 결핍 속에 우리 삶은 더 빛나기 마련입니다.
깃털처럼 가벼워져야, 먼지처럼 작아져야, 구름처럼 흘러갈 수 있습니다. 비본질적 인 것들, 덜 중요한 것들, 부차적인 것들을 내려놓아야 한 차원 높은 삶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비워야, 내려서야, 더 깊은 신앙에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을 옭아매는 갖은 집착에서 자유로워지면 그 때부터 하느님의 은총은 가속도가 붙기 시작합니다. 양손 가득 움켜쥐고 있던 것들을 놓게 되면 그 때부터 하느님의 자비는 풍성해지기 시작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더 큰 것을 얻기 위해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냥 적당히 버리는 것이 아니라 버리고, 또 버리고, 완전히 버리라고 강조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추종, 그것은 결코 만만치 않은 것임을 오늘 복음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름은 결코 정적인 것이 아님을 오늘 복음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역시 만만치 않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충분히 노력했기에 이쯤이면 됐겠지, 하고 있노라면 어느새 또 다른 목표치를 설정해주십니다.
한 차원 높은 목표, 또 다른 새로운 각고의 몸부림이 필요한 목표를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한 곳에 그냥 두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어디론가 데려가십니다. 목숨 떨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지속적인 우리의 쇄신과 성장을 원하십니다.
이러한 변화무쌍한 우리네 인생이기에 가끔은 ‘텅 빈 공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고요한 여백이 필요한 것입니다.
영적인 삶,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결코 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흔들리는 삶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잔잔한 물가로만 인도하실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의외로 자주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나운 폭풍 속으로 인도하십니다.
그 속으로 뛰어들면 큰일 나겠구나, 생각하겠지만, 천만의 말씀, 별 일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때로 우리 삶을 제대로 한번 휘저으십니다. 그래서 완전히 우리 삶이 뒤죽박죽되는 느낌을 받겠지만, 계속 우리를 휘저으시면서 우리를 새 창조하십니다. 우리 안에 새로운 가치를 형성시키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우리의 노력이 자기 비움입니다. 자기 포기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지니고 있었던 거짓 자아를 내던지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의 권고대로 과감히 버리고 떠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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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사람이 된다 함은?
-김찬선신부-
작년 대통령 선거 때 많은 사람들이
세금 포탈을 했어도 경제를 살리기 위해
이 명박 씨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얘기했습니다.
저는 그때 매우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이 명박 씨가 문제가 아니라
국민들의 배금주의적인 선택이 문제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명박 대통령을 잘 못 뽑았다고 후회하며
성토하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때 저는 또 말했습니다.
뽑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후회하고 성토합니까?
그리고 한 사람에게 그렇게 큰 기대를 하지 마시고
하느님이 아닌 인간에게 그렇게 큰 희망을 걸지 마시라고.
그런데 요즘은 제 입에서 그리 점잖지 않은 말이 나옵니다.
국민 여론을 무시하는 대통령의 태도에 실망하고 분노하는 표현이
저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저를 오늘 베드로 서간을 묵상하면서 반성하였습니다.
실망한다는 것은 희망을 걸었다는 뜻인데
저도 정치인에 불과한 한 인간에게
어떤 식으로든 희망을 걸었던 것이지요.
이런 저에게 오늘 베드로 서간은 충고합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그러면서 전에 무지했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우리를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한 사람이 되라 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관심 있게 봐야 할 말이 ‘무지했던 때의 욕망’입니다.
희랍어 원어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영어로는
'the passions of your ignorance'입니다.
ignorance가 알지 못함을 뜻하지만
배우지 못해 알지 못하는 illiteracy와는 다릅니다.
ignorance는 ignore가 ‘무시하다’, ‘묵살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듯이
교만함으로 하느님과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묵살하여
그 결과, 하느님과 다른 사람의 뜻을 알지 못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봐야 할 것은 'passion'이라는 단어입니다.
'passion'이란 어느 하나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몰입케 하는
열정과 사랑을 뜻하는데
우리가 'passion of Christ'를 지니지 않고
주님과 사람들을 무시하는
‘passions of ignorance'를 가질 때 문제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녀야 할 성자 그리스도의 passion은 어떤 것입니까?
필립비서 2장이 잘 얘기하고 있듯이 그것은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신적 위치를 고집하지 않고
종의 모습을 취하여 자신을 낮춰 죽기까지 순종하는 passion입니다.
