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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1. 묵상글 (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 벌도 사랑이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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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1.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벌도 사랑이다.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
그러나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고
조상들의 죄악을 아들 손자들을 거쳐 삼 대 사 대까지 벌한다.”
하느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분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 분이 없을 겁니다.
열심한 신자라면 더더욱 하느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다고 믿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비하심과 너그러우심은 용서하심으로 드러난다고 믿을 것입니다.
그러나 열심한 신자라도 하느님은 용서도 하시지만
벌도 내리시는 분임을 믿지 않을 수 있고,
특히 벌은 하느님의 자비와 너그러우심과 반대되는 거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탈출기의 주님은 용서하시는 분이 당신이시고,
벌을 내리시는 분도 당신이시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자비하시기에 벌을 내리지 않으실 거라고 믿는 사람은
어찌 그런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까?
그것은 벌도 사랑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그것은 자기가 미움 때문에 벌 받았거나 내린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는 실제로 그런 경험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서도 반대의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자식을 정말 사랑하는 부모의 경우 사랑하기에 벌을 주지 않습니까?
참사랑의 부모는 죄와 잘못을 계속 놔두면 자기 자식이 잘못될 것을 알기에
벌을 줘서라도 그것을 고치게 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죄와 잘못을 계속 놔두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오히려 자식을 방치하는 것이고 망치는 것일 겁니다.
요즘 잘못된 자식 사랑 때문에 교사들이 학생을 벌하지 못하게 하고,
벌주는 것을 사랑이 아니라거나 편애라고 공격하여 문제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옛날 우리 어른들은 비록 많이 배우지 못했어도
매를 대고 벌을 줘서라도 자기 자식을 잘 가르쳐달라고 선생님께 청했는데
요즘의 일부 부모들이 그 반대의 행위를 하는 것은 대단히 미성숙함입니다.
그것이 다 자비와 벌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물론 미움과 분노 때문에 체벌을 가하거나 편애해서는 안 되고
그런 면에서 학생 인권 조례도 필요하지만,
스승이 자기 자식을 전인적으로 사랑하고 교육해주기를 원한다면
사랑과 벌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꾸고 스승의 사랑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 탈출기의 가르침은
용서도 하느님 자비의 표현이지만
벌도 하느님의 자비라고 가르치는데,
우리가 진정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사람이라면,
벌주시는 하느님에게서 더 큰 사랑과 자비를 느낄 수 있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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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1.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가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마태 13,29)
우리는 때로는 이 세상에 판치고 있는 폭력과 불의와 죄악을 보면서 곧잘 흥분하고 분노하기도 합니다. 보고만 계시는 하느님이 실망스럽고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또 교회와 우리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정과 부조리와 모순을 보면서 경악하고 환멸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 안에 꿈틀거리고 있는 미움과 무관심과 온갖 악한 생각들을 보면서 심히 좌절하기도 합니다. 사실, 공동체 안에도, 우리 자신 안에도, 밀과 가라지가 같이 자라고 있습니다. 어찌해야 할지, 참으로 당혹스럽고 망막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밀밭의 가라지 비유를 자세히 설명해주십시오.”(마태 13,36)라고 청합니다. 왜냐하면, 밭에 가라지가 있는 것을 발견한 종들이 집주인에게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마태 13,28)하고 묻자, 주인이는 말했습니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13,29-30)
이는 그 속에서 당신이 주님이심을 깨닫고, 주님이신 당신께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동행하시는 주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 속에서 주님 사랑하기를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끝날”(마태 13,40)이 되면, 밀과 가라지의 분리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가라지와 밀을 거두어드릴 ‘때’가 따로 있으며, 또한 그것들을 거두어드리는 일을 맡은 ‘일꾼’이 따로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밀과 가라지에 대한 주권이 바로 당신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세상의 끝날”이 될 때까지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도록 허용되었다는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것 속에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앞의 파견설교에서,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고 하시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악이 세상 안에 함께 자라고 있다고 해도, 우리가 그 악에 젖어 들거나 협조하거나 방조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악을 피하고 선이신 하느님께로 나아가라는 것만도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악을 뿌리 뽑을 수는 없다 할지라도 악이 번지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고, 오히려 악으로부터 선을 보호해야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악이 더 이상 활개 치지 못하도록 싸워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밀밭의 가라지”(마태 13,36)
주님!