그러므로 순종하는 자녀인 우리는 순종하신 성자처럼
종처럼 죽기까지 순종하는 passion을 지녀야 합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가
우리를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한 뜻은
먼저 세상사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희망 때문에
하느님은 제쳐놓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늘 우리를 부르신 분 곁에 머물며
모든 관심과 희망을 그분께 두는 사람입니다.
Being with the Lord God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거룩한 사람이 된다 함은
Doing as the Lord God says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사람의 뜻은 잘 알고 하느님의 뜻은 모르는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누구보다도 잘 알뿐 아니라
무엇이든 자기 욕망을 따라 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뜻대로 하는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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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과 바꾼 아이
-이상각 신부-
아내가 호스피스 병동으로 떠나던 날 아침이었습니다. 할머니 등에 업혀 있던 막내가 엄마에게 가겠다고 막 떼를 쓰며 우는 겁니다. 아마 그 애도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엄마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나 봅니다. 다른 때는 엄마를 봐도 그렇게 가겠다고 하지 않았거든요. 아내는 호스피스 병동으로 가는 차 안에서 울면서 저에게 말했습니다. ‘저 애는 내 목숨과 바꾼 아이야.’ 신부님, 집사람은 성모님을 무척 사랑했습니다. 지난 10여 년 동안 매월 첫 토요일마다 남양 성모성지에서 미사에 참례하고 묵주기도를 바치고 성체조배를 했습니다. 집사람이 오지 못할 때는 저나 제 아이들이 대신 오기도 했습니다. 저희가 남양 성모성지를 처음 찾은 것은 셋째 딸이 병에 걸려 몹시 아플 때였습니다. 그때 성모님께 기도드리면서 딸의 병을 낫게 해주시면 매월 첫 토요일에 성모님께 찾아오겠다고 약속을 드렸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그때부터 매월 첫 토요일마다 성지에 왔습니다. 그러면서 더욱더 성모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신부님, 사실 제 아내는 한 번 낙태한 경험이 있습니다. 아기를 임신한 사실을 모르고 감기약을 먹었는데, 주위 사람들이 모두 낙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내는 두려움에 그만 낙태를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울면서 후회했는지 모릅니다. 매일매일 그 아기를 위해 기도했고 용서를 청했습니다. 아내가 여섯 번째 아기를 임신하고 몸이 아파 병원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의사가 암이라며 아기를 낙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나는 성모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결코 낙태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병원을 나와 성모님께 이렇게 기도드렸습니다.
‘성모님, 아기를 낳겠습니다. 다시는 낙태하지 않겠습니다. 제 생명을 바칩니다. 대신 건강한 아기를 낳게 해주십시오.’ 아내는 가능한 한 매일 미사에 참례하고 묵주기도를 드리면서 건강한 아기를 낳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바라던 대로 건강한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아내의 몸에는 암세포가 다 퍼졌고 아기가 막 첫돌이 지났을 무렵 호스피스 병동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섯 아이들과 저를 남겨두고 그토록 사랑하던 성모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신부님, 제 아내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집에 두고 온 젖먹이 막내를 제외한 다섯 명의 딸과 함께 성모님 앞에서 아내를 위해 기도드리던 그 형제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아기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그 엄마에게 주님께서 틀림없이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라 믿는다.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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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열며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얼마나 커피를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인스턴트커피, 원두커피, 심지어 자판기커피까지 제 입 안에 커피라는 것만 들어가면 다 좋아합니다. 그러다보니 하루에 마시는 양도 만만치 않지요. 아무리 못 마셔도 10잔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10잔 이상의 커피를 마신다고 하면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그렇게 마셔도 잠이 와요?”
하긴 어떤 분은 커피 한 잔을 마셔도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더군요. 그러나 저는 커피 때문에 잠을 못 잤던 적은 하나도 없습니다. 잠자기 직전에 커피를 마셔도 잠을 자니까요. 그래서 저는 어떤 분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저도 커피 마셔서 잠을 못 자봤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정말로 제가 커피 한 잔만 마셔도 잠을 못 자게 된다면 어떨까요? 그때도 이런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있을까요? “저 커피 마셔서 잠을 못 자니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마 그때에는 지금의 저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을 무척이나 부러워 할 수밖에 없겠지요.