이 세상에 폭력과 불의와 죄악이 판을 쳐도,
내 안에 미움과 무관심과 온갖 나쁜 생각들이 꿈틀거려도,
비록 가라지가 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어둠이 빛을 가리지 못하고 당신의 사랑을 가로막을 수 없게 하소서.
오늘도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꺼지지 않는 빛을 밝혀 사랑의 밀밭을 밝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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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1.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인생의 끝에 서면
이건숙씨의 “꼴찌의 간증”에 보니 이런 글이 있습니다.
장수비결
“인생은 육십에 시작하는 것이니
칠십에 저승사자가 오면
잠깐 밖에 나갔다고 전해다오.
팔십에 저승사자가 오면
아직 이르다고 말해다오.
구십에 와서 가자고 하면
뭘 그리 서두르냐고 달래다오.
백 살에 와서 가자고 하면
이제 서서히 좋은 시기 봐서
가겠다고 전해다오.”
인생의 끝에 서면 하루라도 더 세상에 머물고 싶어지나 봅니다. 욕심이라고 하기에는 모두가 가진 기대요, 바람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2,17). “자기의 육에 뿌리는 사람은 육에서 멸망을 거두고, 성령에 뿌리는 사람은 성령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계속 좋은 일을 합시다. 포기하지 않으면 제때에 수확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갈라6,8-9).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해 주시는데 아주 쉽게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이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사실 세상의 종말은 개인적으로 볼 때는 죽음의 순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생 여정의 수확 때인 죽음의 순간에 남을 죄짓게 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가라지의 상태로 있다면 불구덩이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의인의 상태였다면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고 그 삶은 해처럼 빛나게 됩니다. 너무도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럼에도 그 열매를 장담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쉽게 알아들은 만큼 삶의 모습도 맑고 밝아졌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안타깝게도 마지막 날에 좋은 씨앗인 하늘나라의 자녀 가운데에서도 내적으로는 악한 자의 자녀로 밝혀질까 두렵습니다. 얼마나 오래 살아왔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살았느냐의 문제가 더 소중함을 생각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지혜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예로운 나이는 장수로 결정되지 않고 살아온 햇수로 셈해지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예지가 곧 백발이고 티 없는 삶이 곧 원숙한 노년이다”(지혜4,8-9).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인은 이 세상의 삶을 살면서 하느님과 멀리 떨어지는 것보다 죽음을 간절히 청했습니다. 그야말로 “의인은 희생의 제물이고 그의 생애는 끊임없는 제사입니다”(성녀 벨라뎃다). 먼 훗날 하느님의 나라를 갈망하지 않고 지금 여기서 참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알곡을 만드는 것은 오늘 여기서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의인의 삶이 빛나듯 우리의 삶이 해처럼 빛났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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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1.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직업(職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을 보면 “생계를 위해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계속 종사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직(職)은 벼슬을 뜻합니다. 벼슬은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위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직(天職)이라고 말합니다. 옛 어른들은 위에서 벼슬을 거두기 전에는 함부로 직을 바꿀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주도권이 나에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업(業)은 내가 선택하는 일을 뜻합니다. 급여가 좋거나, 처우가 좋으면 더 좋은 업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도시에서 일하다가 귀농하여 농촌에서 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골프장에서 일하다가 식당에서 일할 수도 있습니다. 업은 필요에 따라서 바꿀 수 있고, 그만 둘 수도 있습니다. 주도권이 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평생 같은 일을 하는 것을 귀하게 여겼지만 요즘은 능력과 재능에 따라서 얼마든지 일을 바꿀 수 있습니다. 주변을 보면 같은 업종의 일로 바꾸는 경우도 있지만 전혀 새로운 업종으로 바꾸는 경우도 있습니다. 업을 바꾸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개발과 경험이 중요합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말도 있습니다.
최근에 ‘직’을 걸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직’에 대한 개념이 부족했기 때문에 생긴 말입니다. ‘삭탈관직(削奪官職)’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죄를 지은 자의 벼슬과 품계를 빼앗고 벼슬아치의 명부에서 그 이름을 지우던 일”이라는 뜻으로 대단히 부끄러운 일입니다. 직을 걸겠다고 했지만 직을 거는 경우도 거의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 직이란 본인이 도박하듯이 걸고 말고 할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할 수도 없는 일을 함부로 하면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은 보기에도 어색합니다. 예전에 집안의 어르신들이 ‘사제직(司祭職)’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사제의 직분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이기에 함부로 그만 둘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많은 이들의 기도와 정성이 함께 했기 때문에 함부로 그만 둘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사제의 직분을 내려놓는다면 이 생에서는 어렵게 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직분을 그만 둔 것에 대한 ‘보속’을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사제의 직분이 거룩하고 소중하다는 의미였습니다. 사제가 되었으면서도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듯이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당부’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예수님께서 부르신 12명의 제자들은 배반은 했었을 지라도, 두려움에 숨었을지언정 ‘직(職)’을 버리거나 바꾸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겼던 유다도 뉘우쳤지만 죄책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직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전승은 다른 제자들은 모두 주님의 부르심에 충실하게 응답하였고 주어진 직분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성모님을 모셨던 요한 사도를 제외하면 다른 사도들은 모두 순교로서 주어진 직분을 다하였습니다. 역사가 에우세비우스(Eusebius)는 그의 책 「교회사」에서 12사도의 순교 내용을 사실적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교회의 수장인 베드로는 로마에 가서 전교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고 합니다. 안드레아는 그리스에 가서 전교하다가 아카이아의 파트라이에서 X형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12사도 중에 가장 먼저 순교한 것으로(사도12, 1~2) 기록되어 있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칼로 목이 베여 순교했다고 합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팔레스티나와 이집트, 시리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군중들로부터 곤봉과 방망이로 매 맞아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필립보는 소아시아 중서부 프리지아의 히에라폴리스에서 십자가형을 받아 순교했다고 합니다. 바르톨로메오는 인도와 아르메니아에 가서 전교하다가 참수를 당해 순교했다고 합니다. 토마스는 고대 이란에서 전교하였고, 인도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던 중에 창에 맞아 순교했다고 합니다. 마태오는 유대아를 순회하다가 에티오피아에 가서 전교 중에 참수 당했다고 합니다. 시몬은 페르시아에서 복음을 선포하다가 페르시아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유다 타대오는 페르시아에 가서 전교하다가 활에 맞아 순교했다고 합니다. 가리옷 사람 유다 대신 12사도에 들어온 마티아는 카스피아 연안에서 박해를 받고 콜키스에서 돌에 맞고, 참수 당했다고 합니다.”
한국인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은 복음을 전하다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두 번째 사제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복음을 전하다가 길에서 선종하였습니다. 사도들에게, 사제들에게 그 직은 그만큼 거룩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내가 받은 세례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주어진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한다면 우리는 모두 주님께서 심으신 ‘밀’이 될 것입니다. 행여 두려움 때문에, 욕심 때문에 주님을 배반했을지라도 우리가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우리는 가라지가 아니라 밀로 거듭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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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1.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세상 종말이 오면, 즉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 하늘나라의 자녀들과 악한 자의 자녀들을 구분하시고 악한 자의 자녀들은 모두 불구덩이에 던져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때 의인들은 해처럼 빛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악한 자의 자녀들에 대한 구분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바로 남을 죄짓게 하는 것과 불의를 저지른 자들입니다.
남을 죄짓게 만드는 것은 어떤 것일까 잠시 생각에 잠겨봅니다. 혹시 다른 사람의 마음에 분노의 씨앗이나 원망의 씨앗, 그리고 슬픔의 씨앗을 뿌린다면 그것이 바로 남을 죄짓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그 씨앗은 자라나서 언젠가 다른 누군가의 마음에 똑같은 씨앗을 뿌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그리고 찬찬히 저의 생각과 행동을 돌아다 봅니다.
또한 불의를 저지르는 것은 무엇일까요.
성경 안에서 의로움을 표현할 때 많은 부분 믿음과 연결합니다. 즉 주님께 대한 믿음과 그에 따른 행실이 바로 의로움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것이 의로움이라면 불의는 믿음을 져버리거나 의심을 하였던 모든 마음과 행실을 이야기하는 것일 것입니다.
다시 또 가만히 그리고 찬찬히 주님을 잠시라도 불신한 적은 없는지, 혹은 습관적으로 주님보다 누군가를 또는 나 자신을 더 과신한 적은 없는지 돌아다봅니다.