이렇게 우리들은 지금 자신의 상황이 좋을 때에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감사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았던 지요. 그러면서 교만한 마음에 오히려 안 좋은 상황이 내게 왔으면 좋겠다는 말도 서슴지 않고 할 때도 참으로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로 그렇게 안 좋은 상황에 닥치게 되면 어떨까요? 그때의 교만은 완전히 사라지고 이렇게 말하지요.
“주님, 왜 저만 미워하십니까?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지금의 좋은 상황이 계속 좋으리라는 법이 없지요. 마찬가지로 지금의 안 좋은 상황이 계속 안 좋을 수도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들은 지금의 상황만을 바라보면서 교만 속에 빠지고, 또 때로는 포기 할 때가 왜 이렇게 많은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세요.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이 적용되는지 아마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겸손의 덕을 잃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상황이 좋다고 해서 교만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반대로 지금 상황이 안 좋다고 포기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항상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포기하지 않으면서 주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우리가 되라고 오늘 독서를 통해서 베드로 사도는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오늘 하루 주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한 날로 함께 만들었으면 합니다.
교만에 빠지지 맙시다.
빠다킹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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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살아야 하는 이유
-이철구 신부-
신학교에 입학하던 날이 떠오릅니다. 이불보따리와 옷보따리를 싸 가지고
신학교에 들어가던 날 어머니는 제 방까지 따라오셨습니다. 침대에
이불을 깔아 주시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으셨는지 “부모님은 집으로
돌아가 주십시오”라는 방송이 나오고도 한참을 계시다 발걸음을 돌리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셔서 건강하게 잘 살라고 말씀하시고는
뒤도 돌아다보지 않으시고 떠나셨습니다.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지금도 힘들 때면 ‘잘 살아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의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일까요?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것만으로도
잘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 주어진 소임에 불평 없이
순명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나를 위해 잘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잘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기에
나는 잘 살아야 합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양창순-
◆나무는 불속에 있을 때라도 불붙는 데 필요한 열이 1도만 모자라도 끝내 불이 붙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의 순종이나 헌신도 때로 그 통나무처럼 불이 붙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전심전력을 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도가 모자라는 정도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건 아예 불속에 있지 않을 때가 훨씬 더 많다고 해야 온당한 표현일 것입니다. 그 이유도 가지가지입니다. 그렇다고 꼭 거창한 이유들이 불을 붙이는 데 방해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대개는 별것 아닌 사소한 일들, 자잘한 일상들이 모여서 결국 큰일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거짓된 헌신이 아닌가 합니다. 아니면 겉치레로 꾸미는 헌신이라고 해도 되겠지요. 예수께서 첫째가 꼴찌되고 꼴찌가 첫째되는 일이 생길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그런 겉치레를 경계하라고 하신 말씀은 아닐까요. 저는 직업 탓에 예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이해가 갑니다. 정신과 의사로 일하다 보면 인간이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뼈저리게 느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특히 내가 남보다 잘났다는 교만함이나 너보다는 내가 훨씬 더 중요한 존재라는 우월감은 우리 인간이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그런 교만이나 우월감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줄어드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교회라는 울타리 속에서 그런 생각들이 더욱더 마치 바이러스처럼 번질 때마저 있는 것을 우리는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미 우리의 그와 같은 연약함을 아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첫째가 꼴찌되는 것을 경계하라고 엄중히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린 감히 베드로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라는 통나무를 불속에 넣어둘 수는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께서 불이 붙을 수 있도록 마지막 1도를 더해주실 테니까요. 온전하고 순전한 믿음은 내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 최소한 준비된 모습은 보여 드려야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닐는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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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보화와 상급 - 참 신앙인의 선물
-이기정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주님을 따르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과 축복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추종과 보상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매일 유한한 세상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복음적 가치의 소중함을 깨달음으로써 주님이 주시는 구원의 상급과 선물을 받아 누리는 참된 신앙의 삶을 살기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고 했을 때 주님 때문에 세상 것을 버린 자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상급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주님 때문에 세상 것을 희생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 것들 때문에 주님을 떠나고 멀리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이 사라져 없어질 유한한 세상 것들을 위해 희생하는 삶일 때 아무리
그 희생이 크고 귀한 것이라 하더라도 허망하고 보상을 바랄길이 없는 무의미한 희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반대로 영원하신 하느님 때문에 신앙 때문에 행한 우리의 모든 수고와 희생은 아무리 그 수고와 희생이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희생이 헛되지 않는 의미 있는 희생일 수 있을 것입니다.
보여 지는 현재의 행복은 완전하고 참된 행복이 아닙니다.
영속적이고 시들지 않는 행복만이 참된 행복입니다.
영원하신 주님만이 우리에게 시들지 않는 참된 행복을 주실 수 있는 우리 삶의 진정한 주인이십니다.
우리가 세상을 주인으로 섬길 때 우리의 미래는 희망이 없고 불안하고 불확실합니다.
반면 주님이 우리 삶의 주인이실 때에 현재의 불행은 불행이 아니라 미래의 보증이고 선물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이 원망스러운 어렵고 힘든 상황과 처지에 놓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주님을 섬기며 나름대로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해 왔는데
"주님께서 나에게 해 주신 것이 무엇인가?"라는 원망이 나오는 시련 속에서의 삶 일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필요한 축복과 선물을 넘치도록
주시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단지 우리의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욕심으로 말미암아 축복과 선물을 축복으로 느끼지 못할 따름입니다.
보이는 세상의 좋은 것만을 많이 가지고 누리는 것을 축복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잘못된 생각 때문에 주님이 주시는 상급을 놓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에 헌신하고 목숨을 거는 삶입니까?
과연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우리 삶을 바치고 있습니까?
주님만이 우리의 소중한 것을 버리고 포기해도 아깝지 않을 유일한 헌신의 대상임을 명심합시다.
매일 주님 때문에 신앙 때문에 우리의 것을 희생함으로써 주님이 주시는 상급과 보화를 우리의 것으로 받아 누리려는 결심을 새롭게 하면서 오늘도 우리 삶의 진정한 주인이신 주님과 함께 보이지 않는 영적보화와 상급을 선물로서 받아 누리는 신앙 안에서의 기쁜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아멘.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양승국신부-
<형제님, 무슨 일이십니까?> 언젠가 트럭을 몰고 뭔가 운반하다말고, 복장도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 본당에 미사를 도와드리러 가게 되었습니다. 겨우 정각에 도착했기에 저는 뛰다시피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허겁지겁 제대 왼편에 있는 제의방 문을 확 열고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그곳은 제의방이 아니라 바로 바깥으로 통하는 문이었습니다. 바람이 확 들어오면서 신자들의 눈길이 제게로 확 쏠리더군요. 당황한 저는 한동안 안절부절 하다가 겨우 제의방문을 제대로 찾았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살았구나’ 하며 문을 여는 순간, 한 신사분이 제 팔을 꽉 잡으시더군요. 그리고 제 아래 위를 한번 훑어보시더니 이렇게 경고를 주셨습니다. “형제님, 무슨 일이십니까? 거기는 아무나 함부로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형제님’이란 호칭, 그때 들어보니 참으로 괜찮은 호칭이었습니다. ‘아저씨’, ‘어이’, ‘저기요’ ‘형씨’ 이런 칭호보다 얼마나 예의바르고 정감이 갑니까?
‘형제님’, ‘자매님’ 아마도 우리 가톨릭교회 안에서만 통용되는 호칭일 것입니다. 약간 어색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합니다. 이런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문법적으로 맞는 것인지도 의심이 가기도 합니다. ‘형님이면 형님, 아우님이면 아우님이지 형제님이 뭔가?’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도 자주 사용하다보니 이젠 일반화되었고 자연스럽기까지 합니다.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는 왜 서로를 향해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부를까요? 이유가 있더군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으로 편입된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식탁에 앉는 영적 가족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례 받은 사람들은 영적인 형제관계를 맺게 됩니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 백성의 일원이 된 우리는 동일한 방식으로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합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는 모두 한 형제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말로만, 또 호칭으로만 형제자매가 아니라 엄연한 현실로서의 형제자매인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 안의 살아있는 현실입니다. 예수님께서 궁극적으로 바라시는 바는 모든 장벽들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한 형제자매처럼 지내는 것입니다. 너와 나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장벽, 인종과 인종 사이의 장벽, 국가와 국가 사이의 장벽, 그 모든 장벽들이 허물어지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한 부모 아래서 태어난 자녀들처럼 화목하게, 아기자기하게 지내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 되게 하여 주십시오”하는 간구는 바로 이런 배경을 바탕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라나선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수도생활을 계속할수록 ‘백배의 갚음을 받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예수님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종하기 위해 가족을 떠나왔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 그게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본래 가족과의 유대도 훨씬 강하게 엮어주셨는가 하면 더 많은 영적가족들을 선물로 주시더군요. 종신서원도 했겠다, 서품도 받았겠다, 이젠 ‘떡두꺼비 같은 아들 한번 품에 안아보는 것은 물 건너 갔구나’ 생각했었는데, 수백 수 천 명의 또 다른 아들들이 생겨났습니다. 부모님을, 그리고 형제를 떠나오게 되었으니, 이젠 정말 허전하겠구나, 쓸쓸하겠구나,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따뜻하고 인정 많은 형제들이 다가왔습니다. 훌륭하고 덕망 높은 영적 스승님들, 영적 부모님들이 저희를 보살펴주시더군요. 예수님을 따름으로 인해 포기해야 할 것도 많지요.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 포기에 따른 상실감, 인간적인 아픔도 많겠지만, 그로인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상급은 그보다 훨씬 클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노력이나 투자는 티끌보다 미미하지만 하느님의 보상은 태산보다 더 클 것입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6D0355009A8941D)
뭘 포기 했나?