악한 자의 자녀는 죄를 짓게 만드는 것과 불의로 결정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모두 조금씩이라도 하늘나라에 맞는 사람이 되어가기를 바랍니다. 우리 안에 천사가 늘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치킨 가게 할아버지
치킨 가게 앞에 흰옷을 입고
너털웃음을 짓는 미국 할아버지
세상 모든 것을 품은 듯한 웃음을 짓고 있지만
사실 젊은 시절 그 할아버지는 거의 모든 사업에
실패했었다고 합니다.
이 할아버지를 아시나요?
이 할아버지의 이름은 커넬 샌더슨
실패하고, 실패하고 또 실패하고 그렇게 67세가 되던 해에
동업자를 만나고 사업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를 무릎 꿇게 만드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포기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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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1.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010년 그룹 알리바바의 창업자 마윈이 청소년을 위한 텔레비전 공익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저도 어릴 때는 여러분처럼 하고 싶은 게 참 많았습니다. 버스 기사도 되고 싶었고, 매표소 직원도 되어 보고 싶었어요. 한때는 경찰관과 군인을 꿈꾸기도 했습니다. 하버드 대학 진학을 목표로 공부한 적도 있었죠. 하지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는 그 어느 것 하나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절망하지 않았지요. 대신 꿈을 바꾸었죠. 심할 때는 일 년에 일곱, 여덟 번 꿈을 수정한 적도 있었습니다. 물론 대부분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보다 중요한 건 꿈이 지닌 힘을 믿고 그것을 이룰 때까지 계속해서 도전하는 거예요.”
큰 공감을 가져오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윈의 말처럼, 꿈을 간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도중에 꿈이 변경되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꿈을 아예 갖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해도 안 돼. 이것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편하고 쉬운 일만 할래. 다 귀찮아. 왜 내게는 갑부 부모님이 안 계실까?’ 등은 꿈이 꺾여 있는 말입니다. 이런 마음에는 ‘새로움’으로 나갈 동력이 전혀 없지요. 심지어 새로운 것을 보고도 전혀 새로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관심도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매번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입니다. 새롭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느끼려면 우리 역시 새로움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마음은 어디에서 시작할까요? 맞습니다. 나의 꿈에서 시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새롭게 시작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복음 말씀을 통해서 깨닫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시죠. 그래서 우리 중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구원의 길에 들어서길 바라십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원수인 악마가 뿌리는 가라지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 악마의 유혹에 빠져서 주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이 있게 됩니다. 그 유혹에 넘어갔다고 주님께서 “너는 유혹에 넘어갔으니 이제 가라지다. 지금 당장 뽑아 버리겠다.”라고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 종말이라는 수확 때까지 기다려주신다고 하십니다.
세상 종말이 언제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빨리 회개해서 좋은 밀의 모습으로 살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뜻을 받아들여서 새롭게 변화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 새로움을 자기의 꿈에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꿈은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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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질문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아름다운 대답을 얻는다(E.E. 커밍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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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1.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전쟁
-주님의 전사, 영적승리의 삶-
이런저런 묵상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오늘은 8월 첫날입니다. 7월달의 달력을 넘기는 순간 8월 달력의 첫날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텅빈 한달이 하루하루 채워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오늘 8월 첫날처럼 신선한 감격으로 매일 선물같은 하루를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1989년 7월 11일, 사제서품후 시작된 매일 미사에, 매일강론을 죽는 그날까지 하는 것이 유일한 바람입니다. 광야와 같은 미국의 뉴튼 수도원에서 한동안 지낼 때 살아 있음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던 시간은 공동전례시간과 공동식사시간 둘 이었습니다. 살아 있음을 서로 확인하며 위로와 평화를 얻는 시간이었고 여기서의 계속되는 수도생활에서도 똑같습니다. 여기에 하나가 추가되어 저는 날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강론을 쓰면서 살아 있음을 확인합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위로 향하는, 편해지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어제 저녁식사시 원장 부재인줄 알아 그 자리에 앉아있던 부원장 수사가 원장이 오면서 불야불야 아래로 연쇄적으로 자리를 옮기던 두 형제의 모습과 제가 오지 않는 줄 알았는지 제자리에 앉으려다 아래로 내려 앉는 형제의 모습을 순간 포착하면서 느낀 생각은 윗자리를 향하는 것이 대부분 본능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전 맞은 편에 앉아있던 바오로 수사가 선종한 이후 그 자리는 저절로 다음 순서의 형제가 자리를 채우니 세상을 떠나면 깨끗이 잊혀지기 마련입니다. 의식적으로, 자발적으로, 즐거이 위의 높은 자리보다는 아래의 낮은 자리를, 편함 보다는 불편함을 선택해야 함을 배웁니다.
삶과 죽음은 함께 갑니다. 예전 산티아고 순례시 마을 한복판 성당 주변의 공동묘지가 삶과 죽음의 평화로운 공존을 상징하는 듯 싶어 편안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세상을 떠난 그 많은 분들의 이름을 기억하며 매달 생미사와 더불어 연미사를 봉헌하는 어느 자매의 지극 정성의 노력에 늘 감동합니다. 그분에게는 산 분들이나 죽은 분들이나 똑같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죽은 분들을 자주 기억하며 하루를 경건히, 최선을 다해 살아감이 죽은 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가 싶습니다. 죽은 분들에 대해 너무 무례하고 소홀한 현대인들입니다. 며칠전 받은 병고로 고생중인 수녀님의 편지글 일부입니다.
“비와 더운 날씨에 골목마다 길옆마다 쌓여 있는 냄새나는 쓰레기 치우시는, 환경 미화원님들의 가족과 생존을 위해서 수고하시는 모습에서 그분들의 고된 삶을 느낍니다. 그분들의 건강을 위해 기도해주세요. 신부님, 저는 요즈음 나이듦의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약해지는 변화, 저하되는 면역력...안과, 치과, 이비인후과, 관절, 통증등으로 병원 출입이 일상화되었고 약이 한보따리입니다.-예수의 작은 자매 올림.”
매일 일기쓰듯 하는 강론입니다. 삶은 전쟁입니다. 영적전쟁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에 믿는 이들은 주님의 평생 전사입니다. 결코 전의를, 투지를 잃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젊어서는 공부와의 전쟁, 중년에는 일과의 전쟁, 노년에는 병마와의 전쟁이라 합니다. 주님의 전사로서 그 빛나는 모범이 복음의 예수님이요 제1독서 탈출기의 모세입니다. 두분을 통해서도 평생 제대가 없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로서의 우리의 신원을 배웁니다.
오늘 제1독서 탈출기를 펼치는 순간, 끊임없이 영적전투중인 모세의 삶을 새삼 실감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했고, 성서와 교회의 모든 성인성녀들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치열한 영적전투에 영적승리를 성취했던 분들입니다. 죽어야 휴식이고 살아 있는 동안 휴식은 없었고 죽는 그날까지 계속된 병고등 온통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고통과 시련에 압도되지 않았으며 내적 위로와 평화, 기쁨의 영적승리의 삶을 살았습니다.
바로 오늘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윤리신학의 대가 알폰소의 생애가 참으로 치열한 영적전쟁이었고 91세까지 장수하셨지만 마지막 20년동안은 심한 류머티즘으로 극심한 병고를 겪으셨지만 영적승리로 끝난 생애였습니다. 고해사제들과 윤리신학자들의 수호성인으로 고해시 항상 부드러운 태도로 신자들을 위로했습니다. 성인의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쁜 악습에 깊이 빠져들어 있을수록 그만큼 더 부드럽고 다정하게 다가가야 한다. 고해신부는 죄가 남긴 수많은 상처를 돌보아야 한다. 그는 풍부한 사랑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꿀처럼 부드러워야 한다.”
어떻게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중에 영적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저는 오늘 말씀에서 답을 찾았습니다. 만남과 인내와 심판입니다. 날마다 수시로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거룩한 영적 휴식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하루 시작전 일찍 일어나 2-3시간 걸쳐 강론 쓰는 고요의 시간이 주님과 만남의 휴식시간입니다.
주님과 만남의 안식, 바로 예수님과 모세의 생존 비결이었습니다. 날마다 저녁에는 외딴곳에 홀로 물러나 아버지와의 깊은 친교의 관상시간을 확보했던 예수님이요, 오늘 모세와 그 백성들에게는 그 영적 쉼터가 바로 만남의 천막이었습니다. 다음 묘사가 아름답고 은혜롭습니다.