-이찬홍 신부-
사제로 살아가는 저를 되돌아보게 하는 글이 있어 나누고 싶습니다. ‘† 제가 행한 모든 교만을 전능하신 하느님과 신자 분들께 고합니다. † 사제된 지 10년 되었습니다. 사제 생활하는 동안 예수님은 자꾸만 작아지시고 저는 더욱 커져만 갑니다. 고해 실에서 목소리가 점점 커져갑니다. 존경했던 선배 신부님들이 지금은 비난의 대상으로 많이 바뀌었습니다. 사목의 대상이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서 나를 알아주는 사람에게로 옮겨갑니다. 초대받는 자리에 으레 가장 좋은 가운데 자리에 먼저 앉아서 받습니다. 어르신들이 무릎을 꿇고 술을 주셔도 이제는 앉아서 받습니다. 전엔 예수님을 뵈러 가정방문을 갔는데, 이제는 예수님이 되어 가정방문을 갑니다. 칭찬과 감사, 격려의 말보다 불평과 원망, 지시의 말이 많이 나옵니다. 타인의 말을 듣는 시간보다 말하는 시간이 점점 많아집니다. 강론도 자꾸 길어집니다. 교우들과의 회합 때 무조건 나의 판단이 옳다고 우길 때가 많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죽는 줄 알았는데 안 해도 되는 이유가 자꾸 늘어납니다. †이 밖의 알아내지 못한 교만에 대해서도 뉘우치오니 용서하여 주소서. 아멘.’ (다음 카페 ‘여기 있나이다. 주님’ 조병환 세례자 요한 신부님 글 중에서....) 복음에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실로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사제직을 통해 주님을 따르겠다고 다짐한 저는 집과 가정과 부모님과 자유의지를 포함한 모든 것을 버리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버리겠다고 해지만, 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좋은 집(사제관)이 있고, 함께 살아가는 가정 공동체가 있습니다. 저의 자유의지를 포기하겠다고 했는데, 여전히 저의 삶이 있고, 자유가 있고,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정말 ‘버리면 다 많이 받는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이곳 중앙 성당 신자 분들이 저의 부모님이요, 형제요, 자녀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저를 아들로 생각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이들을 자녀로... 청년들을 동생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진정 내가 버린 것을 것의 없지만, 받은 것은 너무 많습니다. 박해는커녕, 너무 풍족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많이 받은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지도 않는 박해에... 어려움에 자주 머물게 됩니다. 이미 풍족하게 주어졌음에도, 버렸다는 이유로...포기했다는 이유로.. 더 많은 것을 원합니다. 무엇보다도 이에 대해 감사하지 못합니다. 이런 저의 모습은 분명 첫째입니다. 그러나, 이 첫째의 모습이 언제까지 첫째일지 반성해 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은 가정에서, 직장에서,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포기했다는 것이 진정 여러분의 삶 안에서... 마음 안에서 포기되었습니까? 여전히 자신 안에 있고, 어쩌면 더욱 많이 사용하며 살아가는 것 같지는 않습니까? 저처럼, 있지도 않는 박해와 어려움을 스스로 만들어 놓고는 그 안에 갇혀 힘들다고... 괴롭다며.. 하느님께, 가족에게, 이웃들에게 외치는 것은 아닐까요? 꼴찌로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정작 첫째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모두는 이미 하느님께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주님을 위해 10을 포기했다고 하지만, 그 나머지 90은 받았습니다. 아니, 포기한 그 10까지도 열배, 백배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이미 주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다는 것! 주님을 따름에 있어... 신양생활을 함에 있어 기꺼이 포기한 그것까지도 주님께서는 주셨다는 것을 깨닫고 늘 감사하고 또 감사드리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첫째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비록 꼴찌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첫째가 되는 길일 것입니다. 아멘.