‘모세가 천막으로 들어가면, 구름 기둥이 내려와 천막 어귀에 머무르고, 주님께서 모세와 말씀을 나누셨다. 구름 기둥이 천막 어귀에 머무르는 것을 보면, 온 백성은 일어나 저마다 자기 천막 어귀에 섰다. 주님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시곤 하였다.’
모세처럼 우리도 주님의 친구가 되어 다정히 대화를 나누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모세 앞을 지나시며 당신을 선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시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
이런 자비하심을 만난 모세는 만남의 천막에서 주님과 함께 밤낮으로 사십일을 지내면서 빵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 계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판에 기록했다 합니다. 모세가 얼마나 주님과 깊은 일치의 관계인지 상상을 초월합니다.
오늘 복음은 가라지 비유에 대한 설명은 예수님이 아닌 초대교회의 우의적 해설입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 정말 평생 치열한 영적전쟁의 상태를 말해줍니다. 죽어야 끝나는 밀들의 가라지들과의 전쟁은 하늘 나라의 자녀들과 악한 자의 자녀들과의 전쟁을 상징합니다. 분명한 것은 언제 어디서나 밀과 가라지, 빛과 어둠, 선과 악이 공존하는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밀이고 가라지인가는 판단은 보류하고 악한 이들에 대한 영적 승리의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종말 심판은 자비하시고 전능하신 아버지께 맡기고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 최후 심판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최후 심판이자 구원을 상징하는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늘 깨어 삼가며 본질적 삶의 깊이를 사는 것입니다.
마지막 주님의 말씀이 우리 모두 분발하여 심판을 두려워하고 구원을 희망하며 지극한 인내의 삶을 살게 합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의 심판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의인들의 구원입니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을 들어라.”
참으로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깊이 경청하여 분명히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중 우리에게 좋은 휴식을 주시고 영적전의를 새롭게 하시며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어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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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1.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http://www.ofmkorea.org/ofmhomily/531702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43)
의인들은 해처럼 빛날 것이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의 나라 전역에서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는 모든 것을 거두시고, 불법적인 행동을 낳는 이론들이 불구덩이에 던져지고, 사악한 요소들이 완전히 타 버리면 … 그때 의인들은 한 덩어리의 빛이 되어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입니다. 그들은 누구를 위해서 빛날까요? 지금 땅에 사는 이들을 비추는 해처럼 그들의 빛을 누릴 아래 있는 이들을 위해서입니다. 물론 그들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마태 5,16)이라는 말은, 솔로몬이 지혜를 받아들이는 세 가지 길 가운데 하나라고 한 “마음속에"(잠언 7,3) 새겨지게 하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제자들의 빛은 지금도 세상 사람들 앞을 비추며, 죽음과 부활 사이에, 그리고 부활 이후 ”우리가 모두 성숙한 사람이 되며"(에페 4,13) 모두가 하나의 해가 될 때까지도 그럴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입니다.
-오리게네스-
✝️ 성인 / 영적 글 묵상✝️
50가지 예수 모습 / 안셀름 그륀
49. 번번이 눈에서 사라지는 예수
하느님이 너무 추상적이므로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하면 하느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중요한 체험이다.
그래서 묵상을 하면 하느님이 인간적인 모습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성화상 앞에서 다정하게 나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길에서 사랑스런 하느님을 느낀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과 나의 관계에 인간적인 온기가 감돌게 되었다. 그런데 그 순간 예수님은 자꾸 내 눈에 멀어지신다. 예수님의 공생활을 담은 기록영화는 없다. 복음사가들은 자신들의 경험이라는 안경을 쓰고 예수님을 보았다.
예수님 말씀 중에는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 많다. 예수님은 내가 사는 시대와는 다른, 아주 먼 옛날에 사신 분이다.(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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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당신은 하루에 얼마나 침묵의 시간을 보냅니까?
여러분이 만일 정말로 영적성장을 원한다면 얼마나 내가 침묵하고 있는지를 관찰해보아야 한다. 여러분이 어떠한 활동을 하든지 여러분이 행동한 동기를 자세히 조사해보아야 한다. 하루 동안 내가 말한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는 많은 경우 거친 농담이든지, 잡담이든지, 아니면 험담을 하면서 자신의 생명의 에너지를 낭비했음을 발견해 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침묵을 지키는 습관을 지니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우리 의지의 힘은 굉장히 발전될 수 있다.