바다로 내려간 소금인형처럼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1베드 1,10-16 (여러분의 앞날에 대해서 예언되어 있으니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으십시오.)
복 음 : 마르 10,28-31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축복도 백 배나 받을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성당에서 활동하는 많은 봉사자들의 경우에 임기를 마치고 나면 이구동성으로 아쉬워하고 그 시기가 얼마나 은총의 시기였었는지를 고백하고 나누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처음 임기를 맡아 시작할 때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받아들이기를 어려워하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하지요. 그러나 하느님의 사람으로서의 일을 마쳐갈 즈음에는 얼마나 큰 은총의 시기였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어려운 시련과 고통이 많은 사람일수록 하느님의 은총 또한 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인간적인 부족함이나 시련이 없이 축복만이 있을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하느님의 일을 시작했다가 상처를 입는 경우도 있지요. 사람들은 대부분 시련을 통해서 하느님의 깊은 사랑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에 이어진 내용으로 부자 청년 비유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했다가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10,21)는 예수님의 말씀에 실망하여 떠나간 뒤의 상황이지요. 일반적으로 유다인들은 재산의 번영이나 부자가 되는 것이 하느님의 축복의 표지라고 믿고 있었고 어떤 사람이 부자가 되고 가정이 번성하면 하느님께서 그를 축복해 주신 것이 틀림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라고 말씀하시자 실망한 부자는 떠나갔고,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10,25)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도 깜짝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마르10,26)하며 서로 수군거렸지요.
이 때 떠나가는 부자 청년의 모습을 지켜본 베드로가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마르10,28)
베드로의 이 말은 ?우리는 하느님의 길을 택했는데 세상을 택한 부자 청년과는 얼마나 다릅니까? 그러니 저희에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요. 이를 아시고 예수님께서 속 시원한 답변을 해 주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10,29-30)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택할 때는 어려움과 시련이 따르고 세상을 따를 때는 달콤한 열매를 얻을 것 같이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시지요.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르10,31)
세상을 따르는 것이 유혹에 불과하다는 말씀입니다.
반장, 구역장, 단체장, 사목위원 등 주님의 일을 하게 되면 이 세상에서는 뒤쳐질 것 같고 손해를 볼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하느님께서 모두 채워주실 것이며 오히려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영원한 생명까지 누릴 수 있음을 오늘 예수님께서 거듭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께서 불러주신 은혜에 감사 드리며 최선을 다해서 봉사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차고 넘치게 내리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15,5)
예수님의 말씀처럼 주님 안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고자 노력할 때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은 물론이요 현세에서의 축복도 크다는 것을 깨닫는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19세기 인도의 성자 라마크리슈나의 ?소금인형?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눕니다.
바다를 알고 싶어했던 소금인형이 있었습니다. 바다를 알고 싶었던 소금인형은 바다를 찾아가 발을 조금 담갔습니다. 그렇지만 바다를 알 수는 없었습니다. 바다에 담궈진 발이 조금 녹았을 뿐이지요.
?바다야 난 아직 너를 모르겠어.?
?소금인형아, 그럼 네 몸을 던져보렴.?
소금인형은 겁이 났지만 바다를 사랑하는 마음에 몸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소금인형은 바다에 몸이 녹아서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한참이 지난 후에 사람들이 소금인형한테 물었습니다.
?소금인형아, 넌 뭐니??
?음… 난… 바다야!?
보시다시피(마르10, 28-31)
-유 광수신부-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라고 말했다. 베드로가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였는가? 그리고 그 동기가 무엇인가?
아직까지도 제자들은 구원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이다. 다만 구원받는다는 것이 출세하는 것이라는 정도로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쉽다."라고 말씀을 하시니 자기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맞지 않는 말씀이다. 자기들이 생각했던 구원 또는 하느님 나라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런 가능성이 거의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다급해졌고 앞으로 자기들의 운명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라고 물으면서 스승님의 의도를 알고 싶었던 것 같다. 이 말은 주님을 따르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말해준 훌륭한 말이다. 주님을 따르려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따라야 한다. 그것이 주님을 따르는 이들의 자세이다. 그러나 내용이 문제이다. 즉 모든 것을 버린 그 동기가 무엇인가? 가 중요하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은 자기들이 출세하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버린 것이지 정말로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 모든 것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다.
"버리다"라는 단어를 베드로도 사용하였고 예수님도 사용하셨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다른 것이다. 베드로는"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라고 말했 만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버린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기를 위하여" 버린 것이다. 그런 모습은 앞에서 예수님이 수난과 부활에 대한 두 번째로 예고하셨을 때에 바로 그 뒤에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한 것에서도 드러났고 또 세 번째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하셨을 때에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 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도록 해 주십시오."하고 청하는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예수님은 무엇을 위해서 버려야 하는지를 분명히 밝히셨다."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버려야 한다. 그렇다고 제자들이 버려야 할 것들은 집, 형제, 자매, 어머니, 아버지, 자녀, 토지 등 어느 것 하나 쉽게 버려질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이것들은 모두 그들의 삶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다. 어쩌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나선 것은 바로 예수님이 버리라고 말씀하신 것들을 더 많이 갖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애지중지하는 그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니 그 누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자기가 더 잘 되기 위해서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어도 자기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분과 그분의 것을 위해서 자기가 가장 소중한 것들을 그리고 그것들이 없으면 당장 내가 불편하고 살아가기 힘든데 그 모든 것들을 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신 이상자가 아니고서는 그 누구라도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들은 우리의 생각이고, 계산이고, 이해 타산적이지만 분명한 것은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아니 어떻게 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순순한 지향으로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을까?
그것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또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우리가 수도생활을 하든 신앙생활을 하든 처음의 동기는 누구나 베드로처럼 자기 이익을 생각하고 시작하게 된다. 처음부터 예수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자기가 애지중지하던 것들을 모두 버리고 신앙생활이나 수도생활을 시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다 자기가 신앙생활을 하게되면 이러 저러한 면에서 더 좋아질 것이다 라는 의도로 신앙을 갖는 것이고 또 수도생활이나 성직자가 되기 위해서 수도원이나 신학교에 들어가는 이들도 나름대로 자기를 위해서 시작하게 된다. 즉 수도자 또는 신부가 되면 "이러저러한 면에서 자기에게 더 좋을 것이다." 라는 계산이 서기 때문에 시작하는 것이지 처음부터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수도생활이나 성직자가 되고자하는 聖人은 없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자신의 이익 또는 욕망에서 시작은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시작은 베드로처럼 자기의 욕심으로 모든 것을 버리지만 그 동기는 예수님을 따르면서 또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조금씩 순수해져야 한다, 정말로 예수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생활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 모든 것을 정말로 버린 사람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동안 우리 나름대로 소중하다고 지니고 있던 모든 것들과 사람까지도 버릴 수 있는 가치와 의미를 예수님 안에서 또 복음 안에서 찾아야 한다. 즉 무엇을 버리기 위해서는 버리는 것보다 더 큰 것이 발견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손해보면서 버리는 사람은 바보이다. 아니 예수님도 원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더 큰 것을 얻기 위해서 작은 것을 버리는 것이다. 그럴려면 매일 복음을 읽고 묵상하고 실천하면서 내가 갖고 있는 것보다 더 큰 가치를 복음 안에서 발견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복음 안에서 큰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매일 복음을 읽고 묵상하고 실천하면서 그 가치를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복음의 큰 가치는 매일 복음을 읽고 묵상하고 실천하는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통해서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한 사람만이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맛볼 수 있게 된다. 이런 사람만이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릴 수 있고 진정 자유롭게 생활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만이 바오로 사도가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 ...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같이 고난을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필립3,8-10)라는 말을 알아 들을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매일 매일 예수님과 복음의 가치를 새롭게 깨달아 감으로써 예수님과 복음 이외의 모든 것들을 조금씩 버리는 생활이어야 한다. 그것이 신앙의 성숙이요, 발전이다. 이런 사람들은 현세에서 박해를 받을 것이다. 그 동안 자기가 가장 귀중하게 생각했던 것들과 사람들을 버리는데 박해를 받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른 사람한테보다도 우선 자기 자신이 자신에게 박해를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버림이 자기와 다른 이들에게 축복을 가져다 주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기쁘게 박해를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이다. "버림"의 가치와 의미를 숙고하는 하루가 되자.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