침묵의 이유는 이 시간동안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물러 있는 영적훈련을 돕게 하기 위해서이다. 침묵의 시간 없이 분주하게만 보낸다면 불필요하게 사람들을 찾아 나서거나, 인터넷의 세상으로 들어가 여러분의 정신을 허비하거나, TV중독에 걸리거나, 알코올중독에 걸리거나 하는 등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먼저 왜 침묵을 해야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하느님은 침묵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여 계신다. 우리의 감각을 초월하여 계신다. 그분은 침묵으로서 침묵 속에 계시고 침묵으로 말씀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 침묵의 하느님과 하나 되기 위해서는 그 침묵의 하느님을 닮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의 감각이 쉬고 우리의 생각이 멈춘 그 자리에 침묵의 하느님, 진리의 영, 영(spirit)인 참 나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홀로 계신 분이다. 홀로이신 분이시기에 우리가 홀로이신 하느님 안에 있으려면 홀로 안에 홀로 있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속에는 진정한 평화가 있다. 우리가 그 평화 속에 있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 평화 속에서 참 기쁨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예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를 알게 된다. 예수님은 엄청난 봉사의 삶, 섬김의 삶을 살면서도 날이 저물면 홀로이신 침묵의 아버지께로 돌아가 홀로 머물러 계셨다. 그 속에서 그분은 힘을 얻고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아버지의 뜻을 살아갔다. 낮 동안 우리 정신은 정신없이 이것저것을 찾아다닌다. 우리의 정신은 늘 밖으로 향하여 있다. 밖의 대상들에 마음을 두고 그 대상을 소유함으로서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한다.
영적수련이란 밖으로 향했던 자기의 정신(mind)을 자신의 마음 속 깊은 동굴에 살고 계시는 하느님께로 돌려 하나가 되는 과정이다. 낮 동안 자신의 정신(mind)이 밖으로 향하여 있다면 반드시 자신의 내부로 그 초점을 돌려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 과정을 위해 반드시 침묵이 필요한 것이다. 외적 침묵은 내적침묵으로 이어지고 내적침묵은 침묵이신 하느님께로 이어진다. 외적 침묵을 통해 자신의 마음 안에 흐르고 있는 생각들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 침묵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더 나아가 생각과 생각사이의 침묵의 공간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아주 깊은 침묵이다. 더 나아가 온전히 무심의 경지에 있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침묵의 하느님과 함께 사는 성인이라 말할 수 있겠다. 무심의 경지라고 해서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무심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필요할 때 자신의 생각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드시 잠자기 전 적어도 15~20분 정도는 묵상이나 명상의 시간을 갖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우리의 정신은 계속해서 자신이 낮 동안 일 해왔던 내용을 꿈속에까지 끌고 가서 활동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한번 관찰해보면 금방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자극적인 인터넷 사이트이나 영화를 보고 나서 자게 되면 여러분은 밤새도록 비슷한 꿈을 꾸게 되고 꿈속에서도 같은 경험으로 시달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정리된 마음 안에서 잠자리에 들면 아주 깊은 잠을 자게 된다. 만일 여러분이 잠자기 전 15~20분의 묵상이나 명상을 하고 나서 하느님 안에 있는 자신을 느끼며 잠에 들면 여러분은 다음 날 굉장히 가뿐한 몸과 맑은 정신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맑은 의식으로 하느님을 기억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영적 훈련이다. 먼저 눈을 뜨면 즉시 침대에서 일어나는 습관을 갖도록 하라. 조금만 더 하면서 침대 속에 있으면 일어나도 더 피곤함을 느끼게 된다. 즉시 침대에서 일어나 반듯하게 침대에 앉도록 하라. 그리고 내 자신이 지금 살아있음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하라. 하느님 현존 안에 현존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몇 분이라도 체험하는 시간을 가지면 아주 좋을 것이다. 그리고 세면을 하고 몸이 좋아하는 물 한잔을 마시고 사랑스럽게 천천히 몸을 움직여 성당으로 가 하느님의 현존을 더욱 깊게 갖는 시간을 갖는다면 여러분의 삶은 아주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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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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